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안양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다
삼성산의 안양사지와 삼막사를 찾아서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2018년 7월 7일(토) 아침, [관악역]에 모인 참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역명(驛名)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그 이름을 듣고는 서울의 관악산 아래에 새로 생긴 역인가 보다 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역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악산(冠岳山, 629m)은 서울시의 관악구•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시•과천시에 걸쳐 있는 산이며, 이곳이 안양시에 속하므로 ‘범(凡)관악산 자락’이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그리고 심지어 ‘관악산 둘레길’이 통과하는 구간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통념상의 관악산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관악역] 측은 스스로도 그것을 약간 민망하게 여겨졌던지 괄호 안에 수줍게 이명(異名)을 부기하였는데 바로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예술공원? 이 역시도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내가 그곳이 “예전의 안양유원지”라고 부연하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우리가 찾아갈 삼성천변에 ‘안양풀장’이 문을 연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이후 1960년대의 휴가철에 이르면 하루 4만명 이상의 피서객들이 찾아오곤 하던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였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유명했던 유원지들 중의 하나다. 50대 이상의 참가자들이 저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놀러왔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추억담을 늘어놓으니 때 아닌 웃음꽃이 피어난다.
신라 말기의 중초사와 고려 건국 직전의 안양사
[관악역]에서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인 ‘안양사지’까지는 1Km가 조금 넘는다. 한여름 오전의 뙤약볕을 담뿍 맞으며 한참을 걸으니 이내 ‘안양박물관’의 대문이 나타난다. 이 지역의 문화유적들은 최근 수년 간 급격한 변명(變名)과 변화를 이루어 차분히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무래도 가장 오래된 유적부터 시작하여 연대순으로 짚어나가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울 듯 하다.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맨 먼저 왼편에 등장하는 것이 중초사지 당간지주다. 당간지주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절의 입구에 불교용구인 당(幢, 주로 깃발이나 탱화의 형태를 가진다)을 걸기 위해 만들어놓은 지주대를 뜻한다. 이곳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특이하게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이는 국내에서 유일한 사례다. 명문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1년(826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827년) 2월에 완성했다고 하며, 공사의 지휘자와 석공들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혀있다. 즉 이곳은 통일신라 말기에 중초사가 들어서 있던 곳이다.
중초사가 이후 어떻게 쇠락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나말여초에 해당하는 900년경,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쇠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난립하여 이른바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던 그 즈음, 궁예의 부하로서 남쪽지방으로 정벌에 나섰던 왕건이 이곳 삼성산 자락을 지나올 때, 산모롱이에 오색구름이 영롱한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을 멈춘다. 그 오색구름이 피어나던 곳에서 만난 승려가 능정이다. 능정은 왕건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이 건강해질 것이다”라고 제안하고, 왕건은 쾌히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 연기설화를 바탕으로 세워졌다고 믿어지는 절이 바로 안양사다.
안양(安養)이란 불교적 개념의 용어다. 마음이 편안(安)하고 몸이 건강(養)하다면 그곳이 곧 서방세계, 즉 극락정토가 아니겠는가. 고려 건국 이전의 왕건이 변방의 승려(능정)를 만나 의기투합한 결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절을 세웠다는 스토리 역시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왕건은 900년에 안양사를 세운 이후 18년만인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태조에 오른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직도 ‘스토리’에 불과하다. 그 물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세웠다는 안양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시대를 다루고 있는 [도은집], [대각국사문집], [대동금석서], [고려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안양사와 관련된 기록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문제는 안양사의 실제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한 고증이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방문하게 될 ‘절터골’이 원래의 안양사가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물증을 제시할 수 없는 한 그 모든 주장들은 가설일 뿐이다
유특한과 김중업 그리고 안양사 명문기와
이후 현재의 안양사지는 단지 문헌상에만 존재할 뿐 세인의 관심에서 잊혀져 갔다. 이곳에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59년의 일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의 동생 유특한이 형의 사업체로부터 독립하여 유한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1953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1957년에 회사 이름을 ‘유유산업’으로 개칭하고 신사옥에 해당하는 안양공장의 설계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김중업에게 맡긴다. 김중업의 설계에 따라 건축된 유유산업 안양공장이 안양사지에 들어선 것이 1959년이다.
유특한과 김중업은 이렇게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훌륭한 인물들이다. 유특한은 그의 형 유일한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예외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제약회사였던 유유산업은 유비타, 비타엠, 비나폴로 등의 스테디셀러를 내놓으며 크게 성공하였고, 종업원지주제, 우리사주조합, 노동조합 등을 누구보다도 빨리 도입하여 이른바 ‘노사상생’의 모범을 일찌감치 선보였던 앞선 기업이다.
