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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松江 鄭澈) 묘·사당
충북진천군의 기념물 9호
조선 선조 대의 문신이며 시인인 정철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송강 정철선생의 자는 계함,호는 송강,본관은 영일이다.
1561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강원. 전라.함경의 3도 관찰사를 차례로 지낸 후에
좌의정에 올랐다.
사우는 정면 3칸,옆면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1665년 묘소를 이장한 후
창건하였으며,1979~1981년의 정화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송강사 정문앞에 있는 보호수
↓사당 올라가는길
↓사당뜰을 지키는 향나무
내일이 대설이라는데....
눈을 담은 하늘인지
보호수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무겁다.
늦은시간에 찾은 사당은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묘소는 둘러볼수 없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3때 친구들과 찾았던 그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잠시 오래전으로 돌아간 나의 기억은 너무나 멀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묘·사당·재실
송강 정철[중종 31년(1536)∼선조 26년(1593)].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출생이다.
증조부는 자숙(自淑), 조부는 위(潙), 돈녕부판관 유심(惟沈)의 아들이고,
외조부는 안팽수(安彭壽), 처부는 류강항(柳强項)이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과 친숙해졌다.
○ 10세 되던 해인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도중에 죽고 아버지는 유배당하였는데,
그도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 17세에 문화류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 명종 16년(1561)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 이어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다가
○ 31세에 이르러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가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 40세인 선조 8년(1575)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이어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
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와 강계로 이배되었다.
○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하다가 58세로 죽었다.
○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철신도비(鄭澈神道碑) 안내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31
조선 현종 4년(1665)에 세운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의 신도비이다.
선생은 기대승, 김인후 등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명종 17년(1562) 진사시와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을 거쳐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렸다. 붕당(朋黨)으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된 이후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거쳤다. 천부적인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지었다. 그 뒤 대사헌이 되었다가 고향에 돌아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수증(金壽增)이 전서하고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받침 위에 글을 새긴 비 몸을 올리고 그 위로 팔작지붕형태의 비 머리를 올린 형태이다.
선생의 묘소는 사당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정송강사(鄭松江祠) 안내문>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
이곳은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현종 6년(1665)에 송시열이 묘소를 이곳에 정하고,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묘를 이장하였으며 아울러 사당을 처음 세웠다. 1937년에 보수하고 1979~1981녕에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정철선생의 유품 등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사당 앞에는 「정송강비」가 있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명종 17년(156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대사간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서인의 거두로서 당쟁에 뛰어들어 파란곡절을 많이 겼었다. 시가에 능하여 「관동별곡」「사미인곡」등 《송강가사》와 많은 시조를 지어, 국문학사상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철(鄭澈) 묘 안내문>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14-1
이 무덤은 정철(鄭澈, 1536~1593) 선생과 부인 문화류씨를 합장한 묘소이다. 본래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신원동에 있었는데 현종 6년(1665)에 송시열이 지금의 자리를 정하고 이장하였다. 문인석·망주석과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 사당(송강사)에는 1968년에 학국어교육학회와 청주국어국문학회에서 세운 「송강시비」가 있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명종 17년(156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지평을 거쳐 벼슬이 승지에 이르러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강원도·전라도·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천부적인 문재를 동원하여 「관동별곡」등을 지었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공격으로 낙향하여 「사미인곡」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명종 22년(1589)에는 우의정이 되어 동인을 추방하고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나, 다시 동인의 공격으로 사직하고 만년을 보냈다. 죽은 후에 관직과 품계를 빼앗겼다가 광해군 1년(1609)에 신원되었고, 인조 1년(1623)에 복구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송강가사」를 남기는 등 국문학사상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진주사(將進酒辭)>
[가사내용]
『한잔(盞) 먹사이다 또 한잔 먹사이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사이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가사풀이]
술 한 잔 먹세그려, 꽃을 꺾어 셈하며 다함없이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졸라 메어 가나, 좋은 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 따라 가나, 억새와 속새와 떡갈나무와 백양 숲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에 회오리바람이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고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들이 휘파람을 불며 놀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출처] (진천)송강 정철(松江 鄭澈) 묘·사당·재실|작성자 개미실
<41> 송강 정철 사당·묘와 유배문학
세계일보 | 입력 2007.08.1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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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계일보에 '대한민국 통맥풍수'가 연재되면서 충청북도 경상남도 제주도만 빠졌다는
지적과 ▲충북지역에도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묘소와 유적이 많고, 특히 청주에 '기인풍수'가 있으니
취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묘와 사당을 답산하기로 약속한 날.
