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절기의 의미를 다른 것에 연결하여 해석하는 들려주기 -장유리「초복」/박경희「말복(末伏)」/김금자「夏至」
절기의 의미를 삶의 다른 장면에 연결하여 그 장면으로 감정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보통 절기의 의미는 그 절기의 특징적인 면에 대한 사유를 거쳐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기의 특징적인 면과 겹쳐지는 삶의 한 국면이 있다면, 이때는 절기의 특징적인 면을 제시하지 않고 연결되는 사건의 장면만 말해도 충분히 그 특징적인 면이 떠오를 수 있고, 그를 통하여 절기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대개가 그 절기를 제목으로 달고 그 의미가 환기되는 삶의 다른 장면을 표현의 재료로 사용하여 감정세계를 표현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절기의 특징적인 면을 통해 의미를 생각한다.
2) 의미를 환기하는 절기의 특징적인 면과 연결되거나 겹치는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3) 절기의 특징적인 면에 연결된 장면을 넣는다. 결국 연결된 장면이 절기의 특징적인 면에 대한 해석의 역할을 한다.
4) 그래서 제목은 절기가 되고(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연결된 다른 장면을 전개시켜 감정세계를 표현한다.
다음 시는 절기는 아니지만 그 의미를 표현하는 방식이 같아 생각해 보겠습니다.
초복
-장유리
이글거리는 눈을
보는 것은 힘겹다.
달아나도 세상 끝까지
따라올 것 같은
그의 뜨거운 사랑 앞에
옷을 벗는
눈부신 상사화의
긴 허리.
제목이 “초복”인데 내용의 핵심에는 “뜨거운 사랑”과 “눈부신 상사화의 긴 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소서(小暑) 지난 7월 13일 무렵의 초복(初伏)이라는 특징을 해석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자, 그럼 시인은 초복의 특징을 어떤 삶의 다른 장면으로 연결하여 해석했습니까?
-장면1: “이글거리는 눈을/ 보는 것은 힘겹다”. 소서 지난 7월 중순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강렬한 햇볕입니다. 그 볕이 대지의 초록 생명들과 불붙는 사랑을 합니다. 거대한 초록공장이 돌아갑니다. 너를 남김없이 꺼내놓으라는 명령처럼! 대지의 초록생명들은 천지의 법을 그렇게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글거리는 눈을/ 보는 것은 힘들다”고 합니다.
장면2: “달아나도 세상 끝까지/ 따라올 것 같은/ 그의 뜨거운 사랑 앞에/ 옷을 벗는”. 최대의 생명적 호응에 대한 요청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생명력을 과시하는 천지간의 놀이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것은 “뜨거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뜨거운”만 생각하면 일방성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뜨거움은 태워 죽이는 뜨거움이 아니라 “옷”을 벗기는 뜨거움입니다. “옷”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벗기고 사랑의 관계만 남기는 뜨거움으로의 사랑입니다. “이글거리는 눈”이 요구하는 바는 “옷”으로 상징되는 체계를 벗고 ‘너를 최대한으로 살라!’, ‘미지로 너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듯 상사화가 꽃대를 밀어 올립니다,
장면3: “눈부신 상사화의/ 긴 허리. 잘 아시겠지만 상사화는 봄부터 잎을 피우다가 6월에 그 잎이 완전히 말라죽고 초복쯤이면 벌건 맨땅에서 꽃대만 기다랗게 나와 그 끝에 꽃을 피웁니다. 그 과정이, 더 이상 도망갈 곳 없어 차라리 사랑을 의욕하며 이글거리는 눈빛이 멀게 사랑을 피우는 행위로 해석되기에 충분합니다. 그게 촉복 때의 햇살과 초록의 사랑입니다. 하늘과 가이아 여신의 사랑입니다. 그 이글거리는 사랑은 대지를 향해 ‘너의 자연성을 최대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복의 강렬한 햇볕이 아낌없이 초록 생의 다함을 요청한다는 감정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 초복의 특징적인 면을, 그와 다른 삶의 장면에 연결하여 해석하는 들려주기로 표현합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물론 말복은 절기가 아니고 또 시기도 입추 지나서이니 여름 절기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만 한여름의 특징과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말복(末伏)
