미안해 엄마가 너무 솔직해서…
수필집을 준비하면서 옛글을 찾아 읽어보니 아들들의 이야기가 의외로 많아 놀라웠고 글을 통해 그때를 회상하며 추억이 되어버린 그 시간이 그립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편애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작은아들 녀석이 모티브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큰아들은 늘 보조 출연자로 거론되거나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큰아들을 위한 큰아들만의 이야기를 해보리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역시 작은아들의 이야기가 빠지면 팥앙금 없는 찐빵 격이라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여느 딸 부럽지 않은 살가운 막내아들과 달리 큰아들은 말이 없다. 말이 없으니 행동도 무뚝뚝한 편이다. 행동이 무뚝뚝하니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 크게 부각되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자식이 둘이니 비교가 될 만도 한데 비교의 재미는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이렇고 저렇고 하겠건만 두 아들은 뚜렷한 개성의 차이로 성격이나 성향이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형제는 용감하였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리 집 형제는 엉뚱하고 기상천외한 일로 무미건조한 일상을 자극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은 가끔 닮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린 시절 한 때일 뿐 성인이 된 지금은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자식이 열도 아니고 둘, 게다가 아들과 딸도 아닌 성별도 같은 남아(男兒)라, 둘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내게 회자하는 대상이었다. 일테면 누가 형제에 관해 물어보면 앞서 말했듯이 말이 없다 라던가 말이 많다 라던가. 재잘재잘 조잘조잘 미주알고주알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을 건네는 막내 녀석은 다정다감하다. 그와 반대로 큰아들은 내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서 무심한 듯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듬직한 맛은 있다. 어릴 때부터 세심하게 엄마를 관찰하고 흉내 내는 작은 아들은 눈썹 정리하고 있는 나를 따라 자기 눈썹을 뽑고 민 눈썹의 모나리자로 한동안 살기도 했다. 물론 네다섯 살 때 이야기다. 그렇다면 같은 나이 때 큰아들은 뭐 했을까? 그 당시 유행하던 닌텐도 게임 슈퍼 마리오나 파란 고슴도치 소닉에 빠져 조용히 앉아 게임만 하고 있었다. 주방 바닥에 식용유 한 통을 부어 놓고 벌거벗고 헤엄치며 뒹굴고 있던 돌쟁이 막내와 달리 방석에 점잖게 앉아 만화영화만 보던 의젓한 큰아들.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 하는 액티비티한 동생과 전혀 다른 행보로 형은 영국 신사라는 별명을 지녔을 만큼 부모의 눈엔 모범적인 아이로만 각인되었는데… 사춘기에 들어가며 엄청난 변화가 큰아들에게도 찾아왔었다. 오히려 활동적이던 막내는 커갈수록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큰아들은 반장과 회장으로 리더가 되어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말이 없는 조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범생 같은 큰아들 녀석에게도 놀라운 반전은 있었다.
한번은 큰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학교에 간다고 인사하고 간 아들 녀석이 한 시간여 지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아파? 조퇴하고 온 거야?”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아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책가방을 안 가지고 갔어요.” 예상을 떠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파서 온 것은 아니라 하니 다행이긴 한데 학생이 책가방을 안 갖고 학교에 갔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한심해서 잔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좀 전의 상황을 서로의 관점에서 이야기 나누며 박장대소하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아들 녀석은 엄마에게 꾸중 들을 것을 염려했던 불안감이 사라졌는지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책가방을 품에 안고 교문으로 들어섰다. 웃으며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뭔지 모를 안도감과 함께 한심한 아들 녀석에게 뒤늦게 부아가 치밀었다. “세상에… 살다 살다 책가방을 두고 학교에 가는 학생이 다 있네.” 개그의 소재로나 사용할만한 일이 내게 벌어졌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해서 친구들과 인사하며 신나게 떠들다 책가방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을 아들 녀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고 온 책가방보다 엄마와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집이 가까울수록 초조하고 불안했을 아들의 마음으로 감정 이입이 되자 왠지 먹먹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이야기는 거론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더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것이었다. 비록 엉뚱하긴 했지만, 웃음의 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기를 생각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라고 무미건조한 엄마의 일상에 재미있는 일화를 아들은 선물로 준 것 같다. 그러자 입가에서 맴돌기만 하던 미소가 소리를 꺼내며 차 안을 웃음소리로 채워 갔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비슷한 일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생기곤 한다. 빅토리아에서 살 때 딸처럼 가깝게 지내는 UV(빅토리아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 있었는데, 방학 때 한국에 가게 되어 공항에 데려다준 적이 있다. 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출발하려는데, “저, 여권을 안 가지고 왔어요.” 몇 번을 차 안에서 여권이랑 챙겼지? 물어봤는데도 불구하고…. 다행히 빅토리아 공항은 가까워서 총알 같이 달려가서 여권을 챙겨 무사히 탑승한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그 딸내미와 그 이듬해 같은 경우를 한 번 더 겪은 적이 있는데, 그땐 집 근처에서 확인했던 터라 총알처럼 달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두 아들의 엄마가 된 딸내미와 한국에서 만날 때면 재미있는 추억이 된 그 당시의 이야길 웃으며 나누기도 한다. 꼼꼼하게 챙기는 내 성격 탓인지 난 웬만해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다. 남이 작정하고 집어 가지 않는 한 내 부주의로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서 책가방을 집에 두고 학교에 간 큰아들이나 여권을 두고 공항에 가는 딸내미나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그 일을 통해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 큰아들은 점잖고 조심성이 많아 실수가 없고… 하는 선입견을 쌓아 놓고 있었는데 편견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내 기준에 맞춰 불안하고 초조한 아들에게 잔소리하고 꾸중해서 불안감을 더 가중했다면 어쩌면 그 일로 인해 아들은 지금과 또 다른 성격이나 성향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식용유를 쏟아놓고 벌거벗고 맨 몸뚱어리로 허우적거리는 막내 녀석을 보며 어이가 없고 치울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나지만,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큰 소리로 나무라지 않았다. 즐거워서 신나게 헤엄치듯 바닥을 뒹구는 아들 녀석에겐 얼마나 재미나고 창의적인 발상인가! ‘천재 아냐? 어떻게 옷을 벗어야 더 미끄러운 줄 알았을까?’ 첫돌을 맞은 한 살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너무 즐겁지 않은가! 성난 얼굴이 아닌 흐뭇한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었기 때문에 식용유를 온몸에 묻히고 해맑게 웃고 있던 천진난만한 작은 아들은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창의적인 청년이 되어 영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영향을 꼭 주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홈리스들에게 밥을 주고 쉼터를 가끔 청소해주며 성실하게 봉사하는 큰아들은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칭찬이 자자한 좋은 이웃으로 살아간다.
처음에 글을 쓰고자 할 땐 흉이 될 것 같은 아들들의 이야기에 엄마가 너무 솔직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했는데 글 말미를 보니 영락없이 나는 고슴도치에 팔불출 엄마이다. 의도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흐르다 보니 두 아들이 잘 자라줘서 고맙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 또한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에 내가 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창세기 33장 5절에는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내게 적용해보면 두 아들은 나를 믿고 맡기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나 또한 하나님의 소중하고 귀한 자녀로서 우리를 가족의 연으로 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와 찬양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두 아들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 기쁨의 감사가 즐거운 간증으로 신나게 쏟아지는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감사가 얼마나 삶을 복되게 하는지 그 기쁨을 당신도 맛보았으면 좋겠다.
-2022년 11월 28일 큰아들의 일화를 떠올리다가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