김중업은 한국 근현대 건축사의 산 증인이다. 일찍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세계적인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그는 귀국 후 삼일빌딩, 주한 프랑스대사관, 88올림픽 평화의 문 등의 걸작을 남겼으며 후학의 양성에도 많은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다만 박정희 정권 말기에 새마을운동이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등에 대하여 고언(苦言)을 내뱉은 업보로 추방당하여 거의 망명생활을 했던 까닭에 뼈아픈 공백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공백기를 틈 타 전면으로 떠오른 건축가가 바로 김수근이다. 그래서 이후 한국의 건축계는 김중업계와 김수근계로 크게 양분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유특한의 유유산업은 이곳에서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2006년, 공장을 충북 제천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다. 이 폐공장지를 구입한 것이 안양시다. 본래는 몇몇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간략한 리모델링을 한 후 시민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철거 도중 본의 아닌 발굴과정에서 놀라운 유물들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안양사’라는 한문이 명확하게 새겨진 명문기와를 출토하게 된 것이다. 문헌상에만 존재하던 안양사가 우리들의 눈앞에 현존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유유산업 폐공장지는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유유산업의 사무동이었던 건물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되었다. 유유산업의 생산동이었던 건물은 ‘안양박물관’이 되었다. 안양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2017년 9월 28일)이다. 공장부지는 발굴을 계속한 결과 금당지, 강당지, 설법당 등 옛 안양사의 속살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모두가 ‘안양사 명문기와’가 출토된 덕에 가능해진 일이다. 왕건이 안양사를 세운 900년 이전에는 ‘안양’이라는 지명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안양이라는 지명은 안양사에서 유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곳 안양사지에서 안양이 비롯된 것이다.
울리지 않는 마애종과 사라진 귀부
안양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 삼성산으로 올라붙는 등산로가 나 있는 곳에 마애종이 있다. 현재 넓직한 주차장이 들어선 곳의 뒤편으로서, 중초사지 당간지주와는 약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마애종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에 청아한 종소리가 울린다. 마애불을 찾아 전국의 산천들을 헤집고 다닌 지가 벌써 수년째인데, 부처나 승려가 아니라 종(鐘)을 새긴 마애작품은 이것이 유일하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서 아마도 안양사에 실존하였던 종을 바위에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방향을 틀어 현존하는 안양사를 향하여 올라간다. 이 역시 고려시대의 안양사(현재의 안양박물관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대웅전에서 어떤 스님이 불교도들을 배석시킨 채 독경 중인데, 경내 스피커의 음량을 너무 크게 설정해놓아 참가자들 모두가 미간을 찌푸린다. 이 소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다. 안양사가 남긴 몇 안되는 유물들 중의 하나, 안양사 귀부(龜趺, 거북의 등껍데기)를 보기 위해서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이 귀부 위에는 고려의 파워엘리트 김부식이 짓고 당대의 명필로 손꼽혔던 이원부가 쓴 비문의 비석이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언제 도난 내지 파괴 당하였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등 위의 비석을 잃고 쓸쓸히 남아있는 거북의 등껍데기를 어루만져볼 뿐이다. 본래의 안양사가 저 아래 그 본진(本陣)을 펼쳐놓고 있었음을 염두에 둘 때, 현존하는 이곳의 안양사는 아마도 그 부속건물들 중의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찌되었건 독경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우리는 바삐 발걸음을 옮긴다.
과거의 안양유원지가 현재의 안양예술공원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계기는 2005년에 개최된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다. 그 이후 안양시는 유원지에 난립하던 음식점들을 하나둘씩 철거시키는 대신 국내외 젊은 예술가들의 설치작품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이라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겠지만, 그 작품들 사이를 소요하며 삼성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에게는 즐거운 체험을 선사한다. 최근에 세워진 안양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오늘의 강사인 이수인 회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한문에 능한 그는 미발굴자료의 국역에 커다란 힘을 보태고 있는, 우리 인문산행팀의 보배다.
상불암과 영랑산성 그리고 아이스크림
현지 사람들이 ‘절터골’이라 부르는 계곡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은 이제 상불암을 향하여 나아간다. 상불암은 별다른 연혁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일반 사찰과는 사뭇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있는 특이한 암자다. 그 동안 여러 번 탐방했지만 매번 이곳을 지키는 스님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곳을 답사동선에 넣은 것은 영랑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상불암 앞에서 이수인 회원의 짤막한 설명이 이어진다.
영랑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대피용 입보산성으로 파악된다. 현재 우리가 흔히 ‘삼막사 위의 국기봉’이라 부르는 암봉 근처에 형성되어 있다. 사실 삼성산을 포함한 범관악산 지역에는 ‘국기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들이 너무 많다. 예전에 이 지역에 군부대들이 다수 주둔하였고, 덕분에 실제로 국기봉들이 존재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모든 봉우리들을 다 국기봉이라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다. 이 봉우리들마다 그에 걸맞는 고문헌 상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도 우리 인문산행이 해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봉우리에 어울리는 이름은 그러므로 영랑봉이다.
이수인은 상불암에 대하여 매우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출하였다. 바로 “영랑산성에 부속된 건물” 즉 일종의 성랑(城廊)이 아닐까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국기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매우 가파른 대신 호쾌한 전망을 보장한다. 오늘의 인문산행에서 가장 멋진 전망이다. 국기봉 정상(477m)에 오르니 뜻밖에도 아이스크림 장사가 있다. 오늘의 강사인 이수인 회원이 기꺼이 참가자들 모두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쏜다. 아이스크림으로 땀을 식히며 내려다보니 저 아래 삼막사가 들어앉은 자태가 더 없이 포근하고도 아름답다.
