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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과거제도 科制
과거제도는 역易의 관괘觀卦에서 연원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현서賢書를 바치는 일1), 세
가지 일로 가르치는 일2), 선거選擧의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능력 있고 훌륭한 인
재를 추천 받아 선발하는 제도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부터 시작하였고, 효도하고 청렴
한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부터 시작하였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에
는 지진地震이 있자 문학을 천거하였으니, 재이災異가 생겼을 때 선비를 천거하는 일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믿을 만한 신하를 불러서 경전 시험을 보았는데, 이것이 경학經學
으로 인재를 뽑는 일의 시작이다. 인재를 해마다 천거하는 제도는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BC6~AD57, 재위 기간 25~57)3)가 창시하였고, 특정한 해를 정하여 인재를 뽑는 제도는
순제順帝가 창시한 것이다. 대책對策4), 사책射策, 수재秀才, 무재茂才 등은 모두 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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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서賢書를 바치는 일: “향노鄕老 및 향대부鄕大夫, 군리群吏들이 왕에게 현능賢能의 책을 바쳤다”라는 내용이 『주례周禮』·
「지관地官·향대부鄕大夫」에 보인다.
2) 세 가지 일로 가르치는 일: “향의 세 가지 것으로 만민들을 다스리고, 빈이 그들을 흥기시킨다. 첫 째는 육덕六德이니, 지知·인
仁·성聖·의義·충忠·화和이고, 둘째는 육행六行이니 효孝·우友·륙睦·인婣·임任·휼恤이며, 셋째는 육예六藝이니,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이다”라는 내용이『주례周禮』·「지관地官·대사도大司徒」에 보인다.
3) 광무제光武帝: 자 문숙文叔. 묘호 세조世祖. 시호 광무. 성명 유수劉秀.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
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群웅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하북河北· 하남·호북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하남의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하남의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
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세력 범위는 하북·하남·섬서陝西뿐이었으며,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의 외욕隗浴, 하서
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또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즉위한 후 10년 동
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왕망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 전력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유교 존중주의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
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4) 대책對策: 과거科擧의 과목인 제술製述의 하나로서, 책문策問이라고도 한다. 경의經義 또는 정치 등에 관하여 의견을 물은 데
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하는 것, 또는 그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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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이지만, 오히려 사제賜第5)라는 명칭은 없었다. 이 제도들에 대해서는 모두 상세하지
않고 인재를 뽑는 방법이 오직 과거에만 의거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부터는 오직 과거로만 인재를 뽑았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수隋나라를
계승하여 나라를 세우고, 영웅들을 과거科擧라는 틀 속에 가두었으니 제아무리 하늘을
날고 땅을 뛰는 재주가 있더라도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움쩍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당
唐왕조가 사람을 기만하였던 묘한 술책이다. 이 때문에 큰 선비들과 기걸 찬 사람들은 헛
되이 늙어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역대 왕조들은 이 제도
를 본받았고, 이미 천백 년 동안 변치 않는 제도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시험에 달
려 있게 되었다. 세상의 도가 성대하고 쇠퇴하게 되며, 국가가 평안하고 위태로우며, 다스
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인재를 얻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으니, 국가의 큰 정
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러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제도를 대략 개관하고 나의
견해를 덧붙여서 공公을 넓히고 폐단을 구제하는 정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8.1. 중국 역대의 과거제도 歷代科制
수대隋代에는 진사과進士科를 설치하였다.
당대唐代에는 수대의 제도를 본받아서 태종 때부터 예부禮部에서 시험을 치렀다. 측천무
후則天武后(624~705)6) 때부터는 전殿 앞에서 친시親試하였다. 천보天寶7) 연간부터 비
로소 시험장에 담을 설치하는 규정을 두고 곡강曲江에서 잔치를 벌였다. 개원開元8) 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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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동등한 자격을 내려 준다는 뜻이다.
