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당에 모란 작약 지고 신록이 가득
도산서원은 안동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보는 자연은 온통 신록으로 가득하다. 차는 분천리를 지나 도산서원 삼거리에서 도산서원길로 들어선다. 우리는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 다음, 매표소를 지나 강변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길을 가다 처음 만나는 것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쓴 표지석이다. 공자의 자손인 공덕성(孔德成)이 이곳을 방문해 남긴 글씨를 돌에 새겨 세웠다.
추로지향은 맹자의 고향인 추성(鄒城)과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의 전통을 지켜온 고장이라는 뜻이다. 이곳 도산을 동방의 추로지향이라고 말한 것이다. 도산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강 가운데는 시사단(試士壇)이 있다. 시사단은 단어 그대로 선비를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다. 1792년 정조 때 벌어진 일이다. 도산서원 주변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앞 광장 동쪽으로는 왕버드나무 신록이 좋다. 서원 앞쪽으로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매화로 시작해 진달래 철쭉 철을 지나 모란 작약이 피더니 이제는 연두빛 이파리가 짙어진다. 퇴계선생은 서당 앞에 절개 있는 친구(節友)라고 해서 매송국죽(梅松菊竹)을 심고 계절에 따라 이들 꽃과 나무를 즐겼다고 한다. 담장이 쳐진 바깥문을 통해 서당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정원인 절우사(節友社)가 있다. 이곳에는 거의 끝물인 작약꽃이 몇 송이 피어 있다. 절우사 서쪽으로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있고 북쪽으로 도산서당이 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가 도산서원의 출발이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에 오르려면 정우당(淨友塘)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는 연(蓮)을 심어 친구로 삼았다고 한다. 맑은 친구와 함께 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절우와 정우를 통해 자연을 친구로 대하는 퇴계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퇴계가 쓴 「도산잡영(陶山雜詠)」에 따르면, 도산서당은 1560년 11월에, 농운정사는 1561년 3월에 건립되었다.
도산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방과 대청 그리고 부엌으로 이루어졌다. 방은 완락재(玩樂齋)고 대청은 암서헌(巖栖軒)이다. 완락재는 거실 겸 서재로, 즐거움을 완상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퇴계는 책을 읽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대청은 공부도 가르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호연지기도 기르는 장소다. 그러므로 3면이 자연과 통하고, 북쪽만 문을 여닫을 수 있게 했다. 옥호인 암서는 암혈(巖穴: 바위굴)에 산다는 뜻으로, 암서헌은 은둔처사의 집을 의미한다.
농운정사는 유생과 제자들이 거처하는 기숙사였다. 8칸 규모의 공자(工字)형 건물로, 가운데 네 칸짜리 온돌방이 있고, 좌우 앞으로 나온 두 칸은 대청이고, 좌우 뒤로 나간 두 칸은 고방(庫房)이다. 온돌방 네 칸은 잠자는 방으로 지숙료(止宿寮)로 불린다. 동쪽 대청마루는 시습재(時習齋)로 공부방이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이름이 나왔다.
서쪽 대청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다. 물이 소리 내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호연지기를 키우는 일종의 휴게실이다. 서당의 유식(遊息)공간으로 낙동강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는 장소였다. 1969년 농운정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면서 바닥과 기단부에 장대석과 화강석을 사용했다. 농운정사 뒤쪽에는 관리사무소 겸 숙직실에 해당하는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농운정사 서쪽 앞으로는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는데, 서재 겸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역락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呼)”에서 나왔다. 서당 창건 당시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사립문으로 유정문(幽貞門)이 있었다고 한다. 유정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숨어사는 사는 선비의 마음이 곧으면 길하다(幽人貞吉)’에서 나왔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이처럼 서원으로 발전하기 전 초창기 서당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道)로 나아가 가르침의 모범을 보이다.
