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올 때 빌려준 우산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우산의 일
홍성란
한티역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 앞에서 소나기 만난 엄마는 쪼그려 앉아 아기 옷에 달린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어요
파란불에 건너온 할머니가 허리 굽혀 손녀를 감싸 안은 외동딸을 감싸자, 지나가던 우산 둘이 기울어지고 있었어요
우산이 옹그린 삼대를 감싸 주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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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기”의 정도를 측정하여 의미나 가치를 둘 생각은 없지만 중립이 보편적이거나 합리적인 자기방어술로 필자의 정서에 와 닿지 않도록 조금은 애써온 것에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 사설시조 형식을 지닌 구조는 보행자와 행인의 관점이 아닌 독자 즉 운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초장엔 빨간 신호등, 중장엔 노란 신호등, 종장엔 파란 신호등이 켜져 있다.
초장에서 시인이 선택한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 ‘소나기’는 위험이 도사리거나, 어려운 상황이거나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을 상징하므로 독자의 견지에선 ‘소나기’의 영향권에 있는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이다. 한편 ‘엄마’, ‘모자’라는 단어는 보호해 주는 적어도 외적 타격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믿음”의 주체인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러한 상반되는 시어 사이에 “아기”라는 대상을 둠으로써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모성애가 발현되며 1막의 신호가 바뀐다.
이제 횡단보도 건너 중장에 가면 ‘파란불’. ‘할머니’, ‘외동딸’이 역시 안도감, 보호본능을 나타내는데 거기다가 ‘지나가던 우산 둘’이 그러한 감정에 가담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아직 독자의 입장에선 노란 신호등이다. 왜냐하면 ‘외동딸’로 인해 화자와 서로 익히 아는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며 흔한 ‘우리의 일’로 상황을 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시인은 ‘우산이 옹그린 삼대를 감싸 주고 있’는 것으로 종장에서 한쪽 어깨가 젖는 정도의 각도로 독자의 우산마저 기울게 한다. 그러면서 “우산이 되는 일”이 ‘딸’이 ‘모자’로 ‘아기’를, ‘할머니’가 ‘딸’을, 또 ‘지나가던 우산 둘’이 ‘삼대’를 감싸는 ‘일’임을 상징화, 구체화로 동시에 풀어 놓는다. 게다가 그 일은 수많은 ‘할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라는 어머니가 어머니를 감싸는 일이기도 해서 괜히 울컥해진다. 때론 힘겨운 날엔 이젠 소용없지만 아직도 ‘아기’처럼 그 우산 아래 있고 싶을 때 있다.
소나기 올 때 빌려준 우산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