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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단교류 이야기
남재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는 문과, 이과, 의예과의 3개 학부가 있었다. 내가 1952년 의예과에 들어갔을 때 문과의 불문학과에는 나중에 민음사의 사장이 된 박맹호, 국문학과에는 유명한 에세이스트가 된 이어령, 소설가가 된 최일남이 있었고, 철학과에는 역시 에세이스트라 할 최종호가 있었다. 최일남과 나는 대학 때 우연히 한 방에서 반 년쯤 하숙생활을 함께 하기도 했었다. 최일남은 대학에 다니면서 출판사의 월급생활도 하는 등 고학을 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소설은 현실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고 엉뚱한 환상적인 데가 없다. 같이 하숙했을 때 그는 『쑥 이야기』라는 단편을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단편은 현실생활에 밀착한 매우 리얼한 것이었다. 박맹호는 학생 때 훌륭한 정치풍자소설을 써서 한국일보 현상모집에 사실상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풍자가 너무 자극적인 것이어서 발표가 취소되었었다. 그리고 부친이 계속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바람에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글 쓰는 일을 중단하였다. 이어령은 글재주가 타고난 것 같다. 가볍고 속도감 있는 글이 매력이다. 그의 초기작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인 셈이다. 어느 후배 평론가는 그를 “평단의 유쾌한 경기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최종호는 철학과를 나왔지만 독일 유학에서 언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귀국하여 많은 문화비평, 특히 예술비평의 글을 썼다. 그러나 그의 생래적인 오만과 월남파병을 적극 지지하는 보수성은 나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이 그를 멀리하게도 만들었다.
지나놓고 보니 그때 전북 출신 사람들과 많이 만나게 된 것 같다. 최일남과 최종호가 전북인데다가 뒤이어 만나는 이규태도 전북이다. 이규태는 연세대를 나오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는데 계속 칼럼을 쓰게 되다 보니 뻥튀기도 적잖이 있었다.
내가 조선일보 기자 시절 박맹호가 청진동에서 <민음사>라는 출판사를 개업하게 되어 거기서 많은 문인들을 만났다. 전북 군산 출신으로 승려생활을 10여년쯤 하다가 환속한 고은 시인은 민음사에 개근하다시피 하며 점심은 짜장면, 저녁에는 소주를 했는데 그 소주모임에는 나도 끼어 어지간히 대포집을 돌아다녔다. 고은 시인은 나와 동갑인데 소문에 의하면 6·25때 약간의 부역을 하여 국군이 진주하자 군산에 있는 절에 숨어들어간 것이 불문에 들어간 사연이었다 한다. 20세가 채 안된 고은이 부역을 했다고 해도 하찮은 것이었을 것인데 여하간 그는 엉겁결에 절에 들어가 상좌승이 된 것이다. 그 후 훌륭한 스님을 만나 불경공부를 철저히 하고 10여년 만에 환속하였는데 본명은 고은태인데 태자를 떼어버리고 고은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불교공부를 많이 한 고은은 시도 잘 썼고 에세이도 잘 썼다. 다만 같이 술을 마시다 보면 사회생활의 훈련이 안되어서인지 술버릇은 험했다. 특히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거칠었다. 아무튼 그의 경력이 특이했고 시도 좋았기에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 성(聖)을 붙여 ‘성 고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작가 장 주네는 도둑 출신으로 훌륭한 문인이 되었는데 프랑스 문단에서는 그에게 성(聖)자를 붙여 ‘성·주네’라고 불렀었다.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민음사의 출판사업이 번성하게 되고 번듯한 사옥도 마련하게 되자 문인들이 모여들었고 민음사는 김우창, 유종호 두 교수를 편집인으로 하여 『세계의 문학』이라는 계간지를 발행하였었다.
당시 문단에는 백낙청 서울대 교수가 주간하는 『창작과 비평』이 있었고 김현, 김병익, 김주연 등 이른바 3K가 주간하는 『문학과 지성』이 있었다.
민음사는 이문열의 『삼국지』로 떼돈을 벌었다. 열 권 한 질인 『삼국지』는 몇 십만 질이 팔려 민음사와 이문열에 몇 십 억씩을 벌게 하였다. 그 뒤에 『창작과 비평』에서도 황석영의 『삼국지』를 발행하였으나 이문열의 것에 압도되어 별로 재미를 못 보았다.
