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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40권
9. 변정품③
9.2. 선정에 의해 일어나는 공덕[2]
2) 8해탈(解脫)
① 총설
무량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해탈(解脫, vimokṣ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무탐(無貪)의 성질로서
두 가지는 두 선정에, 한 가지는 한 선정에 의지하며
[다음의] 네 해탈은 무색정으로서 선이다.
멸수상해탈(滅受想解脫)은
미미한 마음과 무간에 생기며
자지의 청정한 마음(즉 유루)이나
하지의 무루심으로 나오게 된다.
세 해탈의 경계는 욕계의 볼 수 있는 것이며
네 해탈의 경계는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자지와 상지의 고ㆍ집ㆍ멸제와
비택멸(非擇滅)과 허공이다.38)
논하여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적으로 색상(色想)이 있어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해탈하는 것이며,39)
둘째는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해탈하는 것이며,40)
셋째는 청정한 해탈을 몸으로 작증(作證)하고 구족하여 머무는 것이며,41)
4무색정을 순서대로 네 가지 해탈이라고 하며,42)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여덟 번째 해탈이라고 한다.43)
② 자성과 소의지
8해탈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무탐을 본질[性]로 하니, 탐을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경 중에서 ‘―상관(想觀)―’이라고 설한 것은 ‘상’과 ‘관’이 증가하였기 때문으로,44) 예컨대 숙주념(宿住念)이 색상(色想)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세 가지 해탈 중에 처음의 두 가지는 부정상(不淨相)으로 일어나니, 여기서는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온갖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45)
또한 세 번째 해탈은 청정상(淸淨相)으로 일어나니, 청정한 빛[淨光]의 선명한 행상을 지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해탈이 그것에 보조적으로 수반되는 법[助伴]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모두 5온을 본질로 한다.
처음 두 가지 해탈은 각기 모두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초정려와 제2정려는] 욕계와 초정려 중의 현색탐(顯色貪)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46)
초정려와 제2정려라고 하였지만, [여기에는] 근분정과 중간정도 모두 포섭되는데, 이러한 다섯 경지(초정려와 제2정려의 근분과 근본, 그리고 중간정)에서는 모두 처음 두 가지 해탈을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욕계와 초정려의 현색탐은 안식신(眼識身)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처음 두 가지 해탈은] 바로 그것에서 해탈한 것이다―
초정려와 제2정려 중에 처음 두 가지 부정[상](不淨相)의 해탈을 설정하였지만,
제2ㆍ제3정려 중에는 안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또한 현색을 반연하는 탐도 인기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제3ㆍ제4정려 중에는 부정[상]의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욕계 중에도 역시 처음 두 가지 해탈과 서로 유사한 선근이 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욕계의 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욕계에는] 두 가지 해탈의 명칭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며,
제3ㆍ제4정려 중에도 역시 [처음 두 가지 해탈과 유사한 선근이] 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대치되어야 할 것(현색탐)이 멀리 떨어져 있어 세력이 미열하며, 또한 [거기서는] 청정한 조복[淨伏]을 즐기기 때문에 [처음 두 가지 해탈의] 명칭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해탈은 뒤의 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여덟 가지 재환(災患)을 떠나 마음이 맑고 깨끗해졌기 때문으로,47) 여기서는 제4정려와 근분정을 ‘뒤의 정려’라는 말로 설정하였다.
비록 하지에도 [세 번째 해탈과] 서로 유사한 선근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두드러진 것[增上]이 아니기 때문에 ‘해탈’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즉 욕계의 그것은 욕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초정려와 제2정려 중의 그것은 청정하지 않은 조복이기 때문에, 제3정려 중에서는 낙(樂)으로 인해 미[란](味亂)되기 때문에, 또한 [욕계 내지 제3정려 중에서는] 이와 아울러 여덟 가지의 재환에 의해 동요되고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공무변처 내지 제7비상비비상처)은 그 순서대로 네 가지 선성(善性)의 무색정을 본질로 한다.
