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걷기 - 10월 모임에 갓다..
오늘은 금강 하류지역 장항, 한산 , 신성리 지역을 둘러 보러 갓다..
가는 차안에서 답사 해설을 맡으신 오선생께 개괄적 설명을 들으며..
새로 뚫린 공주 서천간 고속국도를 달리니 금세 한산이다..
차창에 보이는 동산을 가리키며 원산이라 한다..
이색선생이 한산 8경의 하나로 읊은 수고정이 있던 원산..
圓山戌敲(원산수고)
海嶠傳烽火(해교전봉화) : 바닷속 뾰족한 봉우리 봉화 전하는데
閭閻壓波浪(여염압파랑) : 민가에선 물결이는 것 싫어하는구나
百年無事地(백년무사지) : 백년 동안 아무 일 없던 땅인데
戍敲夕陽多(수고석양다) : 수자리 북이 어이 석양에 시끄럽게 울리는가
이 시를 보면 이곳에서 금강하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던 모양..
봉수시설이 있어 왜구 등의 칩입에 대비했던 모양..
더구나 육지라기 보다는 섬에 가까운..
아마 금강 하구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바다물이 들어오는 밀물에는 섬이 되었다가 썰물 때는 육지가 되는 지역이 넓게 분포하였다고 볼수 잇다..
(장암진성에서 바라본 금강하구)
차안에서 가이드 선생이 도발적인 질문울 한다..
금강의 발원지가 어디냐..장수 뜬봉샘..아니그건 현재의 관념이다..과거에는 수분재를 시원으로 삼앗다..
그럼 금강의 하구가 어디냐? 장항- 군산간.. 그것도 현재의 관념일 수 잇다..
금강 하구둑이 생기전에는 바닷물이 강경이나 더 내륙이 부여 규암까지 들어왓다..
따라서 1950년 무렵 6,25로 한강에 분계선이 설치되어 배의 출입이 금지되기 전까지는 배가 주요 운송수단이어서
강경포구도 바닷배가 들어오는 포구로 항구엿다..
아마 그시절 사람은 강경 부근은 강이라기 보다 바다로 인식했을 것이다..
선생이 꼽는 도읍지는 바닷배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었다..
평양은 대동강을 통해, 서울은 한강 마포까지,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은 바닷배가 출입할 수 잇는 규암 부근의 부여로, 개성은 예성강의 벽란도를 통하여 바닷배가 직접 닿아 물류 유통이 원할히 되는 곳이라 왕도 역활을 하였다..
장항제련소 ..
국민학교시절 교과서에 굴뚝 사진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을 대표하던 시설이엇다..
포항에 제철소가 지어진 이후엔 이 곳 사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리라..
제련소 부근 성벽을 따라 장암진성으로 오른다..
그저 성벽일부만 복원된 곳..
이곳이 고대로부터 군사적 요충지란다..
이곳 뒷산 후망산에서 조망하면 금강의 줄기를 일망무제로 관측할 수 잇단다..
후망산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라고 언제 한번 보라고 권유한다..
금강의 하류엔 백제 시절 군산쪽은 육지가 아니라 고군산도라는 섬 지역이고..이곳도 성부근을 빼고는 바닷물이 들고나는 겟벌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당시 포구는 위 사진상 제련소 공장들이 위치한 지역에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당나라군이 침범한 백제의 기벌포를 당연히 이부근으로 비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잇다.
물론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는 이곳에서 가까운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당연히 백제-왜 연합과 나당연합군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진 백강 전투도 이곳 부근으로 상정한다..
또한 고려말 왜구들이 창궐할 때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하여 첫해전을 벌인 진포해전이 바로 이 부근이라고 한다..
그당시 수백척의 배가 불타자 퇴로를 잃은 왜구들이 전라도로 몰려 들어 약탈을 자행하자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까지 추격하여 황산전투에서 화살로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왜구를 섬멸하였다.
장암진성에서 내려오자 길건너 들판에 코스모스가 가득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찾아오듯이
오염된 땅에도 가을이 오고 꽃이 생기를 불어 넣는다..
현재 이 곳 부근 땅은 중금속으로 오염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고,,장차는 이곳을 생태보호지역으로 바꿀 전망이란다..
금강하구둑으로 이동하였다..
금강 하구둑의 설치 개념은 무엇이엇을까?
바닷물의 흐름을 막아 침수피해를 막고 담수를 확보하여 안전한 미곡경작을 꿈꾸었을까?