서울대학교의 김학준 교수는 삼국지의 광이라고 할 정도인데 그는 국내에서 발행된 모든 종류의 삼국지를 다 읽었으며 이문열의 『삼국지』는 거듭거듭 읽었다 한다. 김 교수의 평가로는 황석영의 『삼국지』는 중국화가가 그린 삽화는 볼만한데 무협소설의 그 웅장하고도 호걸풍의 문투는 이문열의 것을 감히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이문열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이문열은 자기 것과 황석영 것은 아예 중국의 판본부터 다르다고 했다.
나는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서점에 나온 일본 신조사(新潮社)의 40권에 가까운 세계문학전집에 눈독을 들였었다. 부모님께 특청을 하여 그것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보니 그 전집이 팔려버렸다. 그것을 사간 사람이 충주에서 중학을 다니던 유종호이다. 유종호는 나중에 문학평론가로 대성하여 여러 대학교수를 지냈으며 박근혜 정권 때는 예술원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매우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해 온 것이 박근혜 정권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주 황당한 가정이지만 만약에 신조사의 문학전집을 유종호가 아니고 내가 샀더라면 혹시라도 나의 인생경로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유종호에 비교해서는 완전한 실패작으로 끝났을 것이고.
유종호의 충주에서의 친구로 신경림이 있다. 신경림은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인데 나는 그의 시집 『농무(農舞)』를 특히 좋아한다. 신 시인은 여러 민주화 문인단체의 지도자로도 활약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지독한 애주가라는 것이다. 한 번은 어느 호사가가 2차로 인사동의 양주 대포집에 그와 나를 데리고 가서 몰트위스키 한 병을 내놓았다. 그랬더니 신경림은 밤 12시가 가까워지도록 그 양주를 마시느라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전철시간을 걱정한 내가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가 강서구에 와서 문인들과 술을 마셨을 때다. 신 시인과 강 시인, 그리고 나는 2차, 3차를 마시다가 밤 12시가 가까워져서 억지로 그를 집에 보낸 적이 있다. 강 시인은 신경림의 시를 연구 테마로 삼고 있다고 했다.
시인 이야기로는 신동문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신 시인은 부잣집 출신으로 고은 시인과도 아주 친했으며 출판사와 신문사에서도 활약했었다. 소설가 이병주는 부산 『국제신보』의 편집국장과 주필로 활약하는 등 부산지역에서만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를 중앙 문단에 소개한 사람이 신동문 시인이다. 5·16 쿠데타가 났을 때 이병주는 중립화통일을 찬동하고 교원노조를 지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2년 반쯤의 옥살이를 했다. 그가 출옥하여 내놓은 것이 중편소설 『알렉산드리아』이다. 이병주는 서울 문단에 아는 사람이 없고 오직 신동문 정도만 인연이 있기에 그에게 그의 중편소설 발표를 부탁했다. 그래서 신동문이 그 중편을 월간 『세대』의 이광훈 주간에게 보여주었다. 이 주간은 그냥 『알렉산드리아』라고만 하면 관광안내로 착각할지 모른다 하여 거기다가 ‘소설’을 붙여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하여 그의 잡지에 게재하였다.
