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범은 기업과 국가_기후 부정의 시대의 불평등
이사야 40:1-8
1.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4.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5.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6.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7.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8.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2020년, 로마 교황청은 5월 24일부터 이듬해 5월 24일까지 한 해를 「찬미받으소서」 특별기념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이 특별 기념의 해로 시작하는 십 년이 지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참된 때(kairόs)를 경험하는 ‘희년’의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특별기념의 해는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시작되어, ‘생태적 회개의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지역, 국가, 세계를 망라하는 모든 차원에서 즉각적이고 일치된 응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풀뿌리 ‘대중 운동’, 곧 선의의 모든 사람이 협력하여 자신의 문화, 경험, 계획, 재능으로 피조물 보호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습니다”(「찬미받으소서」, 14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5월 24일에 지구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라는 회칙을 반포하였습니다. 이 회칙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제 선정부터 집필, 발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첫 회칙이었다고 합니다.
6장 246항에 달하는 이 회칙은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지구 생태환경 문제를 성찰하며 회개와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교황은 이 회칙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 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해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였습니다.
7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이 회칙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에 난 흠집”(「찬미받으소서」, 163항)이 더욱 빈번하고 강력한 홍수와 가뭄, 산불 등 기후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야기된 생태계 파괴와 생물다양성감소는 금세기 안에 6차 대멸종을 예고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회칙은 지구에 난 이 다양한 흠집이 너무도 분명하고 심각해서 더는 간과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냐?”고 질문하죠(「찬미받으소서」, 160항) .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벌어지는 생태 훼손으로 가장 먼저 심각한 희생을 당한 이들이 바로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들이라 선언하며. 더욱더 간절해지고 있는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찬미받으소서」, 49항) 앞에서 더이상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공동의 여정에 대한 도덕적 영적 지침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회칙은 사랑과 연대로 일치를 이루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내고, 공동의 집인 자연과 더욱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하자고 역설합니다. 이른바 통합생태론의 강조입니다. 통합생태론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죠.
코로나19 대유행, 극심해지는 기후 위기 속에서 통합생태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교황청 인간발전부 차관 스메릴리 수녀는 “우리가 만일 생태적 여정에서 뒤로 후퇴한다면, 점점 더 많은 전염병, 기후 문제를 겪을 것이고, 이것은 기아를 의미하고 기아는 전쟁을 의미한다”면서 “모든 것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찬미받으소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회칙에서 ‘공동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기후변화, 물의 문제, 생물다양성 감소 등 지구가 직면한 생태 문제와 인간 삶의 질 저하, 사회 붕괴, 세계적 불평등 등 인간사회의 문제를 제기하죠.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전통이 전하는 이해와 통찰을 전합니다. 특히 창세기를 묵상하며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계획”이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76항)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를 분석하면서 지배적인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 지나친 인간중심주의, 상대주의 문화 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적·지역적 대화, 정치·경제·과학·종교 간의 대화를 촉구하죠.
마지막으로 교황은 ‘생태적 회개’를 이끌 생태 교육과 영성을 다룬 지구를 위한 기도,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로 회칙을 마무리합니다.
“찬미받으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해, 피조물을 위한 기도로 마무리된 이 회칙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 가장 큰 영향으로 꼽히는 것은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입니다. 교황은 이 협약의 중요성을 내다보고 회칙의 발표 시기를 앞당겼습니다.
당시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은 “회칙 반포를 환영한다“면서 ”회칙이 국가적 이익보다 세계적 공동선을 우선시해, 올해 파리에서 이 야심차고 보편적인 기후협약을 채택하도록” 각국 정부를 독려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역시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변화를 억제할 담대한 행동을 취하라는 교황의 간청을 고려하기를 바란다”고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저는 기후 위기는 기후 부정의며 불평등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저지른 자와 피해당하는 이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그들 중에서도 생산수단과 그 결과를 손에 쥔 부자들이 모든 피조물의 멸종을 초래할 기후 위기를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장 힘없는 피조물들로부터 사라지는 비극입니다.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현대 농사법의 시작으로 작물의 종 다양성이 사라졌습니다. 대규모 단일작물 농사 때문이죠. 맛과 수확량이 많은 종자만 선택되고 나머지 작물은 농사에서 버려졌습니다. 그렇게 사라진 종자가 100년간 전체 작물의 75%에 달합니다.
녹색혁명 덕에 인구는 가파르게 늘어났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 자본주의의 악마성이 지금의 지구 상황을 만든 것이죠. 1800년경 10억이던 인구는 130년 후인 1930년에 20억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녹색혁명으로 30년 만인 1960년에 30억으로 이후에는 14년, 13년, 12년, 11년 만에 10억 명씩 증가하여 지금은 79억 5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10억 명 정도 인구가 생태적으로 살며 지켜야 할 지구가 이렇게 되었네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가진 자들이 기후 위기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자신들은 별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도 그들은 안전한 곳에 살고 있고, 극심한 무더위나 추위에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기후 위기로 피조물의 90%가 멸종한다 해도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 거대한 돔을 짓고 생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간절하게 당부한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 모든 피조물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인류의 대각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부정의와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즉각적인 노력과 실천입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 나라가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국에 제출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감축목표를 지킨다고 해도 2050년까지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2.7도 오른다고 지적합니다. 각 나라가 제시한 목표로는 기후 위기로 인한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죠.
