囿松에 대한 再認識(from 밀양 기홍 한학강의원)
門下生 囿松 李在元 書(2019.6.1. 흙)
유송(囿松)은 예전에 漢學師父가 나에게 내린 雅號이다. 密陽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 時 起洪 朴起泰 선생님께 漢文을 師事하였다. 토,일,공휴일을 뺀 저녁마다 하루 평균 2시간 남짓 7~8명의 학우들과 工夫하였다. 1982년 5월부터 1988년 2월까지 6년 가까이 배웠다. 大學을 再讀하고 四書의 나머지를 차례로 讀破한 후에 삼경 입문 직전에 다른 분들과 함께 나도 號를 하나 받았다. 그 호가 유송이다. 유송을 설명해 주실 때 난 별로 맘에 안 들었다. 사람이란 무릇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시시하게 황제나 제후들의 놀이터 정원에 있는 소나무라니 영 별로였다. 그래서 참조로만 여기고 종래의 내가 지은 西山을 나의 호로 여겼다. 號? 별로 쓸 곳도 없지만 그냥 나의 호였다.
周易과 詩經, 書經을 마저 배우고 싶었지만 부산으로 직장을 옮겼다. 만약 시경을 달달 외우고 체득한다면 文理가 溫全 트이고 동아시아 至尊의 學士가 될 수 있다. 文極 一步 直前에 그만 둔 셈이다. 師父인 그분은 퇴계 영남학파 마지막 한학자로서 예순의 中盤을 막 지났지만 風采가 大人이고 젊고 예사롭지 않았다. 聲量도 豐富하고 瑞氣도 선비以上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漢學의 시대가 아니라서 主流弟子보다는 나 같은 非주류들만 키우는 분이 되셨다. 生業은 風水가 主이셨다. 周天度數와 奇門遁甲 이야기도 자주 하셨다. 그렇다하더라도 四柱를 業으로 하는 분은 아니었다. 성리학과 명리학을 두루 體得知한 분이었다. 性理와 命理는 서로가 非優劣의 光陰이라고 말씀하셨다. 聖人은 명리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특히 큰일을 도모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명리가 필수라고 하였다. 성리는 밝아서 집중하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명리는 暗中摸索으로 實戰과 訓練이 필요하다 하였다.
그런 분이 나의 호를 겨우 囿松이라니? 먼저 囿는 황제나 제후들의 사냥놀이터로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정된 산과 들이라고 하였다. 만약 누구라도 허락 없이 출입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자신의 命과 바꿀 각오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松은 木之中으로 貴貴中體라고 하였다. 貴貴中體??? 말도 난해했다. 아무튼 소리 없이 감사히 받아 왔지만 봉건적 느낌이 들어 나의 자유스런 철학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조선일보 오늘자의 김두규의 國運風水에 山形步步移와 松岩이란 문구를 보다가 밀양 한문사부은사님이 나에게 내린 囿松이 문득 생각났다. 이 유송이란 호는 수제자 다음으로 아끼고 아낄 제자에게 내릴 법한 호였다. 지금은 비록 영영 아니지만 먼 훗날 자기를 알아줄 제자에게 내릴 법한 明指의 號였다.
