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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고등학교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 고신
2012, 06, 29
어제 8시 10분에 한국을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이곳 델리에 새벽 1시에 도착하는데 기온이 34도라고 기내 방송을 통해 기장이 알려줍니다.
여기 요즘 낮의 기온이 45도 정도까지 간다고 하니 무척 뜨거운 날씨입니다.
같은 비행기로 한국에서 온 몇 그룹의 여행객들이 즐겁게 여행 시작을 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이십대로 이 곳 인디아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많이 찾는 여행코스인가 봅니다.
이곳 인디아는 워낙 힘 드는 여행코스라서 나이가 든 사람들은 주로 유럽이나 동남아의 쉽고 편한 지역으로 가고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이곳은 젊은 사람들이 베낭을 짊어지고 투어에 나서는데 많은 고생을 각오하고 오지 않는다면 오랜 동안은 참아내기가 힘들지 않을까 보입니다.
마중 나온 직원의 도움으로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2시 조금 넘어서인데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대충 씻고 5시 반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7시 반 비행기로 이곳 잠무에 왔습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조금 피곤하다 싶은데 직원들이 이 뜨거운 공장 내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그나마 염치없어서 졸지도 못하겠습니다.
이 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그래도 전에 비해서는 주변이 낯이 익어서인지 주변의 보이는 불편한
여러 것들이 조금은 견딜 만 합니다.
이 사람들이 쓰레기 처리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주변이 확 달라질 수 있겠다 싶은데 이곳
경제력으로는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이들은 아직 많은 수의 유휴 노동력이 있어서 인력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노동
의 질은 아주 낮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을 하게 되면 이들을 한국식 근무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교육을 시
키는데 여러 사례들을 보아 왔습니다만 그렇게 잘 이끌어 가는 경우에는 탁월한 리더십과 어느
정도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었습니다.
인디아도 역시 어려운 나라인데 이들의 움직임이나 마음가짐으로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하겠
다는 생각인지 먼저 일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해외에서 일을 하다가 들어 온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보아 온 것이 있어서 일을 시키
는데 한결 수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서 모든 집에 할당을 주는 부역이라는 것을 했는데 이 부역이라는 것
이 동네가 맡고 있는 구간 거리에 어느 정도 자갈을 주어다가 깔아 주어서 패인 부분도 막고 또
어느 정도 길을 평평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때 부역을 하러 가면 동네 어른들이 삽을 가
지고 와서 그냥 노닥거리고 있다가 몇 개 돌을 주워 던져 놓고 가는 것이 일이었지요.
그러면서 얘기를 합니다. “부역 와가지고서 땀 흘리는 놈은 3대가 빌어 먹는다” 고..,
물론 우스개 소리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밀가루를 나누어 주는 부역이 있었는데 이때는 참석율도 높고 일도 잘 되면서 빨리
끝내고 오곤 했습니다.
뭔가 대가가 있어야 일이 잘 되지요.
또 상두계 라는 것이 있어서 계원 중에 상을 당하면 상여를 메러 가는데 만약 가지 않으면 벌금
을 물게 되지요.
가끔 상여를 메러 다녔는데 그때 우리 고장 상여는 엄청 크고 무거웠습니다.
아침 일찍 계원들이 도살장 옆에 있는 상여 집에 가서 분해된 채로 묶여있는 상여 부분들을 어깨
에 메고 초상집 부근의 넓은 터에서 조립을 하는데 이게 안 해본 사람들은 하기가 어려워서 항상
그 일만 하는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상여를 조립하고 나서는 상여를 메는 굵은 새끼를 꼬는데 짚으로 아주 굵게 꼬아서 상여 틀에 꼭
메어서 하얀 헝겊으로 사람들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떤 어른들은 자기 자리를 잡으면
이것을 어깨로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해 놓습니다. 그러면 약간 느슨해져서 나중에 메고 갈 때는
어깨에 걸리는 힘이 덜하게 되지요.
주로 나이 잡순 어른들이 그랬는데 이렇게 꾀를 부리는 아저씨들 때문에 몇 젊은 사람들의 어깨
에 힘이 엄청 들어가고 몇 사람이 메는 힘에 의해서 상여가 움직여 갑니다.
이때가 또 재미있지요.
상여를 메고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몸이 똑바로 서지를 않고 비스듬히 갑니다. 똑바로 서서 가
면 어깨에 힘이 주어져서 힘을 받지 않고 가려고 그러는 것이지요.