신동문은 그 잡지를 갖고 마침 조선일보 문화부장인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작품이 아주 훌륭하니 읽어보고 신문에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읽어보니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때 공주사대의 교수로 있던 유종호에게 좀 길게 소설평을 써달라고 했다. 그는 아주 호의적인 논평을 보내왔다. 그래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조선일보 문화면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는 파격적인 발표가 된 것이다. 그 소설이 일약 화제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병주가 중앙문단에서 각광을 받게 된 데 있어 유공자는 따라서 신동문, 이광훈, 그리고 나 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병주는 나에게 아주 자주 화식집에서 술을 샀다. 그는 오후 여섯 시쯤 단골 화식집에 나타난다. 그리고 거기서 초밥으로 요기를 하고 술을 한참 마신다. 그리고는 가끔 쌀롱으로 행차한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간 그는 새벽까지 집필을 한단다. 그는 몽블랑이라는 아주 굵직한 외국제 고급 만년필을 상용했다. 힘을 안 들여도 잉크가 줄줄 나와 속도감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만년필이다. 그리고 그 집필은 새벽까지 계속된단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그는 『지리산』 이라는 장편소설을 『세대』 잡지에 연재하여 계속 히트하였다. 그리고 이어 『관부연락선』 등 장편소설을 연달아 냈다. 소설가로서의 그의 술자리는 취재 인터뷰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술자리에서 들은 경험담들이 메모로 남아 언젠가는 그의 소설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김규식 박사를 따라서 남북협상에 다녀온 송남헌이나, 남로당을 했다가 전향하여 그 후 미군의 도움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거물 이승엽을 만나고 온 박진목 등을 자주 만났다. 그리고 그때 들은 얘기를 기록해둔 것이 나중에 그의 소설에 인용되게 마련이다.
그는 문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외제 승용차를 기사를 두고 타고 다녔다. 그의 돈 만드는 실력도 대단하다. 김현옥 서울시장과는 진주 시대로부터의 지인이다. 그래서 김 시장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권을 따냈다. 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도 어떻게 친분을 맺어 엄청난 돈을 끌어냈다. 말년에는 퇴임한 전두환 대통령의 연설문과 회고록 집필을 도와주고 많은 돈을 얻어냈다는 소문이다. 그러니 그의 씀씀이가 통이 클 수밖에 없다. 그에게 부인이 세 명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첫째 부인은 고향 하동에서의 조강지처이고 둘째 부인은 부산 언론인 생활 때 사귄 부인이며 셋째 부인은 그가 소설가로서 이름을 날린 후 그의 팬이 된 고등학교 여교사이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대』 잡지의 이광훈은 그에게 네번째 부인이 있다고 나에게 귀띔한다.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있고 고급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씀씀이가 풍성한 그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그런데 그의 말년에 동아일보의 한 논설위원이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이병주가 빨치산이었다고 밝혔다. 내가 이병주에게 직접 물어보니 그는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였을 때 그 속에 지인들도 있고 하여 북측의 문화공작대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동의 아주 부유한 집에서 자라 일본유학을 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가 사병으로 중국본토에서 종군하였었다. 그리고 귀국하여 진주에 있는 해인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후에 부산으로 옮겼다. 그가 일체 밝히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그는 국회의원에도 두 번 출마했었단다. 그런데 상대방 후보가 “이병주는 빨갱이”라는 삐라를 살포하는 등으로 하여 두 번 다 낙선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문화공작대원이라면 거물급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무사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한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병주의 부친이 상경하여 김종삼 시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김종삼 시인은 김종문 지리산지구 토벌대장과 형제간이다. 진상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김종삼 커넥션에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근무하던 조선일보 근처에 <아리스>라는 문인들이 주로 모이는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에 원고나 원고료를 맡기기도 한다. 이병주는 가끔 그 다방에 들러 김수영 시인을 만났다. 술도 더러 같이 했다. <아리스>에서 나와 마주쳤을 때 김수영은 “당신 괜찮다는 소문이더군”하고 신문사 문화부장에게 거친 말투로 말한다. 그는 키가 큰 편이며 눈이 아주 컸다는 기억이다. 술자리가 파한 후 이병주는 김수영 시인을 자기 차로 마포 버스 종점에 있는 김수영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한 모양이다. 김수영은 나중에 서강대교가 들어선 쪽의 마포 버스 종점에서 양계장을 운영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차편을 주겠다는 이병주의 제의를 아니꼽게 생각한 김수영은 버스를 타고 가려다가 그만 아깝게도 참변을 당해 사망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시인을 잃은 것이다. 김수영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나는 이 시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권력과 민중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그 시를 떠올린다.