즉 그것은 무기나 염오성의 [무색정이] 아니니, [그러한 법은]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산심(散心)으로서의 선도 아니니, [그러한 법은] 성질이 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으로, 그러한 ‘산심으로의 선’이라 함은 예컨대 목숨을 마칠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다른 때에도 역시 산심으로의 선이 존재하니,48) 이는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선[生得善]으로서, [후천적으로] 듣고[聞] 생각[思]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색정의] 온갖 근분지(近分地) 중 9무간도와 여덟 가지 해탈도 역시 ‘해탈’이 아니니,
하지를 싫어하여 등진 것[厭背]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지를 반연하는(대상으로 하는) 도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하지의 염오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그것(제4 내지 제7해탈)은 하지를 초월한 것이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색정] 근분지의 모든 해탈도에 대해서도 역시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하지를 등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오로지 근본지(4무색정)만을 [‘해탈’이라고] 설한 것은, 근분지 중의 모든 [도]가 ‘해탈’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49)
여덟 번째 해탈은 바로 멸진정(滅盡定)이니, 수(受)와 상(想)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혹은 유소연(有所緣, 즉 심ㆍ심소를 말함)을 모두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멸진]정은 미미한 마음[微微心] 뒤에 현전한다.
즉 [멸진정에 들기] 전의 ‘상(想)과 상응하는 마음[想心]’과 대응하는 마음을 이미 ‘미세한 마음[微細心]’이라 이름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더 미세하기 때문에 ‘미미한 마음’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와 같은 마음 다음 [찰나]에 멸진정에 들어간다.50)
이를테면 유정지(有頂地)의 마음에는 세 가지 품류가 있으니,
‘상’과 상응하는 마음과 미세한 마음과 미미한 마음이 바로 그것으로,
[유정지의 마음에는] 상ㆍ중ㆍ하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품의 마음 이후에 멸진정이 현전하기 때문에 미미한 마음 다음 [찰나]에 멸진정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멸진정으로부터 나올 때에는
혹 어떤 경우 유정지의 청정한 선정[淨定, 즉 정등지]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무소유처의 무루[등지]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은 오로지 유루이지만, 유루의 마음으로부터 무루의 마음으로 나오기도 한다.51)
③ 소연 등의 제문분별
8해탈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욕계의 색처(色處)를 경계대상으로 삼는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두 가지는 부정상(不淨相)을 취하고, 한 가지는 청정상(淸淨相)을 취한다는 점이다.52)
그리고 [그러한 부정상과 청정상은] 욕탐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전도된 것일지라도 선이다. 혹은 일부(청정한 것과 섞여있는 부정한 것)를 [세 해탈의] 경계대상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즉 일부[의 부정한 것]을 반연하여 대부분이 [그러한 것이라고] 사유한 것이기에 ‘가[상](假想)의 승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도를 인기하기 때문에 역시 ‘진실의 작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53)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에서 제7해탈)은 각기 자지와 상지의 고ㆍ집ㆍ멸제와, 일체 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그것의 비택멸과 허공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54)
즉 무색정의 해탈은 [이미] 하지를 버리고 등졌기[棄背] 때문에 하지의 고ㆍ집제를 이와 더불어 반연하지 않는 것이다.
[8해탈의] 행상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두 가지 해탈의 행상은 부정상이고,
세 번째 해탈의 행상은 오로지 청정상이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의 행상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무색정의 해탈은 근본정[本定]만을 포섭하기 때문에 거기서 짓는 행상은 열여섯 가지이다.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55)
염주(念住)와의 구행(俱行) 관계는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은 신(身)념주와 함께 하지만,
다음의 네 가지 해탈은 4념주와 통한다.56)
지(智)와의 상응관계는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과 일곱 번째 해탈(즉 비상비비상처 해탈)은 오로지 세속지와 상응할 뿐이지만,
네 번째ㆍ다섯 번째ㆍ여섯 번째 해탈은 여덟 지와 상응한다.57)
근(根)과의 상응관계는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은 희근과 사근과 상응하지만,
다음의 다섯 가지 해탈은 오로지 사근과 상응할 뿐이다.