6)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년. 별칭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시호‘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중
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지만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
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7) 천보天寶: 당唐 나라 현종玄宗의 후기後期 시대, 곧 741~756년을 말함. 현종은 재위在位 기간이 44년이었는데, 초기에 정사
를 바로잡아 성당盛唐 시대를 이룬 때가 개원開元 연간이었고, 후기에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안록산安綠
山의 난亂을 만나 나라가 어지럽게 된 시대가 천보天寶 연간이었음.
8) 천보天寶: 중국 당唐나라 현종의 연호로써 713년~741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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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과거에 낙방한 자를 입학入學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대개 진사進士를 시詩·부賦·
논論·책策으로 시험 보았던 것은 당나라 제도였고, 헌軒에 나아가서 시와 부로 시험 보
는 것도 당대의 제도였다.
송대宋代에 기존의 시험 과목에다 경의經義를 덧붙였고, 책시策試라는 과목도 정하였다.
봉미관封彌官9)은 순화淳化10) 연간에 시작하였다. 등록원謄錄院은 상부전시祥符殿試에
서 창시되었고, 불출不黜은 가우嘉祐11) 때의 제도이다. 3년에 한 번 과거를 보는 것은 치
평治平12) 때의 제도이다.
명나라는 홍무洪武13) 3년에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취했는데, 문과를 취하
는 것은 모두 원대元代를 따랐다. 홍무 17년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제를 정하였다. 선비
들은 각각 경 하나씩만을 보았으니 모두 『논어』·『맹자』·『중용』·『대학』을 겸하였다.
문과는 논論·표表·부賦·책策으로써 시험을 보았는데, 3년에 한 번 과거를 개최하
되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든 해에 시험을 보았고, 전시殿試는 책策으로 시험을 보
았다.
8.2. 우리나라의 과거제도 海東科制
신라新羅는 애초에 활쏘기로만 인재를 선발했는데, 원성왕元聖王 때에 독서출신과讀
書出身科14)를 처음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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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봉미관封彌官: 과거에서 시험지의 봉미를 떼던 시관試官. 봉미란 과거 시험지 머리 부분에 응시자의 성명과 본관 및 사조 따위------------------
당나라 장경長慶15) 초기에 신라에서는 빈공賓貢 김운경金雲卿16)이 처음으로 당에
들어가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이것을 전례로
삼았다.
8.2.1. 고려의 제도 麗制
고려 광종 때에 한림학사 쌍기雙冀17)에게 명하여 지공거知貢擧가 시詩·부賦·송頌·시
무책時務策으로 시험을 보아 진사를 뽑았다. 이 법은 모두 당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우리 동방은 문풍이 쌍기雙冀에서부터 처음 일어났고, 왕융王融(?~)?18)의 훈도薰陶가
점점 민간에 젖어들어 집집마다 독서讀書하여 취제取第할 때에 세 명 혹은 다섯 명씩 등
과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모두 왕씨와 쌍씨의 공이다.
덕종德宗(1016 ~1034)19)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처음으로 설치하여 부賦 및 육운시
六韻詩, 십운시十韻詩로써 선비들을 시험하고 뽑았는데, 남성시南省試라고도 하고 성균
시成均試라고도 일컬었으니 이것이 감시監試20)의 기원이다.
공민왕恭愍王(1330~1374, 재위 기간 1351~1374)21)은 처음으로 원나라 제도를 받아
들여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규칙을 정하였다.
예종睿宗(1450~1469)22)은 동당시東堂試23)를 제정하여 처음으로 경의經義로써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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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장경長慶: 중국 당나라 목종穆宗 때의 연호이다.-------------
보았다.
