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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4273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두고 다양한 강연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성경대로 믿는 독립침례교인으로서 개신교 사람들이 기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종교 개혁을 되새긴다. 칭의 교리의 재조명과 재정립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종교 개혁의 더 중요한 열매는 "자국어 성경 번역의 시대"를 본격 개막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국제신학원 부총장 김재성 박사라는 사람은 종교 개혁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하 그의 글을 한번 읽어보겠다.
여기까지는 무난한 진술이며 우리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이 특별히 잘못되었다 볼 구석이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루터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행위구원적 신앙관을 바울 서신서들에 제시된 원래의 바른 은혜 복음으로 돌이켰으며 신앙의 겉치례와 행위 부분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다는 사실을 잘 증언했던 게 맞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후 단락에서 많이 나올 것인데 김재성 박사는 그 자신이 <칼빈주의자>의 시각으로 루터를 보고 있기에 루터의 신학에 대해 다소 자의적으로 주석하는 것이 느껴진다.
전문 용어로 "스콜라주의"라 했지만 이 사상은 전적으로 이교적이며 비성경적인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콜라라는 카톨릭 신학자가 구원도 받지 못한 마귀의 자식이었고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선한 행위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는 뜻이다. 루터가 마귀적 로마 카톨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죽을 뻔 했던 사고를 겪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행위 구원이 얼마나 허튼 소리인지, 또 로마서에 간단명료하게 제시된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자신 같은 죄인에게 절실한 것인지 깨달아 알아서 그때 회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는 칼빈도, 루터도, 쯔빙글리도, 그 어떤 유명 신학자도 자기 이름을 딴 종파의 리더로서가 아니라 지옥에 들어가야 할 죄인의 자격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성 박사의 글을 읽아 보면 마틴 루터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예수 믿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루터가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십자가를 신학화시켜서 학문의 카테고리에 집어 넣고 관찰과 연구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로마 카톨릭의 신학 풍조와 사제들이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니 신앙의 본질은 전혀 없고 형식과 제도, 외적 경건만 신경쓰고 있기에 너무나 형편없었고 그래서 비꼬는 냉소적 의미까지 담아서 "그래, 너네는 별 시덥잖은 학자적 논쟁들을 신학이랍시고 그 오랜 세월동안 허비해 왔는데 내가 보니 너네는 구원도 못 받고 헛짓거리 많이 하고 있다. 내가 진정한 신학을 알려줄게. 십자가의 신학이 바로 여기 있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신학 논쟁하거라. 이 카톨릭 돌대가리들아." 이런 심중을 토로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은 있어도 "루터주의"라는 신학은 그다지 존재 부각이 안 되는 것이다. 루터가 신학 책들을 많이 썼지만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는 것은 루터의 <신앙>과 <삶의 간증>이 우선이지 루터의 신학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칼빈에 대해 기억할 때는 칼빈의 삶 이전에 <칼빈주의>, 또는 <튤립, 5대 강령>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이 삶과 신학이 동반된 루터와 삶과 신학이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칼빈의 현격한 차이인 것이다.
김박사가 해석하는 루터의 교리에 대해 각 항목들을 놓고 살펴보자. 첫째, 십자가는 낮아짐과 수치를 의미한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것은 굳이 루터만의 사상은 아니고 거듭난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깨닫는 기초 교리에 해당한다 하겠다. 로마 카톨릭의 수도승들은 이 첫째 항목을 항상 강조하고 실천한다고 하며 루터 자신도 수도사였기 때문에 그의 생활의 1번 규칙이기도 했다.
우리가 종교 개혁의 맥락을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낮아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기초 교리이면서 거듭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고 종교 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이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실은 김박사가 이런 식으로 루터의 교리를 재조명하는 까닭은 루터와 어거스틴주의를 한 세트 메뉴로 만들어서 퓨전 음식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밀어부치는 때문이다.
이성주의와 십자가 중심 신앙은 대척 관계를 이룬다라고 하는 것이 루터의 핵심 사상이다? 나는 루터에 대해 깊이 연구한 입장은 아니지만, 또 김박사는 루터의 저작들을 나보다 더 많이 읽고 알겠지만 이건 참 생소한 이야기로 들린다. 여러분이 중세 시대와 종교 개혁에 관한 역사를 공부했다면 로마 카톨릭이 지배한 중세 사회가 절대 이성적, 합리적 사회였다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신학도 "이성 지향"인 학문의 한 영역인지라 카톨릭 신학자들도 자기들 나름의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추구한 건 사실이겠지만 그들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비성경, 반성경적인 이단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자기들의 잘못된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조차 거부하곤 했었다.