삼성산 삼막사에 남은 민간신앙의 흔적들
삼막사는 삼성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예로부터 한양 외곽의 4대 사찰을 꼽으라면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라고 했다. 그 연원을 찾아보면 저 아래의 안양사보다 훨씬 더 위로 올라간다. 영조 47년(1771년)에 작성된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때 원효, 의상, 윤필에 의해 창건된 절이며, 삼성산이라는 산명 역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는 것이다.
솔직히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사적기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삼성산이 범관악산 중에서도 비교적 유서 깊은 산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오죽하면 김장호가 [한국명산기]에서 ‘관악산’을 언급할 때 “역시 이 산은 삼성산 쪽에 더욱 그 깊이가 느껴진다”고 말했겠는가. 그리고 삼성산을 대표하는 사찰이 바로 여기 삼막사다. 사정이 그러한 만큼 삼막사에는 볼 것도 많다.
국기봉에서 내려와 삼막사로 접어들 때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칠보전이다. 산 능선의 바위에 덧대어 지은 이 보호각 안에는 서울 근교에서 보기 드문 마애삼존이 새겨져 있다. 본존은 치성광여래이고, 삼산관을 쓴 채 좌우로 협시한 것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니, 정통 불교신앙보다는 토속 칠성신앙에 가까운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칠성각’이라 부른다. 마애상 하단에 조성연대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건륭 28년이니 정조 39년 즉 1768년에 새긴 작품이다.
칠보전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 저 유명한 ‘삼막사 남녀근석’이 있다.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민간 기자신앙의 증거물이다. 당연히 칠보전 안의 마애상들보다 훨씬 이전부터 민초들의 사랑과 염원을 듬뿍 받았을 터이다. 여성 참가자들은 그 모습이 너무 적나라해 민망하다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어쩌면 삼막사 경내에 남아있는 그 숱한 문화유적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이 남녀근석일 것이다.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데도 참가자들은 삼막사를 떠날 줄 모른다. 지운영이 머물렀던 백련암지와 그가 쓴 전서 삼귀자(三龜字), 등곡대사가 머물렀던 등곡대, 이곳 출신의 승려 김윤후가 몽골의 살리타이를 죽인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삼층석탑, 맑은 날 인천 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에 가장 아름답다는 망해루 등 저마다 그윽한 사연을 한 아름씩 안고 있는 유적들이 우리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하산길에 들린 염불암에서는 송영철 회원과 류백현 회원이 꽃과 나무에 대한 짤막한 강의를 펼친다. 인생도처유상수, 정말 가는 곳마다 고수들을 만난다는 옛말이 무색하다. 이 하산길의 끝은 다시 안양예술공원, 곧 예전의 안양유원지다. 명칭이야 어찌 변하든 이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삼성산과 관악산 사이에서 발원한 삼성천이 삼막천을 합류시킨 다음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안양천은 성산대교 서쪽에서 한강으로 합류한다. 이제 저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어 발을 담가야할 때다.
월간 [사람과 산] 2018년 8월호
----------------------------------------------------------------------------------------------------
8월 인문산행 안내
노고산 독재동의 추사 암각문을 찾아서
1.일시 및 모임 : 2018년 8월 11일(둘째주 토) 오전 10시, 구파발역 1,2번 출구, 폭포공원 광장
2.주 제 :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산 행위 따라하기
3.코 스 : 고양시 삼하리-아름수목원-이수광묘소-독재동 추사필적암각문-삼하리(약3km)
4.예 약 : 한국산서회 카페 http://cafe.daum.net/peakbook
5.준비물 : 회비 1만원, 간단한 취사도구와 그늘막
첫댓글 후기 감사합니다.
후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도 감사합니다. 요즘 읽고 있어요. 점점 심산님 팬이 돼가는 중입니다.^^
후기가 아주 끝내줍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더운 날씨에 수고 많았습니다.
하이고 송영철님, 무슨 과찬의 말씀을...ㅎ
삼성산은 참 멋진 산입니다
이번 답사동선에서 빠진 '숨겨진 등산로'와 '숨겨진 계곡들'도 아주 좋습니다
저는 거의 반년째 이 '범관악산' 자락을 쏘다니는 중입니다....ㅎㅎㅎ
즐감합니다^^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문루 중 안양문이 생각납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참석 못 함이 아쉽지만 심 산님의 전문가 해설이 매우 유익하고 고맙습니다.
인문산행이 크게 흥하리라 믿으며, 선도하고 계신 회장단에 열열 박수 보냅니다.
하이고 심교수님! 고향 곡성에서는 편안하신지요?
언제 동리산 태안사에 들르기 위해서라도 곡성에 한번 놀러가겠습니다
나말려초에 구산선문들 중 하나가 들어설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곳이 바로 곡성이지요
참 좋은 곳을 고향으로 두셨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