의종毅宗(1127~1173)24)은 승보시升補試25)를 제정하여 임유공任裕公 등 55명을 뽑아
국학國學을 채웠다. 시부와 경의로써 선비를 뽑았으니 이것이 승보시升補試의 시작이고,
생원生員·진사進士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8.2.2. 조선의 과거제도 國朝科制
우리 태조 원년에 과거제도의 법을 정하여 안으로는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26)에서, 밖으
로는 안렴사按廉使가 경전에 밝고 행실이 잘 닦여진 사람을 선발하여 나이·성·관향·
3대조·능통한 경서를 성균관장成均館長에게 올리게 하였다. 이소에서는 사서오경四書
五經과 통감通鑑을 강하게 하였고, 통달한 경經의 다소多少, 이치를 보는 정조精粗에 따
라 그 높고 낮음을 정하는 것이 초장初場인데, 그 결과를 예조禮曹에 보고하였다. 중장中
場에서 표表·장章·고부古賦를 시험 보고, 종장終場에서는 책문策問을 시험 보았다. 이
3장을 통과하여 입격한 사람이 33명이다. 이들을 이조吏曹에 보내면 이조에서는 이들의
재주를 헤아려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권근權近(1352~1409)27)이 상소上疏하기를, 전조에 의거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의
의疑義를 다시 시험 보고, 모두 이문吏文28)의 선비들을 시험 보도록 청하였다.
세종世宗 20년(1438)에 처음으로 생원과 진사를 설치하고 백패白牌를 주었다. 고부古賦
10운시로써 초시初試, 회시會試를 정하여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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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의종: 재위 1146~1170.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 인종仁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예태후 임씨恭睿太--------------
개국 이후로 사학詞學이 모두 폐지되었다. 이때에 진사과를 설치하여 중장中場에서
사부詞賦를 시험 보았다. 이로부터 시학詩學이 비로소 성대해졌으니 모두 류방선柳方善
(1388~1443)29), 조반趙頒의 힘이다.
임술년(1442)에 거인擧人에게 강서講書했는데, 어효첨魚孝瞻(1405~1475)30)이 집현
전集賢殿에 근무하다가 과거 강경講經의 편리 여부에 대해 의논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니 강경講經으로만 인재를 등용한다면, 제술製述은 잘 하지만 강경을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절망할 것이다. 마땅히 그때그때 바꿔가며 뽑아 등용해야 한다. 그
렇게 해도 강경에 힘쓰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 고 하였다.
강서를 폐지한 뒤에 제술로 사람을 뽑으니, 과거를 보는 사람들은 사육변려문을 일삼
고 경서의 반 줄도 읽지 않으니, 강서를 시험 보아야 한다는 의논이 다시 일어났다.
단종端宗 원년(1453)에 진사시를 복설復設하고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바꿨고, 시
詩와 부賦를 합하여 일장一場이 되게 하였다.
세조世祖 정축년(1457)에 별시別試를 설치하였다. 초시初試에서 2소를 설치하고 「역도
설易圖說」을 강하였으니, 별시과別試科는 여기에서 시작하였다.
발영시拔英試31)를 설치하고 문관文官 정2품正二品 이하에게 시험에 나아가게 명하고,
공경재보公卿宰輔 이하 유품문과流品文官까지 대궐의 뜰에 모아 친책등준시親策登俊試
를 치르게 하였다.
구례舊例에 관직이 정3품에 이른 자, 문무과 6품에 나아가지 않은 자, 생원진사시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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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류방선柳方善: 조선 전기의 문인.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서흥부원군瑞興府院君 기沂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외손外孫.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의 문인門人이다. 1405년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
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서원西原으로 유배갔다가, 1410년 영양永陽으
로 이배移配되었다. 1415년 사면되어 원주原州로 돌아갔다가 다시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다. 1427년 19년 만에 사면되었
다. 1428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원주에 우거寓居하며 학문을 닦아 제자
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한편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아 서거정徐居正, 이보흠李甫欽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과 경현
원景賢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30) 어효첨魚孝瞻: 조선의 명신. 자는 만종萬從. 호는 귀천龜川. 시호는 문효文孝. 본관은 함종咸從. 변갑變甲의 아들.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 1429년(세조 11) 문과에 급제,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고, 벼슬을 쌓아서 집현전응교集賢殿應校가 되어 젊
은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서연書筵에서 예기禮記를 강하며 제가諸家의 요설要說을 수집 예기일초禮記日抄를 찬撰
하고, 1446년 집현전응교應敎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註官이 되어 태조 실록의 사실史實을 참조하여 용비어천가를 짓도
록 했다. 문종 조에 집의執義로 특진하고 대사성大司成·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이조·호조·형조 참판·대사헌大司憲
을 지냈고, 세조 조에 들어서 이조 판서·지중추원에 승진,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성품이
순결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음양풍수陰陽風水 등의 미신을 적극 배척하였다.
