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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 신
주 장 성(한강문학극시회 회장)
구국 헌신의 해양 서사시
국가적 불의를 자신의 정의로 극복한 사나이
바다에서 읽는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
▲임진년 5월, 2차 출정 - 거북선 바다로 나가다.
4월 28일.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를 명해 놓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임금은 개국 이래 지켜 오던 도성과 백성을 싸움 한번 없이 포기하고 급히 파천한 것이다.
호위 인원조차 제대로 붙지 않은 파천 행렬은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끼니도 거른 채, 진흙탕을 걸어 개성으로 갔다. 파천 소식에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과 나라 곳간을 불태워버렸다.
한양에 겨우 남은 군사 4천5백으로 한강 방어가 어렵다고 생각한 김명원이 전선에서 머뭇거리자 조선군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실로 20여 일 만에 조선 수도 최후의 방어선인 한강을 넘어 무방비 상태의 한양을 무혈 점령하였으나, 조선 왕이 도성에서 사라졌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잠시 주춤한다.
조선군이 그대로 방치하고 간 많은 전쟁 물자를 획득한 일본군은 한양에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일단 전열을 정비한다.
“하루빨리 조선왕을 사로잡으라, 전라도를 점령하라, 서해로 가는 해로를 확보하라”는 히데요시의 독촉을 받은 일본군은 해•육상에서 일제히 북진과 서진을 개시한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와 ‘ 구로다 나가마사 ’ 군 3만은 황해도를 거쳐 평양성으로 향했고, ‘ 가토 기요마사 ’ 군 2만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향했다.
나머지 다른 부대들은 충청도, 전라도 공략을 서둘렀다.
수군도 점점 서쪽으로 진출해 경상도 서안을 넘어 전라도를 노리고 있었다.
요컨대 일본군은 조선 임금이 있는 평양과 쌀이 있는 전라도와 해로가 있는 남해를 일제히 공략하려는 것이었다.
한강과 한양을 어이없이 내준 조선 조정은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1만3천의 병력을 차출하여 서둘러 임진강 방어군을 편성하고, 김명원에게 또 다시 임진강의 방어를 명 하였다. 한강 패주의 책임은 묻지도 않았다.
도강을 노리는 일본군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조선군은 수차례 소규모 공방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짐짓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무모한 조선군 장수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한밤중에 임진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역공에 몰려 순식간에 전멸하였고, 도강을 반대하며 북안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조선군 병력마저 연달아 무너져버렸다.
조선군은 한강에 이어 임진강도 어이없이 내주고 만 것이다. 선조는 벌써 평양으로 피난하였으며, 김명원 역시 평복으로 갈아입고 일찌감치 달아났다.
군사 경험이 없는 문신 출신 장수, 훈련받지 않은 군사,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체계, 취약한 무기, 이들이 싸움에 이길 수는 없었다.
조선의 국토는 유린당하고, 죄 없는 백성은 죽어 나갔다.
5월 7일 고니시와 구로다군은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왜 수군은 남해 바닷길의 동쪽 요충지, 진주와 섬진강의 바로 아래 지점 사천포를 먼저 점령하고 포구 산정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사천포에 축성이 완료되면, 남해 바다 동쪽은 왜 수군이 장악하게 되고 섬진강-진주, 여수-전라도가 위험해진다. 전라도가 흔들리면 그나마 전국의 우리 백성, 우리 군사들은 다 굶어 죽는다.
이순신은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서둘러 출전하는 것이다.
5월 29일 여수항. 맑음.
이순신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기함에 올랐다.
“나가자”
엄중한 명령이 떨어졌다.
“ 둥 두둥 둥 ”
새벽 어둠을 뚫고 가슴 두근거리는 출항의 북이 울렸다.
나라를 침략한 적을 무찌르기 위해 경상도로 나가는 두 번째 출정의 북이 울린 것이다.
이순신은 1차 출정에서 돌아온 후 전라좌수영 함대를 공격 위주의 기동 함대로 재편하고, 장수들도 그 특성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재배치하였다.
내파성과 항주 시험, 상갑판 장갑 시험, 각종 진형 전개와 함포 집중교차 사격 훈련, 돌격-가속-직충 훈련, 연막살포 훈련, 야간, 무중 협수로 항해 훈련, 손상복구, 인명구조 훈련 등을 충분히 마치고 첫 출정 하는 거북선 2척과 돌격장 이기남, 이언량.
천, 지, 현, 황, 승자총통과 완구, 살탄, 조란탄, 질려탄, 비격진천뢰 등 포탄, 장-편전, 쇠뇌 등으로 중무장한 판옥선 23척.
군량미와 화약, 각종 포탄, 화살 등을 만재한 지원 선박으로 구성된 지구촌 최강 기동 타격 함대인 것이다.
전투 물자지원 선박의 추가 운용은 조운선의 운항 경험이 풍부한 수군들이 많아서 하등 어려울 것이 없었다.
경상도에 진입하여 모든 해안을 샅샅이 수색하며 동진하던 이순신 함대는 사천만 입구 곤양에서 사천 쪽으로 달아나던 적 탐방선 1척을 발견하고 쫓아가 격파하며 사천포에 이르렀다.
지형을 관찰하니 포구 뒷산은 형세가 험준하였으며 앞 바다는 수심이 낮은 펄 지대가 펼쳐 저 있었다.