아무리 허리를 펴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어도 그냥 그렇게 공짜로 매달려서 가는 사람이
절반은 넘었지요!
거기에다 여자 계원들이 와서 그저 상여만 따라 가는 경우도 있었고 아주 나이를 많이 잡순 분들이
와서 술 얼큰하게 드시는 것이 그날 참석인 경우가 꽤나 흔했습니다.
이때는 젊은 아저씨들과 젊은 놈들 몇이서 상여를 메고 가서 장지에 도착해서는 바작을 지고 멧
등 흙을 져 날리느라고 뭣이 빠지게 일을 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몇몇 젊은 놈들이 막걸리나 소주 몇 잔씩 걸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는 재미있게 일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때는 앞에서 아저씨들이 깽맹이와 장구, 그리고 북을 치면서 상여 소리를 하면서 갔는데 그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냥 놀고 먹는 것 같았습니다만 지금 생각 해 보면 상여를 이끌고 사람
들 힘을 북돋우면서 가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요.
징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때도 그렇게 얘기들을 했지요, 상여 메러 가서 땀 흘리고 가는 놈들은 몇 대가 빌어 먹는다고..,
그때만 해도 해방 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든지 “조선놈들은” 하면서 어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비하 하는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조선 놈들은 돈내기 일을 시키면 저 죽을 줄 모르고 일을 한다” 고..,
그러니까 공동으로 하거나 열심히 해도 자기에기 직접 돌아 오는 이익이 없는 일에는 세월아 네
월아 하면서 그저 시간 보내기를 하였던 거지요.
그렇게 대충 일을 하면서 오랜 동안 가난하게 살아 왔지요.
다른 이유도 충분히 있지만 정말 대가가 맨 밑에까지는 제대로 돌아 오지를 않았지요.
그런 생각들이 언제부터 우리에게서 없어졌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서는 그저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나라 돈이면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고 했는데 나라 돈 못 먹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옛날에는 공짜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가 다들 출세했다고 부러워하던 자리인데 지금 우리에게서
그런 생각들이 완전하게 없어졌을까요!
이 친구들에게 일을 시키면 감독을 하는 것이 더 힘이 든다고 우리 직원들이 말합니다.
차라리 내가 해 버리면 훨씬 낫다고..,
하도 답답하게 일을 하니까 그렇겠지요.
이들 중 일부는 시킨 일만 겨우 하면서 그저 시간을 때우고 있습니다.
바닥을 쓰는데 물을 뿌리지 않고 실내를 쓸다 보니 먼지 때문에 숨쉬기도 어렵고 그 먼지가 다시
또 내려 앉으면 쓴 것이나 쓸지 않은 것이나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하고 있는 옆에 둘러 서서 말들은 많이 해 쌉니다.
뭐가 어떻고 또 이러쿠 저러쿠….,
말을 안 하면 밉지나 않지!
이들은 오래 전부터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잘 해도 자기들에게 돌아 오는 몫은 정말 보잘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카스트 제도의 아래 단계에서 브라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 왔고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도 크게 저항하지 않고 더 이상 신분 상승을 원치 않으면서 시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 왔지요.
세월이 변했어도 이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변두리 어두운 곳에서 형편없이 살아 갑니다. 몸에 밴 대로…,
2012-07-03
이른 아침 델리는 쾌적합니다.
호텔 주변을 보면 많은 숲들이 있는데 시내 곳곳에 넓은 공간들에 숲이 조성된 대로 잘 보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덥던 날씨가 아침에는 시원한 정도로 느껴집니다.
어제 기온이 43도였다고 하는데 6월 달이 가장 더운 날씨라고 하며 7월부터는 몬순 기후로 바뀌는데 많은 비가 온다고 하며 이때부터는 기온이 내려 간다고 합니다.
겨울철의 기온은 가장 추울 때가 영상 8도 정도라고 하는데 이들에게는 추운 날씨라고 합니다.
전에 뭄바이나 다른 도시를 갔을 때와 같이 이곳 델리의 큰 호텔들의 비용은 다른 여타 나라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저녁 부페에서 식사를 했는데 비용이 우리 돈으로 4만원이 조금 넘는 것 같습니다.
이 곳의 다른 물가를 감안하면 훨씬 싸야 할 것 같은데 일부 부유층의 사람들 소득은 큰 차이가 있는지 많은 수의 인디아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인디아를 모르고는 얘기를 하면 안 된다고 이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하여튼 빈부의 격차는 극 과 극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하나도 어색하거나 틀린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에 델리에서 이 곳 카타르로 왔습니다.
