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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뱃넘들 발바닥에 흙 묻으면 탈(사고) 난다’는 말이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사방팔방이 물 뿐인, 그나마 늘 출렁이는 바닥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태풍이라도 겪고 난 뒤, 땅위에 오르면 심신(心身)이 헷가닥 하는 수가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낯선 외국 땅에서 정박 기간이 길고 더구나 이탈리아처럼 항구가 자유로와 관세구역에 대한 경계가 없으면 정신적으로도 해이해진다. 적당하게 3~4일 정도 머물다 훌쩍 다시 떠나야 모두가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안정이 된다. 흔들려도 그것이 일상의 장(場)이기 때문이다.
1977년 6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항(港)에 입항 중일 때도 그랬다. 생각하지 않았던 부두 노동자들의 잦은 파업 탓으로 인해 체선(滯船)기간이 길어지자 선내(船內)의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따라서 책임자로서의 부담은 무거워진다. 뿐만 아니고 선주(船主)나 용선자(傭船者)도 다음 일정 때문에 안달이 나서 텔렉스가 잦아진다.
그러나 모처럼의 유명한 이탈리아인지라 좋은 점도 있었다. 거리야 좀 멀지만 무박3일(無泊3日), 즉 호텔에 머무는 일 없이 3일이면 역사적인 로마(Roma)와 4시간이면 베네치아(베니스)를 다녀올 수 있는 여건이었기에 “옳거니!” 하고 작정은 했지만 선뜻 실행을 못하고 있었던 일이다.
지금이야 유럽의 어디라도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지만 47년 전인 당시로선 꿈도 꾸지 못할 때, 꿈에 그리던 곳을 갈 수 있었기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혼자가 편할 것 같기도 한데 기관장(機關長) 영감이 따라 나선다. 저녁 10시25분발 Roma행 급행열차. 일등석을 택했다. 아무래도 장거리엔 자리가 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20,600Lire(한화 약 11,400원)이었다.
보름을 며칠 앞두었는가 달이 유난히 밝았다. 객차의 모양이 많은 영화에서 많이 보았듯이 통로가 가운에 있는 우리완 달라 한쪽은 통로가 차지하고 다른 쪽에 4인용 객실이 마련되어 바깥 풍경도 한쪽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가급적 잠을 자두기로 했다. 어디를 어떻게 달리는지도 몰랐다. 다만 잠결에 열차가 덜커덩거리기에 깨보니 열차가 앞으로 혹은 뒤로 달리기도 한다. 아마 중간역에서 객차만 떼서 다른 열차에 연결해 가는 듯도 했다.
마침 같은 칸에 유고슬라비아인 선원 한 사람이 동승했다. 지리적으로 유고 남부사람들이 출입하기엔 이 항구가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짐작이 간다.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했으나 술 한 병을 꺼내더니 같이 나팔을 불잔다. 포도준가 했더니 알콜 43%의 독주(毒酒)다. 첫 한 모금에 목이 콱 막힌다. 그 녀석은 안주도 없이 몇 모금을 마신다. 아마도 술 덕분에 지루한 시간을 잠으로 이겨보자는 심사인 듯 했다. 더 권하지만 마실 수가 없다.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무리다.
다음날 새벽 5시 날이 샌다. 조용한 농촌의 들판을 지난다. 넓은 목초 재배지엔 Sprinkler가 무지개를 그리며 살수(撒水)를 하고 있다. 가끔씩 산꼭대기에는 이탈리아식 옛성터가 보인다. 포도원이나 과수원에는 닭을 치고 염소를 키운다. 가정에서 짐승을 치는 우리의 농촌과 다른 점이다. 논농사는 거의 없다. 옥수수, 밀 그리고 목초 등이다.
07시경 열차 안에서 미리 준비해 간 삶은 달걀과 빵, 콜라 등으로 아침을 떼웠다. 08시20분 로마역에 도착한다. 유럽의 역사적인 나라 수도의 중앙역이라 그런지 긴장으로 쿵쾅거리는 내 가슴처럼 분주했다. 1~17번까지의 프렛폼(platform)에는 오가는 열차와 승객들로 붐빈다. 전부가 전동차다. 디젤기관차는 보이지 않는다. 역시 개찰구나 출찰구가 없이 자유로운 내왕이다. 역에서 안내 책자를 샀다.