뒷산에는 400여 명이나 되는 왜적들이 둥글게 진을 치고 성을 쌓고 있었고, 앞쪽 해안에는 누각을 세운 대선을 비롯하여 적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산에는 왜적들이 조선 수군을 내려다보며 칼을 휘두르고 발로 밟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물때는 썰물이었다.
“첨벙”
선두 기함에서 측심연을 던졌다.
“수심 네 발. 더 이상 진입 불가”
선수에 나가 있는 갑판장이 큰 소리로 보고 하였다.
포구 안의 왜 전선은 포 사정이 충분히 미치지 못할 만한 거리였다.
“적들은 매우 교만하다. 물러나서 밀물을 기다리자”
이순신의 작전 지시에 따라 함대가 1리 정도 물러 나왔을 때, 왜적 200여 명이 돌출 해안까지 내려와 소리소리 지르고 공포를 쏘아대며 날뛰었으나, 왜선까지 바다로 나올 기세는 아니었다.
이순신 함대가 사천포 외항을 봉쇄하고 꾸준히 기다리자 소리 없이 밀물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은 신중하고 신속하게 진격을 개시하였다.
함대가 포구 앞에 도달했다.
측심연이 던져졌다.
“수심 다섯 발. 높아지고 있음”
돌격이다.
왜군은 조총 병력과 돌격대를 해안가 언덕과 병선에 배치하고 조선 수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그러나 포구로 돌격해 오던 판옥선은 일정 거리에서 딱 멈추어 서고 이상하게 생긴 시커먼 배 두 척이 그 사이에서 튀어나와 빠르게 돌진해 왔다.
왜장은 처음 보는 이 적선이 조총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이 적선은 팅팅 쇳소리 요란하게 조총탄을 튕겨내며 그대로 돌진해 왔다.
이 이상한 배는 선수에 용머리가 솟아 있었고, 선수 흘수선에도 툭 튀어나온 괴물 머리가 하나 더 달려 있었다.
병사나 무장 상태 등 배 내부 모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거북같이 생긴 시커먼 선체가 물결을 헤치며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넓둥근 한 등은 뜸으로 덮여있는 듯했다.
빗발치는 조총탄을 무릅쓰고 먼저 돌진해 온 거북선이 왜 수군의 제 1 방어선에서 달려드는 왜선을 밀어붙이며 길을 열자, 바짝 따라 온 다음 거북선이 이 길을 따라 큰 누각선을 향하여 똑바로 달려들었다.
제2 방어선의 왜군들은 눈앞에 닥친 이 이상한 배에서 곧 적 돌격대가 튀어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일본도를 뽑아 들고 뱃전에 바짝 달라 붙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돌격대는 나오지 않고 함수 양쪽에서 갑자기 시커먼 포신이 튀어나와 “콰강”하고 불을 뿜었다. 바로 면전에서 조란탄에 제대로 얻어맞은 왜적의 뱃전과 방패는 산산조각 날아가고 왜군은 넝마쪽이 되었다.
그대로 적 대장선으로 돌진한 거북선은 북소리가 빨라지며 더 빠르게 돌진하다가 북소리가 딱 그치며 양현의 노를 안으로 싹 당겨 넣고, 선수 수면 괴물 머리로 적 대장선 옆구리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수선에 커다란 구멍이 난 왜선은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곧바로 높은 선교 바로 코앞에 들이닥친 거북선 용두 아가리에서 폭풍같은 조란탄이 발사되어 적 지휘부를 한 방에 쓸어버렸다.
그래도 살아남은 왜군 돌격대는 사다리를 걸고 용감하게 거북선 등 위로 뛰어내렸다.
순간 왜 돌격대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뜸 밑에 숨겨진 쇠못에 마구 찔렸다. 사방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온몸이 더욱 찔리고 시뻘건 피는 거북선 장갑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거북선은 왜군의 시체를 등에 꽂은 채 적진을 휘저었다.
바로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동료를 속수무책으로 목도한 왜군들은 그 자리에서 오그라 붙었다.
적선 옆구리에 큰 구멍을 내고 적군을 쓸어버린 거북선은 천천히 적선에서 떨어지며 대장선을 지키기 위해 몰려드는 적선들을 향해 사방팔방으로 조란탄을 퍼부어 왜 수군을 또다시 아비규환 속으로 몰아넣었다.
어느새 돌격해 온 조선 수군 판옥선이 나머지 적 함대를 향하여 무차별 근접 포격과 불화살을 퍼부었다.
왜적들의 비명과 왜선이 불타는 연기가 사천포구에 가득 찼다. 일본 삼나무 판자로 만든 왜선은 가벼운 만큼 기동성이 좋아 도망갈 때는 좋지만 근접전과 혼전 상태에서는 잘 깨어지고 불이 잘 붙었다.
왜적들은 화염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헤엄쳐 갔다. 그러나 조선 함대의 장, 편전은 이들을 그냥 살려 보내주지 않았다.
바로 이때 한 왜장이 조선 수군의 기함이 포구 안으로 들어 온 것을 발견하였다.
이순신이 첫 출전한 거북선의 전투 활동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혼전 현장으로 바짝 들어온 것이었다.
