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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세진(世珍) 외손서(外孫壻) 동래정씨 정언충(鄭彦忠) 외손봉사(外孫奉祀) 고찰
1. 서언
(1) 정암(靜菴) 조광조(趙光朝) 선생을 사숙(私淑)하고 학행이 탁이(卓異)하여 사림의 추중으로 통훈대부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을 증직받았던 15세 휘 천익(天益)의 3남인 16세 휘 세진(世珍)은 헌릉참봉(獻陵參奉)을 거쳐 종칠품의 분순부위(奮順副尉) 품계를 받고 정칠품의 사정(司正)을 지냈다.
(2) 휘 세진(世珍)의 직계비속(直系卑屬)은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의 진주인 강경우(姜景愚)에게 출가한 딸 밖에 없고 세장(世璋), 세침(世琛), 세진(世珍), 세종(世琮), 세호(世瑚) 등 5형제중 아들이 4명밖에 없어 조카를 입양(入養)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그당시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관례에 따라 주제자(主祭者)는 외손(外孫)인 강득복(姜得福)이어야 하나 외손서(外孫壻)인 동래인(東萊人) 정언충(鄭彦忠)를 주제자(主祭者)로 삼아 동래정씨세세봉사(東萊鄭氏世世奉祀)하도록 족보에 기록되어 있었다.
(3) 따라서 2015.2.18.(수) 강경우(姜景愚)의 태생지이자 진주강씨 진천군파 600년 세거지인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 하림에 거주하고 있는 합천군 향토사학자겸 종중문장(宗中門長)인 강인수(姜仁洙)씨를 찾아 뵙고 확인한 내용과 가전(家傳)되는 사실, 족보의 기록을 중심으로 외손봉사의 결정 배경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외손봉사(外孫奉祀)
(1) 의의(意義)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유교적 종법제도에 의한 친손봉사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행해지던 제사 잇기의 한 방식이다. 직계비속(直系卑屬)의 대(代)가 끊겨 더 이상 친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잇게 하지 못할 경우, 딸의 남편이나 자손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한 풍습이다.
(2) 외손봉사는 친족 구성에서 친손(親孫)과 외손(外孫)의 구별이 크게 엄격하지 않았던 유교의 정착 이전에 행해지던 습속으로, 주로 15~16세기에 걸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혼입(婚入)하여 들어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나 아들·딸·손자 등의 자손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封祀), 아들딸 가리지 않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상속하는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등의 풍습과 제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3. 병신보(丙申譜 : 1836년) 휘 세진(世珍) 방주 기록
(1) 원문
中宗八年癸酉生 有學行 奮順副尉司正行獻陵參奉 忌宣祖九年丙子
墓高靈郡高靈面內上洞黃谷靑龍嶝子坐 竹溪公墓左便
配中和楊氏父홰(言會) 墓夫公墓下同原 外孫壻東萊鄭氏世世奉祀
(2) 국역
중종 8년(1513년)에 태어나시니 계유생이다. 학문과 덕행, 곧 배움과 실천이 있었다. 조선시대 종칠품(從七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인 분순부위(奮順副尉)를 승품받고 헌릉참봉을 거쳐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정칠품(正七品) 서반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제수받았다. 조상이 돌아가신 해는 선조 9년(1576년)이다. 묘는 고령군 고령읍 내상동 황곡 청룡등 자좌 죽계공
묘의 왼쪽에 있으며 배위는 중화양씨이고 아버지는 휘 홰이며 묘는 남편의 묘밑에 있으며 같은 언덕에 있다. 외손서 동래정씨가에서 대대로 조상(祖上)의 제사(祭祀)를 받들기로 하였다.
4. 진주강씨(晋州姜氏) 진천공파(晋川公派) 강경우(姜景愚) 가계
(1)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으로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이듬해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또 이듬해에 요서(遼西)로 출전하여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과 교전하고,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나후(周羅糉)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2) 중시조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장군
1018년(현종9) 거란(契丹)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격파하였으며, 거란군이 바로 개경(開京)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하여 자산(慈山)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 주국 우산기상시(鷹揚上將軍柱國右散騎常侍)가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되었다. 이듬해 지중추사(知中樞事)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고, 사후 태자태부(太子太傅)가 추증되었다.