일본 관광객이 찍어 보내준 사진 1
바로 택시로 Vatican City로 향했다. 역 광장에 나서면서부터 거대한 성터가 보이더니 군데군데 유적 같은 곳이 많이 뵌다. St. Peter(성 베드로) 광장을 들어서면서부터 그 웅장함에 절로 탄복이 터진다. 유명한 천재건축가 Gian Lorenzo Bernini(존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 광장. 284개의 도리아식 원형기둥과 88본의 각주(角柱)로 구성, 1656년에 시작 1667년에 완성했단다. 기둥 위에 96명의 성자(聖者), 순교자들의 높이 3.2m의 대리석상이 줄지어져 있다. 이들 상은 대부분 Bernini가 디자인하고 그의 문하생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주성당(主聖堂)인 St. Peter 대사원의 Cupola(돔 : 둥근지붕)는 유명한 미켈란제로의 작품이다. 우측의 로마 법왕청을 보면서 대사원에 들어섰다.
현재의 대성당은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324-349) 세운 Basilica(바시리카 양식의 교회당)와 대체한 것으로 재건시 최초의 토대석은 1506년 4월, 코리우스2세 법왕의 축복으로 시작, 수많은 건축가들이 동원, 1626년 9월 18일 바루봐노 8세 법왕의 임기 중에 높이 141.5m. 표면면적 150평방미터의 위풍당당한 대성당이 120년만에 완성되었다고 안내서에 나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훈훈한 향내와 함께 엄숙함이 꽉찼다. 우측부터 돌았다. Michelangelo(미케란제로) 작품인 La Pieta(피에타)의 조각은 실로 감명 깊은 것이기도 했다. 흰 대리석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만든, 돌로 깎은 천이 마치 저절로 구겨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추기경 데이 라구라우스가 자신의 묘에 쓸려고 1498년에 미켈란제로에게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그가 25세 때의 작품이란다. 역시 그의 천재성을 증명한다.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젊은 예수를 무릎 위에 놓고 슬픔을 참고 있는 조용한 표정을 한참 보았다. 예수의 손등과 발등에는 십자가에서 박혔던 못 자국까지 파여 조각되어 있다.
Pieta 조각상
수많은 제단(祭壇)과 그 밑에 안치한 성자들의 시체모형, 조각, 천장의 벽화들, 바닥의 대리석 무늬, 어느 한구석을 그냥 남겨 둔 곳이 없다. 마침 주성당에서 미사가 올려지고 있었다. 붉은 천에 붉은 모자를 쓴 신부(神父)들이 경건하게 단상에서 집전(執典)을 한다. 양쪽에서는 따로 합창단이 있어 한 지휘자에 따라 은은한 Pipe Organ 소리와 함께 성가(聖歌)가 퍼진다.
종교를 갖지 않은 내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두 손이 맞잡아지는 것을 보면, 왜 성당, 교회, 사찰 등이 그렇게 웅장하고 복잡하고 요란스럽게 장식하는가를 짐작하게 했다.
많은 교황들과 성직자들이 영원히 잠들고 있고,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신자(信者)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는 지하실. 그리고 역시 미켈란제로의 작품이라는 직경 42m의 원형지붕(돔)에도 올라갔다. 아무런 기둥 없이 그 원형 벽면을 따라 한 사람이 겨우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은 250여 개다. 돌계단이 사람들의 발자국에 닳아 움푹 패인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르내렸는가를 짐작한다. 벽을 따라 뱅글뱅글 돌면서 올라가는 것이 다소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한국 사람의 이름도 두어 개 보였다. 내 이름 석자도 적어두고 싶었으나 차마 이 경건한 자리를 더럽히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 원형계단은 사용이 금지되고 엘리베이터 장치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다. 그 원형지붕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로마시내 또한 장관이다. 각 성당마다 붙은 커다란 벽화와 대리석 조각은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좀 더 많은 설명을 듣고 읽을 수 있었다면….. .