그런데 김박사의 주석에 따르자면 마틴 루터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로마 카톨릭에서 돌아서서 이성과 합리성의 반대편인 십자가를 택했다는 것처럼 보인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며 이런 언급은 마틴 루터를 이성과 거리가 있는 "신비주의적 은둔 성자"처럼 묘사하는 듯 해서 상당히 불쾌할 정도이다.
물론 루터는 개인적으로 많은 영적 체험들, 즉 악령의 역사라던지 천사의 도우심이라던지 여러가지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가 칼빈처럼 메마른 이성주의 신학자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를 핵심에 두고 카톨릭과 전면전을 벌이던 그때 그는 신비주의적 신앙인이 아닌 말씀을 정확하게 분별함으로써 마귀의 교회 카톨릭을 대적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였다.
셋째, "인간의 주도권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루터의 전공 분야는 아니라 현대 신학자인 존 맥아더 같은 자가 해당될 것이다. 루터 말고도 "제자도와 헌신"을 가르치는 개혁적인 교계 지도자들은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태리의 종교 개혁자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절제와 헌신을 모토로 해서 카톨릭의 세속화된 양태를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요주의 대상이 되고 결국 죽임당했다. 루터의 사상은 "인간의 주도권 포기"가 아니며 그런 것은 칼빈주의의 한 항목인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가깝다 하겠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구주를 믿고 영접할 수 있다고 믿었지 칼빈식 저항할 수 없는 수동적 구원을 믿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구원론"이라는 게 제대로 있기나 했으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카톨릭을 깨고 나갈 필요도 없었다. 루터는 수도승이었고 그가 거기서 배운 사상은 십자가가 아닌 인간의 행위가 있어야 의로워질 수 있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행위 구원 사상이었다. 말을 어렵게 꼬아서 하는 김박사 같은 사람들은 신학자로서는 인정받지만 실천신학자로서는 전혀 구실을 못하는 게 보통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학문의 대상으로만 여기기에 루터처럼 복음 전파의 목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박사의 중세 시대 구원론 타령은 전혀 번지수가 틀렸고 또 그 묘사 자체가 대단히 완곡하게 되어 있기에 카톨릭의 잘못이 별로 없어 보일 정도다.
이 사람이 언급하는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은 카톨릭의 뼈대를 세운 신학자로서 카톨릭의 거의 모든 기초 교리들이 이 사람의 사상에 기초해 있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로마 교회는 이 지상에서 가장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교회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찬과 세례(물침례)를 통해 그리스도 대신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라는 위임을 받은 기관이다."
어거스틴 사상의 요체는 로마 카톨릭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 땅을 주께로 "이겨오는"(소울 위닝이 아닌 무력 정복) 사명을 받았고 그것은 이교도들을 피의 정복 전쟁으로 굴복시켜 십자가 아래 무릎꿇리거나 성지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내서 유대인과 모슬렘을 몰아내고 카톨릭 왕국을 세우는 식의 "무력 수단을 통한 확장"에 있다. 어거스틴의 반성경적, 이단적 사상이 잘 녹아들어 있는 저작물로 저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신국론)이라는 책이 있다.