얄궂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전 국토는 속절없는 막바지 장맛비에 사정없이 난타당했다.
이른 아침 청주를 향해 떠난 고속버스 차창에 후두둑후두둑 굵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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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영정. 후손 5대의 사진을 모아 합성한 것이다. |
패철을 차고 남의 묘 자리를 뒤져보기 시작했다는 오암은 괴짜였다. 청주대학 법학과 졸업 후
팔자에도 없는 간척사업에 손댔다가 엄청난 재산 거덜낸 뒤 눈만 뜨면 산에 가 있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송강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 14-1 환희산 중턱에 안식하고 있다.
살아서 좋은 땅에 죽어 묻혔다 해서 나쁠 리 없고, 죽어서 좋다는 곳에 산 사람이 산다 하여
그를 것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시문청호송강정공철지묘'
'정경부인문화유씨부좌'라고 한자로 쓰인 묘비에 400여년 세월이 겹겹이 얹혀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87호다.
우덕순(50) 박법순(47) 회원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이 중 송씨는 사주명리에 밝은
여성풍수로 간산길마다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지회장이 나경을 꺼내 들었다.
용맥 아래 신좌(서에서 북으로 15도) 을향(동에서 남으로 15도)으로 용사했네요.
정동향에 가까우며 속기처(束氣處·만두)도 뚜렷합니다." 비가 내려 질퍽거리는데도 생룡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굴곡이 매우 급하게 드러난다. 혈처 위의 용맥이 굴절 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오면 사룡(死龍)이라 하여 정혈(定穴)을 않는 법이다. 오암의 판정에 동행인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청룡 분척(分脊)점에 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다행히 북현무가 중첩으로 둘러싸
혈장의 설기를 막으며 좌청룡을 밀어 줍니다. 대대로 아들 후손들의 벼슬이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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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의 환희산 중턱에 있는 송강 정철 묘. 우암 송시열이 사당과 함께 잡아 준 터로 또 다른 명당이 좌청룡 내룡맥에 있다. |
흙을 깊숙이 파 보라고 한다. 견고해 보이던 땅이 단숨에 꺼지며 쑥 들어간다.
인공으로 쌓아 올린 부토(浮土)인 것이다. 그러나 가운데 오목한 용맥의 지하 70cm 지점에서
윤기나는 마사토가 나온다.
비몽사몽간의 대화로 점지 받는 곳이 제일이지요.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인데 사람도 살아서는
양기운을 받지만 죽어서는 음기운으로 환원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풍수는 감(感)입니다."
미쳤을 때는 오래 묵은 무연고 묘를 파고 유골과 함께 누워 천지간 운기 이동을 감지했다고 한다.
기가 안 좋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떠밀려 쫓겨나기도 했고, 물길이 좋고 바람이
온화한 곳에서는 마음이 편안해 누런 인골과 단잠을 잤다는 얘기를 지나치듯 한다.
이 지회장이 왜 '기인풍수'라 했는지를 비로소 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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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사 앞에 선 충북지회 회원들. 왼쪽부터 이정훈 선생, 이상돈 지회장, 박문서씨, 송미옥씨. |
(서에서 남으로 37.5도)→정미(서에서 남으로 72.5도) 방향으로 각(角)을 이루며 내려오다
용맥이 멈춘 곳에 올라선다. 나경을 놓고 꼼꼼히 살피면 활처럼 굽어지며 감아 도는
내청룡 자락이다. 만궁형으로 120도 이상을 번신하며 만두를 형성하는 자리가 바로
천룡(賤龍) 혈처로 형제 간에도 양보 않는 자리라 하지 않던가.
