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자의 행운
박미정
그날 밤, 모든 것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늦은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파트로 들어섰다. 복도에는 고요가 흘렀고,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엘리베이터 버턴을 누르고, 멍하니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딩동-"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손가락이 습관처럼 층수를 눌렀다.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축 처졌다. 집에 도착하면 씻고 바로 눕고 싶었다
아뿔사!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옷자락이 문틈에 끼었다. 반사적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을 갈랐다. "쿵-" 강한 충격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 몸이 내던져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의식이 깨어났을 때,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강가, 물살은 조용히 출렁이었고, 차가운 바람이 빰을 스쳤다. 물 위에는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배에는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공이 서 있었다. “마지막이야 어서 타“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 하지만 단호했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머뭇거릴 틈도 없이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사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흔들렸다. ”너는 안 되겠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나룻배 밖으로 밀어냈다. ”이대로 태웠다간 배가 가라앉겠어.“ 나는 졸지에 강가로 다시 내팽개져쳤다. 배는 조용히 떠났고, 혼자 어두운 강가에 남았다.
살찐 자의 행운인가. 다시 눈을 떴다.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 혈압이 다시 상승하고 있다.“ 차가운 병원 조명이 나를 비쳤다. 손등에는 링거바늘이 꽂혀 있었고, 팔에는 수혈바늘이 연결되어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과 아들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남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는데 왜 나는 다시 돌아온 걸까. 그때 퍼뜩 떠올랐다. 내 몸무게!
요단강 나룻배가 기울었고, 사공이 나를 태우지 못했다. 만약 내가 날씬했다면 아마 배는 떠났을 것이고,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순간, 살찐 몸에 대한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나는 다행히 살이 쪘다. 나는 다행히 배가 기울었다. 나는 다행히 이승에 남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몸이 점차 회복되었다. 담당의사는 말했다. ”운이 좋으셨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겁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운이었을까. 아니면 이 몸무게 덕분이었을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깨달았다. 삶이란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무게, 나이, 수명, 우리는 모든 것을 숫자로 계산하지만, 삶은 그보다 훨씬 무겁고 소중했다. 이 순간도 내 존재도 얼마나 아슬아슬한 기적 위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퇴원 할 때 의사는 체중을 줄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굳이 그럴 마음은 없었다. 만약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저승사자가 다시 나타나 이제 배가 기울지 않으니 어서 타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친구들은 가끔씩 저승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저승에서도 살찐 사람은 인기가 없더라.” 그 말에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지만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요단강 나룻배는 내 몸을 버거워했지만 정작 나는 내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종종 삶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간다. 어떤 것들은 당연한 듯 스쳐가고, 어떤 것들은 쉽게 포기해 버린다. 몸무게, 나이, 시간, 성공과 실패, 삶을 숫자로만 환산하며 계산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한 계산법으로 환산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숫자로 매길 수 없는 순간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 지나가는 바람, 식탁 위의 한 끼 식사, 무심코 나눈 미소, 그리고 사소한 대화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 나는 한 때 그 무게를 간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냄으로써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앉아 있다.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하나둘 수저를 든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드 결제를 한다. “이승의 밥값은 내가 쏜다.”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이승에 머물 자격을 다시 얻은 자로서, 내 몫의 삶을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 있는 한 함께 나누는 훈기와 순간들을 가벼히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아직 이곳에서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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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요단강 배가 기울어져서 저세상으로 못간건가요?
엘베에 옷이 끼여 큰일 났을 사고인데 전 왜 이리 웃음이~ ㅎㅎ
마른 사람보다 통통과가 장수한다는 어느 의학 리서치 결과를 읽었기에
저도 살 안빼려하거든요. 큰 사고 아니라 다행입니다.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재밌는 글은 고수의 글인데 ㅎㅎ
고수의 반열이십니다
부끄럽습니다. ㅎ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미소가 떠나지 않네요.
이 수필도 입체적으로 한번 낭송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확 밀려왔어요.^^
수필의 찐 맛 이군요.
박미정 선생님 수필 산정상에 머물면서 신선이 되소서.
더 할 말이 없네요, 재미의 끝판왕! 석류알처럼 품은 사유의 진정성까지요..
하정숙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아가다 선생님,
극찬이십니다.
뚜껍하오니 매 많이 때리소서! ㅎ
다음에는 더 큰 배가 기다릴지 모르니,
몸무게 더 늘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