부설 기념품점에는 수녀들의 작품인가 우리 한국 수녀자매들의 수놓은 병풍과 동양화 자수가 몇 폭 걸려있다. 여기서 산 작은 Pieta(피에타) 조각상은 지금도 내 서재(書齋)에서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티모시 C. 와인가드(Timothy C. Winegard) 의 저서, <모기> 에 이런 얘기가 있다고 한다.
「기독교가 갓 태동하여 주류 종교로 거듭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기독교는 로마의 지배 받았고, 다신교의 영향하에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중심 사상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이 역시 '모기'가 원인이었다. 로마의 세력이 동쪽 바티칸까지 퍼져 나가면서, 바티칸의 모기가 '동쪽의 전염병'을 서쪽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바티칸이라는 이름 자체는 '늪지대' 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늪지대는 모기들의 주 서식지이고 말라리아 병원균을 잔뜩 잉태하고 있었다. 전염병은 로마의 세력을 위협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격리되어 타락의 길로 더욱 빠져들었다. 민중들은 더 소외되고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이를 껴안은 것이 기독교였던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 신자들은 종교와 성경의 권위로 대중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았다. 위안, 보살핌, 구원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내밀었는데, 대표적인 실천으로 병원의 설립이 있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대중들로부터 '치유의 종교'로 불리게 된다.」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사실 여부가 궁금해서 책을 구하려 했더니 절판이라 새로 주문해 두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바디칸시티에서 곧 이어져 있는 Castel San't Angelo(聖天使의 城)의 음침하면서도 견고한 구조. 그리고 전시된 칼, 갑옷, 총들의 무기 유물전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리라. 135년에서 39년에 걸쳐 지었으니 큰 1800년의 역사가 엉켜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성으로서, 정적(政敵)을 가둔 감옥으로서, 또한 침략을 받을 시엔 피난처로서 쓰여져 왔다는 이성의 이름은 성 꼭대기에 있는 천사가 두 날개를 편 체 칼을 칼집에 꽂고 있는 상(像)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로마에 페스트병이 창궐했을 때 크레코리오대 법왕의 꿈에 한 사람의 천사가 성의 꼭대기에 서서 칼을 꽂으며 ‘이제 화가 끝났오’라고 한 것을 보았다는 종교적인 전설에서 불리워지고 있다고 한다. 겨우 두 곳을 마쳤는데 12시가 넘었다. 갈 길은 바쁘고 볼 것을 많고….
동행한 기관장 영감님은 지루한가 보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한낮인데도 아가씨를 찾는다. 간단했다. 군데군데서 볼 수 있는 안내자 비슷한 사람에게 ‘흘레’하는 시늉을 해 보이니 단번에 알아차리고 알려준다. 말이란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형식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보내버렸다. 홀가분했다.
Pizza Venezia에서(일본 관광객이 찍어 준 것 2)
안내서에서 처음으로 로마의 역사를 읽었다. Pizza Venezia를 중심으로 한 Roman Forum의 남은 돌기둥과 그 자취들!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영화에서 본 노예 검투사들이 등장했던 Colosseum(콜로세움)의 웅장함에는 쉬이 발길이 돌아서지질 않는다. 딩구는 한덩이의 대리석에도 비록 풍우에 씻겨 닳았으나 정교한 조각이 남아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조각을 곧 생활화한 듯도 싶다. 또한 그들의 전설 속에서도 항상 인간이 주역을 했던가 모든 조각과 그림은 사람을 위주로 했다. 흰 대리석을 쪼아 만든 여신들의 상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팽팽한 탄력을 보인다.
옛날 귀여운 소녀가 목마른 병사에게 샘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서 ‘처녀의 샘’이라 불리는 Trevi의 힘찬 물줄기와 맑은 물. 모인 사람들이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이 있다. 그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찾게 된다는 전설에 따라 많은 동전이 물 속에 잠겨있다. 저 맑은 물은 BC19년 전에 아그립파가 로마의 교외에서 끌어들인 것으로 수도관의 길이가 20Km에 이른단다.