도징 개징이라고 하나요? 시골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이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긴데 이 곳 역시 몹시 더운 지역입니다.
그냥 밖에만 바라다 보아도 확 찌는 더위가 느껴집니다.
2012-07-04
이곳 카타르 도하 날씨는 한 수 더 떠서 45도를 넘어 가고 길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냥 한마디로 따가운 햇빛이 내리쬡니다.
아이고…, 징하게 덥네요.
모든 이동은 차량에 의해서만 가능 할 것 같습니다.
걸어 다니는 것은 아예 엄두를 못 내겠네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어떻게들 살아 왔을까요, 에어컨도 없고 나무 그늘도 없던 시절에..,
그러니까 이 넓은 땅덩이에 그 적은 인구만이 살고 있었겠지요.
지금은 기름 덕분에 호사스럽게 살지만 양을 몰고 낙타로 이동하고 하는 유목민은 얼마나 생활이 불편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생활의 즐거움이 많이 있었을까요?
도하시내에서 조금만 외곽지역으로 벗어나면 온통 공사판입니다.
새로이 길도 넓히고 많은 건물들도 짓고 또 얼마 지나지 않으면 월드컵을 위한 공사판이 대대적으로 벌어 지겠지요.
다수의 인디아 근로자들이 얼굴에 온통 보자기를 두르고 길 거리 땅을 고르고 포장 일을 돕고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열사 판 공사장에서 일을 합니다.
능률이 별로 안 오를 것 같은데 차라리 조금 시원 해 지는 저녁에 했으면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는 가 봅니다.
아이고! 보는 내가 다 숨이 콱콱 막힙니다.
아침에 거래 회사에 들렀는데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안내를 하는 여직원이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영어로 안내를 합니다. 지금까지 이 곳 카타르에서는 필리핀에서 온 여자들이 사무를 본다던가 판매원으로 있다던가 혹은 호텔에서 일을 하거나 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제 중국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디라서 중국 여직원이 없으리라는 일은 없지만 이제는 사무실에서 보조 업무를 하는 중국의
직원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제부터 그 숫자가 점점 다 많아지는 것은 불을 보듯 한데 우리와
의 경쟁 대상인 중국과의 경쟁에서 정보나 보안 면에서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신
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회사를 가면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운전사가 네팔 사람입니다. 이 네팔 사람들이 우리하고 얼굴이 거의 같은데 키만 조금 작습니다.
네팔 사람들이 얼마나 이곳에 있느냐고 물으니까 약 35만 명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 쪼끄만 나라에서 어떻게 그 많은 숫자가 오냐고 하니까 네팔 인구가 약 3천 만이라고 하고 이 곳에는 인디아 사람 다음으로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아니, 아주 쪼그만 나라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언제 그렇게 큰 나라가 되었지? 일단을 모르니까 한번 확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업체에서 일을 마치고 오후 늦은 시간에 호텔 커피 숍에 앉아서 보니 호텔 앞은 멋진 백사장으로
방금 지나 온 일터 하고는 달리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합니다.
허연 사람, 꺼만 사람, 그리고 노란 사람들까지 어디서들 왔는지 폼 나게 입고, 쓰고 즐깁니다.
이렇게 세상은 차이가 크게 납니다.
2012-07-05
사막의 모래 바람 위력이 대단합니다.
밖을 나가려고 하면 부는 먼지 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여기 게스트 하우스 여 주인이 이곳에 몇 년째인데 이런 바람은 처음 본다고 합니다.
바로 10미터 전방이 잘 안보입니다.
이른 봄 중국 북경에서의 황사는 우리 한국과는 달리 모래와 섞인 먼지가 떨어진다는 표현을 해도 절대 틀리지 않을 정도로 심한 경우를 보았는데 이 곳도 역시 10미터 정도의 앞이 보이지 않을 뿐 더러 오염이 된 황사라고 생각하면 건강에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밖을 나다니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곳은 그리 바람이 세게 불지 않는다 하더라도 먼지는 엄청 있습니다.
화장실의 욕조에 들어가서 물을 받으면 아침에 사용했던 욕조에서 오후에는 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노란 흙탕물이 번집니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운 탓도 있지만 먼지 때문에 항상 얼굴을 헝겊으로 가리고 일을 합니다.
기름이 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기후 조건도 우리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지요.
