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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21일 수요일
[(백)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 리에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8년 사제품을 받고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토바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맞서 싸웠다. 1914년 선종한 그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하신다. 양 떼를 먹이로 삼는 목자들에게서 양들을 구해 내어 보살펴 주시겠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포도밭에 일할 일꾼들을 산 마음씨 후한 밭 임자에 하늘 나라를 비유하시어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테살 2,2ㄴ-8)와 복음(요한 21,15-17)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30)라는 말씀과 연결되지요. 19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에게 백 배의 상급을 약속하시면서도, 그가 많은 것을 버렸으니 많이 받으리라는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십니다. 계산적인 사람에게 이 복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 후한 포도밭 주인이 품삯으로 주는 데나리온은 무한대와 같이 큰 것이어서, 한 데나리온만 받았다 하여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품삯이 하늘 나라의 갚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꼴찌”가 되어 가장 적게 받았다 하여도 그것은 이미 차고 넘치는 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시기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첫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이 천국에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에 견주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도들이 불만스러워할까요? 하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가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기뻐하는 곳, 그곳이 참으로 하늘 나라일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 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 성당에는 새 신자 분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타 주에서도 전입한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한 달에 한번 전입교우 소개를 하는데 지난달에는 6가구 20명이 넘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전입 교우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구역과 반으로 안내합니다. 저도 점심에 함께 하면서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한국에서 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주택, 학교, 자동차, 의료보험, 구직과 같은 것입니다. 주재원으로 오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이민으로 오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신자분과는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현지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입한 교우들은 성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후배 신부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청년이 댈러스로 갔다고 합니다. 숙소, 자동차, 직장까지 구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원했습니다. 저는 청년과 연락 했고 본당 교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이웃을 귀하게 대 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스웨덴은 특이한 월세 계약이 있습니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몇 년이 지나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가 상승으로 관리비는 올릴 수 있지만 월세는 안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입자는 월세 걱정 없이 아이들 교육시키고 생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같은 월세라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큰 혜택입니다. 스웨덴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집이 더 있으면 월세계약을 맺고, 한번 계약을 맺으면 물가가 올라도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합의이고, 이런 합의가 있으니 집이 없는 사람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집이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 집이 많은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세 걱정하면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트렌트 코리아 2024’를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돌봄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봄에는 3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배려 돌봄, 정서 돌봄, 관계 돌봄입니다. 배려 돌봄은 혼자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돌봄입니다. 아이, 장애인, 노인에 대한 돌봄입니다.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도 고령의 부모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이제 배려 돌봄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정서 돌봄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돌봄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이 있는 청소년, 약물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주는 돌봄입니다. 관계 돌봄은 건강한 사람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많이 배웠어도, 많이 가졌어요,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도, 성직자들도 이런 관계 돌봄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 오후에 나와서 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주인에게 더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말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미국 정부는 흑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주거와 복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동네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깨진 유리창은 갈아주고, 노후 되어서 허물어져가는 건물은 다시 세워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흑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흑인 재소자들의 비율도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흑인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흑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살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0,6)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7)
누구에게든
받아들여지고 싶으나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스스로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없음으로써
있어야 하고
없음으로써만
있을 수 있어
애써 눈여겨보지 않으면
애써 다가가지 않으면
애써 찾지 않으면
있음에도 없고
있음에도 없어야 하는
누군가 있다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묻지 않으며
스스로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을 묻지 않으며
다만 환한 웃음 지으며
다만 따스한 눈길 건네며
다만 부드러운 손길 내밀어
그저 품는 겁니다
있음으로써
참으로 있을 수 있도록
오늘의 성인
성 비오 10세(Pius X)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835-1914년
같은이름 : 비우스, 피오, 피우스
1835년 6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Venezia)의 리에세(Riese)에서 우체부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의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Giuseppe Melchiorre Sarto)는 어머니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아 1850년에 파도바(Padova)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1858년 9월 18일 사제가 된 그는 향후 17년 동안 본당 사목자로서 활동하다가 1884년 9월 쇠락한 교구인 만토바(Nantova)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구 활성화에 전념했다.
1893년 6월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를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겸 사제급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베네치아 정부와의 문제로 인하여 18개월 간 부임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10년 동안 지혜롭게 정부와 협력하며 사회주의에 대항하고 신자들에게 헌신했다.
그는 1903년 8월 4일 교황 레오 13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회법 개정에 착수했고, 불가타 성경 개역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명하였다. 특히 그는 매일 영성체할 것을 명하고, 첫영성체 연령을 낮추고, 병자들의 영성체를 완화해주는 교령을 발표했다.
그의 재임기간은 '근대주의'(Modernism)와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 좌파 정치 이념에 가톨릭시즘을 조화시키려던 마크 상니에르(Marc Sangier)의 '르 시용'(Le Sillon) 운동을 단죄하였다. 교황 성 비오 10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22일 후인 1914년 8월 20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을 개탄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까지 불렸던 그는 1951년 6월 3일 복자품에 올랐고, 1954년 5월 29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럼으로써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 되었다.
성녀 그라시아 (Gratia,Gracia)
활동년도 : 1180년경
신분 : 동정, 순교
지역 : 알키라, 발렌시아, 스페인
같은 이름 :
알시라의 성 베르나르도의 여동생인 성녀 그라시아와 성녀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여러 차례 개정 작업을 거친 현 “로마 순교록”에서는 그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에스파냐 발렌시아 지방 알시라에서 시토회 수도자로 아흐메드라고 불리던 성 베르나르도와 그의 여동생으로 자이다로 불리던 성녀 마리아와 조라이다로 불리던 성녀 그라시아가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슬람교를 믿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르나르도의 본래 이름은 아흐메드로 발렌시아 지방에 있었던 사라센 왕국의 카렛 지방 족장인 알만소르의 아들이었다.
그에게는 형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형과 함께 궁정에서 지내며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156년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석방을 위한 외교적 임무를 띠고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에 갔다.
외교적 협상에 실패한 그는 돌아오던 중에 길을 잃고 밤새 숲속을 헤매다가 어디선가 천사가 부르는 듯한 노랫소리를 듣고 타라고나(의 포블레트에 있는 시토회의 왕립 수도원을 찾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수도원장의 친절한 환대를 받고 흰색 수도복을 입은 수도자들의 겸손과 기도 생활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배우고 나서 이슬람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베르나르도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도명으로 정했다.
1181년에 성 베르나르도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발렌시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렛으로 가서 여동생인 자이다와 조라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이어 족장에 오른 형을 만났다.
여동생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자이다는 마리아로, 조라이다는 그라시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형이 격분하자 성 베르나르도는 성녀 그라시아와 성녀 마리아와 함께 피신했다가 그해 8월 21일 알시라에서 체포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이슬람교의 지배하에서도 개종하지 않은 에스파냐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알시라에 묻혔다.
1242년 그 지역을 정복해 무슬림의 손에서 해방한 아라곤의 왕 하우메 1세는 그들의 유해를 찾은 후 순교 장소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삼위일체 수도회에 관리를 위임했다.
1603년 그들의 유해는 시토회의 포블레트 수도원으로 이장되었고, 1643년 이들 세 순교자는 알시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