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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생`사`후[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
1. 단종의 탄생. (세종23년, 1441년 7월23일)
2. 어머니 현덕왕후 승하(왕세자빈 권씨) (세종23년,1441년 7월 24일)
3. 할아버지 세종대왕, 손자 이홍위(훗날 단종)를 왕세손에 책봉(세종30년, 1448년 4월 3일)
4. 할아버지 세종대왕 승하 (세종32년, 1450년 2월 17일)
5. 아버지 문종, 왕위에 오르다.(문종 즉위년, 1450년 2월 23일)
6. 아버지 문종 승하(문종2년, 1452년 5월 14일)
7. 노산군(魯山君) 이홍위, 왕위에 오르다(단종 즉위년, 1452년 5월 18일)
8. 수양대군, 김종서를 척살하다(단종1년, 1453계유년 10월 10일. *계유정란)
9. 송씨(宋氏)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다(단종2년, 1454년 1월 25일)
10. 노산군이 세조(수양대군)에게 선위하다. 수양대군,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다.(세조1년, 1455년 윤6월 11일)
11. 상왕 노산군, 경복궁(景福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다(세조1년, 1455년 윤6월 20일)
12.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세조2년, 1456 병자년 6월 2일)
13.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세조2년, 1456 병자년 6월 8일)
14. 판돈녕부사 송현수 등의 반역으로 상왕을 강봉하고 영월에 거주시키다(세조3년, 1457 정축년 6월 21일)
15. 영월로 떠나는 노산군을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다 (세조3년, 1457년 6월 22일)
16. 경상도 관노 이동이 금성 대군의 모반을 아뢰다(세조3년, 1457년 6월 27일)
17. 금성 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세조3년, 1457년 10월 9일)
18. 이유(李瑜)는 사사(賜死)하고,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라. (세조3년, 1457 정축년 10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19. 1457년 10월 24일, 노산군이 영월에서 승하하니, 나이 17세였다[장릉지]
20. 순흥부사 이보흠을 교살하다(세조3년, 1457년 10월 27일)
21. 노산군, 종친에서 삭제하다(세조3년, 1457년 11월 18일)
22. [장릉사보]중종16년, 1521년 6월4일. 노산군부인 송씨가 승하하시니, 나이 82세였다.
23. 노산 부인 송씨의 상사의 의거할 예에 관해 전교하다 (중종16년(1521년 6월 5일)
24. 노산 부인 송씨의 상례는 대군 부인의 예에 의해 하도록 하다 (중종16년, 1521년 6월 6일)
25.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중종11년, 1516년 12월 10일)
26. 승지를 보내 노산군 묘에 치제(致祭)를 명하다(중종35년, 1540년 8월 5일)
27. [단종실록 부록]숙종 7년 노산 대군으로 추봉하다(숙종7년, 1681년 7월)
28.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숙종24년, 1698년 9월 30일)
29. 노산군의 추복을 청한 신규의 상소에 대해 널리 의견을 묻기로 하다 (숙종24년, 1698년 10월 20일)
30. 종친과 문무 백관을 대정에 모아 노산군과 신비의 위호를 추복하는 일을 논의하다
(숙종24년, 1698년 10월 23일) ~회의에 참석한 백관(百官)이 무릇 4백 91인이었는데,
~백관(百官)들 각자가 글로 올린 것을 모두 봉(封)하여 바쳤다.
31. 비망기를 내려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하다(숙종24년, 1698년 10월 24일)
32. 여러 대신을 인견하여 노산군의 복위 의절을 논의하다. (숙종24년, 1698년 10월 29일)~후릉(厚陵)의 예에 의하다.
33. 노산군과 부인의 시호를 추상하다(숙종24년, 1698년 11월 6일)
34.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신위를 창경궁 시민당으로 옮기다 (숙종24년, 1698년 11월 21일)
35. 신주판(神主版)을 같은 함[櫝]에 넣어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에 매안키로 하다 (숙종24년, 1698년 12월 16일)
36.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청시례를 행하고 시민당에 안치하다(숙종24년, 1698년 12월 22일)
37. 단종 대왕의 신실을 서익실 제4실로 정하다(숙종24년, 1698년 12월 24일)
영녕전 신위
영녕전에는 중앙의 각 신실에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협실(西夾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東夾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34위 신주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38.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구주에 시호를 올리는 예를 행하다 (숙종24년, 1698년, 12월 25일)
39.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숙종25년, 1699년 2월 10일)
40. 사릉(思陵)을 봉(封)하였다(숙종25년, 1699년 2월 20일)
41. 장릉(莊陵)을 봉(封)하였다.(숙종25년, 1699년 3월 1일)
1. 단종의 탄생
세종23년, 1441년 7월23일 동궁(東宮) 자선당(資善堂)에서 출생
아버지는 문종,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
*조선왕조실록 세종 93권,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7월 23일(정사) 1번째기사 -왕세자빈 권씨가 원손을 낳아 대사면령을 내리다.
왕세자빈(王世子嬪) 권씨(權氏)가 동궁(東宮) 자선당(資善堂)에서 원손(元孫)을 낳아 도승지 조서강(趙瑞康) 등이 진하(陳賀)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연령이 이미 장년이 되었는데도, 후사(後嗣)가 없어서 내가 매우 염려하였다. 이제 적손(嫡孫)이 생겼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없다.” 하였다.
영의정 황희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이상을 영솔하고 진하(陳賀)하였으니, 사례(私禮)이었다.
임금이 의정부에 이르기를,
“이제 원손이 생겼으니, 중국(中國)으로 본다면 즉시 대사(大赦)를 행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사(赦)라는 것은 군자(君子)에게 불행이요, 소인(小人)에게는 다행이 되는 고로, 내가 오랫동안 행하지 아니하였다.
내 마음에는, 오늘의 일은 비록 경사(慶事)라고는 하지만 원자(元子)의 예(例)가 아니므로, 우선 근년에 수인(囚人)을 방사(放赦)한 예(例)에 의하여, 유(流) 이하의 이미 결정(結正)하였거나 결정하지 못한 죄를 석방할까 하는데,
도승지 조서강은 말하기를,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황손(皇孫)이 탄생하여, 대사(大赦)하고 연호(年號)를 고쳤으니, 한 나라의 기쁜 경사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대사(大赦)하는 것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우리 나라 경사(慶事)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사오니 대사(大赦)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라,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해 내렸는데, 경순 왕후(敬順王后)의 기신(忌晨)이므로 군신(群臣)이 모두 시복(時服)을 입었고, 풍악은 진설하기만 하고 연주하지 아니하였다.
그 사(赦)하는 글에 이르기를,
“예전부터 제왕(帝王)이 계사(繼嗣)를 중하게 여기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종사(螽斯)에서 여러 아들을 노래하였고 봉인(封人)이 다남(多男)을 축복하였으니, 대개 종사(宗社)의 대본(大本)이요 국가의 경복(景福)이 됨으로서이다.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외람되게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부탁(付托)의 지중(至重)함을 생각하고 계술(繼述)을 감히 잊을 수 있으랴. 생각하건대, 세자(世子)의 연령이 이미 30이 거의 되었는데, 아직도 적사(嫡嗣)를 얻지 못하여 내 마음에 근심되더니, 이제 세자빈이 7월 23일에 적손(嫡孫)을 낳았다. 이것은 조종(祖宗)께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으심이 깊으셨고, 또 상천(上天)의 보우(輔佑)하심이 두터우심이다.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정통(正統) 6년 7월 23일 새벽 이전에 대역(大逆)을 모반(謀反)한 것, 모반(謀叛)한 것, 자손(子孫)이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하였거나 때리고 욕한 것,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 노비가 상전을 모살(謀殺)한 것, 독약이나 저주로 살인한 것, 강도(强盜)를 범한 것 외에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니되었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니되었거나 다 용서하여 제(除)해 버리니,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告)하고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아아, 이미 많은 복을 받았으니 진실로 웅몽(熊夢)의 상서에 합하게 할 것이라, 의당 관대한 은전(恩典)을 베풀어서 홍도(鴻圖)의 경사(慶事)를 크게 넓힐 것이다.” 하였다.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2. 어머니 현덕왕후 승하(왕세자빈 권씨. 세종23년,1441년 7월 24일)
세종 93권,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7월 24일(무오) 1번째기사
- 왕세자빈 권씨가 졸하여 조례(弔禮)를 행하다
왕세자빈 권씨가 졸(卒)하였다. 빈(嬪)은 아름다운 덕(德)이 있어 동정(動靜)과 위의(威儀)에 모두 예법(禮法)이 있으므로, 양궁(兩宮)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임금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잠시 동안에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膳]를 폐하였고, 궁중(宮中)의 시어(侍御)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 없었다. 여섯 승지(承旨)와 예조 판서 민의생(閔義生)·참판 윤형(尹炯)·참의 권극화(權克和)·지중추원사 정인지(鄭麟趾)와 선공 제조(繕工提調) 호조 판서 남지(南智)·동지중추원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정소 공주(貞昭公主)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상장(喪葬)의 예(例)를 참작(參酌)하여 아뢰이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 왕후보다 내리고 정소 공주보다 1등을 더하게 하라.” 하므로, 염빈 도감(斂殯都監)을 설치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거애(擧哀)는 외조모(外祖母)의 예(例)에 의(依)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빈은 나와 한집에 살던 며느리인데, 어찌 차마 밖에 나가 거애(擧哀)하겠는가. 하물며, 빈이 죽어서 거애하는 것은 예전에 정례(正禮)가 없는 것임에랴.” 하였다.
백관(百官)이 시복(時服)으로 근정전(勤政殿) 뜰에 나아가서 조례(弔禮)를 행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궁(東宮)은 소대(素帶)를 30일 동안 띠다가 제(除)하고, 임금과 중궁(中宮)은 소대를 5일 동안 띠다가 제하며, 조회를 5일 동안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 할아버지 세종대왕, 손자 이홍위(훗날 단종)를 왕세손에 책봉
세종 120권, 30년(1448 무진 / 명 정통(正統) 13년) 4월 3일(무오) 1번째기사
- 원손 이홍위를 왕세손으로 삼고 사유를 반포하다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를 봉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았는데, 그 교명(敎命)에 말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슬프다, 내가 큰 사업을 이어받아 조종(祖宗)의 부탁의 중함을 생각하여 일찍과 밤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상고하건대 옛날의 제왕(帝王)은 나라 근본이 이미 바르게 되면 또 그 윤자(胤子)로 대를 이으니,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고 인심을 집중시키자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 스승에게 나갈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는다. 너는 바른 사람을 친하고 가까이 하고 학문을 밝고 넓게 하여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영세(永世)의 아름다움을 믿음직하게 하라. 공경할지어다.”
하고, 또 사유(赦宥)하는 왕지(王旨)를 중외에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옛날부터 제왕(帝王)이 저부(儲副)를 세워서 나라 근본을 바르게 하고 적손(嫡孫)을 택하여 명분(名分)을 정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내가 얇은 덕으로 조종(祖宗)의 사업을 이어받아 차례를 이을 도리를 생각하매, 길이 그 어려움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지금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가 나이 이미 8세가 되어 준수하고 숙성하므로 이에 명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았다.
이미 이장(彝章)을 거행하였으니 마땅히 큰 은택을 내려야 하겠다.
4월 초3일 매상(昧爽) 이전에 유(流)이하의 죄를 범한 자는 간도(奸盜)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의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거기에 해당한 죄로 죄주겠다.
슬프다, 경사가 방가(邦家)에 뻗쳤으니 이미 세적(世嫡)으로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였고, 은혜가 광대하게 미치었으니 거의 고루 백성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라.”
하였다.
4. 할아버지 세종대왕 승하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17일(임진) 1번째기사
-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임금이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였다.
【처음에 영응 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 】
5. 아버지 문종, 왕위에 오르다.
문종 1권,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3일(정유) 2번째기사
-임금이 빈전 밖에서 즉위의 예식을 행하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널[柩] 앞에서 유명(遺命)을 받고 빈전(殯殿) 문밖의 장전(帳殿)에 나가서 즉위(卽位)의 예식(禮式)을 행하였는데, 의식대로 하였다. 슬피 울면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니 옷소매가 다 젖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다시 입었다.
6. 아버지 문종 승하
문종 13권, 2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5월 14일(병오) 2번째기사
- 유시에 임금이 강녕전에서 훙하다.
유시(酉時)에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39세이셨다.
7. 노산군(魯山君) 이홍위, 왕위에 오르다(단종 즉위년,1452년 5월 18일)
단종 1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5월 18일(경술) 4번째기사
-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 .
노산군(魯山君)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고, 반교(頒敎)하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대동(大東)을 웅거하여 차지하고,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 선업(先業)을 빛내고 넓히어 문치(文治)로 태평에 이르고, 우리 선부왕(先父王)께서 성한 덕과 지극한 효도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여 원대한 것을 도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임어(臨御)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여러 신하를 버리었으니 땅을 치고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어 애통이 망극하다. 돌아보건대 큰 위(位)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경태(景泰) 3년 5월 18일에 즉위하노라. 생각건대 소자(小子)가, 때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서정(庶政) 만기(萬機)를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종(祖宗)의 업을 능히 담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못[淵]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도 같이 율률(慄慄)하게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에 따라서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 너 중외의 대소 신료(臣僚)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해서 끝이 있도록 도모하기를 생각하라. 추은(推恩)의 법전과 연방(延訪)하는 조목과 합당히 행할 일들을 뒤에 조목조목 열거한다.
1. 경태(景泰) 3년 5월 18일 새벽녘 이전부터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구매(毆罵)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과,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고독(蠱毒)·염매(魘魅)한 것과, 다만 강도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 주겠다.
1. 제도(諸道) 여러 고을의 인민들이 받은 의창(義倉)의 곡식은 각각 원수(元數)에서 3분의 1을 감하여 민생을 소생시킬 것.
1. 공처(公處)의 모실(耗失)·포흠(逋欠)·일체의 추징(推徵)하는 물건은 모두 다 감면할 것.
1. 옥(獄) 속의 괴로움이란 하루를 한 해같이 지낸다. 원통하고 지체됨이 있어 혹 화기(和氣)를 상할까 염려되니, 모름지기 급히 신리(申理)하고 분변하여 오래 체류(滯留)하게 하지 말고, 그 중에 마땅히 가두어 두어야 할 자도 또한 좋게 보호하여 큰 추위와 더위·장마에 병이 나서 옥중에서 죽는 일이 없게 할 것.