리야드 국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4차선 도로로 새로 만들어 져서 아주 시원하게 달립니다.
시내로 들어 오는 길 양쪽에는 전에 없던 높은 빌딩들이 몇 개가 보이고 한 단지에는 몇 개의 큰 빌딩들을 짖고 있는데 이 곳은 사우디 정부가 첨단 기술 연구 단지를 만들고 이 곳에 많은 외국인 연구 인력과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첨단 기술들을 개발 해 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는 이 곳 사우디 아라비아가 걸프 회원국 다른 나라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나라이고 인구도 많고 자원도 가장 많은 나라 이지만 도시가 발달 된 것으로 보아서는 건물의 높이나 크기, 도로, 거주 지역 등, 아직은 덜 투자가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새로 들어 서고 있는 빌딩들의 숫자는 꽤나 많게 보입니다.
이 곳 사우디가 GULF 수장국인데 지금은 이 회원국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기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름이 큰 돈이 되기 이전에는 서로 국경에 대한 정확한 선이 없이 지내왔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국경 지역에 유전이 널려 있어서 이해 관계가 첨예하다고 하며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의 경우에도 전에는 카타르에서 UAE(아랍 에미레이트)를 가려면 사우디 아라비아를 통과해서 육지로 갈 수가 있었는데 사우디 측에서 자원을 보호 한다는 명분으로 국경을 폐쇄하여 지금은 해상과 항공로만 열려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와 오만,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 그리고 이란과 카타르, 이란과 이라크, 이라크와 쿠웨이트 등 꼭 GULF 국가끼리 만이 아니더라도 전에는 사막이라서 크게 쓸모가 없었던 땅들이 기름이 나오기 시작하고부터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다가도 돈 문제가 생기면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여..,
그랑께 나는 자식들한테는 절대로 재산은 안 물려 주기로 해 부렀구만..,!”
내 고향에 계시는 분이 항상 하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 분은 물려 줄 재산이 없지요.
2012-07-09
며칠 동안이지만 차가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는 곳이라서 시간이 더디 지나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한 낮은 43도를 넘어 가는데 따가운 햇빛을 피할 방법은 에어컨이 시원한 집안에 머무르는 길 밖에 뾰쪽한 수가 없는 것이 길도 모르는 데다가 말도 잘 안 통하고 간판에 써져 있는 이쪽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조차 없으니 혼자는 나 다니는 것이 어렵고 그냥 무척 답답하지요.
오늘은 오전에 잠깐 오래 된 시장을 다녀 왔는데 그냥 겉에만 그것도 잠깐 볼 수밖에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는데 그나마 이 사람들이 오래 전에 살던 흙으로 만든 집을 볼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오래 된 집들은 거의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 조차도 모두 헐어 내고 새로이 개발하려고 하는 것들을 보았는데 옛날 건축 재료가 흙 이외에 별로 없었고 약간의 나무를 걸쳐서 지붕 구조를 만든 것이 정겹다고 할까요? 너무나 없애 버리지는 않는지 염려가 됩니다.
이 지역은 아주 오래 된 지역인데 주변에 우리의 청계천과 같이 도매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오후에는 아주 복잡하다고 하는데 10시 반 전통 공예품이나 귀금속을 파는 가게들이 이제 막 문들을 열고 있는 시간이라서 비교적 복잡하지 않습니다.
근처를 돌아 보다가 저를 안내 해 주는 분이 여기가 목 치는 곳이라고 해서 무슨 얘긴가 했더니 이 곳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직 참수형 제도를 실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해서 공개 처형인데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아직도 도시들에서 아주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목을 쳐 죽이는 참수형 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저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잠깐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 곳 리야드는 전에는 아주 열린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했는데 한 번은 이 광경을 영국의 BBC 방송이 몰래 찍어 방영을 하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광장은 넓지만 사방이 탁 트이지 않은 건물로 닫혀있는 광장에서 이 날에는 많은 경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범죄자들을 차에 싣고 와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 이내에 참수형을 끝내고 차에다 싣고 간다는데 광장에 남아있는 핏자국은 바로 물 청소를 해서 없앤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이 분들 중에 한 여자분은 직접 참수를 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하네요. 아이고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얼굴에 뭐를 씌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오랫동안 유목 생활을 하면서 도둑들에게 시달리거나 아녀자를 납치 당하는 등 워낙 피해를 당하는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혹독한 처벌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구경을 한다고 하는데 조금은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유목 생활이라는 것이 넓은 사막을 풀을 찾아 돌아 다니면서 양을 먹이는데 이들은 도적들에게 수도 없이 자기들 동물들을 약탈 당하고 자기 아녀자들을 잃고 하면서 나름대로 방어 수단이 생긴 것이 집단으로 자기를 방어 하는 수단이 되었고 국가에서도 그런 여건에서 이들을 보호하려다 보니 엄격하게 사형으로 엄단하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몇 십 년 전도 아니고 요즘에 일어 나는 일이라는 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들의 문화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전통, 습관을 그대로 이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 집에 가면 아직도 손님에게 여자들을 보이지 않도록 칸칸이 막아 놓고 있고 또 얼굴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다니게 하는 것은 이들이 약탈당하고 빼앗기고 하면서 나름대로 보호 수단을 강구한 것이란 얘기도 합니다.