31) 발영시拔英試: 세조(1456 1468년) 때에 정2품 이하의 문관 벼슬아치들에게 보게 하던 과거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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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지 않고 당상관으로 시험에 나아가는 일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1419~1472)32)
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종친宗親 극품極品이 시험에 나아간 것은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
(1444~1470)33)로부터 시작하였으며, 부마駙馬가 시험에 나아간 것은 하성위河城尉 정
현조鄭顯祖(1440~1504)34)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대개 세조世祖가 온양溫陽에 행차하
여 별시를 시행했을 때에 모두 시험에 나아갔다.
성종成宗 2년(1471)에 별시別試에 거자대책擧子對策이 있었다. 부처에게 제사지내고
화를 물리치는 제사를 올리는 자는 시관試官이 배척하였다. 상이 손수 쓴 서찰로 하비下
批35)하기를,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하예를 물리치게 하여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도록 하라. 부처님에게 기도하여 화를 물리치고자 하는 자는 시관이 배척
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왕조 이래로 문체가 평담하고 온당하였다. 한두 명의 문사가 사람들을 속여서 기
이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글을 써서 1등에 뽑히니, 과거의 문체가 모두 다 변하여 서곤西
崑36)이 되었다.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출척한 고사에 의거하여 문체가 심하게 기이
한 사람을 출척하여 문체가 약간 복구되었지만, 여전히 모두 다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성종 8년(1477)에 상께서 국학國學으로 행차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고 그 날로 방방放
榜37)하니, 진하할 때에 교문橋門을 둘러싸서 보고 듣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과거 당일
에 방방放榜하는 일은 여기에서 시작하였다.
또 상이 국학國學으로 행차하고 춘당대春塘臺38)에 납시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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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권반權攀: 조선 전기 단종, 세조 때의 문신. 단종 때 형 남과 함께 계유정난에 가담하였다. 세조 때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
며, 전농시소윤·중추원첨지사 되었다. 가선대부로 승자되고 화산군에 봉해졌다.
33) 이보李溥: 자는 준지俊之, 호는 명신당明新堂. 할아버지는 세종이고, 아버지는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이며, 어머니는 증좌의
정 신자수申自守의 딸이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었다. 세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5세까지 세자와 같이 공부하도록 궁
중에서 길렀으며, 8세가 되자 특별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승서하고 영순군永順君에 봉하였다.
34) 정현조鄭顯祖: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여 하성위河城尉에 봉하여졌고, 1466년 1월 의
빈부의빈儀賓府儀賓이 되었으며, 1467년 10월 하성군河城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35) 하비下批: 소차疏箚, 초기草記 등에 대해 비답批答을 내리다.
36) 서곤西崑: 만당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가리키며, 북송의 궁정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당대 수사주의 문학의 극치
를 보였으나 예로부터 난산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37) 방방放榜: 문과·무과, 소과小科인 생원·진사進士에 급제한 자를 발표한 뒤, 일관日官이 택한 길일吉日에 궁중에서 창방의
唱傍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것은 동·서반東西班과 시신侍臣들이 시립하고, 신급제자新及弟者의
부모 형제들이 참관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문과 급제는 동쪽, 무과 급제는 서쪽, 생원은 동쪽, 진사는 서쪽에 등급 순으로 정렬
하여 국왕에게 사배례謝拜禮를 올린 다음, 합격증인 홍패紅牌(문文·무과武科)·백패白牌 등을 하사받았다.
38) 춘당대春塘臺: 창경궁昌慶宮 안에 있는 대臺. 조선조 때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과의 시험을 보였는데,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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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서 선비들이 시험 보는 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종친과宗親科를 설치하여 경經과 역사歷史를 강하니,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
(1454~1504)이 1등으로 뽑혔다.