[3]세의 차별에 대해 [분별하면], 그것들은 모두 3세와 통한다.
[3]세를 반연하는 것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로서 이미 생겨난 것과 앞으로 생겨날 것은 각기 그때의 법[自世]을 반연하며,58) 생겨나지 않은 것은 3세의 [법을] 반연하지만,
다음의 네 가지 해탈은 3세의 [법과] 시간을 초월한 법[非世, 즉 무위법]을 반연한다.
3성(性)의 차별에 대해 [분별하면], 그것들은 모두 오로지 선성(善性)이다.
[3]성(性)을 반연하는 것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은 모두 3성의 [법을] 반연하지만, 다음의 네 가지 해탈은 선과 무기의 [법을] 반연한다.
유학 등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와 뒤의 두 가지 해탈(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 해탈)은 오로지 비학비무학[俱非]일 뿐이지만,
중간의 세 가지 해탈은 다 세 종류(유ㆍ무ㆍ비학비무학)와 통한다.
유학 등을 반연하는 것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은 다만 비학비무학[법]을 반연할 뿐이지만,
뒤의 네 가지 해탈은 세 종류의 [법]을 반연한다.
견소단 등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와 뒤의 두 가지 해탈은 오로지 수소단이며,
중간의 세 가지 해탈로서 유루는 수소단이지만, 그
밖의 것(즉 무루)은 비[단](非斷) 즉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견소단 등을 반연하는 것의 차별은 [이러하다].
처음 세 가지 해탈은 수소단을 반연하지만,
뒤의 네 가지 해탈은 각기 세 가지 단(見ㆍ修ㆍ非所斷)을 모두 반연한다.
자기 몸[自身] 등을 반연하는 것의 차별은[이러하다].
첫 번째 해탈은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반연하며,
다음의 두 가지 해탈은 다른 이의 몸을 반연하며,
뒤의 네 가지 해탈은 세 종류(自ㆍ他ㆍ非相續)을 반연한다.
득(得)의 차별은 [이러하다].
여덟 번째와 세 번째 해탈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것[未曾得]이며,
그 밖의 여섯 가지 해탈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
여기서 ‘두 가지 모두’라고 함은 성자와 내법(內法)의 이생을 말하는 것으로,59) 외법(外法)의 이생은 바로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였던 해탈만을 [획득할] 뿐이다.
[두 번째 해탈은] 다수의 인연으로 인해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것이 바야흐로 이미 해탈(첫 번째 해탈)하고서 생겨났기 때문에,
혹은 이것의 힘이 능히 해탈(세 번째 해탈)을 인기하기 때문에,
혹은 이는 바로 여러 가지 해탈의 성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혹은 해탈과 더불어 승해가 구[기](俱起)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60)
이러한 온갖 해탈은 남ㆍ여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성자와 이생이 모두 능히 닦고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멸진정만은 성자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는데], 성자의 소의신 중에서는 유학과 무학 [모두]와 통한다.
이러한 8해탈은 어떠한 유정이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소연에 대해 항상 대치―즉 탐애의 행[에 대한 대치]―를 추구하는 이라면 다수의 도를 즐거이 닦을 것이니, 이와 같은 유정이라면 능히 해탈을 일으킬 수 있다.
