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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27.금. ♥ <총회서울부흥전도단> 전 단장님 정도출 목사님과의 만남과 대화 (5회 째) ♥ (9P)
*대선배님 정도출 목사님과의 대담 기록을 간단히 정리 하였습니다.
정오 12시에, 대선배님 정도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조은교회에 도착했다.
정목사님이 교회 입구에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몇 달 전, 정목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느낀 마음은 너무나 허물 없고, 친근하시고, 자상하신 형님을 뵙는 느낌이었다.
대선배님 정도출 목사님은 한 마디로 온유하고 잔잔한 미소가 일품인, 자상한 이미지의 차분하신 아버지의 상을 가진 분이셨다. 가능한 한 말씀을 아끼시는 분이셨고, 겸손함이 온 몸에 배여 계셨다. 자기를 드러 냄이나 자랑함이 전혀 없으셨다.
그림 같이 잘 꾸며진 1층 교회 카페에서, 손수 내려 주신 커피를 마시며, 편안하게 말씀을 들었다.
2층 조은교회 본당 실내는 천정을 기도하는 모형으로 디자인 하셨다.
강단은 깨어지고 버려진 벽돌 들로 강단 전면을 장식하셨는데, 이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양쪽 창문은 8복을 상징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하셨다.
‘조은교회’란 ‘좋은교회’란 뜻이다. ‘비전교회’를 개명한 것이다.
당시, 이단자인 ‘이재록’ 으로 말미암아 온 사회가 교회를 욕함으로, ‘조은교회’ 로 개명했다.
대선배님 정도출 목사님과의 대담 중에 너무나 내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많았다.
염천교회, 성민교회를 섬기신 후에, 지금의 ‘조은교회’ 를 개척하셨다.
시골에서 부친 장로님이 집과 논밭을 다 팔아 교회에 바쳐 버리고, 재산 하나 없는 바람에 얼마나 가난하고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정목사님은 하나님께 크게 드리면, 크게 복을 받음을 증명해 주셨다.
“오호라! 나 배종부 목사는 일생 동안 주님께 아무 것도 바친 게 하나 없구나!
남은 생애 20년이라도 생명을 바치고, 전 삶을 다 바쳐, 헌신하리라...”
말씀을 듣는데, 남은 생애 동안에 정말 주님께 큰 헌신과 삶을 드려야겠다는 깨달음이 강하게 밀려 왔다.
문득 백낙준 박사가 생각이 났다.
*백낙준 박사의 부친은 논밭을 다 팔아,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에 건축 헌금으로 바치고, 생계를 위해 교회 使察(사찰)로 충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 백낙준이 선교사를 통하여 미국 유학, 한국 개신교 역사학 박사 1호, 1927년 논문 <조선신교사(朝鮮新敎史)>로 신학박사 학위, 국문학자, 한글학자, 국무총리 서리,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연희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영국 왕립 역사학회 회원, 아시아 학회 이사장, 서울대 교수, 국민대학교 설립, 박정희의 삼선 개헌과 10월 유신에 반대한 야당 지도자... 가 되었다.
백낙준(白樂濬, 1895년 3월 9일 ~ 1985년 1월 13일)은 지난 날 대한민국 제 2대 문교부 장관· 무소속 초선 참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 대학 교수 출신의 정치가이다.