중종中宗 정묘년(1507)에 김대유金大有(1479~1551)39)가 중전정과시中殿庭課試에서
장원壯元을 하여, 그에게 진사시進士試에 직접 나아갈 것을 명하였다.
중종 계유년(1513)에 별시別試에서 강경講經을 명하였다. 별시강別試講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중종 기묘년(1519)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다.
중종 계사년(1533)에 성균관에서 뽑았는데 도기유생到記儒生40)들이 시험에 나아갔
다. 초시初試는 삼경 가운데에서 스스로 원하는 이경二經과 사서四書 중에서 제비 뽑은
두 책을 강하고, 강경한 뒤에 제술을 시험 보았다. 전시도기과殿試到記科가 이로부터 시
작하였다.
김안국金安國(1478~1543)41)이 시장試場에 들어갈 때마다 고시考試가 정밀하고 치밀
했고, 인재를 얻는데 힘써서, 반드시 15일이 지난 뒤에 출방出榜42)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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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대유金大有: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1498년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
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
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
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
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했다. 1545년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
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가 있다.
40) 도기유생到記儒生: 성균관에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유생. 성균관과 사학私學에서 그 출석 점수가 50점이 되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41) 김안국金安國: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
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
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
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 등의 언
해서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 사업에 힘썼다. 1519 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
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 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 문
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
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
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
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42) 출방出榜: 입격자의 방목榜目을 발표하여 내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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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故事에 의하면 선대 왕들이 사운시四韻詩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김안로金
安老(1481~1537)43)가 추천시鞦韆詩로써 장원壯元을 하였다.
유생儒生들 중에서 과시課試44)나 전강殿講에 입격入格한 사람은 문과로 직접 나아가
거나, 초시에서 푼[점수]을 주는 데 차이를 두었다.
명종조明宗朝에서 류조순柳祖詢이 그의 동생 조인祖認과 시권을 바꾸어 써서 급제하였
다. 동생이 소장을 올려 형에게 돌리기를 원하였으므로 상上께서 이를 허락하였다.
선조宣祖 경진년(1580)에 별시別試의 시험 기한이 지난 뒤인데 거인擧人 황혁黃赫
(1551~1612)45)이 그때까지도 시권을 올리지 못하였다. 고관考官이 상께 황혁이 아직 시
권을 올리지 못하였는데 시한이 이미 다하였으므로, 시한을 약간 늘려 자신의 재주를 다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 허락하였다. 방을 발표하였는데 황혁이 과연 장
원壯元이었다.
상이 춘당시春塘試에 나아갔는데 관학館學 원점圓点과 유생儒生 원점圓点에 대한 시
사試士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거자擧子가 노장老莊46)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절대 금지하였다. 황정욱黃廷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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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안로金安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연안延安. 자 이숙頥叔. 호 희락당希樂堂·용천龍泉·퇴재退齋. 1506년(중종1)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
께 유배되었다. 1522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24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잦은 권력 남용으로 탄핵을
받고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었다. 정적에 대해서 무서운 공포 정치를 한 끝에,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체포
되어 유배되고 사사되었다.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으로 일컬어진다.
44) 과시課試: 정례定例로 보는 시험을 말한다.