여행사 시절에 찾은 트레비샘
아릿다운 정복(正服)에 날씬한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안내 아가씨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다니는 단체관광객과는 달리 혼자서 안내 책자를 보고 읽어가며 하자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일본관광객팀이 많이 보였다. 일본의 해외관광이 개방된지 얼마되지 않아 해외여행과 기념품 가게의 ‘싹쓸이’가 붐이 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우스게 소리가 있었다. 그렇게 해외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관광객에게 기자가 뭘 보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가이드 아가씨의 깃발만 봤다.”고 했단다.
1950년대 말경인가 우리나라 수도대여자사범대(현재 세종대) 김찬삼 교수가 오트바이로 세계를 무전여행을 한 기행문집을 본 적이 있다. 존경스럽고 감동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여행은 남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러야 자기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로마의 상징으로 되어있다는 She-wolf상(늑대동상)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인상이 깊다. 로마의 건설자로서 쌍둥이(Romulus와 Remus)가 늑대에게 양육되어 최초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쌍둥이를 젖먹이는 늑대의 이미지는 고대부터 로마의 상징이었으며 고대 신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이콘 중 하나이기도 하단다.
She-wolf상
역사책은 사건을 기술하는 것인가? 사건들의 패턴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사학(史學)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시간적인 계기로 배치해서 그것들 사이에 있는 궤적, 인간의 동선(動線)들을 알게 해 주는 것’이라고 어떤 철학자는 말했다. 수많은 로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 올릴 수밖에 없는 나에겐 역사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선뜻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현재가 역사의 끄트머리이자 시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궤적을 그려볼 수는 있는 듯도 했다.
마침 일본 관광객 틈에 끼어 잠시 해설을 듣다가 인사를 나누게 된 중년 아저씨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고 일본 선주(船主) 회사로 우송해주기를 부탁했다. ‘설마…’ 하며 잊고 있었는데, 사진 2장이 수 개월을 지나 선주를 통해 받았다. 역시 그들의 신의와 정성이 감명 깊은 추억이다.
각 박물관, 미술관의 소장품들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 밤 10시15분 로마발 급행열차로 다시 귀선(歸船) 길에 올랐다. 쉬이 잠이 들지 않은 체 낮에 본 그 아름다운 조각들에 미련이 남음을 느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대의 조각, 철사나 구리조각으로 뜯어 붙인 의미 모를 것들 보담 얼마나 생동감이 있고 정교한 것인지.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로마여! 다시 한 번 기회가 있으면 며칠 머물면서 알뜰히 살펴주마’. 그렇게 빌며 무려 100리라짜리 동전을 등을 뒤로 하고 그 Trevi샘에 던져 넣었으니 꼭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것이다’.
후일담 ; 그로부터 20년 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한 해외여행사 경영자로서 고객들을 안내하여 로마를 몇 차례 더 찾았을 때는 장소와 모습은 그래로였는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땐 들어가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던 곳이 ‘출입불가’로 된 곳들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과 마음과는 달리 지정된 코스 이외는 가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기도 했다.
첫댓글 좋은 기행문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니 로마의 찬란한 문화재를 관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늘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외분 늘 건강하세요. 부산넘
다섯점의 이미지 앞에서 한참을 서성입니다.
아~ 나도 늑점이님처럼 로마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50대 가장 좋은 나이에 여친들과 로마 곳곳을 누볐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아시다시피 대단하지요.
신화와 건축, 문학. 세계의 역사까지.
장암은 바다속을 누볐기에 노년에 함께 유럽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결국 못 가서 여한이 되었습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태어난김에 세계일주>.....등등
TV에서 눈요기만 합니다요.ㅠㅠ
늑점이님의 젊은 날의 삶속에서 바람새가 노년을 웃음짓게 해 주시네요.
<덕분에>란 명구(名句)를 바칩니다.^^
요즘 <걸어서 세계속으로> <태어난김에 세계일주> 등은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닌감요?
자신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 중요한 뭣이 빠진 것 같데요.
진짜로 <덕분에>가 명구네요. 감사함다.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