“저 푸른 깃발이 펄럭이는 큰 배가 적 대장선이다. 저 배의 선루를 쏘아라. 적 대장선의 선루를 쏘아라”
악에 받친 왜장이 소리쳤다.
일시에 수많은 조총이 이순신 기함의 선루를 조준하여 발사되었다.
탄알 한발이 이순신의 왼쪽 어깨에 맞아 등어리에 박혔다. 피가 발꿈치로 흘러내렸다.
이순신은 총상을 입은 채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여 적선을 깨고 모두 분멸하였다.
총탄이 세치만 더 안쪽으로 갔으면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늘의 보호였을까? 하늘의 경고였을까?
사천포 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전멸시켰으며 아군 전선의 피해와 전사자는 없었다.
기함 선루에서 함께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군관 나대용, 이설이 총탄을 맞았고, 판옥선의 장, 편전 사수, 격군 중에서 적탄을 맞은 자가 많았다.
사천포 왜적을 완전 격파한 이순신 함대는 사량도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사량도 백성들은 밥을 내온다, 술을 내온다 하며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온 용사들을 힘껏 위로하였다.
함대는 모처럼 휴식을 취하며 전선을 정비하고 부상자를 치료하였다. 이순신은 쉼 없이 진중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장수들과 함께 사천포 해전 결과를 분석하며, 특히 거북선의 전투 경과를 상세히 평가하였다.
사천포 해전에서 나타난 거북선의 전투 능력은 강력하였다.
거북선은 훈련에서 연마한 전술 기량 그대로 각 국면에서 탁월한 전투 능력을 나타내었다. 특히 초전에 앞장서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진형을 흩트려 놓고, 근접 포격과 직충으로 적 지휘부를 일시에 무력화시키는 전투 능력은 탁월하였다.
이순신은 사천포 해전에서 함대가 돌격을 감행 하다가, 함대의 포 사정거리와 명중률이 최적이며, 왜선의 총포 사정거리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 구간에서 딱 멈추어 함포 집중교차 사격, 포위 진형을 유지 하고 거북선이 튀어나가 적 진형을 흩트리며 공격을 개시하면, 좌우현 교대로 함포를 퍼부으며 돌격하여 불화살을 퍼 붓는 전술을 적용하고 표준 전술화 하였다. 다만 거북선의 갑판이 포 갑판과 노 갑판, 하부 갑판 3층 구조로 나뉘어 있으며, 전투 필수 물품을 구석구석 많이 적재한 탓에 선실의 천정이 낮고 여유 공간이 없어 군사들이 평소에 지내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순신은 사량도에서 등에 박힌 탄환을 달군 칼끝으로 빼내고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계속 씻었다. 그러나 이 상처는 상시 입고 있는 갑옷 때문에 쉽게 낳지 않고 짓물러, 이듬해 부산포 해전까지 이순신을 괴롭히게 된다.
6월 2일 진시. 탐색을 나갔던 협선이 또 숨 가쁘게 달려와 “당포항에 왜선이 있다”고 보고 하였다.
함대는 즉시 사량도에서 동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당포항으로 출동하였다.
동풍이 불었다. 격군, 궁수, 포수 할 것 없이 모두 힘을 합쳐 노를 저었다. 곧이어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함께 힘을 나누어 쓰려는 것이었다.
역풍에서는 거북선이 판옥선을 앞섰다.
당포항은 뒤로 장군봉이 우뚝 솟아 있고 가파른 바위산으로 둘러 처져 있는 작은 만이었다. 물이 푸르고 파도가 컸다.
“첨벙”
측심연이 던져졌다.
썰물임에도 불구하고 당포항 수심은 좋았다.
물때에 지장 없이 거북선과 판옥선이 협동 공격 작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순신은 물러 나와 당포항과 그 주변의 전체적인 지형을 살피고 세부적인 공격 계획을 신속히 수립하였다.
당포항을 중심으로 서쪽 접근로에 있는 미륵-곤리도 수로와 남쪽 쑥섬 수로는 적 지원 세력의 진입과 당포에 있는 적군의 도주를 막기 위해 매복조를 배치하고, 당포항 바로 입구에는 거북선, 판옥선, 협선으로 편성된 포격 및 돌격대를 배치하였다.
장수들의 작전 계획 공유가 끝나고 함대는 각각 매복-차단, 포위-돌격 위치로 진입하였다.
전투 대형 배치는 신속 은밀하게 이루어져 축성에 몰두한 왜군들은 조여 오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포항의 왜선은 판옥선 크기의 대선 9척과 중간 배, 작은 배, 합하여 12척, 총 21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중 제일 큰 배는 층각이 우뚝 솟아 있었고, 밖으로는 ‘황黄’ 자를 크게 쓴 붉은 휘장을 둘러치고 있었다. 휘장 안 붉은 우산 밑에도 붉은 가리개가 둘러있었고, 그 안에 왜장이 있었다.
갑자기 포구를 막아서며 나타난 조선 수군 함대를 보자 왜군은 흩어진 병력을 불러 모으느라 큰 소동을 벌였지만 왜장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왜장 ‘가메이 코레노리’는 일본에서 출정할 때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운다면 오키나와를 영지로 주겠다”는 ‘히데요시’의 약속을 받고 온 인물로서 조선 함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오히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가메이는 즉시 병선을 동원하여 당포항 입구에 2중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고 약탈 나간 병력이 돌아오는 대로 돌격대를 편성하여 치고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 함대는 예상보다 빨랐다.