대한민국의 제2대 문교부 장관 임기 : 1950년 5월 4일 ~ 1952년 10월 29일
출생일1895년 3월 9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리
사망일1985년 1월 13일 (89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뇌졸중, 고혈압,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의 합병증) 본관 수원(水原)
학력 파크 대학교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예일 대학교 박사
연희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정당 무소속
부모 백영순(부) 배우자 최이권
자녀 백순익(장남) 백성익(차남) 백관익(삼남) 백창익(사남)
친인척 최이순(처제) 현제명(사돈)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 통합)
그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교육자, 국문학자이자 한글 학자, 기독교 사학자, 정치가였다. 문교부 장관 직책을 지낸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 호(號)는 용재(庸齋), 미국식 이름은 조지 페이크(George Paik), 일본식 이름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참의원 의원이었고,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참의원 의장이었다. 주로 연희전문학교와 연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문학과 교수로 활약하였고, 보성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근화여자실업학교의 문과 교수로도 출강하였으며, 1927년부터 사망 시까지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사회단체, 학술단체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52년 교육 자치제를 처음 제안하여, 이 때 각 교육청이 설치되었다. 아호는 용재(庸齋), 영어 이름은 조지 백(George Paik)이고 그의 부인은 최이권 前 서울YWCA 명예총재 겸 명예회장이며, 최이순 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그의 처제이다.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와 프린스턴 신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에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교수가 되고, 1945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6년에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면서,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45년 9월부터 12월까지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학부장을 역임하였다. 1938년 영국 왕립 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그 해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됐다.
1950년부터 1952년 10월까지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이승만으로부터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민국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제 5대 참의원 의원과 참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한 때 국토 통일원 고문으로 위촉 되었으나, 박정희의 삼선 개헌과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다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52년 그는 의무 교육과 교육 자치제를 제안하였다. 신익희, 김구 등과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도 참여하여 국민대학교의 설립, 개교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국문학, 한글학 외에도 개신교 역사학자로도 활동했으며, 주로 한국의 개신교사를 다루었다.
그는 대한교육연합회와 한국행정연구회(한국행정학회의 전신)의 창립에도 관여하였고, 1956년부터 59년까지 한국행정학회 초대 회장, 1956년 대한교육연합회(한국 교총의 전신)의 회장을 지냈다.
연세대학교의 교육과학대학이 있는 용재관은 그의 호에서 유래하였다.
본관은 수원이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1895년(고종 33년)에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동에서 농부 백영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0년(융희 4년) 봄에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선교사였던 교장 윤산온(尹山溫, McCune,G.S.) 목사의 실천에 감동 받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윤산온은 중학교 재학 중이던 그를 신성소학교의 강사로 채용 하였으며, 윤산온은 백낙준의 후견인이 되었다. 1913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성소학교의 교사에 채용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의 신학서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14년 이후에도 그는 신성소학교 교사 직을 유지하였다.
1916년 미국에 건너 갔으며, 막 노동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1918년에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22년에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편입학하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도 그는 윤산온의 후원 외에도 고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 하였으며, 1923년에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1925년에는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 역사를 수학하였고, 1927년에 논문 <조선신교사(朝鮮新敎史)>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도출 목사님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나, 전공인 정치계나 법조계로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다.
세상 출세의 길을 버리고, 목사가 된 것은 진정 하나님의 은혜였었다. 포항 동지상고를 졸업하고, 전공한 대로 풀렸으면, 선배인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 지금쯤 감옥에 가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 장로님이 목사 되라고 하여, 서울대 법대를 가도 하나도 기뻐하지 않으셨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우리 집안은 아버지 장로님 때문에 예수 믿고 완전히 망한 집안이다.
시골의 부농인 아버지 장로님은 과수원을 바쳐서, 엄청 큰 교회를 지었다. 면 단위 중에 제일 큰 교회였었다. 옆에 있는 밭을 바쳐서 목사관을 짓고, 나머지 논밭을 다 팔아 교회 짓고, 목사관 지었다.
면장을 지내셨는데, 막상 현직에서 물러 나 사퇴하니, 거지가 되어 먹을 게 하나 없었다. 사라호 태풍이 지나 갔을 때, 2년 동안 밥을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릴 적 나의 팔자는 중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다. 교회가 곧 우리 집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에 내가 살던 시골에서 중학교에 간 아이가 총 6명이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워, 나를 그냥 보내라 하여 중학교에 갔다.
정목사님은 어려서부터 神童(신동)이었다. 포항 동지중학교, 동지상고를 나왔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고교 선배이다.
나 배종부 목사와 후배들이 대선배님이신 정도출 목사님을 자랑스러워 한다.
오직 겸손하신 정목사님은 그저 다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한없이, 한없이 당신을 낮추신다.