행자(行者)는 무엇 때문에 해탈 등을 닦는 것인가?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며,61) 등지(等至)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미 [등지의] 자재를 획득하였다면, 바로 무쟁(無諍) 등의 공덕과 성스러운 신통(神通)을 능히 인발(引發)할 수 있으니, 이에 따라 온갖 경계를 능히 전변(轉變)시킬 수 있고, 유다수행(留多壽行)과 사다수행(捨多壽行) 등의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62)
3) 8승처(勝處)
해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승처(勝處, abhibhā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처에는 여덟 종류가 있으니
두 가지는 첫 번째 해탈과 같고
다음의 두 가지는 두 번째 해탈과 같으며
뒤의 네 가지는 세 번째 해탈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승처(勝處)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63)
내적으로 색상(色想)이 있어 외적인 색의 적은 부분[少]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좋은 것[好]이든 혹은 나쁜 것[惡]이든 이러한 온갖 색에 대해 수승하게 알고[勝知] 수승하게 관찰[勝見]하여 이와 같은 [수승한 지견(知見)의] 상(想)을 갖는 것, 이를 일컬어 첫 번째 승처라고 한다.64)
내적으로 색상이 있어 외적인 색의 많은 부분[多]을 관찰하는 것으로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두 번째 승처라고 한다.65)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의 적은 부분을 관찰하는 것으로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세 번째 승처라고 한다.66)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의 많은 부분을 관찰하는 것으로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네 번째 승처라고 한다.67)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으로서 파란 것[靑]과 파란 현색[靑顯]과 파랗게 나타난 것[靑現]과 파란 빛[靑光]을 관찰하는 것으로,
비유컨대 오막가(烏莫迦, utpala)꽃[靑蓮花]이나 혹은 바라날사(婆羅痆斯, Bārāṇasi: 카시국의 수도로 비단으로 유명함)에서 짙게 물들인 파란 옷과 같은 이러한 온갖 색에 대해 수승하게 알고[勝知] 수승하게 관찰[勝見]하여 이와 같은 [수승한 지견의] 상을 갖는 것, 이를 일컬어 다섯 번째 승처라고 한다.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으로서 노란 것[黃]과 노란 현색[黃顯]과 노랗게 나타난 색[黃現]과 노란빛[黃光]을 관찰하는 것으로,
비유컨대 갈니가(羯尼迦, karṇikāra) 꽃이나, 혹은 바라날사에서 짙게 물들인 노란 옷과 같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여섯 번째 승처라고 한다.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으로서 붉은 것[赤]과 붉은 현색[赤顯]과 붉게 나타난 것[赤現]과 붉은 빛[赤光]을 관찰하는 것으로,
비유컨대 반두시박가(槃豆時縛迦, Bandhu jīvakā, 정오에 붉은 꽃을 피워 다음날 아침 해 뜰 때 지는 나무의 이름)의 꽃이나 혹은 바라날사에서 짙게 물들인 붉은 옷과 같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바로 일곱 번째 승처라고 한다.
내적으로 색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으로서 흰 것[白]과 흰 현색[白顯]과 희게 나타난 것[白現]과 흰빛[白光]을 관찰하는 것으로,
비유컨대 오사사성(烏沙斯星, Uśanas tāraka, 太白金星으로 한역됨)이나 혹은 바라날사의 지극히 선명한 흰옷과 같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를 일컬어 바로 여덟 번째 승처라고 한다.68)
능히 경계대상을 제압하고 조복하기 때문에 ‘승처’라고 이름하였다.
이를테면 비록 소연이 된 일체의 색경(色境)에 청정함과 빛남과 아름다움[華美]과 미묘함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선근의 힘이 능히 다 압도하여 가려[映蔽] 버리니,
비유하자면 하인이 비록 제 아무리 진귀한 의복을 입었을지라도 주인에게 압도되어 가려지는 것과 같다.
혹은 이러한 처(處, 외적인 온갖 색처)에서 [마음의] 전변(轉變)이 자재하여, 이에 따라 [더 이상]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승처’라고 이름한 것으로, [색]처(色處)에 대해 수승하기[勝] 때문에 ‘승처’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혹은 이러한 선근을 바로 ‘처(處)’라고 일컬은 것으로, ‘처’가 능히 수승하기 때문에(다시 말해 ‘수승하게 알고 수승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승처’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다.
앞의 네 가지 승처의 자성과 소의지 등은 순서대로 앞에서 [논설한] 처음 두 가지 해탈과 같다.