우암이 누구라고 아무데나 택지했겠어요. 아마도 당판 아래 큰 자리는 먼 후손들의 끊임없는
발복을 위해 남겨둔 자리 같습니다."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 우암이 주선하여 이곳 진천 땅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로부터 충북지역에 연일 정씨 세거(世居)가 형성되며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처마를 당겨 짓고 화강암으로 이어지는 뒤편 진혈맥(眞穴脈·응기석)을 우측으로 치우쳐
놓았어요. 땅의 솟음(突)과 꺼짐(陷)을 절묘하게 활용한 안목입니다."
물길을 살펴보잔다. 얼핏 당문파(일직선으로 빠져 나가는 물길)인 듯싶으나 좌우의
산자락이 지(之)자로 겹쳐 파구가 안 보인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팔짱을 엇비껴 안은 듯
유정하기 이를 데 없다. 활짝 웃는 송강의 영정이 낯설어 김씨에게 물으니
"송강 후손 5대의 사진을 컴퓨터로 합성해 문중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먼 선조의 모습을 알 길 없을 땐 기발한 착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송강기념관 건너편에 '사미인곡'을 옛 글로 적은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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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뒤 산신석에서 본 내룡맥. 양 옆은 부토이나 중앙 혈맥이 뚜렷하다. |
운무로 인해 식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는 그의 기구한
팔자와 인생역정을 반추했다.
대사헌(검찰총장) 좌의정(부총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당대의 뛰어난 정객이었다.
한 사람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인생은 결코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주변여건이
생사고비로 다가오는가 하면, 고난에 찬 좌절의 귀양살이가 한 나라의 가사문학에
금자탑을 쌓는 역사적 성과로 반전되기도 한다.
(성종의 아들 계성군 양자) 부인이어서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덕분에 후일 명종(제13대)으로
등극하는 경원대군(문정왕후 아들)과 벗이 되어 부러움 속에 자랐다.
가문의 융성일 줄 알았던 왕실과의 혈연이 몰락으로 급전되고 만다. 친구였던 경원대군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 매형 계림군은 거열형(車裂刑)으로
참혹하게 찢겨 죽고 형은 곤장 맞아 세상을 뜨고 만다. 어린 송강은 유배길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10년을 살았다. 새옹지마라 할까. 송강은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당대 석학을 만나 학문의 깊이를 천착(穿鑿)하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도 교유하여
인적기반을 넓힌다. 결국 이것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된다.
탄핵으로 파직, 복직, 귀양살이를 여러 차례 거듭하기도 했다. 호방하고 숨김없는
성품에다 과한 술이 병이었고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임금에게까지 미움을 사 관직을
내놓고 낙향을 네 번이나 했다.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개인의 불행이 국가적 유산으로 남아지는 전화위복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 같은 유배문학의 자취는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서계 박세당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 비하하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단가 등이 주로
낙향과 귀양살이 시절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살아 거목이 되어 도 보호수로 잘 자라고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 그러데 사진이 사라져 아쉽네요 .
다른 자료로 다시 꾸몄답니다! 삭제된 사진은 번거럽지만 출처에 크릭하시면 볼 수 있을겁니다!
선생은 영일정씨이지만 (감무공파)로 포은선생의 (지주사공파)와 다르다고 합니다..
선생의 주옥같은작품으로 인해 우리 한글을 아름다움을 깊히 이해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신 분입니다.
포은선생의 형양공 시조의 윗 대의 문헌이 없어서 같은 집안임을 입증할 만할 자료가 없어 아쉽지만
감무공파 역시 지주사공파 몹지 않게 명문의 가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