- 박경희
계모임에서 옻닭 먹고 온 엄니 밭머리에서 게트림 길게 하고 연거푸 이를 세 번 닦았다는데, 옻 안 타는 엄니 옻 잘 타는 아부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던 엄니가 뒷간 들어갔다 나온 뒤, 아부지 들어가고 똥김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 위에 쭈그려 앉았다고, 밤새 간지러움에 뒤척이다가, 자 어매 여 좀 봐봐 엉덩이 까 보여주자 거시기며 엉덩이가 벌겋게 오돌도돌 옻이 올랐다고, 니미 어떤 인간이 옻닭 처먹었느냐고 똥을 싸도 날 지나 싸지 왜 내 앞에 싸고 지랄이냐고, 옻 똥김 지대로 맞았다고 사흘 밤낮 벅벅 긁다가 세 들어 사는 집 구석구석 살폈다는데 수시로 빤쓰 속에 손 드나드는 통에 동네 아낙 여럿 낯 붉어졌다는데 한동안 대숲 뒷길로만 다녔다는데, 말도 못하고 쥐 죽은 듯 몸 사리며 가끔 아부지 빤쓰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줬다는 엄니
제목이 말복(末伏)인데 옻닭 먹고 일어난 사건만 나옵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말복 보양식 중 하나인 옻닭 드시고 일어난 재미난 사건 정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지막 무더위인 말복의 특성을 해석적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말복은 입추 지나서입니다. 공교롭게도 옻닭사건으로 하여 아주 간접적인 방식으로 “거시기며 엉덩이가 벌겋게 오돌도돌 옻이 올랐다”는 사실이 마치 ‘깊은 곳으로는 이미 단풍이 왔다’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아버지가 최고로 성이 난 상태이고 원인 제공자인 어머니는 그 불벼락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슬 피하며 “말도 못하고 쥐 죽은 듯 몸 사리는” 장면이 마지막 무더위 피하는 사람 모습 같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그래도 그게 마지막 무더위라는 사실입니다. 더위가 하늘 끝까지 뻗친다 해도 이제 가라앉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뻗친 화도 어머니가 “가끔 아부지 빤쓰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주다보면 가려움이 덜어지면서 가라앉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참 아슬아슬 슬기롭게 무더위를 피합니다. 그리하여 두 분 사이가 더 좋아지면 가을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말복 보양식인 옻닭사건을 통해 말복의 의미를 표현합니다.
어떻게?
- 마지막 무더위가 이렇게 가더라고.
이것이 절기의 의미를 다른 것에 연결하여 해석하는 들려주기 방식입니다.
다음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夏至)
-김금자
세 살배기 손녀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다
돌아와 밥 알 동동 뜨는 감주를 한 그릇 주니
땀방울 송글송글한 얼굴
저 혼자 먹겠다며
빨간 입술을 살짝 박고
콧짐 쐑쐑거리며 떠다니는 밥 알갱이를 살짝 살짝 밀어내며
물만 쪽쪽 빨아들인다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한 나절 모 심을 논 삶던 소가
찔레꽃잎 하얗게 덮인 도랑가에 다가가
콧구멍 벌렁벌렁거리며 쇗- 쇗- 꽃잎을 밀어내며
물만 들이키던
저 모습이라니
이 시 역시 제목은 하지(夏至)인데 내용은 어린 손녀가 감주 먹는 모습이고 거기에 소가 물 먹는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렇다면 하지의 의미가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시인은 하지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여 감정세계를 표현한 것일까요?