(3) 진천공파(晋川公派) 파조(派祖) 강위상(姜渭祥)
자(字)는 중상(仲祥)이고 벼슬은 공민왕 3년(1354년) 밀직사사, 첨의평리 황산대첩의 유공으로 이듬해 진천군(晋川公)에 피봉되고 전라도 도순문사, 1361년 경상도순문진변사, 1371년 개성부판사, 1373년 경상도 도순문사를 지내고 전라. 경상 양도에서 왜적을 토벌했다.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 하림에 거주하는 진주강씨는 합천의 대표적인 명문가이며 이명박 정권시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도 이 문중 출신이다.
※ 진천군파(晋川公派) 강경우(姜景愚) 가계도(家系圖)
11. 渭祥 → 12. 仁先 → 13. 居好, 任生 → 14. 秀 → 15. 藎忠 → 16. 鱣 → 17. 靈運 → 18. 晋河 → 19. 得時 |
(4) 진주강씨 족보상 강경우(姜景愚) 부자(父子) 기록
① 노옹(老翁) 강인수(姜仁洙)씨를 면담한 결과 강경우(姜景愚)는 중시조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장군의 11세손인 진천군(晋川君) 강위상(姜渭祥)의 7세손으로 진주강씨 세보에는 휘는 진하(晋河), 벼슬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배위인 휘 세진(世珍) 따님의 기록은 없었다.
② 진천군(晋川君) 강위상(姜渭祥)의 손자 13대에서 장자 휘 거호(居好), 차자 임생(任生)로 분파(分派)되었다. 강경우(姜景愚)는 차종손(次宗孫) 임생(任生)계열의 장자(長子)이다. 최근 간행된 진천군파 파보인 을축보(乙丑譜 : 1925년), 무인보(戊寅譜 : 1938년 , 소화13년), 임오보(壬午譜 : 2002년) 등 진주강씨 족보를 상고(詳考)한 결과 임진왜란시 병화로 인하여 족보가 소실(燒失)되어 선조는 물론 본인, 아들 손자의 휘(諱)만 기록되어 있을 뿐 생몰년, 배위, 묘소에 관한 기록이 모두 실전(失傳)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③ 1836년 발간된 우리 집안의 족보 병신보(丙申譜)와 사위 정언충(鄭彦忠)의동래정씨 족보에 명백하게 휘가 강경우(姜景愚)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강씨 세보에 진하(晋河)로 기록되어 있어 휘가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으며 노옹(老翁) 강인수(姜仁洙)는 이를 애석하게 여기면서 부끄럽게 여겼다. 병신보에는 관직의 기록이 없었지만 동래정씨 족보에는 부정(副正 : 종3품)으로 진주강씨 족보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 : 종2품)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금번 족보 편찬시 휘 세진(世珍)의 사위 강경우(姜景愚)의 관직을 부정(副正)겸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록할 예정이다.
④ 강경우(姜景愚)의 직계후손은 2002년 족보(임오보) 이전에 누보(漏譜)되었으나 임오보를 계기로 수단(收單)하여 입보(入譜)하였다고 하며 1836년 간행된 병신보(丙申譜)의 방주(傍註)와 강경우(姜景愚)의 둘째사위인 동래정씨 정언충(鄭彦忠)이 외손서(外孫壻) 봉사(奉祀)한 사실을 설명하고 우리 족보에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陜川郡 栗谷面 林北里)로 기록된 것을 보여 주었더니 외가집 족보의 기록이 우리 족보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면서 다음 족보 수보(修譜)시 전해준 고령이씨(高靈李氏) 족보의 방주를 반드시 추록(追錄)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우리 문중의 31세 이규효(李圭孝) 장관의 부인이 진주강씨 어사공(御使公) 후예인 것을 알려주기도 하였으며 진주강씨 진천군파의 족보를 입수하는데로 나에게 송부하기로 하였으며 우리 문중의 족보가 편찬되면 1질을 송부하여 줄 것을 부탁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속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다.
⑤ 강경우(姜景愚)의 아들 득복(得福)은 진주강씨 족보에는 휘 득시(得時) 생원(生員)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묘소와 배위에 관한 기록도 없었다.
