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집백연경 제10권
10. 제연품(諸緣品)
99) 장조(長爪) 범지의 인연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죽림에 계시었다.
당시 성중에 질사(蛭駛)라는 범지가 있었다. 그가 아들 딸 두 남매를 두었으니, 아들의 이름은 장조(長爪)이고 딸의 이름은 사리(舍利)였다.
그 아들인 장조가 총명하고도 박식하며 의론이 밝아서 그의 누이 사리(舍利)와 함께 무엇을 논란할 때면 언제나 누이보다 뛰어났는데, 그 누이가 임신하고부터는 같이 논란함에 있어서 아우가 또 누이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아우 장조가 생각하기를,
‘과거엔 모든 논란에 있어서 내가 항상 누님보다 뛰어났는데 이제 누님이 임신하자 도리어 내가 뒤떨어지게 되니, 이는 틀림없이 태중에 있는 아이의 복덕의 힘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아이가 출생해서는 그 의론이 나보다 뛰어날 것이니,
내가 이제부터 외방에 널리 유학하여 4위타(韋陀)의 경전을 비롯한 열여덟 종류의 술법을 다 배운 뒤에 돌아와서 조카와 함께 논란을 해 보리라’ 하고는,
곧 남방 천축(天竺)으로 가서 모든 이론을 배우되,
‘만약 통달하여 으뜸가는 스승이 못 된다면 그것을 통달할 때까지 맹세코 손톱을 깎지 않으리라’ 하고 서원하였다.
그리고 그 누이는 열 달 만에 아들아이를 낳아서 이름을 사리불(舍利弗)이라 하였으니, 그 용모가 단정하여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모든 경론을 널리 통달하여 함께 수작할 상대가 없었다.
이때 왕사성 온 성중의 범지들이 큰 금고(金鼓)를 치면서 18억 군중을 논장(論場)에 불러 모으고는 네 군데 높은 자리를 깔아 두었는데, 그때 사리불은 겨우 여덟 살 동자로서 논장에 나타나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네 군데의 높은 자리는 누구를 위해 깔아 둔 것입니까?”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첫째는 국왕을 위해, 둘째는 태자를 위해, 셋째는 대신을 위해, 넷째는 논사(論士)를 위해 깔아 둔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사리불이 논사의 높은 자리 위에 올라 앉자,
그때 여러 덕망 있는 이와 나이 많은 범지를 비롯한 일체 무리 중생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서로 염언(念言)하되,
‘우리 논사들이 저 조그마한 아이와 함께 논란하여 이긴들 무슨 영광이 되리요마는,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는가’ 하고서,
곧 아랫자리에 있는 말단 바라문을 보내 사리불과 같이 서로 문답하게 하였다.
그런데 말단 바라문은 물론 그 여러 바라문들이 다 이치에 꺾이고 말이 모자라서 차츰차츰 나아간 것이 상좌(上坐)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도 몇 마디의 논란에 졌으므로 그 누구도 따를 이가 없었다.
사리불이 논의에 이기자 그 훌륭한 명성이 멀리 저 열여섯 큰 나라에 떨치었고, 지혜와 학식이 홀로 뛰어나서 짝할 이가 없었다.
그 뒤 사리불이 왕사성의 높은 누각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핀 끝에, 마침 온 성중의 인민들이 어떤 명절의 모임에 모여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곧 스스로 생각하되,
‘저 꾸물거리는 중생들이 백 년 뒤에는 다 없어지고야 말리라’ 하고는,
높은 누각에서 내려와 어떤 외도의 법을 따라 출가하였다.
이 때는 바로 세존께서 처음 성불하시어 열여섯 큰 나라에서 아직 듣고 아는 이가 없으므로, 대자대비하신 여래께서 교화하시기 위해 아비(阿毘) 비구를 왕사성 성중에 보내 날마다 걸식하게 하셨던 때였다.
마침 사리불이 그 걸식하는 비구의 조용한 위의를 보고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복덕이 훌륭하구나. 내가 이제까지 이러한 비구를 보지 못했노라’ 하고는,
곧 그 앞에 나아가 물었다.
“그대가 섬기는 스승이 누구이기에 법도가 그렇게 훌륭합니까?”
이때 아비 비구가 게송을 읊어 대답하였다.
나의 스승 하늘의 하늘께선
삼계에 더없는 높으신 이라
한 길 여섯 자[尺]의 몸 모습 갖추어
신통으로 허공에 노니는 이네.
아비 비구가 이 게송을 읊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이때 사리불이 아비에게 물었다.
“그대 스승의 용모와 신통은 내가 이미 들은 지 오래입니다. 무슨 도를 깨달았기에 그렇게도 거룩하십니까?”
아비 비구가 다시 게송을 읊어 대답하였다.
다섯 가지 쌓임[五陰]을 제거하고
열두 가지 감관[根]을 끊어
천상과 세간의 향락을 탐내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법문을 여시네.
사리불이 아비 비구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의 스승께선 무슨 법을 닦으셨고,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 법을 설하셨습니까?”
아비 비구가 다시 게송을 읊어 대답하였다.
나의 나이 아직 어리고
법을 배운 지도 오래지 않거늘
어찌 그 바르고도 참되고 광대한
여래의 법 이치를 선설할 수 있으랴.
그러자 사리불이 아비 비구에게 또 거듭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스승께서 말씀하신 것을 좀 일러 주시오.”
아비 비구가 다시 게송을 읊어 대답하였다.
일체 법은 인연에서 자라날 뿐
공하여 아무런 주체가 없나니
마음 쉬고 근원을 통달했기에
그러므로 사문이라 말하느니라.