1.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독폐잔질(篤廢殘疾)은 어진 정사의 우선되는 것이니, 중외의 유사(有司)는 곡진히 존휼(存恤)을 가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할 것.
1. 효자(孝子)·절부(節婦)는 중외의 유사가 실적을 명백하게 갖추어 계달(啓達)하여 정표(旌表)에 빙거할 것.
1. 변방을 수비하고 농사에 힘쓰는 것을 제외하고 중외의 긴요하지 않은 공역(工役)과 일체의 부비(浮費)를 모두 다 정지하여 파할 것.
1. 부역(賦役)을 평균하게 하는 것은 민정(民政)의 중요한 일인데, 모든 차역(差役)하는 관리들이 과정(科定)하기를 한결같게 하지 못하여, 호부(豪富)하고 세력 있는 자는 구차히 면하고 고과(孤寡)가 오로지 그 괴로움을 받으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제로부터 감히 전과 같이 불공평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가 규찰하여 다스릴 것.
1. 농상(農桑)과 학교(學校)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니, 소재(所在)의 수령(守令)들은 허문(虛文)을 일삼지 말고, 독려하고 권과(勸課)하여 힘써서 실효를 보게 할 것.
1. 각도의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 및 연변(沿邊)의 진수관(鎭守官)은 힘써 병마(兵馬)를 조련(操練)하고 군사를 무휼(撫恤)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지키도록 노력하여 일체의 방어 사무를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것.
1. 감사(監司)는 법으로는 한 방면을 영솔하고 직책은 출척(黜陟)을 오로지 하니, 그 수령들이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방법에 어긋나고, 탐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하지 않으며, 백성을 병들게 하고 다스림을 해치는 자는 거듭 규리(糾理)를 가할 것.
1. 내가 이제 어리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예전의 거상(居喪)하던 대로 예(禮)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비록 빈소 옆에 있더라도 학업을 폐하지 않고 항상 경연관(經筵官)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읽고, 날마다 경연 대신과 같이 강론에 힘쓰겠다.
1. 고사(古事)의 정사가 모두 중국 서적에서 나왔는데, 하물며 내가 어리고 시위(施爲)에 어두우니 무릇 조치(措置)하는 것을 모두 정부(政府)·육조(六曹)와 더불어 의논하여 행하겠다.
1. 전에 육조에서 항상 직접 아뢰던 공사(公事)를 지금으로부터 모두 정부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해서 시행할 것.
1. 당상(堂上) 이상 관원과 대성(臺省) 정조(政曹)와 방어(防禦)에 긴하게 관계되는 연변(沿邊) 장수(將帥)와 수령의 제수는 모두 정부 정조(政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3품 이하의 제수도 또한 모두 살피어 박의(駁議)하라. 무릇 제수에 관하여서는 내가 사사로이 가까운 자들은 쓰지 않고, 모두 공론대로 하겠다. 만일 특지(特旨)로 제수할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든 정부 대신에게 의논하여 모두 가하다고 말한 연후에 제수하겠다.
1. 대소 과죄(科罪)는 모두 정부에 내리어 의논한 연후에 내가 마땅히 친히 결단하겠고 감히 좌우의 사사로운 청으로 가볍게 하고 중하게 하지는 않겠다.
1. 이미 이루어진 격례(格例)나, 가하다 부하다 할 것이 없는 일체의 항상 행할 수 있는 잡사(雜事)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공사는 모두 승지(承旨)로 하여금 면대하여 아뢰게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다시 상량(商量)하고 가부(可否)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부 대신과 더불어 친히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1. 승정원(承政院)은 직책으로서 출납을 맡게 되는데 관계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대소 인원들은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뢰지 말 것.
1. 언로(言路)가 열리고 막히는 것은 이란(理亂)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는 것과 여러 사람이 진언(陳言)하는 것을 아울러 받아들이고 말이 비록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겠다.
1. 대소 신료들이 사사로이 서로 붕비(朋比)하여 공사를 폐하고 사사(私事)를 영위하거나 혹 망령되이 사설(邪說)을 일으켜서 시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공가(公家)에 이익될 것이 없고 자기에게도 손(損)이 있으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1. 군사[兵]를 맡은 대신의 집 군사는 진퇴시키지 못하고 한결같이 《육전(六典)》에 의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가 규리(糾理)할 것.
1.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집정가(執政家)에 분경(奔競)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법령이 있지마는, 다만 서무(庶務)를 헤아려 의논하는 정부의 대신 및 귀근(貴近) 각처에서는 분경을 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뢰(無賴)·한잡(閑雜)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서로 가서 뵈옵는 폐단이 진실로 다단(多端)하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한결같이 집정가들의 분경하는 예에 의하여 시행하고 공사로 인하여 진퇴하는 것과 출사하는 자는 이 한계에 두지 않을 것.
1. 상례(常例)를 제외하고 무릇 특사할 일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정부에 의논한 뒤에 행할 것.
1. 대저 기교(奇巧)·완호(玩好)에 관계되는 물건은 진상하지 말고, 대소 신료가 식(式)에 의해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문안(問安)하는 등의 일 외에 사사로운 일로 대궐에 나와 인연(因緣)으로 계달(啓達)하는 자는 반드시 유사에 붙이고 혹시라도 용서하지 말 것.
아아! 새로 천명을 받아 특별히 비상한 은혜에 젖었으니, 길이 기쁨을 누릴 것이며 무강한 복을 넓히기 바라노라.”하였다.
처음에 제수하는 조목을 의논할 때에 겸판이조(兼判吏曹) 허후(許詡)는 3품 이하를 모두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으나,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계전(李季甸)과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창손(鄭昌孫)이 반박하였다. 이날에 위사(衛士)와 백관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었고 세조(世祖)가 가장 비통해 하였다. 이용(李瑢)은 승하한 뒤로부터 매양 대궐 뜰에 들어오면 기뻐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상제(喪祭)에 곡림할 때 세조께서 애통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조신(朝臣)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용만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세조가 사저(私邸)로 물러나와 자성 왕비(慈聖王妃)와 더불어 서로 대하고 울어서 비통함이 지나쳐 기운이 막히니 약을 먹고 풀기까지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대행(大行)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마음을 다하기를 원할 뿐이다. 대행이 천성이 어질고 효도하여 사람들에게 대하여 신의가 두터워서 가볍게 절물(絶物)을 하지 않았다. 세종의 상사 때 졸곡 후에 내가 본래 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항상 와서 시선(侍膳)할 것을 명하였고, 또 나더러 정대하고 충성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다르다 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陣法)을 만들었는데 말씀하기를, ‘이정(李靖)·제갈량(諸葛亮)인들 어찌 수양(首陽) 보다 나을까?’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하였다.
대행왕께서 병환이 위독하자 좌우에 말하기를, “수양이 보고 싶다.” 하였으나, 좌우에서 그릇 숙의(淑儀)로 알아듣고 마침내 부르지 않았는데, 대개 후사를 부탁하고자 함이었다.
8. 수양대군, 김종서를 척살하다(단종1년, 1453계유년 10월 10일. 계유정란)
단종1년, 1453계유년 10월 10일 1번째기사
-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세조가 새벽에 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여러 무사(武士)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느지막에 다시 오라.”
하고, 드디어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낮쯤 되어 권남이 다시 왔다.
세조가 나와 보고 말하기를, “강곤(康袞)·홍윤성(洪允成)·임자번(林自蕃)·최윤(崔閏)·안경손(安慶孫)·홍순로(洪純老)·홍귀동(洪貴童)·민발(閔發) 등 수십 인이 와서 더불어 과녁을 쏘는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곽연성(郭連城)은 이미 왔으나 어미의 상중(喪中)으로 사양하기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타이르니, 비록 허락은 하였으나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다. 그대가 다시 말하라.” 하고, 세조는 도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권남이 곽연성을 보고 말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도적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니, 자네는 장차 어찌하려는가?” 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들었습니다.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을까마는 최복(衰服)이 몸에 있으니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義)를 일으키는 것인데,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節義)를 지키겠는가? 또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자네는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였
다. 곽연성이 말하기를, “수양 대군께서 이미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으나,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니, 그대는 자세히 방략(方略)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권남이 하나하나 말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나머지는 의논할 것이 없고, 다만 수양 대군께서 김종서의 집을 왕래하는 데 이르고 늦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성문이 만일 닫히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이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마땅히 선처하겠다.” 하였다.
해가 저무니 홍달손(洪達孫)이 감순(監巡)으로 먼저 나갔다.
세조가 활 쏘는 것을 핑계하고 멀찌감치 무사 등을 이끌고 후원 송정(松亭)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금 간신 김종서(金宗瑞)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 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하고,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민발(閔發) 등은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하니,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혹은 북문을 따라 도망하여 나가는 자도 있었다.
세조가 한명회에게 이르기를,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교가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하여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청컨대 공(公)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홍윤성(洪允成)이 말하기를, “군사를 쓰는 데에 있어 해(害)가 되는 것은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지금 사기(事機)가 심히 급박하니, 만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은 다 틀릴 것입니다.” 하였다.
송석손 등이 옷을 끌어당기면서 두세 번 만류하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활을 끌고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지금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하고, 중문에 나오니 자성 왕비(慈聖王妃)가 갑옷을 끌어 입히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가동(家僮)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金宗瑞)의 집으로 갔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남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하고
권언(權躽)·권경(權擎)·한서구(韓瑞龜)·한명진(韓明溍)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楊汀)·홍순손(洪順孫)·유서(柳溆)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세조가 처음에 권남에게 명하여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다. 권남이 투자(投刺)하니,
김종서가 〈불러들여〉 별실에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남이 돌아와 보고하니, 세조가 이미 말에 올라탔다. 세조가 김종서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니, 김승규(金承珪)의 집앞에 무사 세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귀엣말을 하고 있고 무기(武騎) 30여 인이 길 좌우를 끼고 있어 서로 자랑하기를, “이 말을 타고 적을 쏘면 어찌 한 화살에 죽이지 못하겠는가?”하였다.
세조가 이미 방비가 있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구냐?” 하니, 그 사람들이 흩어졌다.
양정(楊汀)은 칼을 차고 유서(柳溆)는 궁전(弓箭)을 차고 왔다.
세조가 양정으로 하여금 칼을 품에 감추게 하고 유서를 정지시키면서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문 앞에 앉아 신사면(辛思勉)·윤광은(尹匡殷)과 얘기하고 있었다.
김승규가 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그 아비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가 들어가서 고하였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세조가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들어오기를 청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거절하니, 김종서가 부득이하여 앞으로 나왔다. 김종서가 나오기 전에 세조는 사모(紗帽) 뿔이 떨어져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사모 뿔을 빌립시다.” 하니, 김종서가 창황(蒼黃)히 사모 뿔을 빼어 주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에서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 정승은 누대(累代) 조정의 훈로(勳老)이시니, 정승이 편을 들지 않으면 어느 곳에 부탁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임어을운이 나오니, 세조가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윤광은·신사면이 굳게 앉아 물러가지 않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비밀한 청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으나, 오히려 멀리 피하지 않았다.
세조가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하고, 종자(從者)를 불러 가져오게 하였다.
양정이 미처 나오기 전에 세조가 임어을운을 꾸짖어 말하기를,“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하였다.
지부(知部)의 것을 바치니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세조가 천천히 양정 등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흔들게 하여 돌아와서 돈의문에 들어가, 권언 등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날 김종서가 역사(力士)를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다가 세조가 이르니,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 하였다.
엿보는 자가 말하기를, “적습니다.” 하니, 김종서가 오히려 두어 자루 칼을 뽑아 벽 사이에 걸어 놓고 나왔다. 처음에 세조가 김종서의 집에 갈 때에 무사들을 저사(邸舍)에 가두게 하고 나왔다. 여러 사람이 오히려 떠들어대며 다투어 튀어나오려고 하자, 권남(權擥)이 문에 서서 막으니, 혹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지 않고 임의로 대신을 베는 것이 가합니까? 장차 우리들을 어느 땅에 두려고 합니까?”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용렬하지마는 대군(大君)은 고명하니, 익히 계획하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일을 만일 이루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는가? 장부는 다만 마땅히 순(順)을 취하고 역(逆)을 버리고, 종사를 위하여 공을 세워 공명을 취할 것이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어째서 우리들에게 미리 일러 활과 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만 빈 주먹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만일 격투할 일이 있으면 비록 그대들 수십 인이 병기를 갖추었더라도 어찌 족히 쓰겠는가? 그대들은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가 세조를 따라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또 세조의 명령을 반복하여 고해 이르고, 세조가 돌아오는 것을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권남이 달려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洪達孫)을 보고 세조가 이미 김종서의 집에 간 것을 비밀히 알리고, 순졸(巡卒)을 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약속하고는, 또 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숭례문(崇禮門)·서소문(西小門) 두 문을 닫게 하였다.
권남은 스스로 갑사 두 사람, 총통위(銃筒衛) 열 사람을 거느리고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러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일로 인하여 문 밖에 갔으니, 비록 종(鍾)소리가 다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권언(權躽)을 시켜 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장차 대군(大君)의 저사(邸舍)로 돌아가려 하여 미처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성 안으로부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세조가 이르렀다. 웃으며 권남에게 이르기를, “김종서(金宗瑞)·김승규(金承珪)를 이미 죽였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여러 무사가 아직도 공의 저사에 있으니, 수종(隨從)하게 할까요?” 하였다.
세조가 조금 멈추었다가 부르니 한명회가 거느리고 달려왔다.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을 시켜 순졸(巡卒)을 거느려 뒤에 따르게 하고, 시좌소(時坐所)로 달려가서 권남을 시켜 입직(入直) 승지(承旨) 최항(崔恒)을 불러내었다.
세조가 손을 잡고 최항에게 이르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이양(李穰)·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원구(元矩)·조번(趙蕃)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당부(黨附)하고,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조수량(趙遂良)·충청도 도관찰사(忠淸都都觀察使) 안완경(安完慶) 등과 연결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공모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정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여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다. 김연(金衍)·한숭(韓崧)이 또 주상의 곁에 있으므로 와서 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賊魁) 김종서(金宗瑞)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지당(至黨)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하고,
연하여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히 여기어 널리 당원(黨援)을 심어 놓고, 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 지금 부득이하여 예전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의 일을 본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기운을 돌리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천천히 아뢰고 경동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효성(金孝誠)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세조가 그 아들 김처의(金處義)를 시켜 부르고, 또 입직한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계전(李季甸) 등을 불러 들이어 세조가 최항·김효성·이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고, 황보인·이양·조극관·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좌참찬(左參贊) 허후(許詡)·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 등을 불렀다.