5. 외손서(外孫壻) 동래정씨 정언충(鄭彦忠) 방주 분석
(1) 가계(家系)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지낸 정선경(善卿)의 둘째아들로서 충좌위부사정(行忠佐衛副司正)을 지내고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叅判)에 증직된 정비(鄭秠)의 후예이다. 정비(鄭秠)는 우리 문중의 교위공파(校尉公派) 선조로서 두문동 72현중 한 분이고 고려 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낸 문절공(文節公)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손자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맡사위가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영부사(知敦寧府使)에 제수된 이자(李孜)의 맡사위가 되었다. 따라서 정비(鄭秠)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서(外孫壻)이자 방조(傍祖) 이자(李孜)의 사위이다.
방조(방조)
(2) 병신보에 기록된 정언충(鄭彦忠) 방주
① 원문
鄭彦忠 東萊人 以壬亂戰功 錄宣武原從二等功臣 除授通訓大夫行南原府使兼
昌原府使 公之後孫居高靈郡德谷晩霞洞及高靈邑新洞內上洞(東村)
② 국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군의 초계가장(草溪假將)으로서 무계전투(茂溪戰鬪) 및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의병장 정언충에게 선무원종2등공신(錄宣武原從二等功臣)을 책록(冊錄)하였고 남원부사와 창원부사를 제수하였다. 공의 후손들은 고령군 덕곡면 만하동과 고령읍 신동, 내상동(동촌)에 흩어져 살고 있다.
6. 동래정씨 정절공파(靖節公派) 파보에 기록된 정언충(鄭彦忠) 방주
(1) 원문
字藎叔武嘉善大夫昌原府使 壬辰以召募將 錄原從功臣 甲寅生 乙卯二月二十九日卒 墓長方洞亥坐 配晉陽姜氏副正景愚女 墓高靈面乃谷孔谷酉坐
(2) 국역
자는 신숙이며 무인(武人)으로서 가선대부창원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소모장 즉 현재의 병무청 모병관(募兵官)으로서 군사를 모집하여 병력을 충원하는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명종 6년(1554년) 갑인생이며 인조 17년(1639년) 2월 29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소재 장방동 해좌에 있으며 배위는 진양강씨로 부정(副正)을 지낸 경우(景愚)의 딸이며 묘는 고령면 내곡의 공골 유좌에 있다.
※ 공곡(孔谷)
고령군 고령읍 신리 소재 골짜기 일명 “공골”로 불리워지며 문수봉 아래 미숭산 자연휴양림 아래 밤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래정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가 있는 곳이다.
7. 외손서(外孫壻) 정언충(鄭彦忠) 외손봉사(外孫奉祀)
(1) 배경
① 휘 세진(世珍)은 슬하의 무남독녀(無男獨女)를 진주강씨 강경우(姜景愚)에게 출가시켰고 배위 고령이씨(高靈李氏) 슬하에 아들 강득복(姜得福)을 두었고 장녀는 청도군 이서면에 살면서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를 증직받은 밀양인(密陽人) 박경연(朴慶延)에게 출가시켰고 둘째 딸은 성주 소가천 대형전리(星州 小伽川 大荊田里 : 경북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만하동)에 사는 동래인 정언충(鄭彦忠)에게 출가시켰다.
② 진천군(晋川君) 강위상(姜渭祥)의 차자계열(次子系列)은 18세 강경우(姜景愚)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독자로 계대(繼代)를 이어 왔으며 그의 아들도 독자(獨子)이며 장자계열(長子系列)도 자손이 번연(蕃衍)하지 않아 외손봉사(外孫奉祀)가 불가피하였지만 외손서(外孫壻)인 정언충(鄭彦忠)을 외손봉사의 주제자(主祭者)로 삼은 것은 극히 이례적(異例的)인 일이다.