중 3년 때, 서울에서 전국에 9명의 장학생 선발을 하는데, 선생님의 권유로 응시했다. 서울에 일주일 간 구경 시켜 준다는 말에, 시험에 응했다. 그 때에 청와대에도 가 보았었다.
한 달 후에 합격 통보가 왔다. 중학교 아침 조회시간에, 합격 발표와 함께 선물이 넘쳤었다. 고등학교 공부할 것은 선물로 다 왔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등록금을 다 대 준다는 조건이었다. “단 서울에 합격할 경우에만...” 이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
서울대는 중학교 담임선생이 ‘안된다’ 하는데, 나는 ‘한번 해 보겠다’ 했다.
정말이지, 고교 3년 동안 내내 나 혼자 알아서 공부를 했다. 학교 출석 마저도 내 자유였다. 진학 정보를 대구로, 부산으로 가서, 학생 들을 만나 정보 들을 얻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나는 걸릴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진정 이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였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잘 섬긴 은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 법대 100명 정원을 전국 고교 11개교가 합격자를 겨우 내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법대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도중, 진로를 바꾸어 신학교로 갔다.
나는 진정 목사가 되기를 원치 않았었다.
나의 시골교회 목사님이 월 3만 사례를 받고, 밥을 굶는 것을 보았다. 비참했었다. 목사님의 자녀가 월사금을 내지 못해, 늘 울고 하는 것을 보았었다.
목사님이 양 3마리를 얻어 와 길러, 그 젖을 팔아 사는 것을 보았다.
31세에 부흥사로서, 울산 평강교회에 처음 부흥회 인도를 나갔고, 600명 교인에게 첫 설교를 새벽 2시까지 담임목사가 강권하여 했다. 난 할 말이 없어, 30분을 하고서 중단했다. 담임목사가 더 하라 했다. 그렇게 그렇게 새벽 2시까지 간 것이다.
두 번째는 논산에 가서 부흥회를 했다.
나환자 촌인데, 나환자 장로님이 첫날 식사 때에 병에 걸린 손가락으로 보신탕 국을 휘이 휘이 저어서 강사를 먹으라 시험하고, 이에 합격을 하면 부흥회를 시켰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더니, 합격 되었다. 하하하!
부흥회 기간 일주일 내내 보신탕만 먹였었다. 장로님이 큰 은혜 받았다 했다. 장로님이 담임목사에게 “대단한 부흥 강사님이 왔다.” 고 했단다.
이후, 부흥회 하는 교회 마다 기적이 일어 났다. 나는 정말 부흥회도 할 줄 모르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병이 낫고, 기적이 벌어지고, 건축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제주영락교회의 건축 빚 7억(지금 시가 70억)을 성령의 강권으로 부흥성회에서 헌금하게 되었다.
담임도 반대하고, 13명 장로들도 다 반대하는데, 부흥강사가 부흥회 기간에 임시당회를 소집하게 하여 헌금하자 하니, 아프간에서 죽은 목사의 아버지인 똑똑한 장로가 앞장 서서 반대를 하는데, 한 장로가 “부흥강사가 저렇게 건축 헌금 하자는 데는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느냐?” 하여, 감동 되는 사람들은 헌금하라 하니, 700여 명 중에 건축 빚 7억 중에 십일조로 7,000만 헌금한 자가 10명이 나오고, 기타 헌금 들을 다 하여, 총 12억이 나왔었다.
그 돈으로 노인복지회관까지 완공했었다.
대전제일교회도 건축 부흥회를 하여, 30억 헌금을 담임목사가 원하면서, 자기는 확신하니까 부흥회를 하라고 강권하여, 내가 좀 더 헌금이 나올 거라 하니, 정말 총 35억이 나왔다.