세조는 처음에 궐문에 이르러 입직하는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 등으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고, 또 입직하는 여러 곳의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총통위(銃筒衛) 등으로 하여금 둘러서서 홍달손(洪達孫)의 부서를 시위하게 하고, 여러 순군(巡軍)은 시좌소(時坐所)의 앞뒤 골목을 파수하여 차단하게 하고, 친히 순졸(巡卒) 수백 인을 거느려 남문 밖의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 돌다리[石橋] 가에 주둔하고, 서쪽으로는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서쪽 동구에 이르고 동쪽으로 서운관(書雲觀) 고개에 이르기까지 좌우익(左右翼)을 나누어 사람의 출입을 절제하고, 또 돌다리로부터 남문까지 마병(馬兵)·보병(步兵)으로 문을 네 겹으로 만들고, 역사(力士) 함귀(咸貴)·박막동(朴莫同)·수산(壽山)·막동(莫同) 등으로 제3문을 지키게 하고,
영을 내리기를,
“이 안이 심히 좁으니, 여러 재상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은 겸종(傔從)을 제거하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하였다.
조극관(鳥克寬)·황보인(皇甫仁)·이양(李穰)이 제3문에 들어오니, 함귀 등이 철퇴로 때려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을 죽이고, 삼군 진무(三軍鎭撫) 최사기(崔賜起)를 보내어 김연(金衍)을 그 집에서 죽이고, 삼군 진무 서조(徐遭)를 보내어 민신(閔伸)을 비석소(碑石所)에서 베고【이때에 민신은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고 있었다.】또 최사기(崔賜起)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선경(愼先庚)을 보내어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용(瑢)을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잡아서 압송(押送)하여 강화(江華)에 두고, 세조가 손수 편지를 써서 그 뜻을 이르고,
또 시켜서 말하기를, “네 죄가 커서 참으로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용(瑢)이 사자(使者)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도 또한 스스로 죄가 있는 것을 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삼군 진무 나치정(羅致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瑢)의 아들인 이우직(李友直)을 잡아 압령하여 강화에 두었다. 용(瑢)이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급히 그 종 영기(永奇)를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 비밀히 부탁하기를,
“네가 급히 가서 김 정승에게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여 주라.”
하였으니, 대개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이루기를 바란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이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석(河石)이 반드시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니, 네가 꼭 뼈를 거두어 오라. 내가 다시 보고야 말겠다.” 하였다.
이우직(李友直)이 강화에 이르러 용에게 말하기를, “제가 여쭙지 않았습니까?” 하니,
용(瑢)이 말하기를,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하였다.
용(瑢)의 당(黨)에 대정(大丁)이란 자가 있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성씨(成氏)가 여복을 입히어 침병(寢屛) 뒤에 엎드려 있게 하였다. 잡기를 급박하게 하니, 성씨가 부득이하여 내보냈는데, 곧 베었다.
운성위(雲城尉) 박종우(朴從愚)가 문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비록 부르시는 명령은 없으나 변고가 있음을 듣고 여기 와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세조가 불러 들였다.
우승지(右承旨) 권준(權蹲)·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가 또한 오니, 세조가 권준만 불러 들이었다. 정인지(鄭麟趾)가 권남을 시켜 붓을 잡고 이계전·최항과 더불어 함께 교서(敎書)를 짓는데, 밤이 심히 추웠다.
노산군(魯山君)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하여 내온(內醞)·내수(內羞)로 세조 이하 여러 재상을 먹이었다.
세조가 군사에게 술을 먹이도록 아뢰어 청하고, 또 아뢰어 용(瑢)의 당(黨)인 환관 한숭(韓崧)·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을 궐내에서 잡아 의금부(義禁府)에 넘기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元矩)를 시켜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고하고, 아뢰어 내금위(內禁衛)를 보내라. 내가 나를 상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하였으나, 문 지키는 자가 듣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명민(李命敏)도 또한 다시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도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홍달손(洪達孫)에게 고하니 호군(護軍) 박제함(朴悌緘)을 보내어 베었다.
세조가 인하여 여러 적이 다시 깨어날 것을 염려하여, 양정(楊汀)과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李興商)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김종서를 찾아 김승벽의 처가에 이르러 군사가 들어가 잡으니, 김종서가 갇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걸어 가겠느냐?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니, 끌어내다가 베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뒤에 저자 아이들이 난신(亂臣)의 머리를 만들어서 나희(儺戱)를 하며 부르기를,
“김종서 세력에 조극관 몰관(沒官)하네.” 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하였다.
9. 송씨(宋氏)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다(단종2년(1454년) 1월 25일)
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25일(정축) 1번째기사 -
여러 신하들이 왕비를 하례하다
여러 신하들이 왕비를 하례(賀禮)하였다. 그 의식은 정조(正朝)·동지(冬至)를 하례하는 의식(儀式)과 같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신민(臣民)들의 위에 있는데, 하늘의 비운(否運)을 만나서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종친(宗親)·훈신(勳臣)·문무 신료(文武臣僚)들이 서로 더불어 의논을 합하기를, ‘과인(寡人)이 나이가 바야흐로 어린데, 큰 기업을 이어받아 지키나, 홀로 깊은 궁궐에 처해 있어 위로 모후(母后)의 보호(保護)가 없고 아침 저녁으로 다만 환시(宦寺)와 더불어 거(居)한다. 근일에 간신(姦臣)의 변란(變亂)도 또한 홀로 외로운 형세로 인하여 마침내 바라지도 않은 데에서 일어나, 화(禍)의 기틀이 절박하였으나, 다행히 종사(宗社)의 혼령(魂靈)에 힘입어서 대난(大難)을 평정할 수 있었으며, 이제 대권(大權)으로써 큰 위험을 구제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어진 왕비(王妃)를 골라서 내치(內治)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왕가의 후손을 넓히고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보존하여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길흉(吉凶)은 서로 뒤섞이게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권도(權道)를 써서 길복(吉服)을 입어야 한다.’ 하고 두 세 번 아뢰어 청(請)하였으나 내가 차마 따르지 못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이르기를, ‘내 한 몸은 종사(宗社) 생령(生靈)의 의지하는 바이니 사사로이 할 수가 없는 것이라.’ 하고 굳이 청하여 마지않고, 그 말이 더욱 통절(痛切)하였으므로, 내가 부득이 여러 사람의 의논에 억지로 따라서 정(情)을 억누르고 길복(吉服)을 따르며, 송씨(宋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로 삼고 중앙과 외방에 전파하여 알린다.
이어서 너그러운 은전(恩典)을 선포하니, 시행할 사의(事宜)를 다음에 조목별로 열거(列擧)한다.
1. 경태(景泰) 5년 정월 25일 새벽녘 이전에 관리(官吏)·군민(軍民) 등이 모반(謀反)·대역(大逆)한 것, 자손으로서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하거나 때리고 욕한 것,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것, 고의로 모의하여 살인(殺人)한 것, 고독(蠱毒) ·염매(魘魅)한 것과, 다만 강도(强盜)·절도(竊盜)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도형(徒刑) 이하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이를 면죄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告)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이를 죄 줄 것이다.
1. 기사년 이전에 중앙과 외방에서 인민(人民)들이 받아간 의창(義倉)의 곡식은 모조리 모두 감면한다.
1. 중앙과 외방의 공처(公處)에서 포흠(逋欠) 하거나 모손(耗損)하여 일체 추징(推徵)에 해당하는 물건들은 모조리 모두 감면한다.
아아! 여러 사람의 의논이 같았으므로, 이미 권도(權道)를 따라서 변례(變禮)를 쓰나, 대례(大禮)를 이에 들어서 마땅히 은전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한다.”하였다.
10. 노산군이 세조(수양대군)에게 선위하다. 수양대군,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다.(세조1년, 1455년 윤6월 11일) 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윤6월 11일(을묘) 1번째기사
~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다
~환관(宦官) 전균(田畇)으로 하여금 한확(韓確) 등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領議政)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하였다.
한확 등이 놀랍고 황공하여 아뢰기를, “이제 영의정이 중외의 모든 일을 다 총괄하고 있는데, 다시 어떤 대임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하여, 전균(田畇)이 이를 아뢰니,
노산군(魯山君)이 말하기를, “내가 전일부터 이미 이런 뜻이 있었거니와 이제 계책을 정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속히 모든 일을 처판(處辦)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확 등 군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그 명을 거둘 것을 굳게 청하고 세조 또한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하였다. 전균이 다시 들어가 이러한 사실을 아뢰었다.
조금 있다가 전균이 다시 나와 전교를 선포하기를, ‘상서사(尙瑞司) 관원으로 하여금 대보(大寶)를 들여오라는 분부가 있다.’고 하니, 모든 대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변하였다.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상서사(尙瑞司)로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나 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액해 나가게 하였다.
세조가 이에서 나와 대군청(大君廳)에 이르니, 사복관(司僕官)이 시립(侍立)하고 군사들이 시위(侍衛)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김예몽(金禮蒙) 등으로 하여금 선위(禪位)·즉위(卽位)의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고 유사(有司)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헌가(軒架)를 근정전(勤政殿) 뜰에 설치하였다.
세조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선위(禪位)를 받으니,
그 선위 교서(禪位敎書)에 이르기를,
“나 소자(小子)가 방가(邦家)의 부조(不造)하지 못할 때를 당하여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고 궁중 안에 깊이 거처하고 있으므로 내외의 모든 사무를 알 도리가 없으니, 흉한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켜 국가의 많은 사고를 유발하였다.
숙부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의 휘(諱)】이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나의 몸을 도우시면서 수많은 흉도(兇徒)를 능히 숙청하고 어려움을 크게 건지시었다. 그러나 아직도 흉한 무리들이 다 진멸(殄滅)되지 않아서 변고가 이내 계속되고 있으니, 이 큰 어려움을 당하여 내 과덕한 몸으로는 이를 능히 진정할 바가 아닌지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天命)과 인심의 귀의(歸依)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
아! 종친(宗親)과 문무의 백관, 그리고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우리 숙부를 도와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유명(遺命)에 보답하여 뭇사람에게 이를 선양할지어다.” 하였다.
노산군이 다시 좌승지(左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으로 가서 명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계유년에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이 사실을 나에게 고하고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일당들이 아직도 존재하여 다시 궤도(軌道)에 벗어나는 일을 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유치한 내가 능히 진정할 바이겠는가?
수양 대군은 종실(宗室)의 장(長)으로서 사직(社稷)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重任)을 부탁할 만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 서리(署理)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奏聞)하겠다.” 하니,
명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는 곧 국가의 대사인데, 이제 그 유서(諭書)를 받으니 기쁩니다.” 하였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으로 들어가 노산군을 알현하고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한확(韓確)이 백관을 인솔하고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하니, 그 전문에 이르기를,
“아래 백성이 도와 군왕이 되시니, 우러러 천명(天命)을 받으셨고, 큰 덕이 있어 그 보위(寶位)를 얻으시니, 굽어 인심에 순응하셨습니다.
무릇 이를 보고 듣는 자라면 그 누가 기뻐 도무(蹈舞)하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하건대 총명(聰明) 예지(叡智)하시고 강건(剛健) 수정(粹精)하신 자품으로, 그 신성하신 문무의 재덕은 곧 큰 기업의 귀속하는 바가 되고, 그 위대하신 공렬(功烈)의 수립은 진정 중한 책임을 사양하기 어렵게 되셨습니다.
사직(社稷)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다같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하게도 경사로운 때를 맞아, 저 서기(瑞氣) 어린 해와 구름 속에 천명(天命)도 새로운 거룩한 성대(盛大)를 얻어 보고 태산(泰山)과 반석(盤石) 같은 바탕에서 다시 무강(無彊)하신 큰 계책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으시고, 이 대동(大東)의 나라를 가지셨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하시며 밝고 평화로운 세월이 거듭되어 왔다.
그런데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선업(先業)을 이어받으신 이래, 불행하게도 국가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덕없는 내가 선왕(先王)과는 한 어머니의 아우이고 또 자그마한 공로가 있었기에 장군(長君)인 내가 아니면 이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고 하여 드디어 대위(大位)를 나에게 주시는 것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이를 얻지 못하였고, 또 종친(宗親)과 대신(大臣)들도 모두 이르기를 종사(宗社)의 대계로 보아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고 하는지라, 필경 억지로 여정(輿情)을 좇아 경태(景泰) 6년 윤6월 11일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고,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렇게 임어(臨御)하는 초기를 당하여 의당 관대한 혜택을 베풀어야 할 것이므로 경태 6년 윤6월 11일 새벽 이전에 있었던 일로서 모반(謀反)과 대역(大逆) 모반(謀叛), 또 자손으로서 조부모 또는 부모를 모살(謀殺)하였거나 또는 구매(歐罵)한 자,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를 살해한 자,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자와 고의로 살인을 꾀한 자, 고독(蠱毒)·염매(魘魅)한 자와 다만 강도(强盜)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결정하였거나 아직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며, 앞으로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아! 외람되게도 중대한 부탁을 이어받으니 실상 두려운 걱정이 마음에 넘치는 바, 실로 두렵고 삼가는 마음으로 이에 큰 은혜를 널리 베풀어 경신(更新)의 치화(治化)를 넓히고자 하는 바이다.” 하였다.
예(禮)를 마치고 법가(法駕)를 갖추어 잠저(潛邸)로 돌아갔다.
종친과 문무 백관(文武百官)·기로(耆老)·족친(族親)들이 중궁(中宮)에 하례(賀禮)를 드리니, 이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날 밤 이고(二皷) 무렵에 임금이 서청(西廳)에 임어하니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이조 판서(吏曹判書) 정창손(鄭昌孫)·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좌부승지(左副承旨) 구치관(具致寬) 등이 입시하였는데,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11. 상왕 노산군, 경복궁(景福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다(세조1년,1455년 윤6월 20일)
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윤6월 20일(갑자) 1번째기사
-노산군이 창덕궁으로 옮기고 왕이 경복궁으로 들어가다
노산군(魯山君)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니 제사(諸司)에서 1원(員)씩 나와 시위(侍衛)하고, 임금이 그 잠저(潛邸)로부터 경복궁(景福宮)으로 입어(入御)하니 백관(百官)이 시위하였다.
12.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세조2년, 1456 병자년 6월 2일)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일(경자) 2번째기사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사옹방(司甕房)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上王)이 창덕궁(昌德宮)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韓明澮)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上王)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上王)과 세자(世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婦翁]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삼문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났기에 신은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를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폐간(肺肝)을 보는 듯이 하고 있으니, 사실을 소상하게 말하라.” 하고, 명하여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니, 네가 모조리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 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 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하고,
여러 죄수가 나간 다음에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유(李瑜)의 집 정자를 상왕(上王)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하였다.