(2) 외손서(外孫壻) 정언충(鄭彦忠) 외손봉사 위임 근거
강경우(姜景愚)의 배위 고령이씨(高靈李氏)가 외손봉사의 주제자(主祭者)로 둘째사위 동래정씨 정언충(鄭彦忠)을 삼은 것은 아래와 같은 근거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리적으로 자신의 친정(親庭)과 아버지의 묘소가 있었던 고령읍 내상리 황곡과 가까운 곳인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만하동에 둘째 사위 정언충(鄭彦忠)이 거주하였고 생활권(生活圈) 반경(半徑) 같아 친정 아버지 휘 세진(世珍)의 묘소관리와 봉사(奉祀)에 용이(容易)하였던 점을 우선적으로 꼽으면서 간곡하게 외손봉사를 요청하는 장모(丈母) 고령이씨(高靈李氏)의 요청을 뿌리치기가 어려워 수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맡사위 밀양인(密陽人) 박경연(朴慶延)도 학행이 뛰어나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를 증직받아 현달(顯達)하였지만 봉사지(奉祀地)에 연고(緣故)가 없고 원격지(遠隔地)인 청도군(淸道郡) 이서면(伊西面)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외손봉사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재산상속
① 고령읍 내상리 황곡(黃谷) 일대와 문수봉(文壽峰) 산자락은 안동장군(安東將軍) 휘 미숭(美崇)이 미숭산성(美崇山城)에서 순사(殉死)한 후 후손들이 세거(世居)하였던 곳이며 대대로 조상들의 묘를 썼던 세장지지(世葬之地)로서 선조들의 혼이 살아서 숨을 쉬는 신령(神靈)한 곳이다.
② 죽계공(竹溪公) 휘 신문(信文)의 묘역이 있는 고령읍 내상리 산 11번지와 건너편 사당터와 우측의 애련지(愛蓮池)는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③ 휘 세진(世珍)의 묘가 고령군 고령읍 내상동 황곡 청룡등 자좌 죽계공 묘의 왼쪽에 있으며 강경우(姜景愚)의 배위 고령이씨 묘소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지만 정언충(鄭彦忠)의 배위로서 휘 세진(世珍) 외손여의 묘소가 문수봉 아래 공곡(孔谷)에 있으며 그후로 아들, 손자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잡아 동래정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가 되었고 그의 아들 정지(鄭墀)가 선향지(先鄕地)인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장방동(長房洞)을 떠나 이곳에 복거(卜居)하여 고령읍 신리, 내상리(동촌)에 후손들이 번연(蕃衍)한 것은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인한 재산상속(財産相續)과 무관(無關)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재산상속(財産相續)을 배제하고 단순히 선대(先代)의 교유관계(交遊關係)로 인한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외손봉사(外孫奉祀)후 동래정씨 참판공파와 통혼관계
① 생가(生家)로 보면 외손서(外孫壻) 정언충(鄭彦忠)의 친조카인 정창영(鄭昌榮)의 배위로 합천파 파조(派祖) 휘 세침(世琛)의 아들로서 17세인 호군(護軍)을 지낸 휘 민일(民逸)의 딸을 배위로 맞이하였다. 참고적으로 정항(鄭恒)의 네아들중 정언충(鄭彦忠)이 장남이고 정창영(鄭昌榮)의 아버지 정언의(鄭彦義)는 둘째아들이었으나 정항(鄭恒)의 동생 정념(鄭恬)이 아들이 없어 숙부(叔父)앞으로 양자(養子)를 가서 세계(世系)를 이었다. 따라서 휘 세진(世珍)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언충(鄭彦忠)은 딸의 사위이므로 외손서(外孫壻)이고 그의 조카인 정창영(鄭昌榮)은 둘째 형 휘 세침(世琛)의 사위가 되므로 종손서(從孫壻)이다.
② 정창영(鄭昌榮)과 배위 고령이씨(高靈李氏)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정홍진(鄭弘鎭), 정홍현(鄭弘鉉), 정홍선(鄭弘銑), 정홍익(鄭弘釴), 등 네 아들중 사포(沙浦) 정홍현(鄭弘鉉)은 인조(仁祖) 26년(1648년) 무자(戊子)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詩)에 급제한 후 정6품 진용교위(進勇校尉)의 품계를 받고 실직(實職)은 종8품인 훈련원 봉사(訓鍊院 奉事)를 지냈다. 장녀는 여산인(礪山人) 송민구(宋敏求)에게 출가하여 그 맡아들 송세망(宋世望)이 숙종(肅宗) 16년(1690년) 경오(庚午)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詩)에 급제하였고 둘째아들 송시망(宋時望)이 현종(顯宗) 14년(1673년) 계축(癸丑)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詩)에 급제하였다.