사리불이 이 게송을 들음과 동시에 마음이 곧 개오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는데,
때마침 목련(目連)이 사리불의 그 기쁨에 넘친 얼굴빛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와 내가 맹세한 바,
‘누구라도 먼저 감로(甘露)의 법을 얻을 때엔 서로 알려 주자’고 하였는데,
이제 그대의 그 기뻐하는 얼굴 빛을 관찰하건대 감로의 법을 얻은 것이 틀림없구나.”
사리불이 앞서 아비 비구에게 들은 게송을 목련에게 세 번 알려 주자,
목련 역시 이 게송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을 이해하게 되어 수다원과를 얻었다.
사리불과 목련은 각각 그 도의 자취[道跡]을 얻은 기쁜 마음으로 처소에 돌아온 즉시 그의 제자 도중(道衆)들에게 위의 사실을 다 갖춰 설명하고 타일렀다.
“이제 나 스스로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출가하기를 결심하였으니,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제자들은 각각 그 스승에게 대답하였다.
“이제 스승님께서 구담(瞿曇)의 법을 배우기 위해 출가하신다면 마땅히 제자인 저희들도 함께 따르겠습니다.”
사리불과 목련은 이 말을 듣고 곧 자기들의 제자 각각이 2백50명을 거느리고 아비 비구의 뒤를 따라 죽림(竹林)으로 들어갔는데, 마침내 사리불은 불 세존의 그 32상(相) 80종호(種好)로부터 널리 비추는 광명이 백천의 해와 같음을 보고 이내 환희심을 내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서 출가하기를 원하였으며,
부처님께서도 곧 출가할 것을 허락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잘 왔도다, 비구여.”
그러자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 곧 사문의 모습을 이루었으며, 부지런히 도를 닦아 아라한과를 얻고 3명(明)ㆍ6통(通)ㆍ8해탈(解脫)을 구족하여 온 천상과 인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한편 장조(長爪) 범지가 사리불의 그 출가 입도한 소식을 듣고서 진심을 내어 괴로워하며 생각하되,
‘나의 조카 사리불이야말로 본래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넓어서 열여섯 나라의 덕망 있고 나이 많은 논사(論士)들도 다 그에게 복종하였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홀연히 자신의 그 높은 명예를 버리고 구담을 받들어 섬길까’ 하고는,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서 감히 부처님과 논의(論議)하기를 청하므로, 세존께서 장조 범지를 타이르셨다.
“지금 그대의 소견으로선 아직 참된 열반의 길이 될 수 없노라.”
저 범지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잠잠히 대답하지 않았는데, 이같이 세 번에 걸쳐 거듭 말씀하심에도 역시 대답하지 않고 잠잠히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허공에서 금강밀적(金剛密迹)이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범지의 이마를 견주면서 호령하였다.
“네가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가 이 금강저로써 너의 몸뚱이를 때려 부수겠노라.”
그제서야 범지는 겁나고 두려워서 때묻은 땀을 흘리면서 스스로가 갈 곳을 모르고 낯을 들지 못해 곧 부처님 앞에서 엎드려 예배한 다음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 되기를 원하였으며,
부처님께서도 곧 출가할 것을 허락하시고 말씀하셨다.
“잘 왔도다, 비구여.”
그러자 범지의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 곧 사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부지런히 도를 닦아 아라한과를 얻었다.
여러 비구들이 이 사실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저 범지 비구는 전생에 무슨 복을 심었기에 삿된 길을 버리고 바른 법에 돌아왔으며, 또 무슨 인연으로 부처님을 만나서 출가 득도하게 되었나이까?”
이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들으라.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분별 해설하리라.
한량없는 과거세 때 이 바라날국에 어떤 벽지불이 산림 속에서 좌선(坐禪)을 닦고 있었는데, 때마침 5백이나 되는 뭇 도적이 남의 물건을 탈취한 다음 곧 산림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도적의 괴수가 먼저 한 사람을 보내어 산림 속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게 하였다.
마침 나무 아래에 단정히 앉아 있는 벽지불을 보고 곧 다가와서 온몸을 묶어 괴수 도적 앞으로 이끌어 가 함께 죽이려 하자, 그때 벽지불은 이렇게 염언(念言)하였다.
‘내가 만약 말없이 저 도적들에게 죽음을 당한다면, 이는 그들의 죄업(罪業)을 더하여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결과가 되리니, 그러기보다는 내가 이제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굴복하게 하리라.’
이와 같이 염언하고는 곧 허공으로 올라가서 동쪽에서 몸을 솟아 서쪽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남쪽에서 몸을 솟아 북쪽으로 사라지기도 하며, 몸에서 물과 불을 내기도 하고, 온 허공에 가득할 만한 큰 몸을 나타내는 반면 다시 조그마한 몸을 나타내기도 하며 그러한 열여덟 가지 변화를 차례로 일으켰다.
그때 뭇 도적들이 이 변화를 보자 매우 놀라고도 겁이 나서 제각기 온몸을 땅에 엎드려 정성껏 참회하였고 벽지불은 그의 참회를 받아들이니, 마침내 그들이 온갖 맛난 음식을 베풀어 벽지불에게 공양한 다음 발원하고서 떠났는데,
이 공덕으로 말미암아 저 도적의 괴수가 한량없는 세간을 겪는 동안 지옥ㆍ축생ㆍ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천상과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의 쾌락을 받아 왔으며, 이제 또 나를 만나 출가 득도하게 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알아 두라. 그 당시의 도적 괴수가 바로 지금의 이 장조(長爪) 비구니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다 환희심을 내어서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