45) 황혁黃赫: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회지晦之, 호는 독석獨石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80년 별
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의·사간을 역임한 뒤 우승지가 되어 1591년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위리안치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등용되어 아버지 정욱과 함께 사위인 왕자 순화군順和君
을 따라 강원도를 거쳐 회령으로 갔다가, 모반자인 국경인鞠景仁에게 붙잡혀 왜군에게 인계되었다. 그 뒤 안변의 토굴에 감금
되어 갖은 고초를 받다가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끌려가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 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몰래 별도로 아버지 정욱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적어서 보냈다. 1593년 부산에서 두 왕자와 함께 송환되었다. 그
뒤 항복 권유문을 썼다고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이산理山에 유배되었다가 신천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612년, 전날에 이이첨
李爾瞻을 시로써 풍자한 일 때문에 미움을 받아,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 태경晉陵君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
고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46)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를 줄인 말로 도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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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1607)47)이 문형文衡48)이 되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선비들 중 문학을 전공한다
고 이름난 사람들은 단지 장구章句를 찾는 것을 일삼을 뿐이고, 많은 책들을 널리 보는 것
에 힘쓰지 않고 노장의 책을 보는 경우는 더욱 적습니다. 다만 노장의 글이 많은 책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선비들은 그것이 노장인지도 모르고 사용하니 일일이 금지할 수는 없
을 듯합니다. 선유들도 금지해야 하는 것들을 사용하고 그 도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습
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알성시謁聖試를 설치하였다. 호조戶曹가 아뢰기를, “알성시의 기일이
이미 임박하여 중외中外의 거자擧子들이 서울에 모였으니, 초주지草注紙49) 500~600권
을 반드시 갖추어 쓴 뒤에 허다한 선비들에게 푼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물력
이 부족하여 이것을 마련해 낼 수 없었으니, 옛날 정시庭試의 전례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
여금 스스로 갖추게 하고 예조禮曹로 하여금 사관四館의 별색지別色紙와 자르지 않은 종
이를 일체 사용하지 말도록 알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경술년(1610)에 올린 합계合啓50)에 의해서 감시監試에서 시詩·잠箴·명銘·송
頌·책策 중 하나로써 진사를 뽑고, 부賦와 의疑로 생원을 뽑는 일에 대해서 대신에게 의
논하게 하니, 대신들이 입계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꾸지 않고 옛 제도를 고치는 것은 안
된다고 답하였다.
인조仁祖 을해년(1635) 증광시增廣試 때에 양사兩司에서 파방罷榜51)의 논의가 있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52)이 아뢰기를, “파방罷榜이란 천하에 없는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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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황정욱黃廷彧: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이다. 155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 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이 된 뒤 승문권지承文權知·예문관검열·봉교 등을 거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
었다. 1561년 호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해미현감으로 나아갔으며,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565년 헌납 겸
지제교·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훌륭한 선비를 뽑아 종실
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에 올랐으며, 1584년 종계
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
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
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
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장 가토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
에는 거절했으나, 그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혁赫이 대신 썼다. 한편, 항복 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48) 문형文衡: 대제학의 별칭이다.
49) 초주지草注紙: 임금에게 상주할 초기草記에 쓰이는 종이를 말한다.
50) 합계合啓: 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가운데 두 관사 이상이 함께 연명하여 계사啓辭를 올리던 일을 말한다.
51) 파방罷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이다.
52) 김상헌金尙憲: 조선 시대 문신. 자는 숙도淑度, 호는 청음淸陰으로 상용의 동생이며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선조 29년 정
시문과에 병과, 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각각 급제하여 정연·교리·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7년에 지은 「공
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왕의 뜻에 거슬리어 파직되었다. 서인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로서 인조 2 년에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도승지·대사헌·대제학을 거쳐 예·공·형·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
로서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이듬해 강화되자 파직되고,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이듬해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1642년에 의주로 돌아왔으나 다시 잡혀가 1645년에 석방되었다. 귀국 후 좌의
정·영돈령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숭명파로 절의가 있어 신망을 받았다.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저
서에 야인담록野人淡綠, 풍악문닥風岳問答,남한기략南漢紀略, 독례수초讀禮隨抄, 청음집淸陰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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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만 있는 잘못된 관습입니다. 중국의 전례에 의거하여 장옥場屋이 비록 변함이
있다하더라도 시관들 중에 응당 파방할 것은 파방하고 거자들 중에서 응당 삭제할 것은
삭제하면 되니, 영원히 파방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선비들이 마음으로 정함이 있게 하
여 폐습이 영원히 끊어지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인조 병자년(1636)에 감시監試 이소二所에서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1597~1673)53)
이 시관試官이었을 때, 거자擧子들이 부정으로 잡혀서 파장罷場되자 청음淸陰 김상헌金
尙憲이 일소一所에서 차자箚子로 “양시兩試에서 각각 100명을 더 취하여 이소二所의 수
를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였다.