③ 따라서 17세 휘 민일(民逸) 집안은 친손외에 외손(外孫) 정홍현(鄭弘鉉)이 진사시에, 외증손(外曾孫) 송세망(宋世望)이 진사시에, 송시망(宋時望)이 생원시(生員詩)에 급제하는 등 내외손이 현달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5) 외손봉사(外孫奉祀) 실태
① 경북 예천군 용궁면의 ‘작은맛질’이라는 지역에서도 외손봉사의 예가 발견된다. 이곳은 원래 문경송씨가 개척하여 살던 곳이었는데, 후손이 없자 사위인 밀양손씨에게 터전을 물려주게 되었다. 그런데 밀양손씨마저도 후손이 없자 밀양손씨의 사위인 안동권씨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에게 터를 물려주고, 외손봉사로 조상을 받들게 하였다. 이후 이곳은 안동권씨의 동성반촌이 되었으며, 권의는 작은맛질의 입향조로 인식되고 있다. 권의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밀양손씨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②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성 종문의 족장께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수십년전까지 묘제시 외손서 봉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절사(絶祀)된 것으로 파악되어 족보에 기록된 “외손서동래정씨세세봉사(外孫壻東萊鄭氏世世奉祀)”란 말이 무색(無色)하게 되어 애석(哀惜)하기 그지없다.
8. 결론
(1) 16세 휘 세진(世珍)의 외동딸 고령이씨(高靈李氏)는 진주강씨 강경우(姜景愚)에게 출가하여 사위 동래인(東萊人) 정언충(鄭彦忠)을 친정의 외손봉사자(外孫奉祀者)로 삼았고 사촌 오빠 휘 민일(民逸)의 딸 즉 질녀(姪女)를 사위 정언충(鄭彦忠)의 동생에게 출가시켜 연혼(連婚)관계를 맺고 4남 3녀의 자녀을 낳고 자손을 번연(蕃衍)하게 하는 등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남편을 받들면서 부덕(婦德)에 어긋나는 행실이 없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또한 친정의 재산을 상속(相續)케 하였으므로 동래정씨집안에서 세세봉사(世世奉祀)하였던 것으로 본다.
(2)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유교적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한 친손봉사(親孫奉祀)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행해지던 제사 잇기의 한 방식으로 지금도 명문가간(名門家間)에서는 선대(先代)의 금석맹약(金石盟約)과 문중간 신뢰를 바탕으로 세대를 초월하여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어지고 있지만 친손봉사(親孫奉祀)도 잘 지켜지지 않는 세태(世態)에 점염(漸染)되어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아예 구시대의 유물(遺物)로 치부되어 자취를 감춘들 누구를 원망하랴! 다만 양문중간(兩門中間) 선대(先代)에 있었던 금석맹약(金石盟約)의 연원(淵源)을 깨닫고 후손간 남다르게 지내는 것이 현실적인 문중교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휘 세진(世珍) 외손서(外孫壻) 외손봉사(外孫奉祀)를 고찰하여 보았다.
(3) 다행히 여주이씨 문순공파 안동장군후예 죽계공(竹溪公) 휘 신문(信文) 대종중에서는 2012년 4월 21일 고령읍 내상리 산 11번지 선영(先塋) 밑에 묘소가 실전된 죽계공(竹溪公) 휘 신문(信文)의 후손인 12세 처사(處士) 휘 돈고(敦古), 13세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휘 정유(正儒), 14세 신호위별장(神號衛別將) 휘 성(成), 15세 처사 휘 천익(天益), 처사(處士) 휘 지익(地益), 16세 군자감(軍資監) 휘 세장(世璋), 예조정랑(禮曹正郞) 휘 세침(世琛), 분순부위(奮順副尉) 휘 세진(世珍), 서윤(庶尹) 휘 세종(世琮),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휘 세호(世瑚) 등 열분(十位)의 상세조(上世祖)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향사(享祀)를 받들어 숭조보본(崇祖報本)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4) 합천군의 대표적인 재지사족(在地士族)인 진주강씨 진천군파 문중과 우리 문중과의 통혼, 고령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인 동래정씨 참판공파 문중의 후손인 외손서(外孫壻) 외손봉사(外孫奉祀)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전 고령지역에서 고려 명문가로서 우리 문중의 위상(位相)이 굳건하였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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