도산서원의 전반부가 서당지역이라면, 후반부는 서원지역이다. 서원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진도문(進道門)을 지나야 한다. 진도문은 도산서원의 정문으로, 문 안과 밖 좌우에는 광명실(光明室)이 대칭으로 위치한다. 동광명실은 1819년에 지었고, 서광명실은 같은 형태로 1939년에 지어졌다. 광명실은 2층 누각 형태의 서고 겸 장서각으로, 모두 1,271종 4,917권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 서책은 현재 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고 있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이 보인다. 전교당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학공간으로 가름침의 모범이 되는 곳이다. 전교당 앞에는 밤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있다. 전교당 앞 좌측과 우측에는 동재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전교당의 동쪽 담장 밖으로는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이들 네 개 건물이 서원의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전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동쪽 세 칸이 대청이고, 서쪽 한 칸이 방이다. 대청 앞쪽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사액 현판이 걸렸고, 안쪽에 전교당이라는 당호가 걸렸다. 건물 안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숙흥야매잠, 사물잠, 향입약조(鄕立約條) 같은 규약과 잠언, 제문 등이 걸려 있다. 원규는 12개 항목으로 나눠지는데, 앞부분에서는 독서와 학문 그리고 입지(立志)를, 중간부분에서는 생활규범을, 뒷부분에서는 유생과 유사가 지켜야 할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서는 사서오경을 본원(本原)으로 삼고, 소학과 가례를 문호(門戶)로 삼는다. 학문은 근본(體)을 밝히고 쓰임(用)을 적절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문장은 과거의 도구이나, 도를 어지럽히고 뜻을 미혹하게 하는(亂道惑志)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입지가 견고하고 행동이 도의적일 때 훌륭한 배움(善學)이 되고, 마음가짐이 비루하고 지식이 저속하며 이익과 욕심만을 추구할 때 잘못된 배움(非學)이 된다.”
이 날은 마침 도산서원 별유사인 이동구(李東耈) 선생이 우리 회원들을 전교당에 오르게 해 도산서원과 퇴계선생에 대해 간단하게 강의를 해준다. 강의를 듣고 양사규범(養士規範)과 존현의례(尊賢儀禮)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부족한 부분을 참고하라고 2019년에 나온 4차 교정본 『도산서원 의절(儀節)』을 준다. 알고 보니 이 책을 편찬한 사람이 이동구 선생이다. 이 책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교당 서쪽의 방은 한존재(閑存齋)로 원장의 사무실이다. 한존은 『주역』의 “삿됨을 막아 그 성실함을 보존한다(閑邪存其誠)”에서 나왔다. 여기서도 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는 옥호가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다. 박약과 홍의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로, 학문을 널리 공부하고 예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홍의는 넓고 굳은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으로, 도에 이르기 위해 선비가 가져야하는 자세를 말한다.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내삼문이 있고, 그 안쪽에 사당인 상덕사가 있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퇴계 이황이 주향으로, 월천 조목(趙穆)이 종향되어 있다. 퇴계의 위패는 1574년에, 월천의 위패는 1614년에 봉안되었다. 월천 조목은 퇴계의 고제(高弟)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퇴계 사후에는 도산서원을 창건하고 문집을 편찬하는 일에 앞장섰다.
사당 마당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그리고 전교당 서쪽으로 상고직사가 있다. 고직사에서 다시 계단을 내려오면 유물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이 있다. 옥진은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준말로, 『맹자(孟子)』「만장(萬章)」편에서 유래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인 금성(鐘)과 옥진(磬)을 예로 들어면서, 학문을 집대성 한 사람을 공자로 보고 있다. 유물전시관의 당호를 옥진으로 쓴 것을 보면, 퇴계를 공자에 비견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옥진각이 학문을 집대성하지도 않았고, 퇴계의 유물을 집대성하지도 못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부실하고 빈약하다. 먼저 퇴계의 유품이라는 것들이 오리지널인지 의심스럽다. 유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내부 공간이 협소해 유물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전시도 너무 평면적이다. 옥진각이 지어진 것이 1970년이니, 이제라도 서원 밖으로 확장 이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협소한 도산서원에 옥진각을 지어, 아래 사당 위 서원이라는 개념을 흩으려 버렸다. 모두 옛 건물로 이루어진 서원에 근래에 새로운 건물을 집어 넣은 게 잘못이다. 다른 서원처럼 서원 영역 밖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유물만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서원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