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재 신작소시집 * 「몸에서 몸으로」외 4편
몸에서 몸으로 | 한수재
여자의 몸에서 사람의 몸으로
퇴화와 진화 사이를 반복하는 동안
몸은 진짜 몸을 입기 시작했다
마음을 지나서야 보이는 몸이었을 때,
몸이 몸을 죽이느라,
몸에서 몸을 버리느라,
그렇게 몸과 떨어져 헛집을 짓느라
현기증이 일 때마다 온몸을 웅크리던
몸을 지나서야
몸이 들리고
몸이 보이고
몸이 읽히는
이 황홀과 절망,
냄새와 소리, 예민한 움직임
삶이였던 곳에서
기록되지 못한 사랑이 기억되는 곳,
이렇게 이지러져서야 쓰다듬게 되는,
마음보다 정직했던
육체,
나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볼 때마다
내 눈동자로 들어온 나를,
더는 가둬둘 수없는 나를,
몸에서 몸으로 옮기는 일은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옷
방해물이거나
훼방꾼이거나
속이는 자,
간사한 자,
이간하는 자,
밀고하는 자,
배신하는 자,
뒤가 구린 자 같은,
해서,
하나씩 벗어 보기로 한 것이
어느 새
그 하나 마저도 거추장스럽게 되어버렸다
부끄러움은 몸의 일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학대와 파괴의 흔적들이
더 이상 수치일 수 없는,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아픔과 마주 서 보는 일
그렇게 하나씩 옷을 벗어 보는 일이다
몸에게
-절정
그 순간은
죽고 싶다는 말이 딱 맞는 말입니다.
그대로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슬픔도
다른 말이 아닙니다.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원으로
몸에서 혼으로 혼에서 신으로
완벽한 공간에서 누리는 작은 죽음
삶의 불완전함이 편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가치 있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등과 털
손등에 털이 많이 난 남자를 보면
징그럽고 진화가 덜 됐다 생각하면서도
낯선 손등의 털에 괜히 흥분이 될 때는
발달이 덜 된 것들에,
성장이 멈춘 것들에,
기억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은 것들에,
오래된 역사가 궁금해지는 것들에
자꾸 마음을 쓰게 되는가 생각하다가
그런 것들로 뛰는 심장을 생각하다가
그 심장으로 살아가는 하루를 생각하다가
결국 순간순간의 긴장과 열망에서
다시 낯선 이의 손등을 만나게 된다
단순한 화학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몹쓸 병과도 같은 생의 진화
어딘가 아프고도 아픈 마음을 보는 것이다
젖무덤
선율로 치자면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2악장
딱 그 아래
눕고 싶은 것이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과 속도
그러면서도 빠짐없이
채워가는 부드러움
누군가가 보고 있는 듯이
시선을 따라 몸이 따라가고
몸을 따라 소리가 만들어지면
소리대로 눈을 감고 싶어지는
오래된 허기조차 잠재우는가 싶으면
무덤 같은 침묵으로 숨을 참아내는
가슴이 그 가슴이 맞는지
젖무덤이 그 무덤이 맞는지
종종
누군가 얼굴을 파묻고 울고 싶을 때
말없이 내어주고 싶은 무덤
내어주고 나도 울고 싶은 무덤이다
■시인의 에스프리
몸에 관한 짧은…
말[言]이 죽어버렸을 때, 그래 죽었다는 표현이 맞다. 말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묵음의 아우성조차도 죽음보다 무겁고 무섭게 나를 무너뜨리려 했다. 순간, 가장 먼저 나를 잡아주었던 몸, 육체. 본능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으로 숨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몸으로의 도피는 차선책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몸은 나를 응시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닿으면 만져지는 감각들의 안도감과 생생한 느낌이 삶의 본질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부끄러움은 몸의 일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학대와 파괴의 흔적들이
더 이상 수치일 수 없는,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아픔과 마주 서 보는 일
그렇게 하나씩 옷을 벗어 보는 일이다
-「옷」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아니 오히려 학대와 무시 속에서 그 기능과 아름다움이 제대로 마음과 소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나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은 몸의 절규가 처절하게 들린다. 비틀거리면서도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그럴수록 더욱 발현되는 몸의 집요한 에너지와 생명력에 놀라고 놀라울 뿐이다.
종종 끝으로 치닫는 몸과 몸의 전투를, 그 사투를 고스란히 느끼며 내가 뒹굴게 되는 몸의 도가니 속으로 쓰러진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절망과 외로움 사이에서 몸서리치는 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일 때에도 몸은 단순한 욕망과 욕정이 아니었다.
과소평가 되어온 몸에 비해 마음은 너무도 부풀려진 것 같다. 몸과 분리된 마음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들끓는 몸을 읽으면서도 서둘러 몸을 정리해두던 마음이 몸과 나를 속일 때마다 답답하고 갑갑했던 이유가 될 것이다.
몸이 들리고
몸이 보이고
몸이 읽히는
이 황홀과 절망,
냄새와 소리, 예민한 움직임
삶이였던 곳에서
기록되지 못한 사랑이 기억되는 곳,
이렇게 이지러져서야 쓰다듬게 되는,
마음보다 정직했던
육체,
-「몸에서 몸으로」중에서
몸은 그 어떤 고백보다 정직하며 그 어떤 말보다 깊고 따뜻하다. 또한 그 어떤 마술보다 신비롭고 기적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 어떤 약보다도 강한 치유와 위로의 통로임을 안다.
몸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몸을 한번쯤은 쓰다듬어봐야 한다. 손으로 눈으로 코로 구석구석 몸이 내게 전하는 소리에 솔직하게 반응해야 하며 숨거나 도망쳐서도 안 된다.
몸은 세상을 향한 또 다른 문이며, 언어이며, 생의 귀한 동반자이다.
발달이 덜 된 것들에,
성장이 멈춘 것들에,
기억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은 것들에,
오래된 역사가 궁금해지는 것들에,
자꾸 마음을 쓰게 되는가 생각하다가
그런 것들로 뛰는 심장을 생각하다가
그 심장으로 살아가는 하루를 생각하다가
결국 순간순간의 긴장과 열망에서
다시 낯선 이의 손등을 만나게 된다
-「손등과 털」중에서
길을 가다가도 작은 나무 가지나, 풀, 꽃, 나무의 몸을 손으로 쓸어보는 일, 빈 들판을 보면 그곳에 눕고 뒹굴고 그렇게 내 몸과 닿고 싶어지는 일.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그것들에 닿고, 만져보고 싶은 일은 비단 나만의 습관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사랑이거나 아니거나 느끼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나아가 몸과 닿고 싶어지는 끌림은 체온으로 읽고 쓰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통이다.
길들여 있으면서도 항상 낯선 것들에 대해 삶은 그런 애증의 마음을 덤으로 주었다. 자신의 몸과 대립해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몸과 사랑을 나눠보지 않고서는, 그 몸을 지나보지 않고서는, 무엇을 잉태한다는 것은 껍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몸의 일도 만만치 않다.
오늘은 옷을 다 벗고 환한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먼저 몸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 한수재 시인
▪2003년 《牛耳詩》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싶다가도』가 있음.
▪이메일 : jumimj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