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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7]
동학세상
동학군 매장지 현장답사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 가장골
편집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로 128주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학농민혁명 에 대한 명예회복은 완전하지 않다. 최근 들어 지난 4년 동안 동학농민군을 국가유공 자로 포상해야 한다는 주장과 여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미완인 상태이다. 다행 히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됨에 따라 정부뿐만 아니라 관련 지방과 단체에서 해마다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5월 11일 경남 산청 에서 진행된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에서 동학군 유골이 집단으로 매장되었다는 증언 이 나왔다. 바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 가장골에 동학군 180여 구가 집단으로 매 장되었다는 것이다. 증언한 사람은 중태리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정종대(81) 어른이다. 본지에서는 포덕 35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상황과 증언을 재구성하였다.
동학군 매장 증언의 내용 지난 7월 5일 오전 10시 산청군 프레스룸(원명 브리핑룸)에서 동학농 민혁명 당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동학군 매장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 다. 기자회견의 주최는 산청동학농 민혁명기념사업회였다. 서봉석 기 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자회견장에는 KBS, 연합뉴스, 서경방송에서 열띤 취재를 했다.
이날 증언은 중태리에서 4대째 살아온 정종대 씨(81)였다. 증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62년 8월 22일, 당시 중학생으로 시 천면 중태리 배돌산(해발 360 미터) 질 매골에 둥글레를 캐러 갔다가 조복이 趙福伊라는 분으로부터 가장골(假葬谷) 이라는 곳에 동학군 180여 명이 묻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정종택 할아버지에게 조복이 씨로부 터 들었던 말을 하자, 할아버지가 사실이라고 하였다.
조복이 씨는 옥종에서 일본군에 밀린 동학군이 덕천강을 따라 후퇴하다가 시천면 덕천서원에 이르렀을 때, 동학 군이 숨겨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덕천 서원에서는 이곳은 공부를 하는 곳이 기 때문에 싸움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동학군은 덕천강을 따라 더 내려가 중태리 문배 골로 숨어들었다. 동학군을 뒤쫓던 일본군과 관군은 문 배골에 숨어있는 것을 탐문하고 공격하여 동학군이 몰살하였다. 당시 몰살 된 동학군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 다. 동학군은 역적이기 때문에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3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진정되자 마을 사람들이 동 학군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장하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 불렸던 문배골은 동 학군 유골을 가매장하였다고 하여 가 장골로 불리게 되었다.
정종대 씨 증언
정종대 씨의 증언이 처음 알려진 것은 산청군 시천면 대내리에 ‘동학 농민혁명 영남지역 발상기념비’가 건립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지역의 전 유물로 알려졌지만 경남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진주와 하동 등 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희생자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의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발상기념비>
특히 천도교 진주시교구에 의해 영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가 산청군 시천면이라는 것이 밝 혀지면서, 2014년 산청지역에 동학 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듬해 2015년 10월 동학농민군의 희생과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시천면 내대리에 '동학농민혁명 영남 지역 발상기념비'를 세웠다.
산청 군도 2019년 9월 '산청군 동학농민 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산청군이 영남지역 최초의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임을 알렸다.
기자회견문, “동학군 유해 발굴 요청”
산청군청 브리핑룸에서의 기자회견 장면
그럼에도 가장골 동학군 유골 매 장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금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을 맞아 기념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정종대 씨가 참석하여 처음으로 가장골에 동학농민군 유골이 가매 장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증 언을 들은 천도교 진주시교구와 산청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이 를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해 지난 7 월 5일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이 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하재호 산 청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이 <기자회견문>을 발표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우리는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을 맞 을 때면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울 분을 토로하곤 한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원인에 대하여는 깊이 있고, 끈질긴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 편이다. 현 시점의 우리의 상황인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일에 대하여 진지하게 알아보고, 일을 해나 감에 있어서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에 거주하는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1894년 일본군 과 관군에 쫓긴 동학농민군 180 명이 하동군 옥종에서 지리산 쪽으로 모여들었다가 모두 억울하게 학살되었다고 한다.
중태리 산 3번지(당시에는옥종면에 소속됨) 주변에 흩어진 시신들은 매장도 하지 않고 버려져 있었다. 한참 후 주민들이 일본군과 관군 의 눈을 피해 시신을 한 곳에 가매장 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척양척왜, 보국안 민”을 외쳤던 우리의 선조들이다.
시천면 대내리에는 <영남지역 동학농민 운동발상지>의 탑을 세우고 유족과 지역 주민, 인근 지역 천도교인들이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또한 산청군 은 <동학농민운동> 관련 조례를 제정 하여 이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 고 있다.
오늘 기자회견은 중태리 주민의 증언 을 언론에 공개하여 그 학살지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발굴을 요청하는 바 이다. 산청군과 천도교 측에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위원회>를 구 성하여 절차에 따라 발굴, 보존, 계승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 묻혀져 있는 근대사의 아 픈 부분에 대하여 행정기관, 군민, 언 론 등에서는 깊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 라면서 회견을 마치고자 합니다.
산청지역 동학농민혁명과 가장골
산청지역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 듯이, 영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1894 년 1월 10일 고부에서 동학농민혁 명의 깃발을 들고, 3월 26일 백산 (현재 부안군 백산면)에서 대회를 열 고 혁명군으로서 위상을 갖추었다. 호남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을 올리자 산청군 시천면 덕산을 기반 으로 하는 백낙도 대접주는 이에 호응하여 5백여 명의 동학군을 조직 하고 1894년 4월 초에 기포하였다.