왜적의 전투 준비가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판옥선단이 거침없이 돌격해 들어가다 딱 멈추어 서서 보란 듯이 옆구리를 드러내보였고, 그 사이에서 이상하게 생긴 배 2척이 튀어나와 그대로 돌진해 왔다.
시커먼 배가 돌격해 오자 왜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하였으나 이 배에 맞은 총알이 핑핑 튕겨 나가고, 그 뒤의 판옥선 앞에 우박처럼 떨어졌다.
거북선의 격군들은 총알이 장갑판에 맞아 튕겨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밀고 당겼다. 포수들은 화봉을 든 채 숨죽여 징소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장수들은 배의 흔들림과 적선과의 거리를 재며 발포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왜 병선과 거리가 줄어들수록 거북선은 속력을 더 내기 시작했다.
“쿵 쾅쾅”
직선으로 달려온 거북선은 그대로 1선의 ‘세끼부네’를 들이받고, 밀어제치며 대장선 향하여 달려들었다. 목표는 오로지 대장선이었다.
2선의 세끼부네와 ‘아타케부네’도 조총을 난사하였지만 “팅 팅” 쇳소리만 낼 뿐 거북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진형을 파헤치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당황한 왜선들이 대장선을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으나 거북선은 그대로 대장선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거북선에 부딪힌 왜선들은 노가 부러져 이리저리 튀고, 구멍이 나 바닷물이 들어오고, 선체가 뒤틀려 삐걱거렸다.
자신이 공격 목표임을 알아챈 가메이는 “저 배를 막으라”고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눈앞까지 돌진해 온 거북선에서 그 징그러운 징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함수에서 포신이 튀어나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피령전’을 발사하여 선루를 파괴했다. 연이어 거북선 함수 아래 튀어나온 괴물 머리는 가메이 기함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들이받아 커다란 구멍을 내었고, 용두 아가리에서 ‘조란탄’이 발사되어 선교를 쓸어버렸다.
왜 기함의 선교는 산산조각이 나 무너져 내리고 노는 이리저리 부러져 날아갔으며, 구멍 난 선체는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왜적들은 크게 파손되어 기울어지는 왜선에서 탈출하기 위해 갑판으로 몰려나오다가 눈앞에서 터지는 조란탄을 맞고 몰살되었다.
진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고 왜 선단으로 돌격해 들어온 조선 수군 협선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치는 왜적들을 남김없이 사살하며 왜선에 불화살을 날렸다.
왜선에 둘러친 화려한 휘장은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 자신들의 배를 불태웠다. 눈앞 있는 거북선에 왜선이 몰려들어 둘러싸면 기다렸다는 듯이 전 방위로 포탄을 날려 접근조차 못하게 방어를 하였다.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척의 왜선은 죽기 살기로 노를 저어 탈출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당포항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복선에 걸려 모두 분멸되고 말았다.
분탕질을 하다가 때늦게 도착한 왜적들은 눈앞에서 불타는 자신들의 배와 물속에서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동료를 보고 경악하며 산으로 도주하였다.
당포항의 푸른 물은 이웃 나라를 이유 없이 침범한 왜적들이 뿌린 피로 붉게 변하였다.
기함에 버티고 있던 가메이는 협선을 탄 중위장 권준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 활을 쏘아 거꾸러뜨리고 흥양 보인 진무성이 재빠르게 뱃전을 타고 올라가 그의 목을 베었다.
조선군이 임진왜란 첫해 수륙전을 통틀어 처음으로 획득한 적장의 목이었다.
왜군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이자 수많은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해 온 고향의 영주이며, 패배를 모르던 해적 가메이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하고 전의를 잃었다. 그나마 시신을 거두려고 접근한 왜군도 빗발치는 화살에 모두 꺼꾸러지고 말았다.
우후 이몽구는 불타는 적장의 배를 수색하여 금부채 한 개를 획득하였다. 금부채는 옻칠한 갑 속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히데요시가 왜장들에게 신표로 주었던 것이었다.
왜장 ‘가메이 코레노리’는 히데요시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오키나와 영주로 봉할 것’을 약속할 정도로 신분이 높은 무장이었다. 그는 조선 땅에서 황금색 비단옷을 입고 층루선 선교에 앉아 ‘오키나와 왕’의 위세를 미리 과시하다가 이순신에게 죽은 것이다.
사천포와 달리 당포항은 수심이 좋아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 수군 판옥선들이 마음대로 항내를 누비면서 계획한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이 적선을 모조리 불태운 후 육지로 올라가 잔적을 소탕하려 할 때 외부에 나가 있는 탐색선에서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수 많은 배들을 거느리고 거제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이 즉시 바깥 바다로 나가니, 싸움을 지원하러 달려 온 적의 배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당포항에서 조선 수군이 추격하는 것을 목도하고 재빠르게 방향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의 여러 배들이 뒤쫓았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 추적을 중지하고 진주 땅 창신도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만일 이순신 함대가 당포항에 몰려 들어가 적의 수급을 취한다고 미적대고 있었으면 외곽에서 접근하는 왜선에게 기습당하여 위험에 빠질 뻔 한 상황이었다.