임금이 윤자운(尹子雲)을 노산군(魯山君)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성삼문은 심술이 좋지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조금 알기 때문에 그를 정원(政院)에 두었는데, 근일에 일에 실수가 많으므로 예방(禮房)에서 공방(工房)으로 개임(改任)하였더니, 마음으로 원망을 품고 말을 만들어내어 말하기를, ‘성왕께서 이유(李瑜)의 집에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가만히 불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제 방금 그를 국문(鞫問)하는 참입니다.” 하니, 노산군이 명하여 윤자운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과 박쟁(朴崝)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유응부·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관가(觀稼)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공초(供招)에〉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좌참찬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윤사로(尹師路)·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13.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세조2년,1456 병자년 6월 8일)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8일(병오) 2번째기사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윤사로(尹師路)·강맹경(姜孟卿)·이인손(李仁孫)·신숙주(申叔舟)·성봉조(成奉祖)·박중손(朴仲孫)·어효첨(魚孝瞻)과 승지(承旨)·대간(臺諫) 등을 불러서 입시(入侍)하게 한 다음,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윤영손(尹令孫)·권자신(權自愼)·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이휘(李徽)·노산군(魯山君)의 유모[嬭母] 봉보 부인(奉保婦人)의 여종 아가지(阿加之)·권자신의 어미 집 여종 불덕(佛德)·별감(別監) 석을중(石乙中) 등을 끌어 와서 장(杖)을 때리면서 당여(黨與)를 신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개·하위지·성삼문·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송석동·권자신·윤영손·아가지·불덕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아울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친자식들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안치(安置)시키며,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고,
드디어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 등을 환열(轘裂)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성격이 출세에 조급하여 스스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름은 남의 앞에 있으나 오래도록 제학(提學)과 참의(參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비 성승(成勝)은 본래 이용(李瑢)과 가까이 지냈는데,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관직이 떨어져 고신(告身)과 과전(科田)을 거두었으나, 이용(李瑢)이 자기 당류(黨類)들에게 말하기를,
“성승이 가장 나를 따르고 있다. 만약 변(變)이라도 있게 되면 의당 내 말[馬]앞에 설 사람이다.” 하고, 바로 계청(啓請)하여 환급(還給)하였다.
이 말이 남들에게 퍼졌으므로 성삼문이 그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였다.
박팽년은 사위 이전(李瑔)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일찍이〈세조에게〉견책을 받았으므로 원한을 품었었고,
이개(李塏)와 유성원(柳誠源)은 품질(品秩)이 낮은 것에 불평 불만하여 진달(進達)하려는 생각에서 마침내 서로 깊이 결탁하여 급급히 왕래하였는데, 정적(情迹)이 이상하여 남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14. 판돈녕부사 송현수 등의 반역으로 상왕을 강봉하고 영월에 거주시키다 (세조3년,1457년 6월 21일)
세조 8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6월 21일(계축) 2번째기사
-판돈녕부사 송현수 등의 반역으로 상왕을 강봉하고 영월에 거주시키다
백성 김정수(金正水)가 전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사윤(尹士昀)에게 말하기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와 행 돈녕부 판관(行敦寧府判官) 권완(權完)이 반역(反逆)을 도모합니다.”
하니, 윤사윤이 이를 아뢰었다.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우의정 정창손(鄭昌孫)·우찬성(右贊成) 신숙주(申叔舟)·우참찬 박중손(朴仲孫)·병조 판서 홍달손(洪達孫)·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영중추원사 윤사로(尹師路)·판중추원사 이인손(李仁孫)·공조 판서 양정(楊汀)·이조 판서 권남(權擥)·병조 참판 구치관(具致寬)·형조 참판 황효원(黃孝源)·도승지 한명회(韓明澮)·좌승지 조석문(曹錫文)·우부승지 권지(權摯)·동부승지(同副承旨) 김질(金礩)을 불러 보고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하옥(下獄)시켰다.
이어서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전날 성삼문(成三問) 등이 말하기를, 상왕(上王)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상왕(上王)도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居住)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달 동안 청하여 마지 않았으나, 내가 진실로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命)과 종사(宗社)의 중(重)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 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오로지 너희 의정부에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따라갔다.
15. 영월로 떠나는 노산군을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다 (세조3년, 1457년 6월 22일)
세조 8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6월 22일(갑인) 2번째기사
-영월로 떠나는 노산군을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16. 경상도 관노 이동이 금성 대군의 모반을 아뢰다 (세조3년, 1457년 6월 27일)
세조 8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6월 27일(기미) 1번째기사
-경상도 관노 이동이 금성 대군의 모반을 아뢰다
경상도 안동(安東)의 관노 이동(李同)이 판중추원사 이징석(李澄石)을 통하여 예궐(禮闕)하여 말하기를,
“이유(李瑜)가 순흥(順興)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群少輩)와 결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합니다.” 하고, 또한 이유(李瑜)가 준 명주 띠[紬帶]를 바쳐서 증거로 삼았다.
임금이 사정전에서 인견(引見)하고,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도승지 한명회(韓明澮)에게 명하여 증거를 따져서 물어보게 하였다.
마침내 임금이 명하여 소윤(少尹) 윤자(尹慈)를 순흥(順興)에, 우보덕(右輔德) 김지경(金之慶)을 예천(醴泉)에, 진무(鎭撫) 권감(權瑊)을 안동(安東)에 보내어 이유(李瑜)의 공사(供辭)에 관련된 사람들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또 환관(宦官) 지덕수(池德壽)·안충언(安忠彦)에게 명하여 순흥(順興)에 가서 이유(李瑜)와 그 처자(妻子)들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며,
또 내의(內醫) 이유분(李有蕡)을 보내어 약(藥)을 가지고 가서 돌보아 주게 하고,
또 경과하는 여러 고을에 유시(諭示)하여 주찬(酒饌)을 갖추어 대접하게 하였다.
17. 금성 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 (세조3년, 1457년 10월 9일)
세조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9일(기해) 2번째기사
-금성 대군이 순흥에 안치된 후 역모를 꾸민 안순손 등을 처벌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유(李瑜)가 순흥에 안치(安置)된 뒤로부터, 다른 뜻이 있어 기관(記官) 중재(仲才)와 품관 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와 군사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과 향리(鄕吏) 김근(金根)·안당(安堂)·김각(金恪) 등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好仁)을 시켜, 옛 종[奴] 정유재(鄭有才)와 그의 무리인 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 및 풍산 관노(豐山官奴) 이동(李同)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공모하고, 각각 병장을 휴대하게 하였으며,
또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에게 금정자(金頂子)와 산호 입영(珊瑚笠纓)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公)은 근일에 반드시 당상관(堂上官)이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보흠이 이를 받지 않으니, 이유(李瑜)가 말하기를, ‘마땅히 다른 날 이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내려갔다는 것을 듣고, 거짓 말하기를, ‘유모(乳母) 소비(小非)가 내 첩자(妾子) 오을망(吾乙亡)을 발로 차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이보흠과 중재(仲才)를 청하여 들여 이를 신문(訊問)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청컨대 공(公)은 군병을 모아서 나와 더불어 오늘 밤에 곧장 영천(榮川)을 공격하여, 영천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군법(軍法)으로 종사(從事)하고, 즉시 안동(安東)으로 향하면, 안동은 나의 가동(家僮)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2, 3천의 병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절제사·처치사(處置使), 제읍의 수령·교수관(敎授官) 등의 성명을 기록하고, 칼을 빼어 이보흠을 위협하여 서명(署名)하게 하고, 취각(吹角)과 타각고(打角鼓)를 시켜 빨리 인신(印信)과 군기(軍器)를 취득하라고 독촉하고, 종이를 중재에게 주어 패자(牌子)를 발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고,
스스로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간신(姦臣)이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고, 종친이 유도해 도와서 주상(主上)을 방출(放黜)하고 사직(社稷)을 전복(顚覆)하였으니, 한마음으로 광구(匡救)하되, 만일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천지의 신기(神祇)와 사직(社稷)·종묘(宗廟)의 신이 날로 이에 감림(監臨)할 것이다.’ 하고,
이보흠·중재(仲才)와 더불어 같이 서명(署名)하여 맹세하기를 요구하고, 드디어 이보흠에게 정자(頂子)·입영(笠纓) 및 단자의(段子衣)를 주었습니다.
이어서 견고한 갑옷[甲]을 찾으니 이보흠이 없다고 사절하였으나, 유가 다시 안동(安東)에 철갑(鐵甲)을 요청하고 이보흠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지금 풍기 군사(豐基郡事)를 죽령(竹嶺)으로 보내고, 문경 현감(聞慶縣監)은 초점(草岾)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끊게 하고, 그 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면, 본도에서 종사(從仕)하는 자는 처자(妻子)를 잊지 못하여 바람에 쏠리듯이 올 것이니, 인하여 군사를 모집한다면 성사(成事)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보흠이 일찍이 거짓으로 진양(鎭穰)한다 일컬으고, 맹인(盲人) 석경(石敬)을 유(瑜)에게 보내어 유를 달래어 말하기를, ‘전조(前朝)의 왕자가 젊어서부터 중[僧]이 되어 화(禍)를 면한 자가 자못 많았다.’ 하고,
또 중[僧] 나부(懶夫)에게 묻기를, ‘유(瑜)가 이 고을에서 평생을 마치겠는가? 장차 서울로 돌아가겠는가?’ 하니,
나부가 대답하기를, ‘허몽상(虛蒙相)이 있다.’고 하여, 이보흠이 이를 유에게 말하니,
유가 말하기를, ‘내가 계양군(桂陽君)의 연고로 죄를 얻고 왔는데, 근래에는 위문하지도 않으니 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데에 있다.
너도 또한 두려워할 만하다. 너는 옛날 이용(李瑢)과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마침 지금 이 고을에 수령이 되었고, 나도 또한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좌죄(坐罪)한다.’ 하니,
이보흠이 말하기를, ‘정난(靖難) 때는 그 사태가 매우 급하여 간혹 신문(訊問)하지 않고 저죄(抵罪)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유가 이보흠과 더불어 모역(謀逆)한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 중재(仲才)·호인(好仁)·정유재(鄭有才)·석정(石丁)·범삼(凡三)·석구지(石仇知)·범이(凡伊)·이동(李同)·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황치(黃緻)·김근(金根)·신극장(辛克長)·안당(安堂)·김각(金恪)은 모두 각각 승복(承服)하였으니, 다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법에 의해 연좌(緣坐)케 하며, 재산은 적몰(籍沒)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안순손·황치·김유성·안처강·안효우·신극장은 처참(處斬)하되, 연좌하지 말게 하고, 이보흠·김근은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리에 처하고, 김각은 장 1백 대에, 안당은 장 80대에 처하며, 석경은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때 죄를 범한 자는 무지(無知)한 소민(小民)이 많았는데, 간사한 사람들이 속이고 미혹(迷惑)하여 정상이 의사(疑似)한 자도 또한 있었다.
임금이 조율장(照律狀)을 의정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그 일이 반역(反逆)에 관계되었으므로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고 거의 무거운 법전을 따랐는데,
신숙주(申叔舟)는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어찌 많이 사람을 죽이겠는가? 마땅히 정상을 살펴 죄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써 생명을 온전히 한 자가 많았다.
18. 이유(李瑜)는 사사(賜死)하고,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라.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3년, 1457 정축년 10월 21일)
세조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1일(신해) 2번째기사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화의군 등을 금방에 처하다. 노산군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지내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듣건대, 유예부단(猶預不斷)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고, 사은(私恩)으로 대의(大義)를 멸절(滅絶)하면 대계(大計)를 해친다고 합니다. 전일에 간흉(姦兇)들의 변란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참여하여 종사에 죄를 지었고, 이유(李瑜)는 그를 성원(聲援)하는 일당과 교결(交結)하고 불궤(不軌)할 것을 도모하여 신민이 함께 분노(憤怒)하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보시고 차마 법에 두지 못하시어, 외방으로 옮겨 놓으시고 곡진히 성명(性命)을 보전케 하셨는데도, 오히려 그 재조(再造)의 덕(德)을 알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여 장차 노산군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으니, 죄악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데, 어찌 다시 용서하여 국법을 문란케 하겠습니까? 신 등이 누차 법을 바루시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분울(憤鬱)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영(李瓔)· 이어(李𤥽)·이전(李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흉악한 모역죄는, 왕법(王法)에 반드시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못할 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어서 화근(禍根)을 끊고 인심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무거운 것이어서, 대의가 있는 곳에는 친속(親屬)도 주멸(誅滅)하는 법입니다.
노산군의 전일의 변(變)은 그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며, 유는 화심(禍心)을 품고 불궤(不軌)를 꾀하였으니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외방에 안치(安置)해 두었습니다. 은사(恩賜)가 많이 무거웠는데도, 오히려 성은(聖恩)을 생각하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을 시도하며 노산군을 끼려고 도모하였으니, 그 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뜻을 굽혀 그 죽음을 용서하시려고 하여 신 등이 여러 날 정청(庭請)을 계속하였으나,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여, 대소 신료가 분통함과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이영(李瓔)·이어(李𤥽)·전(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 등의 일당이 반역한 죄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밝히시어 신민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유(李瑜)는 사사(賜死)하고, 영(瓔)·이어(李𤥽) ·전(瑔)·송현수(宋玹壽)는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영(瓔)·이어(李𤥽)·전(瑔)·정종(鄭悰)·송현수(宋玹壽)도 죄가 같으니, 또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가하다. 옛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또 성인(聖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고, 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19. [장릉사보]1457년 10월 24일, 노산군이 영월에서 승하하니, 나이 17세였다
-10월24일에 노산군이 영월에서 승하하니, 나이 17세였다.