즉 처음 두 가지 승처는 바로 첫 번째 해탈의 결과이며,
다음 두 가지 승처는 바로 두 번째 해탈의 결과이니,
그것(즉 제1ㆍ제2해탈)을 자량으로 삼아 능히 여기에 들기 때문이다.69)
그리고 뒤의 네 가지 승처의 자성과 소의지 등은 앞에서 [논설한] 세 번째 해탈(淨解脫)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정해탈은 이러한 네 가지 승처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그것을 자량으로 삼아 능히 여기에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해탈에서는 다만 온갖 색을 능히 총체적으로 부정상(不淨相)과 청정상(淸淨相)으로 취할 뿐이지만,70) 지금의 8승처에서는 온갖 색을 적고 많은 부분이나 파란 색 등의 [각기] 다른 상으로 분별한다.
따라서 앞의 [세] 해탈이 다만 색에 대한 욕탐이나 부정상(不淨想)을 버리고 등지려는 것이라면, 지금의 8승처는 능히 소연을 분석(分析)하여 제압 조복하고, 이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 번째 해탈은 [온갖 색을] 총체적으로 청정상으로 취하기 때문에 하나의 명칭으로 설정하였지만,
8승처 중의 뒤의 네 가지 승처는 [그것을 청ㆍ황ㆍ적ㆍ백으로] 차별하여 취하기 때문에 네 종류로 나누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정해탈(淨解脫) 역시 [온갖 색을] 차별하여 반연하지만, 청정한 성질을 취하여 다 함께 하나의 명칭(즉 정해탈)으로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뒤의 네 가지 승처 역시 마땅히 하나의 명칭으로 설정해야 하니, 양자를 차별할 만한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10변처(遍處)
승처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변처(遍處, kṛtsnā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처에는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여덟 가지는 정해탈과 같으며
뒤의 두 가지는 청정한 무색정으로
자지의 4온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변처(遍處)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과 아울러 공(空)과 식(識)의 두 가지 무변처(無邊處)를 두루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경에서는 이러한 처(處)에 대해 다
“한가지로 생각[一想]하여 상하와 좌우[傍]가 무이(無二)이며 무량(無量)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처’에 대해 사이[間]도 없고 틈[隙]도 없이 두루 사유하기 때문에 ‘변처’라고 이름한 것으로, [생각이] ‘처(處)’에 두루[遍] 하기 때문에 ‘변처’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혹은 이러한 선근을 바로 ‘처’라고 일컬은 것으로, [‘처’의] 행상이 두루 하기 때문에 ‘변처’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즉 여기서 ‘지(地)’ 등은 소연을 나타내며, 앞서 설한 ‘두루[遍]’라는 말은 ‘행상이 [두루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행상은 비록 [청정상(淸淨相)으로]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소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변처를 열 가지 종류로 나누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에서 설한 ‘한 가지’라는 말은 이러한 등지(等至)가 한 종류의 경계대상의 상(相)을 사유하여 현전시킨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생각’이라는 말은 바로 승해작의를 나타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한가지로 안다[一知]’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71)
또한 ‘상하와 좌우’라는 말은 마음[意]의 유전(流轉)을 나타내고,
‘무이’라고 하는 말은 [마음의 유전에] 사이나 틈이 없음을 나타내며,
‘무량’이라는 말은 승해의 무한함[無邊]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같은 뛰어난 등지를 갈고 닦은 힘으로 말미암아 관행자의 마음은 [자유]자재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변처가] 능히 소연에 대해 두루 관찰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열 가지만이 ‘변처’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인가?
[일체 ‘처’에] 두루 하는 행상은 이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오로지 제4정려와 공무변처ㆍ식무변처에만 무변의 행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10변처 가운데] 앞의 여덟 가지 변처는 정해탈(세 번째 해탈)과 마찬가지로 자성은 모두 다 무탐의 선근이며, 만약 그것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법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모두 다 5온을 본질로 한다.
