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하나님께 2”
발표: 이동기목사
p. 95-180
세상에 기록된 하나님의 암호를 풀어라: 야스퍼스
철학자 야스퍼스에게 있어서의 철학의 과제는 이 세상에 가득한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초월자의 암호(하나님의 숨결)를 읽어낼 때, 현 존재 인간은 신적 존재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때 인간은 가장 큰 내면의 충만함으로 느낀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온 천지에 가득한 하나님의 암호, 우리의 삶에 가득한 하나님의 암호,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사람이 만나는 한계상황은 하나님을 찾게 하고, 그리하여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고 야스퍼스는 말하고 있다. 깊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절박”이 “대박”이 될 수 있다.
새들은 하늘에서 물고기는 물 속에서 자유하다: 에리히 프롬
온 만물은 자유를 원한다. 인간은 자유를 확대해 왔으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자유란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발적으로 책임있게 결단하는 행위이다. 자유는 자율적 행위, 의무, 책임, 결단 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품 안에 있을 때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참 자유가 있다. 우리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 그곳은 하나님의 품 안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질과 죄악의 종이 되어 간다.
잘 노는 하나님의 나라: 요한 하우징아
<논어> ‘옹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놀이는 인간의 인간다운 본질을 나타낸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창의력을 얻는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하늘의 축제와 하늘의 놀이를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거룩한 놀이에 성도를 초청하는 것이다. 쉼표없이,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까지도 아까워하며 욕심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놀이와 축제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스침이 아닌 만남을: 마르틴 부머
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왜 사는지는 ‘관계’ 속에서 찾아가야 한다. 부머는 진정한 만남을 강조하면서, 신앙생활은 일상생활에서 참된 만남을 통해 빛을 발해야 한다고 교훈을 던져준다. 메마른 인간관계가 회복되는 길은 명료하다. 서로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면 행복은 따라온다. 거룩을 추구하면 다시금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감동을 회복한다.
자연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서도 인간의 거룩이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추구하면 우리 속에 있는 죄성,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제어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욕심을 대상으로 바라보던 자연을, 지켜야할 자연으로 보기 시작한다.
만남의 복은 주님이 주신 최고의 복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려 할 때 ‘사람’을 보내주신다. 하나님이 최상의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만남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소홀히 여긴다면 복을 발로 차는 꼴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람’과 ‘나와 너’가 되어야 하는데, ‘나와 그것’이 된다면 비극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휴머니타스.
역사는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이다. 둘째,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셋째, 그 기록에 대한 해석이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 요소에는 역사가의 주관이 다분히 들어간다. 그리고 과거의 사실 중에서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것만 기록으로 남긴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 것은 맞는 것도 있지만 틀린 것도 있고 허무한 것도 있다. 우리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자, 역사 속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위대한 역사가이시다.
첫째, 역사의 동인(주체)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진,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도 사용하시지만,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인간을 쓰시고 인간과 동행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구속사가 온전한 역사관이다. 근대의 핵심적인 네 가지 역사관이 있다. 인본사관, 정신사관, 문명사관이 그것이다. 그에 반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구속사’이다. 구속사관은,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과정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구속사관, 섭리사관, 그리고 목적론적사관이다.
구속사관은, 역사의 동인되시고 주체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모든 과정에서 섭리하심을 믿는 것이다.
섭리사관은, 역사의 동인되시고 주체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모든 과정에서 섭리하심을 믿는 것이다.
목적론적사관은, 역사가 하나님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칼보다 강했던 침묵의 힘: 김훈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침묵은 이순신의 침묵이다. 그 침묵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침묵은 예수님의 침묵이다. 그 침묵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은 왜 생과 사의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침묵하셨는가?
예수님의 침묵은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 나라를 여는 천근같은 몸짓이었다. 또다시 침묵하신 것이다. 이 침묵이 큰 사랑이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이 침묵의 사랑이 제자들을 살렸고, 지금 우리를 살리고 있다. 칼보다 강했던 침묵, 사랑의 침묵이.
시계는 좋은데 나침반이 없는 사람: 김윤희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시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사막을 건너는 데 시계, 지도, 나침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나침반을 선택해야 한다. 이완용은 좋은 지도와 시계도 있었는데, 나침반이 없었다. 그래서 좋은 지도와 시계를 가지고도 나라 팔아먹은 역적이 되었다.
하나님을 향하는 나침반, 즉 우리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죄인일 뿐이다. 올바른 방향, 죽도록 미쳐도 후회가 없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위해 미치도록 달려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