인조 무인년(1638)에 정시庭試에서 거자擧子 이정상李廷相의 시권試券 중에 목조穆
祖 어휘御諱를 부표付標54)하였는데, 이 사람을 방에서 제거할지 여부를 대신과 의논하였
다. 좌상左相 최명길崔鳴吉이 말하기를, “강학姜翯이 선조 잠저 때의 어휘御諱를 범하였
으므로, 그 대신 차점자에게 직접 나아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전교하
여 말하기를, “강학姜翯의 일은 선왕先王이 중외로 하여금 꺼리지 말라고 교시하였으므
로 그대로 놓아두라.”고 하였다. 예조禮曹가 아뢰어 말하기를, “이정상李廷相은 강학姜翯
과 차이가 있으니 그대로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발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상께서 그것을 윤허하였다.
인조 갑신년(1644)에 토역신討逆臣 심기원沈器遠(?~1644)55) 등에게 별시를 행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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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정두경鄭斗卿: 조선 후기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
여 문명을 떨쳤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
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法篇」·「징편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해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 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七條疏」와 「원이설
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
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
54) 부표付標: 문서 가운데 특별히 유념하거나 참고해야 할 곳에 표지標紙를 붙여 표시하였다.
55) 심기원沈器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수지遂之이다. 아버지는 군수 간諫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유생으로 이귀李貴 등과 협력하여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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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토역과討逆科는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임담林墰이 과장이 엄하지 않다는 폐단에 대해 아뢰고 청하기를,
“‘근봉謹封’이란 글자를 새기고 지금 사관四館이 과장에 가서 피봉에 찍어서 폐단의 근원
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그것을 윤허하였다. 이에 앞서 시권試券의 피봉皮封
과 호명糊名 외에 ‘근봉謹封’은 거자들이 서울의 재상과 명류들에게 좇아가는 사람이 많
아서 써주기를 청하였다. 고관考官들은 사적을 따르기 쉬우므로 임담林墰이 법식을 고쳐
줄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효종 2년(1651)에 과장할봉법科場割封法56)을 행하였다.
당시에 거자擧子 한 사람이 국휘國諱를 써서 과거에서 삭제되었는데, 법전法典에
의한 것이었다. 연신筵臣들은 애석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여서 상은 복과復科를 허락하
였다.
현종顯宗 5년(1664)에 예조禮曹의 계啓에 의거하여 합제合製를 명령하여 제술製述에서
16명을 뽑고 강경講經에서 8명을 뽑았다.
일찍이 사학四學의 입재유생入齋儒生에게 명하기를, 논제를 내어 제술에서 입격한 자
는 진사회시進士會試에 직접 나아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현종 신축년(1661)에 작헌례酌獻禮를 시행한 뒤에, 즉각 궁으로 돌아가서 유생들에게
과제를 내렸다. 제술製述의 경우 삼중三中 이상은 모두 전시殿試로 직부直赴할 것을 명
하였고, 심백沈栢·윤계尹階·김석주金錫胄·윤빈尹彬에게는 모두 사제賜第하였다. 좌
상左相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처음 사람을 뽑는 것은 정탈하지 않는 것이어서, 은사
恩賜가 너무 지나칩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장원 심백沈栢 이외에는 모두 푼을 주라고 명
하였다.
효종 임인년(1662)에 증광시를 치를 때 옛 규칙은 초시에서 3소로 나누어 그 중 관시
는 으레 원점으로 부임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에 백헌 이경석李景奭이 국용에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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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과장할봉법科場割封法: 할봉이란 시험관이 과거답안지의 봉미를 떼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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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관시의 수를 나머지 두 시소에 합설할 것을 건의하자 상께서 이것을 윤허하였다.
효종 무신년(1668) 정시庭試 때에 대간이 성균관시의 시제가 다시 출제되었으므로,
대제학大提學 조복양趙復陽(1609~1671)을 파면시킬 것을 청한 이후 파방罷榜할 것을
아뢰자 상께서 그것을 윤허하였다.