즉 뒤의 네 가지 승처는 [앞의 여덟 가지 변처의] 가행으로 인생(引生)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뒤의 네 승처)과 함께 정해탈과 같다고 한 것이다.72)
[앞의 여덟 가지 변처는] 또한 정해탈과 마찬가지로 제4정려에 의해 일어나며, 아울러 욕계 색처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어떻게 지(地) 등을 역시 색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73)
지(地)와 지계(地界) 등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현(顯)ㆍ형색(形色)을 ‘지(地, 즉 현실의 땅)’ 등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74)
그래서 ‘지(地)’ 등을 변처라고 설하였을 뿐 지계(地界) 등을 변처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앞의 여덟 가지 변처는 다만 색처를 반연할 뿐이다.
풍(風, 즉 현실의 바람)과 풍계(風界)에는 이미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하였거늘,75)
어떻게 [‘풍’의 변처] 역시 색처를 반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세간에서도 역시 [현색과 형색을 갖는 가견(可見)의 바람인] 모래바람[黑風]이나 회오리바람[團風] 등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앞의 여덟 가지 변처가 색처를 반연한다는 사실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 변처는 순서대로 공(空)ㆍ식(識)의 두 가지 청정한 무색정을 그 자성으로 삼으며, 각기 자지의 네 온을 반연하여 경계대상으로 삼는다.
5) 해탈 등의 세 공덕의 획득과 소의신
이상과 같은 해탈 등의 세 갈래의 공덕(해탈ㆍ승처ㆍ변처)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며, 어떠한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으며
그 밖의 공덕은 두 가지 득과 모두 통하는데
무색정의 공덕은 3계신(身)에 의지하며
그 밖의 공덕은 오로지 인취에서만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덟 번째 해탈(멸수상정해탈)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으니, 이것은 바로 앞에서 [논설한] 멸진정이기 때문이다.76)
그 밖의 해탈 등(7해탈과 8승처와 10변처)은 모두 두 가지에 의해 획득된다. 즉 그것들은 이염과 가행에 의해 획득되니, 일찍이 수습하였던 이도 있고, 아직 수습하지 못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77)
그리고 앞의 여덟 가지 변처를 처음 수습할 때에는 모두 안식(眼識)을 그것의 가행으로 삼으며, 공무변처의 변처를 처음 수습할 때에도 역시 그러하니, 처음에는 반드시 공계(空界)의 색을 반연하기 때문이다.78)
그러나 그 후 승해의 힘에 의해 그것을 원만하게 성취할 때에는 자지의 네 온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또한 식무변처의 변처를 처음 수습할 때에는 다만 의식(意識)을 그것의 가행으로 삼을 뿐이니, 처음에는 반드시 식(識)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인데, 그 후 승해력의 힘에 의해 그것을 원만하게 성취할 때에는 역시 자지의 네 온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네 가지 무색정의 해탈(즉 제4에서 제7의 해탈)과 두 가지 무색정의 변처(즉 공ㆍ식무변처의 변처)는 각기 삼계의 몸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대개 하지의 몸에 의지하기에 자지(무색계)와 하지(색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은 모두 뒤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로지 무소유처의 해탈만은 역시 또한 상지에 의지하여서도 일어날 수 있다.
[무색정의 네 해탈과 두 변처를 제외한] 그 밖의 공덕은 모두 다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것은 오로지 인취(人趣) 가운데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洲)에서만 일어날 뿐으로, 그 밖의 세계는 혜(慧)의 힘이 저열하고 성교(聖敎)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색정의 네 해탈과 두 변처를 제외한] 그 밖의 해탈 등은 욕탐을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2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공덕은] 처음 일어날 때에만 오로지 인취에 의지할 뿐이니, 요컨대 그것은 성교의 힘[敎力]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즉 성교는 인취 중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천취 중에는 존재하지 않아 설령 거기에 현저한 즐거움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능히 처음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
따라서 인취에서 처음으로 일으키고 물러나 욕계천(天)에 태어났을 때, 숙세(즉 인취)에서 익힌 힘에 의해 그 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제3정려에 [6]통과 [4]무량은 존재하는데, 해탈 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 연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모두 분별하였다.79) 해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승처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 해탈을 방편[門]으로 삼아 승처에 들기 때문이며, 승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처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 승처를 방편으로 삼아 변처에 들기 때문이다.