- 하지 무렵이면 모내기를 거반 끝마치거나 늦은 논은 한창일 때입니다. 초록들도 차오르고 뭐든지 쑥쑥 자랄 때입니다. 이 세상에 온 생명들이 제 힘껏 피어오를 때입니다. 세 살배기 손녀 역시 그럴 때입니다. 어린 모가 물을 빨아먹고 연신 햇살을 빨아 먹듯이 “세 살배기 손녀/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갈증이 날 것 같아 냉장고를 열고 감주 한 그릇을 줍니다. 물론 여느 때처럼 먹여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놈, “저 혼자 먹겠다며” 할머니 손을 물리치고 입술을 갖다 댑니다. 여름 볕에 고만큼 자랐던 것일까요. 땀방울 송글송글한 얼굴로 “빨간 입술을 살짝 박고/ 콧짐 쐑쐑거리며/ 떠다니는 밥 알갱이를 살짝 살짝 밀어내며/ 물만 쪽쪽 빨아” 들입니다. 그 모습이 놀랍습니다. 이전같이 먹여줄 때 밥 알갱이가 거치적거리면 입을 떼고 ‘할머니, 이것!’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콧바람을 불면서 감주만 먹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마치 새로 나온 연둣빛 꽃 같던 이파리들이 짙은 초록잎으로 변해가듯 제 힘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이 아이에게 어떤 여유로 피어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르지만 유사한 이미지가 겹칩니다. “한 나절 모 심을 논 삶던 소가/ 찔레꽃잎 하얗게 덮인 도랑가에 다가가/ 콧구멍 벌렁벌렁거리며 쇗- 쇗- 꽃잎을 밀어내며/ 물만 들이키던/ 저 모습이라니”. 두 이미지가 겹치면서 생명의 성정에 미더움이 생깁니다. 그 점에서는 제 생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과 그로 인한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 능력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한 것입니다. 아이는 이제 최소한의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성장의 궤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어린 모처럼 쑥쑥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기에 여유로운 ‘인간의 길’이 떠오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하지 무렵의 생명적 상태입니다.
이런 감정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 제목을 ‘하지’(夏至)로 달고, 그런 하지의 생명적 특징이 잘 보이는 손녀의 감주 먹는 장면과 “논 삶던 소가” 물먹는 장면을 겹쳐 해석하는 들려주기로 표현합니다.
-글/오철수
첫댓글 시가 아름다움을 얻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믄서 읽었어요.
얼핏 겹쳐지는 장면이 있는데 집중해 봐야겠어요.
그렇게 여름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드세요.
여름에 대한 인상적 장면들은 누구나 있을 거에요.
그 장면을 어떻게 할 때, 아름다움을 얻고, 의미의 표현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만드는지....
그런 것들이 조금씩 해명되는 공부되시길.
여기에 오른 시들을 보면 언어가 정말로 살아서 숨을 쉬는구나! 생각해요. 특히 "말복"
요즘 인터넷이나 제 이웃에 사는 어떤 젊은 청년이 쓰는 판타지소설의 용어와는 전혀 달라 아름답고, 아는 청년이 낸 책이라서 관심가지고 읽으려 해도 저는 이해가 별로 안 오던걸요. 사이버상에는 꽤 유명하다던데^^
예전에 그대가 쓴 시 중에
어머니가 노래가사 적어놓은 것이었던가 하는....
그런 시가 보고 싶군.
곶감으로 바꿨다더니 어찌 잘 되고 있는 것인가?
자유게시판에다가 홈피 올려나봐요^^
@오철수 예전엔 제가 철딱서니 없이 글공부하는 이곳에서 사과를 게시판에 선전했더랬지요. 정말 죄송했어요. 아직은 곶감저장하는 냉동창고가 없어서 바로 수확해서 12월~구정까지 팔만큼만 만들었고 스마트폰의 카스나 카톡덕분에 어렵지 않게 판매했어요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신다>를 써놓고는 다른이들에겐 다 구경시켰는데
정작 주인공인 엄마에겐 아직까지 못 보여드렸네요^^
@남수현 그 노래를 열살짜리가 부르면 기괴하고
스무살짜리가 부르면 촌스럽고
서른살짜리가 부르면 서럽고
마흔살짜리가 부르면 육감적이고
한 일흔살 되신 분이 부르면 걍 담담하지요..
세살베기 손녀가 밥알을 밀어내고 콧짐으로 쐑쐑 거리며 들이키는 모습 아름답네요.
말복 읽다 옛날 신혼때 생각나서 얼굴을 붉혔구먼요.
대판 싸운 다음날 어디서 옻닭을 먹고온 편 술이 거나해져 그날은 뭐가 동했는지 자는 사람 덥치더니 이튼날 저녁부터 스믈스믈 가렵더니 피부과 일주일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옻은 항문으로부터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