노량진교회는 3억이 있어야 수리를 하는데, 헌금할 자가 없었다. 림인식 목사님이 별로 기대감도 없이 부흥회를 했는데, 부흥회에 가서 내가 “내 집 대신에, 하나님을 집을 먼저 짓자.” 하니, 3억이 나와서 교회당을 다 수리했고, 림인식 목사님이 은퇴한 후에는 노량진교회 100주년 기념 사업을 하려 하는데, 림인식 원로목사님이 담임목사에게 정도출 목사를 모셔서 부흥회를 하라 하여 부흥회를 했더니, 무려 100억의 헌금이 나왔다.
이는 전적 내 능력도 아니고, 내 실력도 아니다.
난 진짜 못하는데, 하나님이 하셨다.
나는 부흥사의 재주도 없다.
설교도 못한다.
농담도 나는 못한다.
그렇게 설날이건 추석이건, 매주 2회씩 42년을 부흥회를 연속하여 3,000여 회 이상을 인도했다.
“목사님! 천보산 기도원은 몇 번이나 갔었습니까?”
“천보산기도원은 수십번도 더 갔었다.”
신현균 목사님 밑에 있으면서, 그의 부흥사 기질을 전혀 본 받은 적이 없었다.
염천교회 4년, 성민교회를 3년 정도 섬겼는데, 나는 정말 부흥사의 기질이 없었다.
나는 부흥회 할 줄 모르니까, 할 말이 없다...
“목사님! 고난 당한 얘기 좀 해 주세요.”
“고난 많지! 어려서는 너무 가난했고, 중고등학교는 제대로 다닌 적도 없지...
하나님이 한번씩 나를 치셨다.
진짜 큰 채찍은 서울대 법대 졸업 후, 29세에 간이 곪아 썩었다.
‘간 혼수증’ 이었다.
병원 침대에서 죽어, 숨이 아예 끊어졌다.
아버지 장로님이 임종예배를 드리고 침대에서 옮기자 하여, ”이 놈은 천당 가기 힘드니, 예배 드리고 천국 보내자.“ 하여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데, 예수님이 정도출 목사님의 환상 중에 간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다.
예배 후에 깨어나, 목사님! 여기가 어디입니까? 혼수상태에서 물었다.
대학병원 측에서는 갑자기 내가 살아 나니 놀라서 의사들 21명이 다 달려 왔고, 3개월을 나를 독방을 주며, 간을 검사하고, 또 임상 검사했다.
3개월 동안 호텔 음식을 먹으며, 병원에서 지냈었다. 병원 내에서 나는 단연 기적의 인물이 되었다.
이 3개월의 기간에 병실에서 방언하고, 불 받고, 성경을 100독 했다. 나의 하나님을 만난 회심의 시간이었다.
이전에 나는 영락교회 청년회장 하면서도 완전 좌파였었고, 영락교회에 불을 질러 버리려 했었던 못된 사람이다.
신앙이 하나도 없었다. 데모에 늘 앞장섰었다...”
정도출 대선배님은 당신의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차분하게 남 얘기 하듯 하신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 만을 강조하신다. 대선배님의 자기를 드러 내지 않음, 겸손함이 내내 나의 가슴에 깊이 깊이 느껴졌다.
데모하고 요주의 인물이 되어 군에 가니, 선배가 중앙정보부에 있었는데, 내가 B급 요주의 인물인데, 선배가 차트를 없애 버렸다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지키셨다.
이는 다 아버지 장로님의 위대함 덕분이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한 것은 절대 공짜가 없다.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다 준비하고 마지막 기도하는데, 주님이 개척하라 하셨다. 6개월을 버티다가 주님께 맞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개척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환상으로 은마 아파트 앞의 상가를 보여 주시면서, 개척하라 하셨다.
말씀을 듣는데, 정도출 대선배님께 ‘예언의 은사’ 가 강력하게 와 계심을 알게 되었다. 대선배님께는 강력한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그리고 아버지 장로님이 전 재산을 다 주님께 바쳐 버렸음으로, 그 엄청난 ‘물권’ 이 정도출 목사님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있었다.
사모랑 둘이서 개척을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지도 모르고...