전투 전에 접근로를 봉쇄하고 전투 중에도 외곽에 탐방선을 내보내는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원칙준수 정신이 항시 승리, 불패의 요인이 된 것이다.
이순신은 소비포 군관 이영남李英男이 왜장의 배에서 구해 온 ‘억대’라는 우리 여자 포로를 통하여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억대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15일여 전에 적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으나 울산, 동래, 전라도라는 말은 우리말과 같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전라도’ 라는 말에서 왜군들이 전라도를 공략하려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 전라 좌수영 이순신 기동함대의 사천포-당포 해전 승리로 ‘나고야’ 사령부에서 히데요시의 수륙병진 추진계획은 남해 바다 초입부터 실패로 돌아갔다.
무기도 무기지만 군량이 더 문제였다.
일본군이 부산포에서 전쟁 물자를 수령하여, 곳곳에 의병이 출몰하는 조선 산악의 긴 소로 길을 지나고, 강을 건너 한성 이북으로 이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월 3일.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전라, 경상, 충청 삼남 지방에서 모여든 근왕군 5만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의 지휘를 받으며 용인까지 진격해 왔으나 광교산에서 ‘와키자와 야스하루’가 이끄는 1천 600명의 일군에게 대패하여 궤주하고 말았다.
이 중요한 패전의 결과 수도 탈환과, 북으로 진격하던 고니시군과 가토군의 배후 압박은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은 물론 전라도로 처들어 갔다.
그러나 광주목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천 5백이 이치전투에서 고바야카 다카가게가 이끄는 일본 제 6군에게 승리하고, 이순신이 한산도 전투에서 대승하여 다행히 삼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이 바다에서 연전연패 하자 원래 수군 출신이던 ‘와끼자까’를 남해로 내려 보낸다.
이에 “내가 이순신을 죽이겠다”고 기고만장한 와끼자까는 남해로 달려간다. 이순신과 와키자와는 바다와 육지에서 각각 승리를 기록하고 서로 모른 채 한산도 대 회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6월 3일 새벽에 이순신은 추도로 이동하여 근방의 섬을 수색 하였으나 왜적은 없었다. 날이 저물자 고성 땅 고둔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6월 4일 당포 앞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협선이 앞서 적선을 탐색하던 중 지방 병사 ‘강탁’이란 자가 달려와 말하기를 “2일 당포 접전 후 왜놈들은 죽은 왜군들의 목을 벤 후 한 곳에 모아 불태우고 육로를 따라갔으며, 그날 도망친 왜군의 배는 거제도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거제도 수색과 공격 계획을 장수들에게 숙지시킨 후 출발하고자 할 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과 협선, 포작선을 거느리고 군악을 울리며 나타났다.
계속되는 전투에 지쳐있던 전라 좌수영 함대는 기뻐서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억기 함대와 연합 함대를 구성한 이순신 함대는 사기충천하였고 전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이순신이 추도 수역에 머물면서 집중 탐색을 한 이유도 이억기 함대가 오는 길목을 지켜주고, 경상도에 처음 오는 함대가 익숙지 않은 해로에서 헤매다가 항해 사고가 나거나, 적에게 기습당하는 일이 발생치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남해의 다도해는 섬과 암초, 협수로가 많고 굴곡진 지형이 많아 안전 항해 위해 요인이 많았다. 특히 6, 7월경에는 안개가 자주 들어, 항시 바람과 조수가 변화무쌍하여 지리와 조수에 익숙하지 않으면 전투는 고사하고 항해하기조차 어려웠다.
이순신은 그동안 벌어졌던 해전의 전투 상황과 왜군의 전술 특성을 이억기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손수 그린 상세 해도도 제공해 주었다.
이억기와 더불어 왜적을 쳐부술 계획을 한창 의논하는 가운데 날이 저물었으므로 거제 땅 ‘칙량’ 앞바다로 가서 같이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6월 5일 아침 이순신 연합 함대는 거제도로 도망간 왜적을 찾아 출항 하였는데 안개가 심하게 들어 함대 이동이 어려웠다.
다도해, 섬 사이사이 협수로에서 사방이 안 보였다. 우리 배의 위치는 물론 항해 위험물의 위치를 미리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조류는 계속하여 흐르므로 물위에 그냥 정지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 하였고, 위치를 유지하며 그대로 항해해 가기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 순간에 심각한 해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담담히 명령 하였다.
“이 곳은 거제도가 근접한 협수로이므로 닻을 놓고 있으면 적에게 기습당하기 쉽다. 그 상태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우리가 불리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키가 잡히는 최저 빠르기로 노를 저어라.
우리의 움직임을 적이 알지 못하게 소리를 내지 말라. 협선은 가시거리만큼 선단을 앞서 나가며 계속 수심을 측정하여 보고하라.
다음 선두 판옥선은 각 열의 향도를 맡아 함미에 인도 줄을 길게 내고 뒷배들은 그 줄을 따라오며 함대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고 방현대를 준비하라.
각 오는 기함을 따르고 각 열은 향도를 철저히 따르라.
비상 투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동일하다.
수시로 각목을 던지고, 조류가 흐르는 역방향과 바람이 부는 역방향을 보고 선수를 잡되 강한 쪽에 맞추어 선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라.
평소 훈련한 대로 하면 된다”
갑판장과 항해장은 이리저리 갑판을 뛰어 다니며 일일이 군사들을 독려 하였다. 군사들은 복잡한 조함 명령을 즉시 이해하고 따랐다.