放置한 號가 30年 以上의 充分한 休息을 취하고 棺뚜껑을 열고 나타난 드라큘라 같았다. WHO가 公式 撲滅시킨 콜레라 菌이 復活한 瞬間이다. 石山이 때가 익어 崩壞한 느낌이다. 너무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왈각 났다. 이런 고급아호를 받았는데, 낫 놓고 기역자도 옳게 모르고 거짓과 사기, 위증으로 재판정을 가득 채우는 천한 상놈들이 버글버글한 부산에서 무뢰한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마음에 상처만 가득한 하전사가 되어 상이군인마냥 겨우 배급 식권하나로 滿足生活하는 無知의 꼴로 살다니 말이다. 당시에 나는 수제자급은 아니었다. 그분은 당시 밀양의 有志로서 同年輩級인 富裕한 弟子도 多數로 많았고, 지역 발언권이 陰陽으로 있던 분이었다. 난 그저 月受講料를 제때에 꼬박꼬박 내고 저녁마다 혼자 공부하러오는 小生에 불과했다. 말만 동급학우들이었지 연륜 등등이 나랑은 한 세대 정도로 차이가 나서 조용히 먼저 도착하여 立座로 공부하다가 두 시간 후 조용히 立座를 풀고 빠져 나오는 정도로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간 10분간 휴식시간엔 그분들은 각자가 들고 온 보온병 차나 음료를 마시면서 밀양지기 동년배들로 상호간에 밀양의 인사나 서예, 각종 행사 등에 대하여 경비 등등의 실제 정보를 주고받았다. 밀양에 계속 산다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법도 하지만, 당시로는 학교만 아는 타지출신의 백면교사로 몰라도 되는 정보들뿐이었다. 나는 들어도 그냥 듣고만 있으면 되었다. 간략하면 워낙 傳統漢學을 배울 자가 없어서 혹시나 하는 미래의 밀양 재목감으로 나를 그냥 하나로 키우고 있던 참이었다. 실로 고귀한 것을 밀양이란 조선 전통의 도시에서 師事로 한문비법까지 極으로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밀양의 미래 재목감? 이건 宏壯한 것이다. 漢學은 유럽으로 치면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을 希臘語로 배우는 격이다. 이걸 四書三經의 높은 수준까지 古典的 方法으로 習得해 놓아, 지역에서의 土着年輪이 쌓이고 도덕적으로 큰 瑕疵만 없으면 밀양 같은 전통의 소도시에서 얼마든지 정신적 유지가 될 수 있다. 사립학교 교원으로 그 즈음에는 鄕土弟子들도 많을 것이고, 과목도 도덕·윤리이기 때문에 전통지식문화에 직결된다. 當今의 知識의 市場에서 전통한학은 이미 벌써 大學은 물론 民間에서도 사정 없이 밀리고 있었다. 마땅히 배울 곳이 거의 없었다. 일단 배우기만 배워도 장차 이곳 지역의 인사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전통이지만 사라져가는 漢學이다. 도리어 한문사부가 아직도 몇 분이 있는 것이 神奇할 정도이다. 이런 엄청한 畢生의 惠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유라시아 젖줄 동아의 해상무역의 지존인 釜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쉽지만 밀양에서의 6년 시간이 추억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래도 傳統의 矜持 이상으로 師父께서 당일의 내게 내린 아호설명의 분위기는 소나무처럼 熱氣를 품고 있었다. 力道山이 한국 제자 金一에게 내린 프로명의 전수와 같은 분위기이었다. 그 이름 바로 오오키 긴타로!!! 프로데뷔전에 패배를 하고 스승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역도산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의 大木 金太郞라는 이름으로 위로하였다. 周易에 들어가자마자 부산으로 행하는 나의 下直人事에 부디 釜山에서도 漢學을 계속 硏磨했으면 좋겠다는 當付를 두 번이나 강조하여 들었지만, 350만이란 부산시민들 가운데 그분만한 사부가 전수하는 道場이 민간엔 없었다. 물론 대학엔 한문전공 등으로 있었겠지만 성리와 명리, 주천도수와 기문둔갑, 역과 시.서가 동시동면으로 한 곳에 아울려 한학의 文.章 하나하나를 통째로 五音 宮商角徵羽 운율에 맞추어 풀이하기엔 힘들 것이다. 무릇 큰 스승은 하늘이나 땅과 같아서 같이 있을 적에는 햇빛과 뭉게구름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바람처럼 속 시원하면서 부드러워 그 진가를 알 턱이 없다. 간혹 학부모와 학생이 함께 奔放하여도 전혀 被.害를 주지 않아 아무도 그분의 容.量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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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하면 밀양은 타지출신에 대한 차별이 적은 곳이다. 