그 때문에 바닷배의 출입과 어류의 출입도 막앗다..
물류의 이동 가능이 끊겨 강경포구는 쇠퇴하였다..
하여간 우리가 그동안 보리고개에 질려선지 쌀의 자급을 달성하기 위하여 시행한 여러 시책들..영산강 하구뚝, 금강하구뚝의 건설, 서산간척사업로 쌀을 증산하였고 호남의 새만금 간척사업도 추진하였으나, 역설적으로 이젠 쌀소비가 줄면서 쌀은 남아돌고 농업은 위기에 처하였다..
하구둑에서 해물칼국수와 입가심으로 맥주에 소주를 말아 먹엇더니
붉은 옷색깔과 얼큰한 얼굴 색이 조화를 이루었는데, 파란 모자 색만 튄다..ㅎㅎ
그리고 한산면 소재지로 이동햇다..
한산은 모시, 소곡주, 신성리 갈대밭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간 곳은 1000년이 넘은 묘자리라는 한산 이씨 시조묘인 호장공묘이다..
한산 이씨 중에 유명한 이는 토정 이지함이다..
시모묘가 명당인 탓인지 문중에 기인이 많이 배출되고 벼슬자리도 끊기지 않았단다..
호장공이라는 분이 1000년전 고려시대 한산군의 호장(향리의 우두머리)으로 있을 때 관아터인 이곳이 명당이라 이곳에 부친의 백골을 관아의 대청마루 밑에 붙엇단다..
어디 그뿐이랴..그자신은 새곡이나 환곡을 받을 때 색락(추가로 받는 여분의 쌀)을 받지 않음으로 적덕을 하였다하니...그 정성에 후손이 번창하지 읺았나 싶다.
그뒤 조선말 고종때 관아터를 옆으로 옮기면서 봉분을 만들었단다..
극단적인 풍수 사상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옆 관아터였던 면사무소 앞에는 관리들의 선정비, 애민비, 영세불망비들이 줄지어 서잇다..
그 중한곳에 청렴하게 다스리고 규정을 간소화 하였으며 변치않을 높은 선비의 절개을 가지셨고 이지역에 인애의 유풍을 남겼네..((廉明之治 簡 ?其規 百世淸風 一境遺愛)라는 귀절도 보인다..
다음 코스를 변경하여 한산 소곡주 생산 마을을 방문하였다..
동자북마을..마을 지형이 아이들이 북치고 노는 형국이란다..
하여 큰소 2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북을 달아 놓앗다..
일행의 아들이 신나서 쳐본다...
소곡주.. 우리나라 전통 명주..앉은뱅이 술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곳에서는 미리 주문만 하면 항아리에 용수박은 채로 주문자에게 배달하겠단다..
막걸리와 전통주가 와인과 위스키를 능가하는 날이 오기를..
JSA영화로 유명해진 신성리 갈대밭..
아직은 때가 일러 억새만 활짝 피고..갈대는 아직 덜 피었다..
그래도 키큰 갈대를 이렇게 가득 보니 모두 입이 벌어진다..
다양한 코스를 만들었지만 그저 갈대 숲을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보상을 받는다..
금강의 하류의 모습..
금강걷기가 소설이라면 책읽는 중간에 결론이 어떻게 되는지 먼저 본 꼴..
그래도 결론이 재미잇으면 소설을 더 열심히 차근차근 읽게 되듯이..
금강걷기에 대한 열정이 대하처럼 흐른다..
갈대 밭의 솟대..
피곤한 날개 쉬어 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한 때 솟대공원을 만들어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적이 잇다..
솟대..지유를 위한 비상을 꿈꾸라..
갈대 숲속에서 불쑥 나에게 묻는 것이 있다.
여기서 뜨거우면 불바다 될터인데..
소곡주 몇잔이 수면제처럼 편안한 꿈나라로 인도한다..
눈을 떠보니 석양이 차창으로 따라오며 환송을 한다..
첫댓글 월강님 덕분에 다시 한번 다녀 온 듯, 사진과 설명이 잘 어우려져, 소곡주를 마시며 다시 한번,,,,
마지막 석양 사진이 이날 여행의 여운을 더하는듯 해요. 소곡주에 취한 향기로운 여행의 여운~~
그날의 일정을 소화하기 쉽게 잘 정리하셨네요. 탁월한 동료교수(peer tutor)십니다!
어제나 월강님의 후기는 감동입니다. 마지 마무리 사진과 맨트야 말로 일품이 아닐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