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사순 제 4주일 루카 15, 1-3, 11-32
-류해욱 신부
아버지의 비유
사순 제 4 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소위 ‘탕자의 비유’로 불렸던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에서 보다 중심적인 주제는 탕자의 회심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에 보다 올바른 제목은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루가 복음 15장에서 세 비유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비유는 모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잃었던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잃었던 양을 찾은 목자에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비록 당신의 이끄심 을 따르지 않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잃었던 은전의 비유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한 닢의 은전을 찾기 위해서도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지는 열정을 보이는 여인에게 비유하면서 그 은전을 찾으면 기뻐서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면서 침묵을 지키면서 기도하는 피정의 체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마도 이 비유를 묵상하신 경험이 있었 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내용 모두가 그렇지만 특히 이 비유 이야기는 단순히 그냥 읽어내려 갈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고 깊이 음미해야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고요한 숲 속 길을 산책하면서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들꽃의 향기에 취하면서 천천히 걷듯이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천천히 한 낱말씩 읽어나가면서 어떤 낱말이나 구절에 마음이 이끌리면 멈추어 서서 숲의 향기를 음미하듯이 멈추고 음미해야 합니다. 독일 예수회원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회를 했던 빌리 람베르트라는 신부가 쓴 ‘오라 그리고 가라’라는 책이 있는데 그 신부님이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이렇게 질문을 한답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이라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조금 전에 들었는데 기억하 시고 계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등등의 대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대답이랍니다.
그런데 정확한 답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보신 아버지는 먼저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우리말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대목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옮기면,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나 ‘깊은 연민’이나 모두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측은지심은 곧 자비심,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인간을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등지고 떠났던 삶, 죄의 삶, 타락과 죄의 결과는 소외와 고통이었지요. 소외와 고통을 체험했을 때야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멀리서부터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의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돌아온 동생은 반기기는 고사하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 을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지요. 아버지가 나가서 달래자, 큰아들인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 고 염소 새끼 한 마리 도 잡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착실한 아들이지요. 일 년 내내 아버지를 도와 뼈 빠지게 일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쁘게 했던 것이 아닙니 다. 그냥 의무로서 했던 것이고 내면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여기 있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냥 ‘저 아들’이라고 옮겨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정확히 옮기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장 원문에 가깝게 옮겼다는 NRSV 영어 번역은 이렇 게 되어 있습니다. “not my brother, but this son of yours”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돈을 창녀들에게 빠져 다 탕진해 버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문으로이거나 추측이겠지요. 사실 더욱 서글픈 것은 그가 내내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보살펴 준 부모 의 은혜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네 모습 아닙니까? 천만에 말씀이라고요?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제발, 그러면 얼마나 좋겠 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큰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왜 하실 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셈이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느냐고 하시며 함께 기쁨을 나누고 즐기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기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도 당신의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 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 한 번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깊이 마음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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