숙종肅宗 정사년(1677)에 증광시增廣試가 2월에 설치되었고, 회시會試 때에 대술인代述
人이 입장하였기 때문에 파방罷榜하였고, 10월에 다시 회시를 설행할 때 바꾸어 쓸 때에
간계가 있어서 또 시관을 파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무오년에 다시 초시와 회시를 설행하
고 생원시와 진사시 및 무과는 모두 파방하지 않았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거자擧子들의 문체가 전에 비해 크게 변하여 모든
책문策問에 으레 사용하는 문자들이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데 힘씁니다. 예컨대 ‘천연天淵’
을 ‘성연星淵’이라고 하고 ‘말세末世’를 ‘해세亥世’라 하며 ‘계차이후繼此以後’를 ‘윤자이예
胤玆以裔’라고 하고 ‘공유恭惟’를 ‘장유莊惟’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로
장구를 이루기도 하고, 어록을 집어넣어 문자를 변형시키니 이것은 실로 세도의 성쇠와 연
관되니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 고 하니 상이 엄히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갑자년甲子年(1684) 구례의 절일제節日製57)에서는 사제賜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서 시관試官이 상피相避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형文衡 이민서李敏敍(1633~1688)58)의
조카 정명鼎命이 국제菊製59)에서 장원을 하자 대신臺臣들은 발방拔榜할 것을 논계하고
서는 드디어 주문主文과 거자擧子가 상피相避해야 한다는 법을 정하였다.
경오년庚午年(1690)에 명하기를 문과에서 남의 글로 대신 급제한 사람은 무과武科의
대사율代射律에 의거해 처벌한다.
계사년癸巳年(1713)에 김우항金宇杭이 아뢰기를, “대소과大小科의 비편裨篇은 초서
로 써서 거칠고 어지러우니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임금께 아뢰기에도 경건함을 잃었으니
모두 그만두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경기유생京畿儒生들이 상소上疏하여 “대소과大小科 초시初試에서 경외京外를 나누
어 액수를 정하고, 시험으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선대왕들의 금석金石과 같이 변치 않을
법입니다. 그런데 임진년 이후에 경기는 과액科額이 경사京師에 합해졌고, 지금 군현郡
縣이 잔폐해지고 저축에 남음이 있어서 마땅히 옛 제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
다. 예조禮曹에서는 서울 유생들이 경기의 호적에 많이 들어가 있으니 반드시 혼잡의 폐
단이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허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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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절일제節日製: 성균관 유생에게 보이던 시험으로, 인일제人日製, 삼일제三日製, 칠석제七夕製, 구일제九日製에 황감과黃柑
科를 말한다.
58) 이민서李敏敍: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극강克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록綏
祿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며, 어머니는 박임경朴任景의 딸이다. 뒤에 도정 후여厚輿에게 입양되었다. 서울에 살
았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였다. 1650년(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
언·지평·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초 수찬으로 있을 때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병조좌랑에 전직되었고, 검상·헌납· 응교·사인·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승지·대사간·대제학에 이어 공조·이조·병조·호조의 참판을 거쳐 1683년(숙종 9) 강화부유수가 되고, 예조·호조· 이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金壽
恒·이단하李端夏·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1677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옥朴光
玉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金德齡을 제향하였다.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와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
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서하집』 17권이 있고, 편서로『고시선古詩選』·『김장군전金將軍傳』이 있다.
59) 국제菊製: 구일제九日製라고도 한다.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 오순절제는 인일제人日製·삼일제三日製·칠석제七夕製· 구일제·황감제黃柑製 등이다. 매년 9월 9일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과 지방의 유생에게 제술製述로써 행하던 시험.
의정부·육조·홍문관·예문관의 당상관이 시관試官이 되어, 대책對策·표表·전箋·잠箴·송頌·제制·조詔중에서 1편
을 짓게 하였다. 이에 합격하면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나 복시覆試에 등시할 자격을 주거나, 혹은 시상施賞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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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의 천일록 -- 과거제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