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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11:24~26에도 나오는 난해비유로서 그 해석이 분분하다.
물 없는 곳의 물을 말씀 또는 성령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귀신이 쫒겨난 후, 그 사람에게 말씀이 없거나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다시 악한 귀신 일곱을 끌고 와 이전보다 더 못된 사람이 되고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본인도 동조하는 해석이지만, 앞뒤 문맥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선적으론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란 걸 알수있다.
이 말씀을 하게 된 경위를 보면, 예수님이 눈 멀고 벙어리된 자에게 귀신을 쫒아내어 고쳐주자, 무리들이 놀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라고 인정한다.
그러자 시기가 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낸다며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보일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신 후, 본문의 일곱귀신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귀환시 우상숭배라는 더러운 귀신은 쫓아내는 개혁적인 일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바리새인파의 발흥으로 지나치게 울법과 형식에 얽매인 외식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본문 44절의 '수리되었거늘'의 뜻은 헬라어 '케코스메메논'는 '장식되었다, 꾸며져 있다'란 뜻이다.
즉 거룩한 척 남을 의식해 자신을 꾸미는 심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과 자기의, 교만은 누가 18:10에서 바리새인이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하며 이레에 두번 기도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 한 것에 잘 드러나있다.
그렇다면 '일곱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곱귀신의 '7'은 완전수로 완전한 악을 의미한다.
칠죄종이라 하여 오래전에 '세븐'이란 영화의 소재로도 쓰인바 있는, 초기교부 시대부터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하여 부단히 경계를 한 일곱가지 죄가 있다.
즉, '교만, 인색, 시기,분노, 음욕, 탐식, 나태' 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후, 가나안 정복시에 진멸해야 할 가나안의 일곱족속 또한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 마음에 거하는 7가지 죄악을 의미 한다고 한다.
여기서 가나안 7족속이 상징하는 죄악들을 잠깐 살펴보면,
헷족속은 공포, 두려움,
기르가스족속은 혼돈, 의심,
아모리 족속은 교만과 지식,
가나안 족속은 열등의식, 비굴함,
브리스 족속은 미움, 분노,
히위족속은 족속은 향락, 예술,
여브스족속은 원망 불평' 이다.
또한 잠언 6장 16~19절에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7가지가 나온다.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한자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형제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다.
이렇 듯, 인간이 짓는 완전한 죄악이 일곱귀신이기도 한데, 여기 세분류의 일곱가지 죄의 종류는 각기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죄는 교만이다.
즉, 교만은 모든 죄악중의 선봉이며 왕인 것이다.
사탄이 타락한 원인도 교만이며 아담과 하와를 범죄 케 한 것도 하나님과 같고자 했던 이 교만때문이다.
탐식, 정욕, 분노, 시기, 게으름, 분노, 열등감, 두려움 등등, 갖가지 죄를 지었어도 예수를 만나서 회개하면 되는데, 교만한 자는 애초에 예수님을 만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도 우상숭배라는 귀신을 내보내 깨끗해졌어도 교만함으로 예수님을 배척했고 그래서 더 악한 귀신들이 그들의 마음을 점령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 까지 한 것이다.
43절의 '물 없는 곳'이란 문자적으로는 광야, 사막을 뜻한다. 광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귀신들의 처소로 생각했다고 한다.
(레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
마4:1"그때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러므로 물 없는 곳은 생명이 자라지도 거하지도 못하는즉 황폐한 심령을 뜻한다.
첫귀신이 나간 후, 일곱귀신이 들어 와 이전 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 경우가 대표적으로 가룟유다이다.
가룟유다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왔을 때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나름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가 있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되어 제자가 되길 자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처럼 전도도 했고 귀신도 쫒아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첫 귀신이 나가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3년을 그렇게 예수님을 쫒아다니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가룟유다는 열심당원이었다고 한다. 열심당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독립투사들로 이루어진 정치단체이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실질적인 메시야로서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메시야와 예수님은 너무 달랐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하질 않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질 않나. 이런 예수의 모습은 가룟유다에게 무력하고 비굴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생각과 다르면 예수님을 떠났어야 했는데 가룟유다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께 들어오는 돈을 빼돌리기 위해 예수님 곁에 머무른 것이다.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 사람을 그렇게 이용가치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도 유다는 순전히 돈 욕심 때문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살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자금을 모으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돈에도 개념없고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는 이상한 자의 돈을 빼돌려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이 더 값지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가룟유다의 발을 씻겨 주고 양심을 찌르기도 하면서 수차례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유다는 그런 자기 생각에 꽉차 그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고 급기야 3년을 동거동락했던 스승을 은 삼십세겔에 팔기 까지 했다.
삼십세겔은 성인 노예값으로 지금돈으론 1500만원 정도의 그리 큰돈도 아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그 정도의 가치로 밖에 생각을 안한 것이다.