장로교인들은 어거스틴을 사도 바울의 신학적 후계 계보에 집어 넣고 거의 바울 못지 않게 극진하게 존경하는데 김박사도 예외가 아닌지라 어거스틴 이름 함자가 등장하는 그의 글의 모든 대목에서 그는 카톨릭 신학자 어거스틴에게 빛나는 후광을 둘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거스틴의 칭의에 대한 진술이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초 교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중세 로마 카톨릭은 그 기본마저도 흉측한 마귀의 행위 구원으로 변질시켜 놓았기에 중세 시대 끄트머리를 살던 루터 시대 사람들에게는 비성경적 신학자인 어거스틴마저도 천사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점은 내가 부인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칭의론에 대해 여러분이 이 인용문들을 볼때 어떤 감상을 느끼는지 한번 보라. 나는 어떤 느낌을 받는지 이야기하겠는데 한마디로 "위선자 어거스틴, 되도 않는 근엄 떨고 있다"는 감상이다. 어거스틴은 성경대로 믿는 원시 침례교도들을 박해하고 전쟁을 벌여 죽이는 데 찬동했던 종교 재판관이었다. 그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법을 머리로는 알았을지언정 마음으로 진짜 믿고 양심을 깨끗케 만들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때 박옥수나 유병언 수준의 지식과 머리로 받는 구원론을 믿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가 다 커버쳐 줄 수 있는 만능의 방탄 유리이므로 종교 독재든, 자신과 견해가 틀린 그리스도인을 고문하고 박해하는 일이든, 신앙의 명분으로 다 정당화된다는 마키아벨리즘적 신앙관이다. 이것을 더 발전시켜서 정예화한 집단이 종교 개혁 시대에 등장한 로욜라의 예수회인데 그들 집단의 모토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어거스틴 사상을 잇는 진정한 계승자들로서 자기들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경적 신학자들이라고 흔히 주장한다. 어거스틴처럼 그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자들의 주권이라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는 물론 어떤 일을 하시고, 하지 않는 "주권"이 있지만 그 주권은 마음대로 휘두르는 무작위의 폭력적 주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들은 각 인간들과 국가와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하나의 "리액션" 성격이 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작정하셨을 때 인간들의 믿음이나 불신에 의해 바뀌어질 가능성까지 미리 고려하신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미리 아심"이라는 개념인데 칼빈주의자들은 미리 아심에 대해 간과하고 항상 "주권"만 앞세우기에 그 자들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철썩같이 주장하면서도 행위 구원으로 미끄러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의 튤립 교리 중 마지막 항목,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도 결국 구원과 행위 요소를 결부시킨 독소 조항이라는 얘기다.
루터와 칼빈을 비교, 대조하는 김박사의 서술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루터를 종교 개혁의 선봉장으로 묘사하지만 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서 솔직 담백하게 전부 다 조명하지 않는다. 루터는 카톨릭의 행위 구원을 비웃고 조롱하고 무시하며 교황을 대놓고 모욕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문제점들과 오류들을 깨닫고" 정도의 신학자였다면 그는 카톨릭 신학 사전의 한 분파 목록을 장식하는 사람으로 끝났겠지만 그는 로마 카톨릭과 유럽을 완전 이혼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시도한, 다시 말해 온 몸으로 카톨릭을 거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자였다. 그가 카톨릭의 성사 개념들을 철저히 버리지 못하고 화체설(미사 의식)을 끌어 안은 것은 큰 실책으로 남았지만 어떤 시대의 영웅도 실수가 있는 법이니 그 정도 넘어가 줄 수는 있다. 그런데 칼빈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종교 개혁의 방향을 반카톨릭에서 리틀 카톨릭화된 개신교의 정립이라는 새로운 목표로 돌려 놓은 개혁의 X맨이라 보는 것이 맞다. 그는 심지어 몸소 스위스 제네바에 개신교 신정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역대 교황들의 실패한 시도인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또 실험해서 실패를 반복하는 멍청함까지 보여 주었다. 솔직히 칼빈의 업적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어서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칼빈의 최대 공로이자 개혁자로서의 업적은 "기독교 강요" 저술이 아닌 "제네바 성경 번역"이다. 그것이라도 없었다면 칼빈을 루터의 동급 반열에 올려놓기가 심히 무안했을 것이다.
김박사 왈, 칼빈이 루터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JFK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생뚱맞은 거짓 진술이다. 칼빈과 루터는 인간형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고 사상의 경향도 물과 기름이며 그들의 유일한 공통 분모는 반교황, 반카톨릭 정도이다. 루터는 자국어 성경을 보급해서 독일에 신앙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포부가 있었으나 칼빈은 루터만큼 자국어 성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네바 성경은 한 시대를 풍미하지 못하고 후에 고서 목록으로 들어갔지만 루터 성경은 그가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했던 독일 국민들의 손에서 멀어지지 않고 대대로 읽혔다. 어떤 차이점이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지 안다면 여러분은 루터의 계승자가 곧 칼빈이라는 식의 도식화 진술에 절대 동의 못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 간에 벌어진 성례들(카톨릭 종교 의식들: 성경에서는 침례와 주의 만찬)에 관련한 논쟁은 사실종교 개혁의 본질을 빗나가게 만든 암적 요소이기에 개혁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또 개혁자들이 침례교도들을 성례 때문에 공격, 박해한 사실도 있기 때문에 잘 말해지지 않는다.