또한 제3정려에서는 미묘한 즐거움[妙樂]에 탐착(耽著)하는데, 생사(生死) 중에서 이러한 즐거움은 수승하기 때문에 해탈 등의 세 가지 공덕을 능히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 공덕은 모두 다 생사를 등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통과 [4]무량 등은 즐거움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 의지하여서도 역시 능히 닦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 등의 세 갈래의 공덕(즉 8해탈ㆍ10승처ㆍ8변처)은, 만약 그 중의 한 가지를 획득하여도 그 모두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한 가지를 획득하면 그 모두를 획득하지만]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 뜻은 어떠한가?
뒤의 공덕을 획득하였으면 필시 앞의 공덕도 획득하였을 것이지만, 앞의 공덕을 획득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뒤의 공덕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변처(遍處)를 획득한 자는 필시 세 가지 공덕을 모두 획득하였으며,
승처(勝處)를 획득한 자는 필시 해탈을 획득하였지만 변처는 결정적이지 않아 혹은 획득하기도 하고, 혹은 획득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해탈(解脫)을 획득하였다면, 나머지 두 가지 공덕은 결정적이지 않으니, 변처에 들려면 승처를 방편으로 삼아야 하고, 해탈을 방편으로 삼아 승처에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탈 등의 [세 공덕의] 차별은 어떠한가?
오로지 능히 버리고 등지는 것[棄背]을 일컬어 ‘해탈’이라고 하며,
이와 아울러 소연을 [분]석(分析)하여 [그렇게 하는] 것을 일컬어 ‘승처’라고 하며,
여기에 무변(無邊)의 [승]해를 더한 것을 ‘변처’라고 이름하였으니,
이 세 가지 선근은 점차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이 세 가지 선근은 하ㆍ중ㆍ상품에 의한 차별로서, 이를테면 능히 소연을 버리고, 뛰어나게 조복시키며, 행상이 무변이라는 점에서 승열(勝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80)
또한 유여사는
“해탈은 오로지 원인이 될 뿐이고, 변처는 오로지 결과일 뿐이며, 승처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6) 선정을 일으키는 인연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상2계 중에는 [성교를] 설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인연에서 선정을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81)
게송으로 말하겠다.
2계(界)에서는 원인과 업에 의해
능히 무색정을 일으킬 수 있으며
색계에서 정려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법이력(法爾力)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상2계에 태어난 경우, 모두 세 가지의 인연에 의해 능히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을 인기하여 낳게 된다.
첫째는 원인의 힘[因力]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가까이서 그리고 자주 닦았던 힘이 선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82)
둘째는 업의 힘[業力]에 의해서이다.
이를테면 일찍이 상지의 생을 초래할 만한 순후수업(順後受業) 등을 지었을 경우, 그러한 업의 이숙이 장차 세력을 현전시킴으로써 [상지로] 나아가 능히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키게 되니, 만약 하지의 번뇌를 떠나지 않았다면 필시 결정코 상지에 태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력(法爾力), 즉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서이다.
이를테면 기세계(器世界)가 장차 허물어지려고 할 때, 하지의 유정은 저절로 능히 상지의 정려를 일으키는데,83) 이러한 단계에 존재하는 선법은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 증성(增盛)되기 때문이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상2계 중에 태어난 자는 원인과 업의 힘에 의해서만 무색정을 일으키며, 법이력에 의해서는 일으키지 않는데, 무운천(無雲天, 제4정려의 제1천) 등은 3재(災)로 인해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84)
그렇지만 색계에 태어나 머물 때에는 앞의 두 가지 인연과 법이력에 의해 정려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욕계에 태어나 상지의 선정을 일으킬 때에는 이 밖에 성교의 힘[敎力]에 의해서도 각각의 선정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교의 힘에 의해 [상지의 선정을 일으키는] 자라 함은 인취의 세 주(洲)를 말하니, 하늘[天] 역시 성교를 듣는 일이 있지만, 미미하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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