가룟유다는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인간이 할수 없는 수많은 이적과 생명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보다 자기 생각이 옳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과 말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자, 뭔가 잘못 됐다는 걸 알았지만, 끝끝내 자기 생각대로 자살을 택했다.
예수님은 정말 수없이 이 세상이 끝이 아니며 내세가 있고 천국 지옥이 있다고 하셨는데,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끝내 버린 것이다. 정말 이보다 더 나쁜 삶의 결말이 또 있을 까.
이처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은 교만 한자의 특징이며, 이 교만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그런데 내가 틀린걸 모르기에 회개가 어려운 것이다.
가룟유다는 애초부터 마귀의 종자라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누구나 이처럼 자기생각 자기의를 믿으면 가룟 유다가 될수 있다.
우린 처음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피로 인해, 성령의 물로 인해 깨끗히 청소가 된 경험들이 있다.
마치 거대한 물호스로 씻겨 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쓰레기, 오물들이 깨끗히 쓸려 비워지게 된 체험이 있다.
이는 꼭 비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축사 사역자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직접 축사를 하신다.
나 또한 왜 그러는지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을 훌렸고, 하루종일 하품을 하거나, 구토와 같은 기침, 트림을 하며 내안의 더러운 것들을 토해냈다. 이런 것들은 축사시에 일어나는 대표적 신체현상이다.
그렇게 우리의 심령은 깨끗해지면 방탕했던 옛 죄악된 습관에서 저절로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 점차 그 빈 마음에 예수님 대신 자기 생각, 자기의로 채워지면서 바리새인인의 신앙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오직 자기 생각만 옳아서 자기와 다르면 이단이며 자신이 정한 거룩함에 못미치면 상종못할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듣기에 어떤 교회에서 어느 여집사님이 이혼을 한 후, 그 후 남편과 다시 합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혼인신고를 안하고 합한 걸 그 교회 장로인가 영향력있는 사람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간음한자와 같이 있을 수없다며 저 사람을 내보내지 않으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 수 없이 그 여집사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그 장로는 공동체의 거룩성을 보존 하기 위해, 그 여집사를 내보내는 게 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악한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자기 생각에 힘을 실어 줬을 것이다.
그 쫒겨난 여집사는 그후로 다른 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잘했는 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상처를 받아 아예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종교적 열심과 교만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실제 중세 카톨릭이나 초기 개신교때 종교재판,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그때 사용했던 고문도구나 살해방법을 보면, 그 어떤 악독한 연쇄살인마도 그렇게 악랄한 방법으로 죽이기는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다.
자기 의에 의한 신앙이 그렇게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분명 성경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란 말씀이 있고(갈 3:3), '성령을 소멸치 말며' 란 말씀이 있다.(살5:519)
고전 9:27에서 바울조차 자신이 남을 전도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고백했다.
첫귀신이 나간 후, 그 빈 마음에 예수님 대신 악한 일곱귀신이 가득차면 그는 사단의 사람이지, 예수의 사람이라 할수 없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지만 다시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 진 사람이 된것이다.
신앙인이 되면 대부분 이전에 짓된 죄들을 끊게 된다. 술취함, 폭력, 토색, 음란 등등... 하지만 이런 것보다 교만이 더 큰 죄임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죄인줄 모르고 일상으로 짓는다.
분명 그들도 성경에 교만이 죄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교만은 눈을 멀게 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자신의 죄엔 눈이 멀었지만 타인의 죄는 밝히 본다는 것이다.
마7:3~5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있는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 티를 빼리라"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가장 싫어하신다.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교만한 자는 누구나 싫어한다. 교만한자 조차도 타인의 교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만한자는 스스로 자신을 교만하다 생각지 않는다. 교만의 속성은 이렇듯 속이는 데에 있다. 그래서 경계하고 대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넘어뜨리고도 넘어진 줄 모르게 하는 게 사단의 수법아닌가.
빌립보서 2:3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이 말씀을 기독교인들이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로 받아 들여 문제라고 우스개 소리가 있다.
성경을 일점 일획도 빼거나 더하면 안되는데 '낫게'를 '낮게'로 한 획을 추가해서, 그 한 획이 아예 그 가는 길의 노선 자체를 바꾸게 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은 좁은길이며 멸망의 길은 넓은 길이라 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핍박과 또는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 그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론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아도 본능대로 죄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넓은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만한 품성을 타고났다. 아주 어린아이들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잘난척하고 으스대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본다.
그래서 모든이가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추앙받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되기 위해 삶의 목표를 정한다.
그래서 그런 무리 속에서 교만의 본능을 거스르고 낮은 마음, 낮은 자리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좁은 길, 생명의 길이 아닐까 한다.
우리 모두 좁고 힘들어도 바른 노선, 일곱귀신이 아닌 예수님이 장악한 겸손한 심령이 되어 구원의 길 생영의 길을 걷는자가 되길 기도한다.
주님의 산ㅡ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