함대는 기함을 따라 숨을 죽이고, 조용히 노를 저으며, 단단히 키를 잡고, 선수-선미 조류의 흐름과 앞-뒷 돛대 바람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며, 엄숙하게 남해 다도해 6월의 변화무쌍한 안개 속을 계속 헤쳐 나갔다.
매우 위험하고 조심스러우나 어쩔 수 없는 무霧 중 항해가 무거운 침묵과 삼엄한 사주경계 속에 오시까지 이어졌다. 해가 올라오고 날이 뜨거워지자 안개는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해무 위로 점차 보이기 시작하는 섬 봉우리로 보아 함대의 위치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무중 항해 상황은 이상 없이 해제되었다. 이억기 함대는 처음 만나는 협수로에서 안개를 만나 오그라들었던 가슴을 펴고 크게 한숨을 쉬며 안도 하였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며 거제도 탐색에 다시 들어갈 때에 왜적에게 잡혔다가 도망쳐 나왔다는 거제도 백성 7~8명이 작은 배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반갑게 쫓아와 말하기를 “당포에서 도망친 왜적들이 당항포로 들어갔다”고 알려 왔다. 요긴한 정보였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노를 재촉하여 당항포 앞바다로 달려왔다.
주위를 살피니 멀리 남쪽 진해성 밖 들판에 기갑병 천여 명이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다. 군사를 보내 탐문해 보니 함안 군수 ‘유승인’이 기병 1천 1백 명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당항포 왜적을 치러 간다고 알려주었다.
당항포는 입구는 좁으나 만 안으로는 깊숙하고 충분히 넓었다. 함대가 숨기는 좋겠으나 도망가기는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탐색선을 보냈는데 곧 돌아 나오며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함대는 즉시 전투준비를 갖추고 종열진을 형성하며 당항포로 돌진해들어갔다. 만 밖의 적 기습과 만 안의 적 탈출을 막기 위해 판옥선 4척을 바다 어귀에 매복시켜 놓고 깊숙이 진격하여 만의 막다른 끝 ‘소소강’ 서쪽 기슭에 이르니 과연 검은 색을 칠한 왜선들이 있었는데 판옥선만한 큰 배가 9척, 중간 배 4척, 작은 배 14척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배는 3층 누각에 단청을 칠하고 검은 선체에 검은 깃발을 잔뜩 휘날리고 있었다. 왜 기동 함대였다.
이순신은 적선이 여기서는 달아나기 어렵겠구나, 사생결단 달려들겠구나 생각하며 거북선을 앞세워 종열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당항포 주막에 승복 차림을 한 남자 손님이 하룻밤을 묵었다. 주막의 주인 ‘월이’는 그 손님의 눈매가 유난히 날카롭고 행동거지가 날렵한 것이 아무리 보아도 수상하였다. 승복을 입기는 하였지만 스님 같지는 않았고 간간이 일본 억양이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때라 월이는 곧 그자가일본의 첩자임을 직감하였다. 그자가 취하여 잠들었을 때에 그의 등짐을 몰래 뒤져보니 놀랍게도 남해안의 지형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월이는 그 지도에서 고성 땅 당항포를 찾아보고, 당항만의 안쪽 끝지점인 ‘소소포’와 낮은 땅으로 이어진 반대편 작은 만인 ‘주도포’ 사이가 바다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 넣었다. 일본 첩자가 그린 해안 지도를 변조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그 변조된 지도를 가지고 몰래 숨어들었다. 반대편으로 공격해 나가기 좋아 보이는 당항포로 깊숙이 들어왔고, 이순신 연합 함대가 들이닥쳤을 때 왜군들은 반대편으로 나가는 바닷길이 없으므로 꼼짝없이 갇히게 된 것이다.
왜적들은 갑자기 나타나 돌격해 오는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고 놀라 급히 조총을 쏘아댔는데 탄환이 마치 싸락눈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왜선이 가까워지자 함대는 양쪽으로 갈라지며 학이 날개를 편 듯 왜선단을 포위 하였다.
후미의 ‘이억기’ 함대는 왜군이 모르게 미리 떨어져 나가 북쪽 해안 골짜기로 재빨리 들어가 숨었다.
거북선이 선두에서 돌격해 들어가 포를 쏘아 적의 큰 배를 먼저 공격하여 진형을 흩트려 놓았다. 이어서 판옥선이 줄줄이 따라 들어가 함포와 화살을 마치 폭풍처럼 천둥처럼 쏘아 붓고 돌아 나오고, 다음 판옥선이 돌진해 들어가고 하였다. 한참을 돌아가며 싸웠는데 갈수록 조선 수군이 우세하였다.
이때 썰물이 시작되어 이순신 함대가 조금씩 물러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왜 누각선이 돛을 달고 전진하여 나오고 다른 전선들이 그 누각선을 날개처럼 양 옆에서 호위하며 나왔다.
전투 중인데도 불구하고 돛을 올린 적의 모습을 본 이순신은 그들의 목적이 탈출에 있음을 알고 남쪽 기슭의 포위망을 조금 풀었다. 왜선들은 필사적으로 그쪽을 뚫고 나오려고 했다.