버스 타고 은마 아파트 앞에 내리니, 환상 중에 본 건물이 보였다. 3층 당구장을 보고서, 복덕방 주인에게, “저 당구장이 좀 있으면 매물로 나올 테니까 연락하라 하니, 믿을 수가 없는지 뜨악하게 나를 쳐다 보았다. 정말 며칠 후에 당구장이 매물로 나왔다. 그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1,000만 주고 개척교회를 시작하는데, 4개월 후에 주인이 전화가 와서 강권적으로 건물을 사라 했다.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사라 했다. 자기가 서류를 다 만들어, 내게 건물을 팔았다.
이유인즉 주인인 그가, 서대문구의 체육선생이 유괴 살인범으로 몰려 도망 다니는데, 대신 범인으로 몰려, 빨리 팔려 한 것이었다. 그 때에는 체포되면, 누구나 바로 범인이 되는 그런 시대였었다.
당구장 주인은 여수제일교회 여전도사님의 아들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허랑방탕하며 살다가 망하는데, 마지막 건물인 교회 건물을 부도 나기 전에 나에게 넘긴 것이었다.
나는 3-4년 간 그 돈 갚느라 정말 고생했었다. 그 후 송파 쪽으로 와서 건축을 했다. 그 주인은 훗날 양문교회의 주장로였다.
정도출 목사님의 3자녀는 1남 미국 뉴저지에서 유학한 목사, 딸, 아들이다.
“나는 별로 신통한 게 없으니까...”
정도출 대선배님을 만난 경험 중 가장 신선함은 몸에 배인 겸손함과 자기를 낮추심이었다.
지난 한 시대를 풍비한 대선배님 들을 한 분, 한 분 알아 가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모임의 취지 :
‘전 단장님과의 만남과 대화의 시간’ 은 존경스러운 선배님들의 그 獻身(헌신)의 일생을 높여 드리고, 후배들이 그 靈性(영성)을 본 받기 위한 아름다운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선배님들이 接待(접대)를 하시면 안됩니다. 단장과 임역원들 중심으로 <서울부흥단>이 待接(대접)해 드리는 시간입니다.
가능하시면 많은 단원들이 오셔서, 친교와 힐링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밥상공동체가 가장 이상적인 親交(친교)입니다. 꼭 다들 오셔서 즐겁게 하루를 지내고 가시기를 당부합니다.
앞으로 <서울부흥단>의 사업 방향을 훈련과 교육과 예배 중심이 아닌, 친교와 여행, 밥상공동체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2021.4월-7월 부흥강사 훈련, 교육, 예배 중심
2021.8월-11월 친교, 여행, 밥상공동체 중심
2021.12월-2022.3월 연합 부흥성회 중심
오늘 모임은
대선배님 정도출 목사님의 조은교회에서 모인 후에,
좋은 말씀을 받고서,
식당으로 이동합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부부 동반으로 오셔서,
즐거운 하루의 ‘힐링’ 과 ‘웰빙’ 의 시간이 되시기를 당부합니다.
다들 오셔야 합니다.
오실 분들은
미리 상임총무 백중규 목사님께 연락을 주시면,
준비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상임총무 백중규 010-4336-0512)
● 일시 : 2021.8.27. 금요일 12시 정오
● 강사 : 전 단장 정도출 목사님
● 장소 : 조은교회
● 주소 :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22나길 14(오금동2-5)
평생을 목회하시며,
부흥강사로 사역하신 전 단장님을 만나 뵙고,
대접하며,
귀한 사역 경험을 듣고 배우는
진정 복 되고, 멋진 자리입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목사님을 정성으로 대접해 드리며,
적은 寸志(촌지)를 드려,
그 아름다운 삶을 높여 드리려 합니다
<총회서울부흥전도단> 모든 단원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
단장 배종부 목사
상임부단장 이종선 목사
상임 총무 백중규 목사
서기 박도식 목사
회계 이형기 목사 외
임역원 일동 초청 드림
* 상기의 아름다운 사업은 <총회부흥단> 산하 모든 지역 부흥단에서 함께 실시하면 좋을 것 같아서. 참고가 되실까 하여,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