이날 뇌우가 크게 일고 세찬 바람에 나무가 뽑혔으며, 검은 안개가 하늘을 가득 메워 밤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호장 엄흥도가 곡하여 조문하고, 관을 마련해서 이튿날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군(君.영월) 북쪽 5리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장릉사보 91쪽]
20. 순흥부사 이보흠을 교살하다(세조3년, 1457년 10월 27일)
세조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7일(정사) 3번째기사
-의금부 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이보흠(李甫欽)을 교살(絞殺)하였다
21. 노산군, 종친에서 삭제하다(세조3년, 1457년 11월 18일)
세조 10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1월 18일(무인) 4번째기사
-노산군·금성 대군 등의 자손들을 종친에서 삭제하고 부록에 기록토록 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 및 이유(李瑜)·이영(李瓔)·이어(李𤥽)·이전(李瑔)·정종(鄭悰) 등은 그 죄가 종사(宗社)와 관계되므로 속적(屬籍)을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자손까지도 종친(宗親)에서 삭제하고 부록(附錄) 같은 데 기록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22.[장릉사보]중종16년, 1521년 6월4일. 노산군부인 송씨가 승하하시니, 나이 82세였다
23. 노산 부인 송씨의 상사의 의거할 예에 관해 전교하다 (중종16년(1521년 6월 5일)
중종 42권,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6월 5일(을유) 5번째기사
- 노산 부인 송씨의 상사의 의거할 예에 관해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노산 부인(魯山夫人) 송씨(宋氏)의 상사(喪事)는 의거할 예(例)가 없으니, 왕자군(王子君) 부인의 호상하는 예수(禮數)에 의하여야 하겠다. 예조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내가 짐작해서 정하겠다.”
24. 노산 부인 송씨의 상례는 대군 부인의 예에 의해 하도록 하다 (중종16년, 1521년 6월 6일)
중종 42권,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6월 6일(병술) 5번째기사
- 노산 부인 송씨의 상례는 대군 부인의 예에 의해 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노산 부인 송씨의 별부(別賻)는 완산군 부인(完山君夫人)의 예(例)로 하되 다만 역청(瀝靑)·칠관곽(漆棺槨) 1부씩을 더하여 제급(題給)하며, 3년 안의 제소(祭所)에는 소선(素膳)으로 공상(供上)하라.”
하매, 예조가 아뢰기를,
“노산 부인의 상례(喪禮)는 대군(大君) 부인의 예(例)에 의하게 하소서.”【완산군 부인의 예보다 후하게 한 것이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25.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중종11년, 1516년 12월 10일)
중종 27권,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12월 10일(병진) 2번째기사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26. 승지를 보내 노산군 묘에 치제(致祭)를 명하다(중종35년, 1540년 8월 5일)
중종 93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嘉靖) 19년) 8월 4일(계해) 2번째기사
-승지를 보내 노산군과 연산군의 묘에 사제하려 한다고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승지를 보내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의 묘에 사제(賜祭)하려고 한다. 이는 요즘 하지 않던 일이니 대신에게 수의하도록 하라.”
중종 93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嘉靖) 19년) 8월 5일(갑자) 1번째기사
- 연산군은 종사에 죄를 얻었으므로 관원을 보내 치제하지 말 것을 아뢰다
윤은보 등이 아뢰기를,
“노산군과 연산군에게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致祭)하는 일은 참으로 후하신 뜻입니다. 다만 연산군은 종사에 죄를 얻었고 일찍이 많은 성은을 입었으니 관원을 보내 치제하지는 마소서.”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27.[단종실록 부록]숙종 7년 노산 대군으로 추봉하다(숙종7년, 1681년 7월)
금상(今上)7년 신유(1681) 7월에 임금이 경연(經筵)에서 하교하기를,
“현덕 왕후(顯德王后)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위호(位號)를 추후로 회복[追復]하고 산릉(山陵)을 개봉(改封)하였으나, 노산(魯山)은 대군(大君)이라 일컫지 아니하니, 일이 미안하게 되었다. 모든 정비(正妃)의 소생은 대군이라 일컬으니, 노산군도 또한 대군이라 일컬음이 마땅하다.”
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니, 대신도 또한 이의(異議)가 없었으므로, 이에 추봉(追封)하여 노산 대군(魯山大君)을 삼고, 8월에 우승지(右承旨) 송창(宋昌)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치제문(致祭文)
“영령이시여! 그전에 어린 나이로 천지 비괘(天地否卦)하고 수뢰 둔괘(水雷屯卦)의 운(運)을 만나고 혁제(革除)의 때를 당하였으니,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저 약당(若堂)3409) 을 바라보니, 아득히 동협(東峽)에 있어, 지금에 이르도록 산록이 거칠어졌으매, 원금(冤禽)3410) 이 피눈물로 울고 있습니다. 누조(累朝)에서 봉식(封植)하여 향불이 결함이 없었고, 소릉(昭陵)을 고복(告復)하니 잃어버린 전례(典禮)를 이제 곧 거행하오나, 홀로 홍지(洪支)에 있어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흡족하게 하여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소자(小子)가 추념(追念)할 때 마음에 슬픔이 있어, 이에 「대(大)」자를 더하여 저의 신충(宸衷)을 결단해서, 이제 종신(從臣)을 보내어 형작(泂酌)을 대신 드리게 하오니, 어둡지 않으시거든 정성을 굽어살피소서.”
28.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숙종24년, 1698년 9월 30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9월 30일(신축) 1번째기사
-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전 현감(縣監)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바를 진달하였는데, 비답(批答)을 내리기 전에 빈청(賓廳) 대신(大臣) 이하가 마침 입시하였다.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그 상소를 대신에게 보이도록 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옛날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서 하청(河淸)의 운(運)을 만나 화란(禍亂)을 평정하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돌아갔습니다. 노산군(魯山君)께서는 어린 나이에 보위(寶位)에 올랐으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시고 하늘의 명에 응하고, 사람의 뜻에 따라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한 것을 본받아 별궁(別宮)으로 물러나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때 세조께서는 겸허하게 이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종팽(宗祊)의 부탁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목하고 겸허하게 사양하신 미덕(美德)은 요·순[唐虞]의 훌륭함과 맞먹는데, 그 선위를 받은 교서(敎書)를 살펴보면 또한 만세(萬世)에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신(六臣)의 변(變)이 뜻밖에 나오게 되었으며, 권남(權擥)과 정인지(鄭麟趾) 등이 은밀히 보좌한 논의가 또 따라서 이를 격동시켜, 세조께서 상왕을 보호하려는 은혜로 하여금 유종의 미(美)를 거둘 수 없게 했으니, 육신의 복위(復位) 계획은 다만 노산군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으므로, 충신(忠臣)·의사(義士)의 감회가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성상께서 환히 알고 계시어 이미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운명은 길고 짧음이 있고 일은 꺼리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한 조각 외로운 분묘(墳墓)가 저 멀리 황폐한 곳에 있은 지 이미 50여 년이 되었으나, 향화(香火)가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종(中宗)께서 등극하시고서 비로소 폐지되었던 은전(恩典)을 거행케 하여,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제물을 갖추어 치제(致祭)케 하였습니다.
그 후에 노산군에게 후사를 세워주자는 논의가 이약빙(李若氷)의 상소에서 처음 발의되었는데, 그 때의 대신(大臣)들은 올바르게 의논하지 못하여 심지어 과감하게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불측(不測)한 죄를 받게까지 하였으니,
아!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는 또 관찰사(觀察使) 정철(鄭澈)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묘표(墓表)를 개수(改修)하고 제물은 1품(一品)의 의식을 쓰게 하였으니, 우리 열성(列聖)께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은전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으며, 지하(地下)에서의 한(恨)도 거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서는 오히려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무릇 왕위에 올랐던 임금으로서 재앙을 만나 폐출(廢黜)된 경우, 한(漢)나라의 창읍왕(昌邑王)과 제(齊)나라의 울림왕(鬱林王)과 우리나라의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과 같은 이는 모두 혼암(昏暗)한 덕(德)으로 법도를 망쳤으므로 자신이 천명(天命)을 끊은 것이니, 그 칭호(稱號)를 깎아내리고 지위를 낮추어 죽지 않을 정도로 대해주면서, 제(帝)는 왕(王)으로 강등이 되고 왕은 군(君)으로 강등되는 것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선위(禪位)를 한 임금과 같은 경우는 일찍이 말한 만한 실덕(失德)이 없는데, 혹은 일시(一時)의 권의(權宜)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 어려운 사세(事勢)에 몰려서 자리를 사양하고 한가롭게 나가 있는 이야 주(周)나라·한(漢)나라 이후 어느 시대에는 없었겠습니까만, 존호(尊號)의 일컬음을 깍아내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선위한 일은 쫓겨난 것과는 다르고, 사양한 자취는 적대 관계보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신(臣)은 굳이 시대가 먼 전대(前代)의 일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공양왕(恭讓王)에 대해 살아서 대할 때나 죽어서 장사지냄에 있어 모두 제왕(帝王)의 예(禮)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성(異姓) 사이에 대(代)가 바뀔 때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왕실(王室)의
노산군이 온 나라에 군림(君臨)한 것은 하루아침이 아니었으며, 온 국민이 모두 사랑하고 추대할 줄 알았으며, 이미 왕위를 사양한 뒤에도 오히려 가까운 지친(至親)으로서 주고받는 성대한 일을 행하였는데, 도리어 왕호(王號)를 없애는 것이 옳겠습니까?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으니, 당시에도 왕호(王號)를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가령 육신(六臣)이 변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노산군이 그 천명(天命)을 끝까지 누리게 되었으면 장사나 제사 때에 반드시 왕례(王禮)를 사용했을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 육신은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복위를 꾀했다가 다만 그 화를 재촉했을 뿐인데, 노산군이야 어찌 거기에 관여함이 있었겠습니까?
관고(貫高)의 변(變)에 조오(趙敖)가 함께 연좌되지 않았던 것은 그 모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니 당시 노산군에게 왕호(王號)를 다시 일컬을 수 없었던 것은 혹 사세에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어찌 오늘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육신에 대해서는 그 절의(節義)를 아름답게 여기셔서 특별히 정포(旌褒)하시고 사당을 세우도록 윤허(允許)하여 빛나는 편액(扁額)까지 하사(下賜)하셨으니, 육신의 고충 열지(孤忠烈志)는 성상에게 인정을 받아 백대(百代) 이후에까지 더욱 빛나게 된 것입니다.
아! 저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에 죽은 육신(六臣)은 이미 성상께서 정포해주시는 아름다운 은혜를 받았는데, 더구나 그 육신의 옛 임금으로서 그 모의도 알지 못하였으며, 일찍이 그 덕에 하자도 없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히 죽지도 못하였고, 제사 때에 왕례(王禮)를 쓰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殿下)의 부족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시대가 바뀌고 일이 지나가 언덕은 이미 평평해졌고 쑥대가 우거지고 풀이 무성하여 여우와 토끼들이 뛰어다니며, 봄바람의 두견새 소리는 시인(詩人)들의 싯귀에 들어가며 보리밥 한식절(寒食節)에는 시골 늙은이들의 탄식 소리를 되삼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무한한 울분이 지하(地下)에서 엉키고 맺혀서 백세(百世)토록 변화하지 않고 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또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서 양양(洋洋)하게 오르내리실 적에 외로운 고혼(孤魂)을 다 슬퍼하지 못함이 있는지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왕호(王號)를 추복(追復)하여 제사 때에는 왕례를 쓰며, 그 침원(寢園)을 봉하여 수호군(守護軍)을 더 두고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그 의물(儀物) 갖추는 것을 한결같이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를 추복한 고사(故事)와 같게 한다면, 법으로 보더라도 참람함이 되지 않고 옛일을 참고하더라도 진실로 인정이나 예절에 부합되는 것이니, 신(神)을 위로할 수가 있게 되어 천심(天心)이 기뻐할 것이며, 인정(人情)도 반드시 흡족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臣)은 중종(中宗)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일에 대하여 더욱 가슴 아프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이 음학 무도(淫虐無道)하여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우리 중종 대왕께서 밖으로는 군신(群臣)들의 추대(推戴)를 받고 안으로는 모후(母后)의 명을 받아, 잠저(潜邸)에서 용비(龍飛)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부인(夫人) 신씨(愼氏)는 배필이 된 지 여러 해였으나, 곤범(壼範)에 결함이 없어 곤위(壼位)에 올라, 명분이 올바르고 의리에 순응하여 왕후[翟褕]의 높은 자리에 앉아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았으므로, 종묘사직에 주인이 있고 나라 사람들이 기대를 하였었는데, 원훈(元勳)이었던 박원종(朴元宗) 등은 다만 자신들의 문제만 생각하고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서 종사(宗社)의 계획을 핑계 삼아, 정청(庭請)의 논의을 주도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해서 마침내 폐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경장(更張)하는 초기에 근본을 단정히 해야 하는 교화를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삼가 중종께서 정청(庭請)에 답한 내용을 보면,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으니, 중종께서 그리워하여 차마 버리지 못한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훈신(勳臣)의 강청(强請)에 못 이겨서 은혜를 끊고 인정을 자르고서 폐출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박원종 등이 제멋대로 협박한 죄는 어떻게 정의(正義)로운 선비의 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삼가 그 때에 정청(庭請)의 계청(啓請)을 보니, ‘의거(義擧) 때에 신수근(愼守勤)을 먼저 제거시킨 것은 대사(大事)를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대내(大內)에 입시(入侍)하고 있으니, 만약에 곤위(壼位)에 있게 되면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협박하는 말입니다. 당초에 신수근을 죽인 것도 이미 반드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또다시 그것으로써 신씨를 폐출시키는 구실의 자료로 삼고 있으니, 신은 신씨가 연좌된 죄명은 무엇이며 폐출된 것은 무슨 의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안(上官安)이 모반(謀反)하여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으나, 상관후(上官后)는 그 일에 관여하여 들은 적이 없으므로 폐출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심온(沈溫)도 태종대왕(太宗大王)에게 죄를 입었으나,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모의(母儀)는 처음처럼 변함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수근의 죄는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신씨에게 연루될 수 있겠습니까?
훈신(勳臣)들이 그러한 역모로 억측하여 협박한 것은 국모(國母)의 아버지를 죽인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조정에서 있으면서 깊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서 훗날의 근심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죄명도 없고 경우에도 없는 말을 연출하여 몸을 보전하고 은총을 굳히는 계획을 삼았으나, 그것이 결국 스스로 임금을 무시하는 행위에 빠지고 만세(萬世)에 죄를 얻게 됨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은 군자(君子)였습니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돌아갔을 때에 상소하여, 박원종 등의 임금을 협박한 죄를 거론하며 신씨가 죄 없이 폐출당한 사유를 극진하게 말하여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계청(啓請)했었는데, 그 말이 엄격하고 강직하여 오늘날 읽어보아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生氣)가 있습니다.
아깝게도 그렇게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논의도 당시의 모순된 의논에 의해 막혀서 시행되지 아니하였으니, 신은 매우 애통하게 여깁니다.
