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사람]
햇볕이 따사롭게 등짝을 데운다. 며칠 전에 계획한 일이지만 처음 정해 놓은 출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울 산행에 나선다. 과일과 빵 조각 몇 개와 핫 팩으로 가방을 채우고 집을 출발한다.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도로 옆에는 하얗게 쌓인 눈이 뒹군다. 포근한 날씨 탓에 양지 쪽은 눈이 내린 흔적만 헝겊 조각처럼 남아있다. 멀리 올려다 보이는 산자락엔 희끔희끔 겨울 산의 위엄을 보여준다.
구천동 입구는 겨울을 즐기는 이들을 맞이하는 장비들로 줄지어섰다. 점심 먹기가 마땅찮아 편의점 삼각 김밥이 선택되었다.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데 시간 계획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자칫하면 도로에 시간을 쏟아붓다가 끝나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 부부와 처제 식구 셋으로 다섯 명이 삼각 김밥 봉지를 뜯어 서툴게 김으로 밥을 감싼다.
주차 안내 요원의 지휘봉을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평일인데도 입구부터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위쪽으로 차가 들어갈 수가 없어 눈을 밟으며 걸어서 올라간다. 매표소 앞에는 몇 사람만 줄을 서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입장권을 쥐고 건물을 돌아 콘돌라 탑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이게 왠일인가. 줄지어 선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몇 바퀴를 돌아왔는지 겨우 한 줄로 접어든다. 조카는 두 손으로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다 눈밭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덩달아 장갑을 끼고 눈을 모아 조카와 눈싸움을 벌이는데 안내판에 보이는 글씨가 마음을 녹여준다. 현재 기온 영상 2도에 바람도 초속 1미터다. 늘어선 대기 줄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스키와 보드 타는 이들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두 시간 째 줄을 서 있다. 커피와 간단한 간식거리로 시간을 줄여 나간다. 마침내 콘돌라 탑승을 하였다. 좌우로 흔들리는 커다란 움직임 뒤에 올라가는 기계에 몸을 맡겼다. 창밖에 다가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소리를 지른다. 발 밑에 보이는 모습이 자연의 조화를 안긴다. 나뭇가지에 수북하게 내려앉은 흰 옷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날개가 무거워 가끔 팔을 흔드는 바람에 고마움을 전한다. 계곡 끝자락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힘이 달려 고드름에 자리를 내 준 듯 물소리가 얕아졌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사이에 더없이 깊게 펼쳐진 골짜기의 차가움이 다가온다.
콘돌라 상부 정류장에 도착을 하였다. 하부행 운행 시간을 확인한다. 발 디딘 자리가 미끄러워 눈 내린 산을 실감한다. 설천봉이다. 왼쪽으로 스키 고급자 코스를 끼고 주목 두 그루가 나란히 태양을 안고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했던가. 곁가지는 떨치고 억센 심지만 남아있다. 자세를 바꾸어 가며 사진을 찍고 눈 내린 강산을 동영상으로 담아 낸다. 처제는 조카들에게 우리가 언제 이렇게 눈 내린 겨울 산을 볼 수 있었느냐며 아이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다. 입은 다물어 지지 않고 탄성을 자아낸다.
설천봉 상제루를 옆에 두고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등산로는 눈이 정리되어 미끄럼 방지 장치를 하지 않더라도 너끈히 올라간다. 포근한 날씨 덕분에 추위와 힘 겨루기 하나는 덜었다. 반면에 자연의 조화는 멀어졌다. 낮은 기온과 바람이 만드는 상고대를 만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일수록 사람들의 걸음이 느려진다. 함께 온 이들과 장면 담기에 정신을 쏟는다. 우리도 동참을 하여 여러 가지 자세로 자연을 끌어안는다. 눈에 드러눕기까지 한다. 온통 하얗게 토해낸 산자락에 제각기 다른 색깔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아내의 숨 내뱉는 소리가 빨라지고 발걸음 옮기는데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나아가지 못하고 늘어서 있다. 정상을 백 여 미터 앞두고 엉덩이를 눈 더미 위에 붙인다. 더 이상 올라 가기가 어렵단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네 명이 갔다 오라고 한다. 힘을 내보라고 하지만 주저 앉아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다. 눈 앞에 표지석이 아른거려 등산객 사이로 파고 들어간다. 정상석 근처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기념 사진을 찍느라 기다리는 사람 너머로 사진을 담는다. 향적봉 꼭대기에서 남덕유산과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다가온다.
아내에게 영상 통화를 하며, 산 꼭대기에 몰려든 이들의 모습을 함께 담아낸다. 발 아래 펼쳐진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산세는 궁금증을 만들어낸다. 지금이라도 내달리고 싶을 정도다. 포근한 품을 펼쳐 보이는 산, 덕유산이다. 고향 친구 중에 이 산이 안겨 주는 멋에 빠져 아이의 이름까지 산에서 따 호적에 싣기도 하였다. 바람이 품고 눈이 녹아 큰 바위 덩어리를 드러낸 정상은 은빛 세상과 대조를 이룬다. 서쪽 낭떠러지는 칼로 자른 듯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는 길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가다 섰다를 반복한다. 이참에 등산로 경계를 울타리를 넘어 나무에 기대어 눈을 한 주먹 쥐고 흩뿌려본다. 무지개가 펼쳐진다. 아래로 발을 내디딜수록 발걸음을 자주 딛는다. 경사 길에 미끌미끌 넘어지지 않기 위해 행사용 풍선처럼 팔을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는다.
아내가 기다리는 곳에 이르러 두 팔을 벌려 손잡고 가볍게 안아 준다. 몸을 옆으로 돌려 미끄러지지 않게 발을 옮긴다. 상부 승강장에 도착하여 내려다보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다. 올라온 사람은 다 태워 내려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쉼터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산세를 둘러본다. 상제루 서까래 아래쪽에 눈송이가 매달려있다. 세찬 바람에 얼어붙은 눈덩이가 재주를 부리는 모양이다. 시간의 여유도 어느덧 산꼭대기 하루해가 이부자리 속으로 사라지듯 자취를 감춘다.
콘도라에 몸을 싣고 산과 작별을 한다. 몇 번 말로만 약속을 하다가 오늘에야 산에 올랐다. 눈 속 상상과 겨울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다양한 자연의 그림책을 넘겨 받았다. 겨울은 우리에게 수많은 시련을 안기지만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새 하얀 눈송이처럼 순수한 자연의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그려보자. 겨울이 우리에게 안기는 혜택을 가까이 해보자. 상상이 망상이 아니라 현실로 실현되는 날이 자주 왔으면 한다. 자작나무의 고결함과 주목의 굳건함처럼 자신의 빛을 찾아가자. 덕유산이 모든 이를 품에 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