그러나 백낙도 등은 관군의 피체되어 처형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동학 조직은 남 원대회에 참여했던 김인배 대접주 가 영남 일대 동원령을 내리자 진주, 산청, 하동 일대는 다시 혁명의 횃불이 타올랐다. 하동 관아를 점령하는 등 혁명의 기세를 올렸으나 토포사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으로 동학군을 진압하자, 동학군의 전세는 점차 불리해 졌다.
그럼에도 산청지역 일대에서 활 동하던 동학군은 1894년 11월 11일 옥종면 수곡촌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 한나절 동안 치열하게 전투하였다. 이 전투에서 186명의 동 학군이 희생되었다.
남은 동학군은 옥종면 고성산으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고성산 전투에서도 동학군이 패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 중 일부 동학군 180여 명은 덕천강을 따라 시천면 중태리 문배골로 피신하였다. 동학군이 문배골로 피신한 것은 이 지역 계곡에서 유일하게 물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길을 따라 허기를 달래면서 후일을 도모하던 동학군은 문배골 깊숙한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동학군을 추적하던 일본군과 관군은 지역민으로부터 동학군이 문배골로 숨어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계곡으로 몰려들었다. 계곡 사이로 흰 옷을 입은 동학군을 확인한 일본군 과 관군은 일제히 사격을 하고 더 이상 피신할 곳이 없었던 동학군은 대응하였지만, 우세한 화력에 몰살 당하였다.
여우굴, 지금은 오소리 굴
이렇게 학살된 동학군은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당시 동학군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동학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문배골 계곡에 그대로 버려져야만 했다. 수습되지 못한 동학군의 시신은 여우들의 먹이감이었다. 밤이면 중태리 일대 산에 살던 여우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동학군이 묻힌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우굴이 있었다. 지금은 오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3년이 지난 1897년경 동학에 대한 탄압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마을 주민들은 동학군의 유해를 모아 산 중턱에 매장하였다. 이후 문배골은 동학군이 가매장한 곳이라고 하여 가장골이라고 불렸다.
동학군 매장지 현장 답사
기자회견을 마친 후 정종대 씨의 안내를 받아 동학군이 매장된 중태리 산 3번지로 향하였다. 시천면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중태리 정종대 씨 집 앞 도로가에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정종대 씨의 안내와 방송국 취재진, 진주시교구 분들 15, 6명은 정종대 집 뒤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길도 제대로 없는 길을 정종대 씨의 안내로 20여 분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정의적 진주시교구장, 서봉석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등은 입구와 갈림길 등에 준 비한 작은 안내표시물을 나무에 매 달았다.
산길을 따라 중턱쯤 이르자 정종 대 씨가 손가락으로 동학군이 매장 된 무덤을 가리켰다. 두기의 무덤 이었다. 작은 나무와 잡풀이 뒤덮여 무덤같이 보이지 않았다.
준비 해간 톱으로 나무와 풀을 걷어내자 그제서야 무덤의 흔적이 나타났다. 한 기는 제법 무덤으로 보였지만, 다른 한 기는 알려주지 않으면 전혀 무덤인지 모를 정도였다. 정종대 씨는 예전에는 봉분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서봉석 사무총장은 미리 준비한 <동학농민군 매장 추정지>라는 표지판을 아랫 무덤 앞에 세웠다. 방송사는 취재에 열심이었다.
우선 정종대 씨의 증언, 필자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필자는 동학군이 학살된 일대가 한국전쟁과 관련이 없고, 또한 전염병 등으로 인한 대규모의 피해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동학군의 매장지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였다. 다만 문헌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앞으로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현장을 답사한 일행 중 연합뉴스 취재진과 함께 정종대 씨의 안내를 받아 여우굴을 확인하고 동학군이 학살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이날 기자회견과 현장 답사의 취재는 KBS와 연합뉴스, 서경방송에서 여러 차례 방영되었다. 연합뉴스 방영된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무를 베어내고, 풀을 걷어내자, 봉분으로 추정되는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봉분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128년 전, 동학농민군들이 일본군과 조선 관군에 의해 몰살당해 그 유골이 집단으로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올해 여든 살인 정종대 씨는 아버지를 통해서 이곳 봉분에 동학농민군 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을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동학군 유해발굴추진위 구성과 과제
현장 답사를 마친 진주시교구와 기념사업회는 ‘산청동학농민군유 해발굴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공동대표에 하재호 기념사업회 회장·정의적 진주시교구장·산청군 농민회장, 집행위원에 정갑선 천도교중앙총부 교무관장과 서봉석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추진위원에 정종대(중태마을, 증언)·김동규(삼당마 을, 유족)·박경동(남대마을)·김희수 (천도교)·박완주(천도교), 자문위원에 성주현(천도교 상주선도사)을 각각 선임하였다.
추진위원회는 산청군의 지원을 받아 금년에는 학술용역과 발표 등 학술적으로 먼저 발굴준비를 하고 내년에 본격적인 유해발굴을 추진 하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차적으로 증언을 뒷받침하는 문헌 기록을 발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자료와 증언 등을 포함한 학술용역이 가장 우선시 된다. 이를 토대로 학술발표회를 통해 동학군이 매장되었다는 확증을 받아 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예산 확보도 필요하다.
이후 본격적인 발 굴과, 앞으로의 보존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계승, 동학군 추모 공원과 시설 등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희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