그 후에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대를 이어오면서 빠진 전례(典禮)를 강구(講究)하였으나, 이 일만은 추복(追復)하자는 논의가 없으니, 신도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당시에 신씨를 폐출시킨 것은 이미 중종의 뜻이 아니니 위호를 추복하는 것이 어찌 중종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때로는 혹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으니, 오래 되었다고 하여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신씨를 추복하는 일은 늦출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만약 조종(祖宗)들도 미처 못한 일이라 하여 미루신다면, 신은 거기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릉(貞陵)은 폐위(廢位)된 지 2백 년이 넘었으나 현종(顯宗)께서 복위(復位)시켰고, 소릉(昭陵)은 폐위(廢位)된 지 50년이 넘었으나 중종께서 복위시켰습니다.
그 밖에 선비들이 억울하게 화를 당한 이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같은 무리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뒤에는 모두 신원되어 여러 조정에서 정포(旌褒)와 추증(追贈)을 받지 않음이 없었고, 그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고쳐야 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논한 바 두 가지는 그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으로서 전례(典禮)에 있어 거행(擧行)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명의(名義)에 있어서 추복(追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조정 대신들에게 널리 물으셔서 그냥 두었던 전례(典禮)를 수거(修擧)하여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신다면, 비단 우리 성상께서 전대에 빛나고 후세에까지 빛이 날 성대한 덕이고 아름다운 일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오늘날 인심(人心)을 위로하고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크나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말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널리 물어 상의해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널리 문의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참고하게 하였다.
승지(承旨) 송상기(宋相琦)가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집(文集)과 만필(漫筆) 중에서 참고가 될 만한 문자(文字)는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넣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29. 노산군의 추복을 청한 신규의 상소에 대해 널리 의견을 묻기로 하다 (숙종24년, 1698년 10월 20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0월 20일(신유) 4번째기사
-노산군의 추복을 청한 신규의 상소에 대해 널리 의견을 묻기로 하다
30. 종친과 문무 백관을 대정에 모아 노산군과 신비의 위호를 추복하는 일을 논의하다(숙종24년, 1698년 10월 23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0월 23일(갑자) 1번째기사
- 종친과 문무 백관을 대정에 모아 노산군과 신비의 위호를 추복하는 일을 논의하다. ~회의에 참석한 백관(百官)이 무릇 4백 91인이었는데,~백관(百官)들 각자가 글로 올린 것을 모두 봉(封)하여 바쳤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대정(大庭)에 모아,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을 문의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삼가 《실록(實錄)》의 등본(謄本)을 보건대, 노산군(魯山君)으로 위호(位號)가 강등(降等)된 것은 송현수(宋玹壽)의 변고(變故)가 있은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중종(中宗) 때에 노산군에게 후사(後嗣)를 세워 주는 문제를 의논했는데, 상신(相臣) 정광필(鄭光弼)이 말하기를, ‘후세에서는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후사를 세워 주는 문제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와 같았는데,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예전(禮典)인데 이제 도리어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愼妃)를 복위(復位)시키는 논의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의 의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는 중종이 당저(當宁)해 있었고 곤위(壼位)가 바야흐로 비어 있었는데, 그때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하교(下敎)에 이르기를, ‘이것은 큰 일인데 어찌 대신(大臣)의 말을 듣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일찍이 위호를 추상하는 논의가 조정에 들리지 아니하였는데, 그것은 어찌 그 사체와 예절(禮節)이 김정이 상소했을 때와 같지 아니하여서 그러한 것이었겠습니까? 예(禮)로써 따지면 분명한 문자와 정확한 증거를 근거삼을 만한 것이 없고, 일로써 따지면 진실로 조종조(祖宗朝)의 처분에 관계됩니다.
조주(祧主)를 영녕전(永寧殿)에 곧바로 올리는 한 문제는, 송(宋)나라의 곽후(郭后)의 일을 유창(劉敞)이 의논한 것과 그 미안하고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오늘날 의논하는 자의 논의와 같으니, 더욱더 십분 신중하여 지당(至當)하게 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이 선위(禪位)했을 때의 일은 대체로 시골 마을의 아낙네와 어린이들도 지금까지 슬퍼하고 있으니, 이는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대의 제왕(帝王)은 비록 선위한 이성(異姓)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를 추후하여 깎아내린 일이 없으며, 명나라의 일도 예를 삼을 만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제기되고 있는 숭봉(崇奉)의 논의도 마땅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만, 다만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에 관계된 것이므로, 신자(臣子)로서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 중종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김정(金淨) 등의 상소를 살펴보면 공의(公議)의 소재(所在)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는 진실로 추복(追復)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후세에 있어서는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제신(諸臣)들이 인용(引用)한 바의 유원부(劉原父)의 의논과 정이천(程伊川)9696) 의 말은 가장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이렇게 추측해보면, 이제 와서 추거(追擧)한다는 것은 아마도 예(禮)의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장(閔鎭長)은 말하기를, “수백 년 동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그 두 일에 대해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본성(本性)에 있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대(前代)의 고사(古事)에도 분명히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위호(位號)를 추복하는 것은 계지 술사(繼志述事)의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역대의 임금이 서로 계승하면서 오래도록 거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인데, 하루 아침에 결단하여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미안함이 있을 듯합니다.”하고,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은 질병으로 인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가서 물으니, 말하기를, “당초에 노산군(魯山君)을 강등(降等)시켜 폐위(廢位)시킨 것은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신하의 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성상께서 이미 그 신절(臣節)을 포상하셨으니, 그들의 옛 임금에 대해서 다시 혐의를 남겨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의 위호를 추복시킨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니, 그것이 또 옛 예로서 충분히 증거가 될 만한 것입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폐위를 계청했을 때에 중종(中宗)께서 상당히 난처한 뜻을 보였으며, 《실록(實錄)》에 기록된 것만 해도 충분히 고증이 되어 믿을 수가 있으니, 위호를 추가하여 청묘(淸廟)에 올려서 배향(配享)하는 것은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유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臣)은 예전(禮典)에 실로 밝지 못하오니, 감히 억측의 견해로 논단(論斷)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魯山大君)이 선위(禪位)한 뒤의 일은 모두 신료(臣僚)들의 계청(啓請)에 의한 것이고, 신비(愼妃)를 폐위시킨 것은 사실 세 공신(功臣)이 후환(後患)을 염려하여 몸을 보전할 계책이었지 중종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배려하셔서 이렇게 널리 자문을 구하시니, 수백 년 동안 한이 맺혔던 인심(人心)이 거의 조금이라도 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건대, 나라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고 큰 선비와 훌륭한 보필들이 대대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일찍이 이에 대해 의논한 적이 없었던 것은 어찌 의논이 감히 거기에 미칠 수가 없었고, 일도 지극히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에서 시행하지 못했던 예를 아마도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하고,
우참찬(右參贊) 최규서(崔奎瑞)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추복(追復)한 것과 아주 가깝기는 하나, 일은 다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은 송(宋)나라 원우(元祐) 때에 맹황후(孟皇后)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서로 같으나,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이 이미 있었으니, 오늘의 일에 끌어다가 의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중대한 일을 억측으로 논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을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함은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우리나라 중종께서 소릉(昭陵)을 복위시키고, 현종(顯宗)께서 정릉(貞陵)을 복위시킨 일이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므로, 후세에 할말이 있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근거할 수 있는 전례를 따라 여러 대에 미처 못했던 일을 거행하는 것은 아마도 계지 술사(繼志述事)하는 성덕(聖德)에 빛이 날 듯합니다.”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위호(位號)를 복위시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이 슬픔을 품고 있은 지가 2백여 년이 되었으니, 지금 추복할 것을 의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 조정에서 일찍이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그 일이 성조(聖祖)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신씨(愼氏)의 일은 여러 훈신(勳臣)들이 방자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우리 중종[中朝]으로 하여금 배필의 윤기(倫紀)를 보전 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인심(人心)이 원통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 후 1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일을 논의하여 계청(啓請)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아마도 선대의 대를 이어받은[繼體] 뒤에는 예(禮)에 거리끼는 바가 있어서 감히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가지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십분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하고,
행 사직(行司直) 박경후(朴慶後)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예부터 유전되어 지금까지도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역대 조정에서 명신(名臣)과 숙유(宿儒) 중에 추복(追復)에 뜻을 둔 이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것은, 어찌 요즈음 세상 사람보다 의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했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춘추(春秋)》의 휘친(諱親)하는 도리에 있어서 말하기 어려운 바가 있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처분한 일을 감히 갑자기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인데, 신과 같은 천견(淺見)으로서는 진실로 논의하기 어렵습니다.”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인환(李寅煥), 행 부제학(行副提學) 조상우(趙相愚), 이조 참의(吏曹參議) 홍수헌(洪受瀗)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부인들과 어린이까지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으니, 인심(人心)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에 와서 이미 폐지된 위호(位號)를 다시 되찾고 이미 쫓아냈던 위(位)를 다시 올려 받들고자 한다면, 지난 역사를 고찰해서 반드시 십분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낸 연후에 그 근거에 의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명나라의 경태제(景泰帝) 때의 일과 송(宋)나라의 맹후(孟后)의 일도 같음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경제(景帝)는 영종(英宗) 때에 폐위(廢位)되었다가 헌종(憲宗) 때에 복위되었으니, 이는 조카가 숙부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다는 것이고, 맹후는 철종(哲宗) 때에 쫓겨났다가 휘종(徽宗) 때에 복위되었는데 상 태후(尙太后)가 이를 주관하였으니, 이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지 않다는 것인데, 그 밖에 근거할 만한 일이 있습니까? 감히 억측의 견해를 가지고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례(典禮)를 널리 고찰하여 큰 일에 흠이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하고,
장령(掌令) 김덕기(金德基), 응교(應敎) 김시걸(金時傑), 지평(持平) 정유점(鄭維漸), 교리(校理) 이희무(李喜茂), 지평(持平) 이언경(李彦經)들은 모두 말하기를, “시행하는 것이 옳기는 하되, 또한 열성조에서 시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교리(校理) 이인병(李寅炳)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오늘날 감히 의논할 수가 없고 감히 말할 수가 없는 의리가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을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 역시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부응교(副應敎) 김진규(金鎭圭)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제(景帝)를 추복(追復)시킨 것이 좋은 예(例)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금 당장 추복하게 되면, 이는 이미 조묘(祧廟)에 관계되는 것인데 조묘를 영녕전(永寧殿)에 추부(追祔)하는 것은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으니, 이것이 장애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씨(愼氏)에 있어서는 이미 폐위(廢位)된 뒤에 추복하는 것이 아마도 《춘추(春秋)》의 뜻에 어긋날 듯합니다.”하고,
정언(正言) 김창직(金昌直)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을 추복하는 것은 진실로 폐지할 수 없는 논의입니다. 그러나 신씨를 복위(復位)시키는 문제는 중종께서 윤허(允許)하지 않으신 것이니, 이제 와서 추복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부교리(副校理) 남정중(南正重)은 말하기를, “이 일은 나라 사람들의 다 슬퍼하는 것입니다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옛 기록을 고찰하여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갑자기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고,
정언(正言) 김상직(金相稷)도 어렵게 여겼고 신씨 문제에 이르러서는,
“근거할 만한 예(禮)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백관(百官)이 무릇 4백 91인이었는데, 그 의논에 있어서는 혹은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혹은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시행할 수 없다고 한 자도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마침내 백관(百官)들 각자가 글로 올린 것을 모두 봉(封)하여 바쳤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 일은 이미 마음속으로 말없이 계획했던 것이나, 마땅히 수의(收議)한 내용이 다 이르기를 기다려 조처하겠다.”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밖에 있는 대신(大臣)·유신(儒臣)의 수의가 다 이른 다음에 마땅히 빈청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보내겠으니, 그날에 대신(大臣)·육경(六卿)·판윤(判尹)·삼사(三司)를 모두 명초(命招)하라.” 하였다.
31. 비망기를 내려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하다(숙종24년, 1698년 10월 24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0월 24일(을축) 3번째기사
- 비망기를 내려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하고 신비는 추복하지 않기로 하다
임금이 마침내 빈청(賓廳)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기로는 세조[光廟]께서 선위(禪位)를 받으신 초기에는 노산 대군(魯山大君)을 존봉(尊奉)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았고, 또 한 달에 세 번씩이나 문안하는 예(禮)를 시행하였다. 불행하게도 마지막에 내린 처분은 아마도 세조의 본뜻이 아닌 듯하며, 그 근원을 추구해보면 육신(六臣)에게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육신이 이미 정포(旌褒)되었는데, 그들의 옛 임금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것은 또다시 어떤 혐의와 장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명나라 경태제(景泰帝)의 일은 비록 서로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본받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제 추복하게 되면, 이는 세조의 성덕(盛德)에도 더욱 빛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아! 지난날 신규(申奎)의 상소를 반도 읽기 전에 슬픈 감회가 저절로 마음속에 간절해져, 일찍이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거론했다는 것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불평스러운 생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연석(筵席)에서 먼저 묻게 된 까닭이었다. 아!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은 서로 그렇게 먼 것이 아니니,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열락(悅樂)하여 이렇게 서로 감동할 이치가 있었던 것인가? 소원(疏遠)한 신하로서 지극히 중대한 일을 거론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일을 끝내 시행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천자(天子)나 왕가(王家)의 처사(處事)는 필부(匹夫)와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혹 판단에 의해 결정하고 논의에 구애받지 않는 경우도 옛부터 있었으니, 진실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반드시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성대한 의식을 시행하도록 하라.
32. 여러 대신을 인견하여 노산군의 복위 의절을 논의하다.