이병주는 엄청 많은 돈을 갖고 애인과 함께 미국에서 몇 년 동안 살다가 폐암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가 미국 담배 윈스톤의 맛에 빠져 너무 지나치게 피어대서 암에 걸린 것이다. 그의 영결식이 열린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달려갔더니 추도사를 할 문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문단 교제는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요청을 받고 즉석추도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병주가 『국제신보』의 주필로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는 부산일보 주필로 있었으며 박 대통령은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자주 술자리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5·16이 나자 이병주는 2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황용주는 문화방송 서울본사 사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박 대통령이 죽자 이병주는 『그를 버린 여인』이라는 소설을 써서 박 대통령을 몹시 나쁘게 묘사하였다.
나는 이호철, 최인훈과도 만났었다. 이호철은 나보다 한두 살쯤 위였는데 원산 태생으로 6·25후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서울은 만원이다』란 연재소설을 써서 인기를 끌었었다. 그는 나에게 김학철이라는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의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였는데 『마지막 분대장』이라는 김학철의 자전적 소설은 중국에서의 독립투쟁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최인훈은 서울법대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재학시절 그를 알지 못했다(나는 의예과 2년 후 서울법대로 옮겼었다). 그가 『새벽』 잡지에 발표한 중편소설 『광장』은 단연 그 당시 문단에 중심화제가 되었다. 북한포로로 붙잡혀 휴전협정에 따라 북으로도 남으로도 갈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된 청년이 남과 북을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인 인도행을 선택하여 배를 타고 인도로 가는 도중 비극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그 당시 시대분위기의 한 단면을 고민스럽게 묘사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소설도 썼지만 이 『광장』을 거듭거듭 개작하고, 개작하고 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독선적인 데가 있었다. 한 잡지사가 좌담회를 마련하여 나도 참석했었는데 종합정리를 맡은 최인훈이 제출한 원고는 좌담회는 일체 무시하고 자기의 의견만을 서술한 것이었다. 매우 거만한 것이다. 잡지사는 나에게 좌담회의 정리원고를 부탁하여 내가 단시일 내에 원고를 정리하느라고 애를 먹었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선우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평북 정주 태생인 그의 집안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해방이 되고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그의 부친은 형제들을 반분하여 반은 북한에 남아있고 반은 남한으로 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이 잘 되든 반타작은 하자는 계산이었다. 선우휘는 그 동생과 함께 남한으로의 배정을 받았다.
선우휘는 경성사범 출신이다. 일제는 한반도에 경성사범, 대구사범, 평양사범의 세 학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발전시켰단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사범 출신이고 백선엽 대장은 평양사범 출신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선우휘는 육군 정훈대령으로 예편한 후 신문사 논설위원이 되었으며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그는 중편소설 『불꽃』으로 동인문학상을 받고 문단에 등단했는데 주로 전쟁을 소재로 삼은 소설을 썼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우휘 주필에게 감사원장을 제의했을 때 선우 주필은 다음과 같은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인용하면서 사양했다는 것이다. “들에 핀 아름다운 야생화를 집안에 옮겨 심으면 시들해 보인다.” 그가 『물결은 메콩강까지』라는 우리 군의 월남파병을 찬양하는 신문연재소설을 쓰려할 때 그를 좋아했던 후배 언론인 여럿은 강력히 월남파병 찬양을 하지 말라고 말렸었다.
월남파병을 놓고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 교육부장관이던 김숙희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누님이기도 한데 국방대학원에 강연을 갔을 때 월남파병에 관한 의견을 묻자 한마디로 “그것은 용병이죠”라고 해버렸다. 그 말이 신문에 보도되어 논란이
일자 대통령은 김 장관을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월남파병에 관한 지식인사회의 반대는 치열했는데 월맹의 전쟁은 공산주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오랜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반식민지 투쟁이라는 측면이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우휘가 파병을 찬양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해서 기자들이 적극 말린 것이다. 선우휘는 조선일보를 정년퇴직하고 얼마 안 있어 갑작스레 타계하였다.
이렇게 문단얘기를 회고하다 보니 그 동안의 시대상황의 변천을 회상한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소설이나 시도 역시 시대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남재희 언론인, 전 11대 노동부 장관역임 (제10~13대 국회의원 역임)
출생 : 1934년 1월 18일, 충북 청주시
학력 : 서울대학교 법학과
경력 : 2003.~ 통일고문회의 고문
수상 : 청조근정훈장수훈
저서 『진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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