나의 한문사부님도 고성출신이라고 본인이 직접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재직한 사립학교도 재단 산하 학교가 4개나 되었는데 타지출신이 평교사로 와서 학교의 관리자까지 올라 선 분들도 몇이 꽤 있었다. 심지어 이북출신도 학교장으로 있었다. 팔등신급 이상의 용모 출중한 그분의 따님도 같은 재단 산하의 사회과 교사였다. 나의 경우도 부임할 적엔 몰랐는데 밀양엔 나의 제종숙부님이 이미 밀양 유지로 법원공무원으로 계셨고 재단의 젊은 이사장님과는 고교동기 한반 출신의 옆자리 죽마고우로 친분이 당시에도 계모임을 하는 등 상당하였다. 또 서울대 등을 나온 나의 고등학교 선배님들도 무리를 지어 지역세를 형성하고 있어 장차 나의 밀양생활에 큰 덕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에 불리한 점이 없었다. 내가 만약 학교재단의 이사장이라면 객지출신은 관리자엔 열외 할 것이다. 수고스럽지만 평교사로만 있기를 공포할 것이다. 전국등급이상의 수상경력이 있더라도 수석교사까지만 인정할 것이다. 수석은커녕 정년까지 간 동향출신도 평교사로 다반사 그만 두는데 능력이 있더라도 있으면 얼마나 더 있다고 부산출신, 대구출신, 김해출신, 청도출신 등등이 학교의 관리자로 정년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밀양 같은 소도시엔 해당치 않는 관용의 정신이다. 하여튼 사통팔방의 드넓은 미리벌과 영남루, 그 옆의 밀양 문화원, 부드럽고 조용히 흐르는 밀양강과 길고 긴 잔디밭, 그리고 지방법원과 검찰청 등의 관청이 즐비하게 있지만 섬처럼 보이는 산문동을 멀리하고 그곳 생활을 청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密陽의 地名처럼 나는 빽빽한 인문적 지식을 쌓았다. 한 번도 크게 써먹어 본적은 없지만 내실의 양기가 되었다.
그리고 외부출신 중용 기피는 모두 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절대 닫힌 마음이 아니다. 고을 운영지도자급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 인간들이란 무릇 타지인 이라도 능력을 보고 상급 관리자로 뽑아주면 말년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모조리 다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본토인을 교육시켜 연임가능의 단기 임기제로 하면 된다. 글로벌 경쟁의 광역시급 이상이라면 당연히 외부영입인사가 극히 필요하지만 밀양시처럼 작은 내수형 도시는 본토인이 주축이 되어야 모든 면에서 실익이다. 예를 들면 나의 대학모교는 대부분이 서울대출신 교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카르텔이 장난이 아니다. 교수공석이 나오더라도 재직학교 출신의 제자는 어떻게 하든 탈락시키고 生面不知의 서울대 자기 후배를 요식 심사 후 총장 뜻이라며 데려 온다. 그 변을 들어보면 괴변의 달인들이다. 背恩忘德을 예사로 한다. 자기들끼리의 모임에 다녀온 나의 지인에 의하면 재직학교 자체를 우습게 보는 말들을 예사로 하고, 그 수준이 능멸적이라고 하였다. 재단에 대한 고마움도 제자에 대한 사랑도 근무교에 대한 미련(尾聯)도 아예 없는 것이다. 퇴직과 동시에 그만인 것이다. 국비로 공부한 한국의 최고급 수재들도 이러한데 다른 조선것들은 안 봐도 알 수가 있다. 나는 도저히 한국인들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조리 1:1의 거래개념을 가져야 한다고 매번 느낀다. 물론 밀양이 전통도시라 하더라도 전문 지적인 부문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초빙급 중책이 필요하다. 이런 거는 하지 말라 강조하여도 하게끔 되어 있다. 일본이란 나라가 이렇다. 세계 제일의 슈퍼 엘리트 국가이지만 내국인과 본향인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번영시키고 있다. 같은 일본인이라도 외국국적을 가지면 바로 외국인으로만 대우를 하여 준다. 이는 결코 닫힌 마음이 아니다. 나라의 발전과 자기 고장을 바르게 아는 철학적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미리 공포를 해야 한다. 이 작은 고장에서 객지인의 한계는 실무부장급이 끝이라고 말이다. 시장가격에 의해 본향인보다 돈을 몇 배 더 주더라도 이건 필요한 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