(숙종24년, 1698년 10월 29일)~후릉(厚陵)의 예에 의하다.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0월 29일(경오) 1번째기사
- 여러 대신을 인견하여 노산군의 복위 의절을 논의하다.~임금이 후릉(厚陵)의 석물(石物)이 가장 간략하고 적다고 하여 그 예에 의하여 할 것이며, 이 뒤에도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는데, 이때에 장차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복위(復位) 의절(儀節)을 거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의정 유상윤(柳尙運)이 품계(稟啓)하기를, “서울에서는 복위하여 부묘(祔廟)하는 호(號)로, 외방에는 능(陵)을 봉(封)한다는 호로 하여 각각 도감 제조(都監提調)를 차정(差定)하소서.”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최규서(崔奎瑞)는 또 아뢰기를, “각릉(各陵)에 상설(象設)이 많고 적음이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옛 관례를 따라 쓰게 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후릉(厚陵)의 석물(石物)이 가장 간략하고 적다고 하여 그 예에 의하여 할 것이며, 이 뒤에도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33. 노산군과 부인의 시호를 추상하다(숙종24년, 1698년 11월 6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1월 6일(정축) 2번째기사
- 노산군의 시호를 추상하다
대신(大臣)·육경(六卿)·의정부의 서벽(西壁)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들을 빈청(賓廳)에 모이라 명하였다.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는데, 중정 정수(中正精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대려 자인(大慮慈仁)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여 뜻이 화(和)한 것을 장(壯)이라 하고, 의(義)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목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니, 순행(純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니, 예를 지키고 의를 붙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중심(中心)으로 일을 공경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아 능히 엄정할 수 있음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감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능호(陵號)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34.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신위를 창경궁 시민당으로 옮기다 (숙종24년, 1698년 11월 21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1월 21일(임진) 1번째기사
-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신위를 창경궁 시민당으로 옮기다
단종 대왕(端宗大王)과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신위(神位)를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겼다.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 및 승지(承旨), 사관(史官), 병조(兵曹), 도총부 당상(都摠府堂上), 낭청(郞廳) 각 한 사람씩이 배종(陪從)하였다.
35. 신주판(神主版)을 같은 함[櫝]에 넣어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에 매안키로 하다 (숙종24년, 1698년 12월 16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2월 16일(병진) 1번째기사
-서울에 있는 구주는 사릉에, 영월에 있는 위판은 장릉에 매안하기로 하다
이에 앞서 예조(禮曹)에서 단종 대왕의 구주(舊主) 및 장릉(莊陵)에서 받들 위판(位版)을 장릉에 매안(埋安)하고, 왕비의 구주(舊主)를 사릉(思陵)에 매안할 것을 품정(稟定)하였다.
이때에 최석정(崔錫鼎)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선유(先儒)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살아 있을 때는 부부가 마땅히 유별(有別)하나 죽은 후에는 혼기(魂氣)가 서로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궤탁(几卓)에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대왕과 왕비가 비록 따로 장사를 지냈으나 같은 함[櫝]에 넣어 함께 매장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도 당연합니다. 또한 2백 년 간이나 같은 함에 들어 있던 신주판(神主版)을 나누어 양릉(兩陵)에다 매장한다면, 비단 예(禮)의 뜻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리(神理)에 있어서도 또한 부족한 것이 있을 듯합니다. 서울에 있는 구주(舊主)는 이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사릉(思陵)에 함께 매안(埋安)하고, 영월(寧越)에서 받들던 위판(位版)도 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장릉(莊陵)에 매안하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석정이 또 말하기를, “단종 대왕이 승하하시던 처음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육신(六臣)의 사당에 배향(配享)하게 된 것입니다. 향리(鄕吏)는 이미 천인(賤人)이 아니며 충절 또한 가상하니, 이 전대에 없던 성대한 전례(典禮)를 추거(追擧)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포증(褒贈)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나, 지금 듣건대 자손이 없으니 만약 낭관(郞官)의 직위로써 특별히 포증(褒贈)을 더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들었다.”하고, 이에 해조(該曹)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최석정이 또 말하기를, “신이 띤 봉릉 도제조(封陵都提調)는 서울에 있을 때에는 이 칭호가 나쁘지 않으나, 국외(局外)의 장소에다 설치 할 때에는 모사(某使)라 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총호사(摠護使)라는 칭호는 비록 사용할 수 없으나 총리사(摠理使)로 부른다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36.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청시례를 행하고 시민당에 안치하다 (숙종24년, 1698년 12월 22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2월 22일(임술) 1번째기사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청시례를 행하고 시민당에 안치하다
하루 전에 복위 도감(復位都監)에서 단종 대왕(端宗大王)과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옥책(玉冊)·금보(今寶)를 받들고 대궐로 들어와 별전(別殿)에 봉안하였다가 이 날에 안으로부터 봉출(奉出)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유상운(柳尙運)이 배종(陪從)하여 종묘(宗廟)에 나아가 청시례(請諡禮)를 행하고, 예가 끝난 후에 환봉(還奉)하여 시민당(時敏堂) 악차(幄次)에 임시로 안치시켰다.
37. 단종 대왕의 신실을 서익실 제4실로 정하다(숙종24년, 1698년 12월 24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2월 24일(갑자) 1번째기사
- 단종 대왕의 신실을 서익실 제4실로 정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신실(神室)은 마땅히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아래 덕종 대왕(德宗大王)의 위에 봉안하여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부묘(祔廟)를 고유(告由)할 때에 덕종 대왕의 신실(神室)을 이봉(移奉)하는 뜻을 함께 고하였던 것인데, 이날 이에 서익실(西翼室) 제4실에 강봉(降奉)하니, 4실에 마침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녕전 신위
영녕전에는 중앙의 각 신실에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협실(西夾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東夾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34위 신주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38.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구주에 시호를 올리는 예를 행하다 (숙종24년, 1698년, 12월 25일)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2월 25일(을축) 2번째기사
-단종 대왕과 정순 왕후의 구주에 시호를 올리는 예를 행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과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구주(舊主)에 시호 올리는 예를 행하였다.
대왕의 시책문(諡冊文)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왕위을 미루어 나라를 사양하니, 지극한 덕(德)은 이를 수 없습니다. 시호(諡號)를 올리고 이름을 높이어 거행하지 못했던 의식(儀式)을 이에 실행하니, 이에 장차 책문(冊文)을 밝혀 감히 은미한 정성을 진술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공의 온문 대왕(恭懿溫文大王)은 어진 명성과 아름다운 태도를 지녔으며, 세손(世孫)·원사(元嗣)로서 어린 시절부터 세종(世宗)이 등에 업어주는 사랑을 입었는데 잇달아 대상(大喪)을 만났으며, 문종(文宗)으로부터 회면(頮面)의 가르침을 받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나라의 운명에 어려움이 많아 역수(歷數)가 돌아감이 있게 되어 상궁(上宮)에 옮겨 거처하니, 예(禮)는 더욱 존양(尊養)을 다하였는데, 휘호(徽號)를 고사(固辭)하니 뜻은 더욱 겸양함이 있었습니다. 또 주나라 태백(泰伯)이 왕위를 버리고 형만(荊蠻)으로 달아난 것을 사모하였는데, 이어 순(舜)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한 결과를 빚었습니다. 화천(花天)이 멀어졌으니, 아! 하늘의 큰 명(命)이 연장되지 않아 깊은 산 속에 장사를 지내니, 욕의(縟儀)가 갖추어지지 못했음을 슬퍼합니다. 지금 거의 2백 년이 지났으나 오히려 천만 인의 마음에 유감이 있어, 이에 드디어 많은 벼슬아치들의 의논을 모아 마침내 열조(列祖)에 승부(陞祔)하여 호분(虎賁)으로 엄하게 호위하니, 마치 익실(翼室)을 택종(宅宗)으로 맞아들이는 것과 같고, 용을 그린 깃발로서 경계하여 가니 마치 면복(冕服)을 받들고 박(亳)으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비록 전서(傳序)가 이미 조위(祖位)에 이르렀으나, 예절과 은혜가 떳떳하게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정수(精粹)하고 자인(慈仁)하여 경쟁하고 다툼이 없었으며, 바른 도리를 실천하고 의(義)에 말미암았으므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묘호(廟號)를 이름지어 찬양함에 이르니, 더욱 예를 지켜 공손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만승(萬乘)의 지위를 가벼이 여기었으니 진실로 그 고풍(高風)을 비유하기 어려우며, 덕이 천년토록 무거우니 진실로 그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에 합당합니다. 이에 길일(吉日)을 점쳐 밝은 제사를 드리오니,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유상운 (柳尙雲)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받들고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니, 우러러 바라건대 예령(睿靈)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굽어 살펴 주소서. 처음으로 큰 예를 행하오니, 바라건대 이것을 흠향하시고 크나큰 아름다움을 거듭 내리시어 더욱 번창하고 강성(强盛)하게 해주소서.”하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지어 바쳤다.】
왕후의 시책문(諡冊文)에 이르기를,
“삼가 이름을 드러내어 아름다움을 밝혀 제부(躋祔)의 욕의(縟儀)를 추수(追修)하옵니다. 아름다운 덕을 나란히 높여 이에 예절과 은혜의 비워두었던 의식(儀式)을 거행하여 비로소 명분과 실제에 맞게 되었으니, 실로 신과 사람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의덕 왕후(懿德王后)는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군주의 아름다운 배필이 되어, 자태가 아리땁고 지혜가 조숙하셨는데, 처음에 청명(淸明)함을 도왔으며, 깊은 믿음을 은밀히 도와 내외가 화목하도록 하였습니다. 권도(權道)를 알아 선양(禪讓)함에 이르러서도 또한 보필하여 이루어지게 하여 태비(太妃)의 높은 이름을 받고, 또한 빛나는 아름다움을 받았고, 일국의 융성한 공양을 누리니, 모두가 넉넉함을 기뻐하였습니다. 불행히도 시변(時變)이 계속 일어나 드디어 조정의 의논이 틀려지게 되었습니다. 해가 숨고 달이 어두어져 황도(黃道)와 함께 밝아야 할 빛을 잃었으니, 물가에 가도 생각하고 산에 가도 슬퍼하여 창오(蒼梧)에 따라가지 못한 원통함이 맺히었습니다. 곤궁함에 처하여서도 왕비의 자세는 티가 없었고, 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라 보산(寶算)이 더욱 멀었습니다. 신리(神理)가 오랫동안 하늘에서 울결(鬱結)되어 있으니 아름다운 사업이 가리워지고, 묘향(廟饗)이 오랜 세월 동안 빠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였습니다. 생각건대 큰 칭호가 어찌 유현(由幽)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를 빠뜨렸던 것은 혹 구원(久遠)한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제(古制)를 참조하여 한결같이 미충(微衷)으로 결단하였습니다. 헤아려 보건대 저 천도는 반드시 펴지는 것이니 감히 이에 나타내어 게시하시어, 바라건대 우리 종사(宗事)에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마땅히 정문(情文)을 다 갖추어 이에 왕의 법도를 회복하여 조실(祧室)에 올려 대(代)를 차례지었고, 아울러 곤위(壼位)를 성대하게 하여 책보(冊寶)를 올려 이름을 바꾸었으니, 마치 휘작(翬翟)이 거듭 빛나고 건곤(乾坤)이 완연하게 제체(齊體)이옵니다. 생각하건대 성조(聖祖)께서 숭봉(崇奉)하는 아의(雅意)가 어찌 빛나지 않을 것이며, 열조(列朝)의 오르내리는 밝은 영(靈)들이 말없이 열어주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떠도는 영이 여기에 다 모이니, 한릉(漢陵)의 염유(簾帷)가 비로소 새로와졌고, 경광(耿光)이 다시 밝아지니 주묘(周廟)의 완염(琓琰)이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 옛일을 생각하니 실로 감회가 더하여, 재물을 진설하여 경건함을 다합니다.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유상운(柳尙運)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諡)를 추상(追上)하기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오니, 깊은 정성을 굽어 헤아리시어 밝게 영감(英鑑)을 베푸소서. 동사(彤史)에 아름다움이 전해짐은 비록 2백 년이 지났으나 징험할 수 있으며, 요도(瑤圖)에 경사가 넘침은 천만 년이 되도록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대제학(大提學)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바쳤다.】
39.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숙종25년, 1699년 2월 10일)
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2월 10일(경술) 1번째기사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사릉(思陵)의 화소(火巢)안에 정중휘(鄭重徽) 집안의 오래 된 분산(墳山)이 있는데, 이미 옮기지 말게 하였습니다. 능소(陵所)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산 밑의 조금 먼 곳에서 바라보고 지내게 할 것이요, 제사지내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이 의당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장릉(莊陵)의 헌관(獻官)은 의당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차정(差定)하여야 하니, 영월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사체(事體)를 높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최석정이 또 아뢰기를, “육신(六臣)의 사당(祠堂)을 그대로 본존시키고, 엄흥도(嚴興道)를 포증(褒贈)한 것은 성스럽고 덕스러운 일입니다. 듣건대 원호(元昊)는 문종조(文宗朝)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는데, 단종(端宗) 초년에 원주(原州)에 물러가 살다가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영월로 들어가 3년상(三年喪)을 입었다고 합니다. 광묘조(光廟朝)에 특별히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하고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정표(旌表)하여 권장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인(士人) 김시습(金時習)은 광묘조(光廟朝)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還俗)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子孫)이 없습니다. 그의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원호는 정려(旌閭)하고 김시습은 증직시키고 사제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집의(執義)에 추증하였다.
처음에 김시습(金時習)은 장릉이 손위(遜位)하였다는 말을 듣고, 바야흐로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다가 책을 불사르고 입선(入禪)하였으며, 시문(詩文)에다 자신의 뜻을 붙였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백이(伯夷)라고까지 일컬었는데, 세상에서 매월당(梅月堂)이라고 칭하였다.
40. 사릉(思陵)을 봉(封)하였다(숙종25년, 1699년 2월 20일)
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2월 20일(경신) 1번째기사
사릉(思陵)을 봉(封)하였다.
41. 장릉(莊陵)을 봉(封)하였다.(숙종25년, 1699년 3월 1일)
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3월 1일(경오) 2번째기사
장릉을 봉하는 데 노역의 피폐가 큰 영월 등에 부세를 감면하다
장릉(莊陵)을 봉(封)하였다. 능(陵)이 먼 지역이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고, 또 눈이 얼어붙은 몹시 추운 때 3개월 동안의 동역(董役)에 민력(民力)이 크게 지쳤으므로, 총리사(摠理使) 이하가 연명(聯名)으로 장문(狀聞)하기를,
“영월(寧越)이 노역(勞役)의 피폐가 제일 심했으니, 대동(大同) 일등(一等)을 견감시키소서. 평창(平昌)·정선(旌善)·제천(堤川)에는 재목을 베고 돌을 뜨는 노역이 있었으니, 반을 견감시켜 주소서.”하였다.
42. ~장릉에 비석 설치를 명하다(영조9년, 1733년 6월 19일)
영조 34권, 9년(1733 계축 / 청 옹정(雍正) 11년) 6월 19일(무진) 1번째기사
~장릉의 비석 설치 문제를 논의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경기 감사 신방(臣昉)과 전 감사 윤양래(尹陽來)가 함께 들어왔다.