또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는 리야드인데 사막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서 옛날 교통 수단이 좋지 않았을 때에는 상당히 불편했을 것 같은데 뱃길이 닿는 곳은 워낙 많은 외부 세력들의 약탈이 심해서 그걸 피하기 위해 항구 도시인 옛 수도 제다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들의 전통에 따르면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 피해를 당하면 꼭 복수를 해야 한다는 문화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커다란 사건으로 연결이 되곤 한다는데 우리가 보도를 통해서 자주 듣던 파이잘 국왕도 왕정을 잘 이끌어 왔는데 왕위에 오를 때 그가 제거했던 정적의 아들이 외국 유학 후에 돌아와 왕의 바로 앞에서 결국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곳 사우디 아라비아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인데 실은 AL SAUD라는 말은 사우드 가족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하는데 즉 사우드 가문의 국가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 사우디는 왕족에 지배에 의해 다스려지고 오직 왕족과 관계가 되거나 몇 유명한 가문의 사람들 약 5%가 95%의 이상의 부를 갖고 있으며 모든 지배 계급이나 군대에서 장교가 되는 사람들도 이들 가문 출신들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시 카타르에 와서 공항에 앉아 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인디아 사람들이 인디아 에어를 타기 위해 짐을 한 보따리씩 가지고 출국 수속을 합니다.
물론 보이지 않게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스리랑카 사람들이 섞여 있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에 가까운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모양들이 한 껏 모양들을 낸다고 냈는데도 후즐근 합니다.
여섯 시간을 기다렸다가 한국으로 돌아 가는 비행기를 타는데 이런 때가 컴퓨터로 글도 써 보고 책도 보고 하는 유익한 짜투리 시간입니다.
한참은 졸 수 있겠군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어저께는 수영복을 입은 많은 피서객들이 붐볐는데 오늘은 사막 모래 바람이 덥쳐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주 도로인데 워낙 교통량이 많이 늘어나서 시도 때도 없이 밀립니다.
리야드 전통시장의 야채 가게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채소류들도 보이는데 인디아에서 그런지 무척 풍요스러워 보입니다.
리야드의 전통 시장과 가까이 있는 전통 건물인데 대우에서 설계 시공을 했다고 합니다.
이 광장은 아까 제가 글을 쓴 내용 중에 나와있는 곳인데 일단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은 것을 주의해야 된답니다.
리야드에서 오래 된 토담 집을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허물고 있거나 아주 극 소수만 남아있습니다.
도하에 있는 호텔 앞에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Z 형 건물로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건물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고신 오빠 반가워요 저 한정숙입니다 44년만에 서울 동창회 모임 나갔다가 이카페를 알게 되었어요 진도요양원에 들리셨다는데 제가 못봐서 서운했어요 저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좋은곳 여행많이 하셨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여행 다녀오셔서 많이 올려주세요
정숙이 동생!
정말 오랜만이다. 전에 한번 칠전 언니네 요양원에 있다고 해서 갔었는데 마침 무슨 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해서 못 만나고 왔지.
순철이 오빠도 얼굴 보고 싶은데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인데 자주 못 만나고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운데 다시 서울로 올라 왔다고 하니 이제 얼굴을 볼 수가 있겠네.
어떻게 잘 살고 있지? 연락하고 한번 만나자. 이런 저런 재미있는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어. 어렸을 때 부터 시작해서..,
반가워요 오빠 ! 저 부천에 살고있어요 시간나시면 한번뵈요 전번 010-3499-3009 예요 8월말일날 아버지 기일이라 광주에 다녀왔어요 오빠네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