물러서는 이순신 함대를 주춤주춤 추격하며 탈출을 시도 하던 왜 선단이 이억기가 매복한 지점을 지나는 순간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이순신 함대는 함수를 순식간에 반대로 돌리고 진을 벌려 학익진을 만들며 달려들기 시작 하였다.
‘이상하다’라고 느낀 왜군이 주위를 돌아보니 북쪽 골짜기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의 판옥선과 협선들이 벌떼 같이 몰려나오며 역시 학이 날개를 편 듯 후미를 둥글게 포위해 왔다.
왜군은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교차 사격의 표적이 되었다.
왜군들이 당황하여 혼란이 일어난 사이 거북선이 돌진하여 층루선을 들이 받았다. 거북선의 흘수 귀신 머리는 층루선의 선수 옆구리를 어김없이 들이 받았고 ‘용두포’는 어김없이 선루를 날려 버렸다.
깨지고 불타는 배와 배를 탈출하는 왜군으로 바다는 온통 들끓었다.
수많은 왜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육지로 헤엄치고 조선 수군들은 육지까지 추격을 했는데 이때 흥양 고을 소속의 ‘손장수’라는 병졸이 왜적의 칼에 맞아 전사하였다. 임진년 조선 수군 첫 전사자였으며 칼에 맞아 전사한 유일한 경우였다.
조선 함대는 당항포의 왜 군선을 모두 깨트렸다.
화살에 맞아 죽은 왜적의 수는 부지기수였고 산으로 도망간 왜군은 매우 적었다. 이순신 함대는 왜선 1척을 슬며시 살려두고 만 입구로 물러 나왔다.
왜장이 탔던 큰 누각선에는 선수에 선실이 하나 있었는데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이 급히 쳐 올라가 수색 하였다. 선실은 극히 화려했으며 작은 궤짝 안에 문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왜군 3천 40여 명의〈분군기〉였고, 각자의 이름 아래 피를 발라 놓은 문서였다.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이순신은 분군기 6축 외 획득한 전리품인 갑주, 창, 칼, 활, 조총, 표범가죽, 말안장 등과 왜장의 수급을 행재소에 올려 보냈다.
6월 6일 새벽 이순신은 산으로 도망친 왜적들이 틀림없이 살려 놓은 배를 타고 탈출할 것이라 예상하고 방답 첨사 이순신을 바다 어귀로 보내 매복토록 하였다.
과연 이른 새벽, 왜선 한척이 소리 없이 바다 어귀로 나오므로 활을 쏘며 들이닥쳤다. 배에는 왜적들이 1백 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이순신의 배가 총통과 장-편전을 쏘며 달려들자 도망치려 하였다. 급히 쫓아가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기니 왜적들은 반이 넘게 물에 뛰어들었다.
왜선에는 화려한 복식을 한 젊고 건장한 왜장이 홀로 서서 칼을 잡고 남은 부하들을 지휘하며 싸우며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적이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태도는 훌륭하였다. 첨사가 활을 쏘아 맞추니 왜장은 10여대의 화살을 맞고 소리를 지르며 물로 떨어지므로 즉시 ‘사조묘’로 끌어올렸다. 적장은 아직 살아있었는데 단칼에 목을 베었다.
그날 오전 8시경 경상우수사 ‘원균’이 때 늦게 나타나 돌아다니며 물에 빠져 죽은 왜군들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는데 50여 개나 되었다.
원균은 이렇게 하여 모은 수급을 조정에 올려 보내며 “이순신과는 별도로 싸워 승첩을 거두었다”고 장계를 올리곤 했다.
당시는 전투에서 거둔 수급의 수에 따라 전과를 평가하던 시대였다.
원균의 편을 들었던 ‘윤두수’를 비롯한 서인파 대신들은 이 수급을 들고 “이순신은 원균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출정했고, 해전에서도 머뭇거리며 원균의 뒤만 따라 다녔다”고 3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모함한다.
이순신은 모든 전투에서 왜 병선을 깨트리는데 주력하고 왜군의 목을 베려고 덤비는 것을 경계 하였다. 적의 목을 베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지체 하다가 역습을 당하거나 칼에 맞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수군의 활에 맞아 죽은 왜적은 수 없이 많았지만 목을 벤 숫자는 항시 많지 않았으므로 이순신 함대는 획득한 전과에 비해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거나 극히 적었다.
이는 이순신이 항시 싸움에서 승리하고, 패하지 않은 요인 중에 하나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모함하는 대신들의 말만 듣고, 베어낸 목만 따지며, 후에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핑계로 삼게 된다.
이날 오후 바다에는 갑자기 구름이 짙게 끼고 비바람이 몰아쳐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파도가 높았다. 조선 함대는 당항포 앞바다에서 피항을 하였다.
악천후가 계속되어 심하게 요동치는 배들을 단속하느라 군사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순신은 비바람 들이치는 뜸 아래 홀로 앉아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비바람이 몰아쳐 뜸이 날아갔고, 파도가 몰아쳐 갑판 위를 넘나들며 배들을 흔들고 부수어대었다.
날씨는 밤새 으르렁 대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6월 7일 다행히 바다가 순해져 이순신 함대는 수색과 탐방을 계속하였다. 반면 원균은 계속 죽은 왜군을 찾아 목을 베고 돌아 다녔다. ‘가덕도’에 나가있던 전라좌수영 탐방선이 왜군 탐방선을 한척 만나 이를 격파했는데 원균의 군관이 갑자기 들이닥쳐 수급을 빼앗아 가는 일까지 있었다.