김박사도 개혁자들의 잘못된 성례관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마치 그 당시 개혁자들이 이해했던 침례와 주의 만찬 부분이 정확히 성경적이라는 식으로 오도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바로잡는 것인데 루터와 칼빈을 포함해서 당시 모든 개신교 개혁자들은 카톨릭의 "미사 개념"을 100% 거부하지 않고 상당부분 수용했다. 특히 루터는 화체설을 수용하는 편이었고 칼빈은 실제 그리스도의 몸이 임하는 것이 아닌 상징으로 해석하긴 했지만 이 개혁자들은 카톨릭의 미사 교리가 매우 마귀적이고 교활한 거짓 이론이라는 데 대해 교황 비판만큼이나 자유롭게 비난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시대를 좀 이해할 필요가 있는 문제인데 루터가 상대했던 당대 기독교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카톨릭의 물뿌림, 곧 유아 세례를 받고 태어나서 평생을 카톨릭 7성사 교리로 세뇌당해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마귀적인 가짜 기독교와 가짜 구원론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건져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루터가 침례교도들을 배척한 것 때문에 그는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루터교라는 유산을 남기는 것으로 사역을 마무리했지만 제대로 개혁을 끝내려고 했으면 반드시 카톨릭의 "세례 중생"(물세례 받아서 구원받는다)과 "화체설"도 완전 혁파했어야 되었다. 그것들을 어중간히 남겨 놓았기에 루터교는 결국 카톨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먼 길을 돌아 다시 "로마로의 회귀"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 21세기 루터교가 더 이상 과거의 루터 신앙이 아니게 된 것은 루터가 카톨릭 교리들을 완전히 잘라내지 않고 어중간한 교리적 개혁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어떠한가? 그는 화체설 대신 상징설을 채택함으로써 카톨릭과 결별할 조건을 만족했지만 세례 중생 교리는 포기를 못하고 가져왔다. 오늘날도 장로교회는 세례 중생 교리를 간직하고 유아 세례를 주고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칼빈이 반카톨릭을 주장했지만 실은 내심 "칼빈주의식 리틀 카톨릭"을 재생산해 낸 그 깨끗하지 못한 개혁 때문이다.
칼빈의 구원론에서 제일 비성경적 부분이 등장하는데 김박사가 언급하는 대로 예정이 믿음보다 앞서고 선택이 자유의지보다 앞선다는 그 사상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행위와 믿음,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상충되는 요소들을 두고 돌려막기식 말장난을 일삼는다.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인간의 의지는 구원 받는 데 있어 하등의 효력이 없기에 폐기해야 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실제 성경에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데 있어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계시고 적극적인 회개를 통해 능동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이 칼빈주의자들, 김박사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 예정,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같은 것들은 종교 개혁의 값진 과실이 아니라 암흑 시대에 여전히 있었던 어거스틴주의의 썩은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리 지옥에 떨어질 자로 예정하셨고 또 어떤 죄인은 믿기도 전에 구원받을 자로 예정하셨다는 칼빈의 이론은 종교 개혁의 열매로 볼 것이 아니며 마귀의 썩은 이단 교리가 중세 시대를 거쳐 묻혀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나온 악취 나는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 문제는 "수동적"이지만 생활의 경건은 "능동적"인 체 하지만 그 사람들이 결코 그리스도인의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행위 자체에 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자기 자유 의지를 써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제대로 영접한 적이 없이 칼빈의 잘못된 교리를 따라서 무조건적 선택만 맹신하기 때문이다.
김박사가 이해하는 종교 개혁은 그래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인 내가 바라보는 종교 개혁의 의미와 거대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내가 종교 개혁에 대해 크게 감사하는 점은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 그리고 자국어 성경 번역 시대를 열게 한 루터의 공로이다. 다른 것들은 사소한 문제들이며 또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이 무수한 비성경적 일들도 했다. 나는 종교 개혁의 간접적 산물인 1611년 KJV를 한국어의 최종권위 성경으로 번역한 한글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경 번역자 루터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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