~ 윤양래가 말하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재임(在任)할 때 장릉(莊陵)을 봉심(奉審)하였는데 당초의 상설(象設)이 단지 망주(望柱)와 무석인(武石人)만 있고 비석이 없었습니다. 능소(陵所)가 대단히 먼데 만일 비기(碑記)가 없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무엇으로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알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도(北道)를 안무(按撫)하면서 모든 능(陵)을 두루 봉심하였는데 역시 다 비석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두어 자를 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릉에도 역시 여기에 의하여 비석을 세워 아무 대왕(大王) 아무 능이라 쓴다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침이 있는 데가 대단히 멀고 또 성고(聖考)께서 추복(追復)한 것이 뜻이 있으니 선대(先代)의 뜻과 서업을 계승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적(文跡)이 없을 수 없다. 듣건대, 북도의 모든 능의 비석도 역시 다 검약하다 하니 여기라 해서 또한 어찌 반드시 풍대(豐大)하게 하겠는가? 아직 앞으로 봐서 본도(本道)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윤양래가 말하기를,
“영월에는 원래 비석에 마땅한 돌이 없습니다. 신이 재임할 때에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비석을 세웠는데 돌의 품질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으니, 경사(京司)에서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서 수로(水路)를 따라 능소로 운반하면 편리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월 수령이 오히려 엄호장의 비석을 세웠는데, 나라에서 능침에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묘당(廟堂)에 물어 거행하게 하였다.
엄흥도는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했을 때 충성을 다하여 노고를 바친 사람이다.
1733년, 한양에서 표석을 만들고 새겨 한강->남한강->영월의 합수머리 까지 수로(水路)를 따라 운반하여 장릉에 세운 비석이다.
한양에서 표석을 만들고 새겨 한강->남한강->영월의 합수머리 까지 수로(水路)를 따라 운반하여 장릉에 세운 비석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 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뒷면 :
端宗大王 諱 文宗大王 嫡嗣
단종대왕 휘 문종대왕 적사
母妃 顯德王后 權氏 以 正統 辛酉 七月二十三日 誕生
모비 현덕왕후 권씨 이 정통 신유 7월 23일 탄생
王 戊辰 封 王世孫
왕 무진 봉 왕세손
景泰 庚午 冊封 王世子
경태 경오 책봉 왕세자
壬申 五月 文宗 昇遐 王嗣 登
임신 5월 문종 승하 왕사 등
大位 乙玄 尊爲 上王 上號 恭懿溫文 天順 丁丑
대위 을현 존위 상왕 상호 공의온문 천순 정축
王在 江原道 之 寧越郡 是年 十月二十四日 薨 春秋 十七
왕재 강원도 지 영월군 시년 10월24일 훙 춘추 17
葬 郡 北 辛坐乙向 原
장 군 북 신좌을향 원
肅宗大王 二十四年 戊寅 追諡 王恭懿溫文 純定安莊 景順 敦孝大王
숙종대왕 24년 무인 추시 왕공의온문 순정안장 경순 돈효대왕
廟號 端宗 陵日莊 附 永寧殿 上之九年 癸丑 命 竪石于 陵以識之
묘호 단종 릉일장 부 영녕전 상지 9년 계축 명 수석우 릉이식지
[해석]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단종대왕의 휘(는 ‘홍위’로) 문종대왕의 적사(본처가 낳은, 집안의 대를 이을 맏아들)다.
모비인 현덕왕후 정통(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36~1449) 신유년(1441년, 세종23년) 7월23일에 왕을 낳으셨다.
무진년(1448년, 세종30년) 왕세손에 봉해지고,
경태(명나라 대종 때의 연호 1450~1456) 경오년(1450년, 문종 즉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신년(1452년, 문종2년) 5월 문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세자로서 왕위에 오르셨다.
을해년(1455년, 세조 즉위) 왕을 높여 상왕으로 삼으며, 공의온문 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천순(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57~1464) 정축년(1457년, 세조3년) 왕께서 강원도 영월군에 계셨는데, 그해 10월24일에 훙서(임금,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하셨다.
춘추(나이)는 열일곱이셨다.
영월군 북쪽 신좌을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숙종대왕 24년 무인(1698년)에 ‘공의온문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이라는 시호를 추상하고 묘호는 ‘단종’으로 정했으며 능호는 ‘장’이라 하고 영녕전에 합사하였다.
금상(영조) 9년 계축(1733) 능침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나. 단종유배길 현황(궁궐에서 영월까지)
1457년 윤6월22일, 돈화문을 출발한 노산군의 유배행열은 인솔책임자인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앞장서고, 군자감정 김자행과 판내시부사 홍득경, 50명의 군졸들로 이루어졌다.
유배행열은 남한강 뱃길과 이포나루에서 영월 청령포까지의 역로를 이용했다.
찌는 듯한 더위속의 유배길은 힘든 여정으로, 일주일 뒤인 6월28일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창덕궁 대조전과 화양정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돈화문을 나선 노산군이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지금의 성동구 화양동에 위치해 있다.
광나루(영도교)
유배행열이 배를 타기위해 도착한 광나루이다. ‘차성복’이란 백성이 백설기를 찐 시루를 노산군에게 바치며 큰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광주 ‘배알미리(拜謁尾里)’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는 '배알미리'는 귀양가는 노산군을 위해 모여든 백성들이 상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통곡 속에 큰절을 올렸다 하여 마을 이름이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되었다.
여주 이포나루와 어수정(御水井)
노산군을 실은 배가 도착한 곳이 이포나루이다. 여기서부터는 가마를 타고 육로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지친 노산군이 잠시 쉬어가며 찬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게 해준 우물을 가리켜 '어수정' 이라고 부른다.
단정지(端亭址)와 뱃재
원주 땅으로 들어선 유배행열이 부론면 단강리에 있는 느티나무 정자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이 '단정지'이다. 이어서 부론면 운남리 고갯길을 넘어갈 때에도 백성들이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이곳을 왕을 배알한 고개'뱃재(배알치)'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미와 어음정(御飮井)
노산군이 원주 신림역을 지나 이곳 샘터에서 물을 마시고 갔으므로 지명을 '물리'라 하고 그 샘터를 '어음정'이라 하였다.
역골`공순원
조선시대 역(공순원)이 있었던 곳에서 가까운 골짜기라는 뜻
저녁무렵 신흥역 공순원에 도착한 노산군은 유배된 몸이라 하여 공순원 역에서 주무시지 못하고 주막에서 하룻밤 유숙한 마을이다.
쉼터
영월로의 유배길에 잠시 쉰 곳이라 하여 쉼터라 부르고 있다.
이 때 한 노파가 샘물을 떠나 바쳤다는 전설도 있다.
군등치(君登峙)
노산군이 오른 길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노산군이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데 이다지도 험로인가?” 하고 하문하니 수행원이 “노산군께서 오르셨으니 군등치 옵지요” 라고 아뢰었다 한다.
명라곡(鳴羅谷)
백성들이 함께 울면서 지나간 마을이라 하여 '울래실-우래실'이라고 불렀는데, 한자식 표기로 '명라곡(鳴羅谷)'이 되었다.
방울재
군등치와 당마루 사이에 있으며 노산군이 타던 말의 방울이 떨어진 곳이라 한다.
배일치(拜日峙)
노산군이 귀양지가 가까워 지면서 마지막 고개를 넘게 되자, 서산에 기우는 해와 한양에 있는 종친과 종묘를 향해 큰절을 올렸던 곳이라 하여 배일치(拜日峙)라 한다.
옥녀봉
그리운 정인을 닮은 봉우리. 모양이 동그랗고 두메산골의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해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를 보니 부인 송씨의 어여쁘고 정갈한 모습이 떠올라 노산군이 ‘옥녀봉’이라 불렀으며 유배길에서 이 옥녀봉을 넘었다.
청령포(淸泠浦)
1457년 6월21일, 세조의 조정은 왕위를 선위한 상왕에 대하여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우두머리로서 그 죄가 크다’면서,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의 유배를 결정하였다. 6월22일 궁궐을 떠난지 7일만 인 6월28일 늦은 저녁에 이곳 청령포(淸泠浦)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3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나룻배가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천연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어 계시던 노산군은, 큰 물로 침몰할 염려가 있어 영월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이어(移御)하시어 유배생활이 이어지게 되었다.
관풍헌(觀風軒).객사(客舍)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26호(1971.12.16).
상왕의 신분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큰 물로 침몰할 염려가 있어 이곳으로 이어(移御)1)하시었다.[장릉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시절이 흉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천명이 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17세의 나이로 이승을 떠나야만 했던 조선국 역사의 현장이다.
영월군읍지(寧越君邑誌)에서 기록하기를-
【단종이 영월에 이거(移居)하여 계실 때, 머무시던 침실이다.
신해(辛亥)년(1791년, 정조15년)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重修 : 낡은 건축물 따위를 다시 손질하여 고침)하여 단종을 높이 받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려 하니, 연신(筵臣 : 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벼슬아치)이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고, 이에 수개(修改 : 수리하여 옛 모양대로 만듦)하여 모습이 일신(一新 : 기분이나 분위기 따위가 아주 새로워짐)되었다.
가운데는 침방(寢房 : 寢 잠잘 침. 房 방 방)을 두고, 동쪽에는 소루(小樓 : 樓 다락 루)가 있으며, 앞에는 억새풀 렴(簾 : 발 렴)을 설치했다.
관풍헌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돌층계) 아래로는 옛날 어로(御路 : 임금이 거둥하는 길) 형지(形止 : 어떤 사실의 전말(顚末))가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었기로, 옛 자취를 따라 점차 길을 닦아가니, 자규루(子規樓 : 자규:두견이 새)와 서로 연결되었다】하였고,
강원도사(江原道史)에서는 기록하기를,
【의정부(議政府)와 종친부(宗親府), 그리고 충훈부(忠勳府) 등과 육조(六曹)에서 “노산군이 종묘(宗廟)사직(社稷)에 득죄를 했을 뿐더러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산군을 살려둔다는 것은 국법에 위배된다고 하니, 골육지정(骨肉之情)만을 생각하고 살려둔다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고 청원서(請願書)를 올렸다.
이에 따라 세조는 1457년 10월24일 유시(酉時)
‘命賜 魯山君 死(명사 노산군 사)’ 라고 하여 단종을 사사(賜死)토록 하였다】를 기록하고 있다.
*命賜 : 명을 스스로 선택하게하다. 命 목숨 명. 賜 줄 사. 주다. 하사하다. 은혜를 베풀다.
객사(客舍)는, 3채의 건물로 왼쪽 첫 번째 건물은 망경헌(望京軒) 이라 하였다.
가운데 건물은 내성관(奈城館) 이라는 편액을 단 객사(客舍)이라 하였다.
우측에 건물을 관풍헌(觀風軒·樓) 이라는 편액을 단 객사(客舍)이라 하였다.
관풍헌 앞에는 2층 문루가 있었는데 백운루(白雲樓) 라는 편액(扁額)을 달았다.
삼문(三門)과 백운루(白雲樓) 사이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월중도 8폭 화첩에서 객사 건물의 배치와 지붕위쪽에 기록되기를, 좌측 건물은 망경헌, 가운데 건물은 객사(편액을 내성관), 우측 건물은 관풍루(편액에도 관풍루)이라 하였다.
관풍헌과 자규루는 전교(어명)를 높이 받들어 세웠으므로 호장(戶長)이 색리(色吏)가 되고, 수노(首奴)가 고직(庫直)이 되어 쓸고 딱으며 관리할 때의 조목을 아래와 같이 시행한다.[영월부읍지·영월읍규(寧越府邑誌·寧越邑規)]
■관풍헌의 침실은 10일마다 호장이 직접 불을 밝히고, 숯은 부사(府使)가 매번 4말씩 대어 주어야한다.
■관풍헌 수호군은 15명이며, 감영에 보고하여 일정한 액수가 정해지면 군보(軍保)나 군관(軍官)등이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완불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오로지 수호하는 일만 영구히 하도록 글로서 하고, 궐액(闕額)이 생길 때에는 보충하는 절목을 능군(陵軍)의 예와 같이 시행한다.
■관풍헌의 풀을 뽑거나 보수를 하는 일은 수호군이 담당하게 하고, 눈을 치우는 일은 영흥하리 주민들이 담당함을 영구히 정식으로 삼아 시행한다.
■매달 보름 영월부사가 관풍헌과 자규루를 살필 때 예방향리가 예에 따라 거행하고, 신관 부임 후의 숙배(肅拜) 때에도 또한 동일하게 거행한다. 그리고 맹삭(孟朔)마다 능소의 예에 따라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하며, 혹 의외의 일이 있으면 때와 상관없이 보고한다.
다.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지하1층 전시실)
왕세자로 책봉되기 전 '원자'의 나이가 3살이 되기까지는 '보양청'을 설치하여 원자의 보호와 양육을 맡겼다. 보양청에서 주력했던 교육은 세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갖춰야 될 덕을 쌓는 정서교육이었다.
원자의 나이가 4살 정도가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으로 바뀌고 4살부터 6살까지의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교육을 담당하였다.
강학청의 교재로는 천자문, 소학, 격몽요결, 동몽선습, 대학, 유합, 사략 들을 이용한 유교 교육이 중심이었다.
한자교육이 대부분 이었으나 한글과 채조도 함께 가르쳤다.
수업은 매일 아침, 낮, 저녁 때 각각 한 차례씩 세 번을 하였으며 수업시간은 대략 45분 정도였다.
수업방식은 강학관이 한문의 글자 음과 뜻을 새겨주면 원자는 그대로 따라서 반복하여 읽는 방식이었다.
왕세자의 입학식
원자에서 왕세자로 책봉되면 교육은 '세자시강원'에서 전담한다.
왕세자가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에 들어서는 단계인데 그 전에 유교적인 행사인 '입학례'를 치르게 된다. 유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에서 세자의 중요 의례 중에 하나로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세자시강원의 전임관료를 '서연관'이라 부르고 세자에게 경서를 비롯하여 왕의 도의에 대해 가르쳤다. 강의 방식은 서연 당상관과 의논하고, 교재는 왕의 허락을 받은 책을 선택하였으며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예기와 같이 유교경전과 역사책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서연관들이 역사나 유명한 인물의 격언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아무리 세자라 하더라도 교육의 과정과 그 결과는 냉엄했다.
세자는 '고강'이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통(우수)-약-조-부(낙제)의 순으로 성적을 장부에 기록했다.
먹과 붓, 서예와 함께한 세자시절
왕실에서는 세자에게 어렸을 때부터 늘 공부와 관련된 놀이를 시켰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는 말처럼 어렸을 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과 먹, 책을 가지고 놀게 했다.
세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익숙했고 신하들은 왕과 세자의 친필을 모아서 '열성어필', '동궁보묵'과 같이 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