이순신은 몹시 분해하는 척후병들을 다독이며 술 한 잔을 같이 나누고 위로하였다.
정오. 이순신 함대가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큰 배 5척, 중간 배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동남풍 역풍이어서 쫓아가기 어려웠다.
조선 수군을 발견한 왜선은 짐짝을 모두 버리며 부산 쪽으로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이에 우후 ‘이몽구’는 바람 방향과 섬들의 상대 위치를 관찰한 후 다소 둔한 큰 배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바람은 북동, 저도猪島, 대죽도 등 섬은 북동쪽 풍상에 위치하여 있었고 왜 적선들은 동동남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몽구는 왜선의 후미에서 전선을 인솔하여 바람을 가로질러 멀어지는 듯 어긋나게 남동쪽 외해로 한참을 달려 나갔다.
왜선이 저도, 대죽도 바람 그늘을 벗어나며 역풍에 완전히 노출되어 힘겹게 노를 젓기 시작할 때 가버리듯 멀리 나간 이몽구는 좌현으로 크게 변침하여 우측 함미로 한껏 바람을 받으며 여유 있는 각도를 잡고 속력을 최대한 올려 적 선단에 달려들었다.
외해에 위치하고 바람을 잘 받아 양측 다 속력이 빨랐으므로 충돌 전법이 불가하였다. 조선 수군은 왜 적선에 접근하여 갈고리를 걸어 끌어 당겨 올라타고 백병전을 벌여 적들의 목을 베었다.
격파된 적선은 7척이었고 수급은 41개나 되었다. 나머지 왜적들은 모조리 물에 빠져 죽었다.
수색 중 조우한 적 선단을 뒤 늦은 위치에서 탁월한 범주 역량으로 역풍을 비켜 멀어지다가 순풍이 되는 각도를 잡고 쫓아가 깨고, 백병전으로 전멸시킨 장쾌한 승첩이었다. 군사들은 모두 매우 통쾌, 후련해 하였다.
계속하여 본대는 가덕, 천성, 부산 다대포 까지 진출하여 적의 무리를 수색 하였으나 적들은 흔적도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함대는 거제도 송진포로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6월 8~9일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를 수색 하였으나 적의 자취는 없었으며 ‘최원’ 병마사로부터 ‘한성의 왜군들이 한강을 타고 전라도를 침공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공문을 받았다.
6월 10일 이순신, 이억기, 원균은 진을 파하였다.
이순신은 ‘가덕 서쪽 수역을 마음대로 드나들던 적은 많은 배들이 분멸되고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부산으로 달아난 일부 왜적들이 우리 함대의 위세와 전황을 다 말했을 것이므로 지금부터 내지의 왜군들은 뒤가 걱정될 것입니다.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대로 부산으로 가서 적의 종자까지 없애버리고 싶었으나 연일 바다를 돌아다니며 적과 싸우고 악천후와 싸우느라 군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부상자들도 많이 생겼으며 전비 물자가 다 되어 지금 쳐들어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 되지 못하겠으므로 이억기와 상의하여 본영으로 돌아 왔습니다’라고 6월 14일자 <당포파왜병장>으로 장계하였다.
이순신 함대의 총 피해는 총탄에 의한 사망 10명, 부상 13명, 칼에 의한 사망 1명, 화살에 의한 사망 2명, 부상 21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날아오는 총알과 화살을 무릅쓰고 분전하다가 전사하거나 혹은 부상당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부상당한 사람은 충분히 치료하여 주고, 전사자는 따로 작은 배로 싣고 그의 고향에 가서 안장해 주었다.
난리를 피해 숨어 살던 백성들이 조선 수군의 승첩 소식을 듣고 모여들자 이순신은 그들에게 노획한 식량과 옷, 베 등을 나누어 주고 수영 가까운 곳에 모여 살게 하였다.
군사력이 강해지고 백성이 모여들자 이순신이 주둔한 여수 지역은 점차 이순신이 다스리는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갔다.
이순신은 해전에 임할 때는 철저한 준비와 사전 분석을 실시하여 싸움마다 승리하였고 전투 후에도 철저한 사후 평가를 실시하여 다음 전투에 반영하였다. 후방에서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체제를 관리 하였으며, 군사들의 후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조직의 활성화를 위하여 모두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하고, 항시 논공행상을 바르게 하였다. 비록 적의 목을 베지 않았더라도 죽을힘을 다하여 싸운 병사를 으뜸 공로자로 삼았다.
이순신 함대의 2차 귀항은 여수항을 또 다시 환호의 물결로 넘쳐나게 하였다.
이순신, 이억기 연합 함대가 남해 일대의 왜 수군을 여지없이 격파하였다는 승전 소식은 내지의 의병 봉기를 더욱 자극하였고 조정에도큰 힘이 되었다.〈계속〉
주장성
시인, 《한강문학》(22호, 2020)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희곡부문 신 인상 수상(23호, 2020) 해군사관학교졸업(1972), 해군 복무(1972-1993), 세한대학교 명예교수, 대한요트협회교육이사(1995), 요트스쿨운영, 한강문학극시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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