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에 런던 로열페스티벌 홀에서 있었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 다녀와서 짦은 감상 남깁니다. 지휘는 요즘 한층 주가를 높이고 있는 콜롬비아 출신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맡았고 연주곡은 하이든 교향곡 22번 '철학자', 풀랑크 오르간과 현악기, 팀파니를 위한 협주곡, 리게티 '대기', R.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습니다.
로열페스티벌 홀이 위치한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는 첫인상에 예술의 전당 등과 비교해서 뭔가 어수선하고 시장바닥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ㅎㅎ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암튼 처음엔 좀 놀랐습니다. 건물 앞에는 길거리 음식(치고는 비쌈, 역시 런던 물가ㅠ) 파는 천막 들이 줄지어 있고 건물 안을 들어서니 내가 음악회장에 온 건지 대형 쇼핑센터에 온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엄청 큰 공간에 엄청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내심 연주회장에서도 분위기가 안 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불행히도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2층 뒤, 그러니까 10파운드 짜리 제일 싼 자리에 앉아서 그런걸 수도 있지만 암튼 주위 관객매너는 최악에 가까웠습니다. 첫 곡인 하이든 연주에서는 매 악장마다 박수가 나왔고(점점 잦아들긴 했지만), 제 뒷자리에는 아마도 동유럽 쪽에서 관광온 걸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연주회 내내 속닥거리는 통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부에서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제 바로 옆옆 자리에 앉은 약간 노숙자 행색의 나이 든 아저씨가 '차라투스트라'의 그 유명한 서주부분이 끝날 즈음에 갑자기 큰 소리로 '이거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나왔던 음악이야!'하고 외치는 통에 2층 관객들이 다 깜짝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습니다. 아놔 누가 그거 모르나.. 사실 리게티 곡도 그 영화에 나왔는데 그건 몰랐나봅니다. 암튼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약간 좀 정신이 불편해 보이긴 하더군요.
이런 열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연주 자체는 정말 좋았습니다. 하이든은 최신 유행하는 소위 절충주의식(현대악기에 시대악기식 연주법 응용한) 연주에 가까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그야말로 하이든 연주의 진수를 들려주였습니다. 소편성에도 불구하고 집중력 있는 음색과 통통 튀는 리듬감으로 굉장한 몰입감을 자아내더군요. 제임스 오도넬이 협연한 풀랑크의 오르간 협주곡은 콘서트홀에서 오르간이 어떻게 울리는지 제대로 경험하게 해줬습니다.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홀에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이나 말러 8번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습니다.
리게티의 '대기'는 사실 제대로 감상하려면 완벽히 정숙한 분위기가 필수적인데 아무래도 주위 관객 분위기가 산만하다보니 제대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슈트라우스는 그 정신나간 관객의 소동(?)만 빼면 정말 놀라운 연주였습니다. 이미 하이든에서 지휘자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차라투스트라' 연주는 그 느낌을 확신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아직 만 40세가 채 안 된 젊은 지휘자에게서 벌써 거장 느낌이 난 달까요. 독일적인 중후하고 탄탄한 음향적 기반 하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악상 전개, 그리고 클라이막스를 화려하게 수놓을 줄 아는 연출력까지.. 특히 솔로 바이올린이 활약하는 춤의 노래에서 이 곡 전체의 클라이막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어서 종소리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불을 뿜는 금관과 함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한 순간을 선사해줬습니다.
연주가 좋았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연주회였습니다. 다음 기회가 또 있으면 돈이 더 들더라도 반드시 좀 더 좋은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나중에 런던에서 사우스뱅크에서 열리는 연주회 가게 되시는 분 있다면 참고하시길요.ㅎㅎ 로열 페스티벌 홀의 음향은 살짝 건조한 감은 있었지만 뒷자리임에도 오케스트라 파트 구석구석 소리 잘 들리는 편이고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에스트라다의 젊음과 열정이 점점 알려지는 것 같습니다. 관객의 환경은 우리나라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말이죠. 까다롭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요^^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예전에 말러 3번 영상을 통해 처음 보고 굉장한 지휘자라고 느꼈는데 이번 연주회는 그걸 완전히 확인시켜준 셈입니다. 이 지휘자가 앞으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ㅋㅋㅋ~오딧세이에서 빵~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무매너인 사람들도 클래식홀을 시장 드나들듯 편히 간다는 사실이 선빈님 글에서 가장 놀랍네요ㅋ 소식 잘 들었어요~
런던이 워낙 국제적인 대도시라 관광객들도 많고 어중이떠중이(?)들도 많고 그래서 그런듯요ㅎㅎ
반가워요~ 선빈님 런던 생활이 어떠신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리뷰 올려주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연주회장 해프닝들이 상상 그이상인데요ㅋㅋ 작년인가 안드레스 오로스코 에스트라다는 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과 내한했었는데 그때 받은 제 인상은 굉장히 에너지가 충만하고 젊은 감성으로 곡을 해석한다는 느낌이었어요. 그가 연주한 하이든, 리게티, R. 슈트라우스 모두 들어보고 싶네요~~
사실 저는 맨체스터에 있고요, 급하게 런던 갈 일이 생겨 잠깐 갔다왔었습니다. 맨체스터에서도 연주회 한 번 갔었는데(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초청공연) 거기 청중들이 훨씬 매너가 좋았습니다.ㅎㅎ
유럽에선 관객들 매너가 늘 기본 이상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네요 ㅋㅋ 이번주 화욜에 런던 심포니와 하딩이 내한해서 터니지의 호칸 트럼펫 연주곡을 연주했거든요..그런데 곡 끝나고 지휘자가 지휘봉 천천히 내려 놓을 때까지 박수 안 치고 기다려줘서 우리나라 관객들 수준도 꽤 나아지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지역을 막론하고 진상 관객들은 어디나 꼭 있나 보네요~ 재밌고 생생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네 우리나라 관객 수준도 이제 무시못할 수준으로 올라온 것 같습니다. 별 영양가 없는 감상글인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지휘자는 첨 들어보는 사람인데 앞으로 주목해봐야겠군여. 말3 지휘도 함 찾아서 들어봐야 겠어요. 런던 관객 분위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좋지 않다는건 여기 저기서 듣긴 했지만 선빈님이 겪으신건 들은 내용 중 가장 최악인듯...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여 ㅡㅡ;; 그래도 가끔 기회 되실때 공연 보시면 후기 부탁드려요~ ^^ 덕분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