2030년까지 1.5도 이하로 기온 상승을 막지 못하면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데 이런 결과를 야기한 것은 가진 자들의 반발 때문입니다. 탄소배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기업들에 대한 느슨한 규제, 시민들의 '삶'이 아닌 '산업'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는 정부가 그 주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50년까지 지구 평균온도를 1.5도 이하로 억제한다는 국제사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1인당 탄소 배출량을 2.1톤 이하로 만들어야 합니다. 2020년 기준 1인당 탄소배출량 세계 평균은 4.5톤이었으니 절반 이상을 줄여야 하는 거죠.
기후 위기는 모든 인류의 책임이지만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탄소 배출량을 보면 소득 하위 50%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0.69톤으로 이미 목표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반면, 소득 상위 0.1%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216.7톤입니다. 목표치의 100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그러니 누가 탄소배출을 줄여야 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한 것입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생한 탄소배출량 중 약 71%가 세계 100대 기업에게 책임이 있다는 탄소공개프로젝트(CDP)의 발표 역시 기후 부정의를 보여줍니다.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간의 격차도 기후 위기 문제가 불평등의 문제임을 방증하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2 이사야가 기록한 글의 첫 부분입니다. 학자들은 이사야 1-39장이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 왕에서부터 요담과 아하스를 거쳐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유다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이사야의 글이라고 보고, 40장부터는 다른 이사야의 기록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간절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를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의지하는 것을 비판하며 오히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그의 예언 사역을 마무리 합니다(39:1-8).
이사야의 마지막 예언이 있은 지 100년이 지날 즈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죠. 성전은 파괴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바벨론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일정한 자치를 누릴 수 있게 조치를 내립니다(에스라 1:1-4).
제2 이사야는 믿음의 선배 이사야의 예언을 계승하여 바벨론에서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제2 이사야는 포로 귀환 명령을 단지 고레스왕의 선의나 포용 정책의 결과라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끝내고 새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인지했습니다. 그래서 초라한 포로들의 귀환 행렬을 향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되었다고, 그리고 유다의 70년 포로 생활은 그들의 범죄에 대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1-2절).
제2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향한 포로들의 귀환 행렬이 단지 그들만의 행렬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거느린 웅장한 행차이기에 광야와 사막 가운데 길을 내라고 명령합니다(3절).
이 길은 새 세상을 향하는 길이기에 해방된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기필코 닦아야 하는 길입니다. 만일 이 길 닦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히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다시 돌아오시는 그 길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세상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이사야는 사막에 길을 내는 것, 벌판에 큰길을 내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리며,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곧게 펴 만드는 길입니다.
첫째, 모든 골짜기를 메우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 있는 골짜기를 메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풍요로워졌지만 어두운 골짜기에서 춥고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각 사람에게 있는 골짜기를 메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골이 패인 것이 있습니다. 낙심, 좌절, 절망, 외로움의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나오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과 언덕을 깎아내는 것입니다. 이것도 두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괴롭히고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만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세력을 척결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교만함을 꺽고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히라는 것입니다. 절벽이나 비탈진 길은 오르기 쉽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차별입니다. 신분 계급, 돈과 권력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차별과 불평등을 부추기며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자들은 추방되어야 합니다. 정의와 평등,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나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새 세상을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이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또 야훼께서는 이사야에게 이 말을 소리 높여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6-7)."
이 말씀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함,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귀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포로에서 귀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이 통치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이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있을 것이고, 그의 통치 안에 들어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하심을 맛볼 것입니다(9-11절).
이스라엘과 유다를 전쟁으로 함락하고 포로로 이끌어간 나라는 앗수르, 바벨론 등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강한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시들어버릴 꽃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을 방해하는 골짜기나 비탈, 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그 방해물들은 치워져 평탄하게 될 것입니다.
기후 부정의에 의한 불평등이 올 여름 한국과 파키스탄 등 아시아에 큰 폭우를 뿌려댔습니다. 한국이 경우는 지난번 말씀드린 바가 있고 파키스탄에는 말도 안 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6월에 시작된 폭우로 파키스탄은 역사상 최악의 홍수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파키스탄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어린이 380명을 포함해 1,100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파키스탄 인구의 7명 중 1명꼴인 3,300만 명 이상이 홍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다가오는 대재앙을 면하려면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지속가능한 새 세상을 방해하는 강대국과 자본주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자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각성한 대다수의 민중들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교황을 필두로 가톨릭교회가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 역시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이 길에 떨쳐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그분과 함께 새 세상을 향한 길을 닦으려 헌신하는 모든 이들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2.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