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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쪽에 보면,
세간의 잡다한 일들이 있을 때는 그것을 배척하지 말고 다만 생각이 올라오는 곳에서 가볍게 화두를 들어 굴려보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세간의 잡다한 일들이 있을 때 그걸 막 억지로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그 잡다한 생각이 올라오는 곳에서 그냥 ‘이 뭐고’ ‘모를 뿐’ 하든지. 뭔가 화두를 한번 들라는 얘기지요.
그러면 크게 힘을 덜 것이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가볍게’라고 했잖아요. 막 힘줘서 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크게 힘을 덜 것이고 또한 무한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왜냐면, 분별 망상을 따라가는 습관을 화두를 듦으로써 자꾸 쳐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공(公)께서는 화두를 들고 버티시되,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화두를 그냥 들고 답답하고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지요.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다만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되지? 이만하면 될 때가 안됐을까’하고 이렇게 깨달음을 기다리지는 말라는 겁니다.
문득 저절로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공부란 세간의 수많은 일들을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 위에 돌려놓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
여기서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가 나왔네요. 세간의 수많은 일들이나 사량분별하는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가 되었든 ‘이 뭐고’ ‘모를 뿐’이 되었든 화두 위에 올려놓고서.
분별의식이 움직이지 않게 하기를, 마치 흙이나 나무인형과 같이 해야 합니다. 깜깜하여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음을 느낄 때가 좋은 소식입니다.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하고 분별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집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6,287)
분별심이 올라올 때마다 뭐 ‘이 뭐고’ ‘모를 뿐’ ‘마른 똥막대기’ ‘무’ 하고 이렇게 가볍게 화두를 한번 들어보되 다시 지금 이 자리에 돌아와서 ‘어! 지금 이렇게 생각을 일으킨 자가 누군가’하고 바라보되 이게 말의 어려운 점인데요. 계속해서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이 생각을 일으킨 자가 누구지’ ‘이 분별을 일으킨 자가 누구지’하고 이렇게 속삭이는 그런 마음도 없이 그냥 ‘이 뭐고’ ‘모를 뿐’하고 그냥 저절로 놔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게 되면 제대로 하게 되면 처음에는 생각이 막 속삭이게 돼요. ‘이 뭐고, 이게 무엇일까’ ‘이게 왜 진리가 아닐까’ 이러면서 이제 자꾸 속삭이면서 말을 하게 되고 생각도 올라오게 되는데. 그냥 ‘이 뭐고’하고 탁 내려놓고 ‘모를 뿐’하고 탁 내려놓고 그냥 올라오는 그 자체로 놔지는 거지요. 올라오는 그 자체로 보자마자 놔지게 돼버립니다. 그러면 약간 이런 느낌이지요.
간화선이라는 화두는 근원적인 발심을 해서 뭔가 법을 확인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배경의 마음이라면, 현실에서는 일상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걸 그냥 보게 되는 겁니다. 보게 되면서 처음에는 ‘이 뭐고’도 하고 ‘모를 뿐’도 하고 이러다가 그것을 할수록 그때는 속삭임 없이 그냥 ‘이 뭐고’하고 그냥 저절로 놔지게 되는 거지요. 혹은 그러다 보면 나중에 ‘이 뭐고’라는 말도 필요 없이 그냥 보게 되는 순간 저절로 놔지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곧 위빠사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 돼버려요.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깜깜해서 뭐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하다 보니까 깜깜해서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고. ‘야 이게 뭐지’ ‘이게 지금 공부야’ 뭔가 제대로 된 수행법을 자꾸, 절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진언을 하든지, 진언 같은 거는 공부하기가 딱 좋거든요. 염불도 그렇고 내가 하루에 염불을 한 시간 하겠다. 두 시간 하겠다. 절을 천배 하겠다.
진언을 내가 만 배를 목표로 하겠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만 배 십만 배를 이렇게 목표로 하시는 분들이 계시데요. 그런 분들은 성취감이 있고 좋습니다. 공부가 되어가는 느낌이 드니까. 거기에 의지가 되지요. 그래서 ‘야! 내가 오늘 십만 번 해야 되는데. 오늘까지 해서 삼만 오천칠백 번 맞췄다’ 뭐 이런 식의 어떤 성취가 보이니까 그 성취감으로 공부가 나아가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성취감에 안주하게 되기 때문에 사실, 그건 공부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공부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로지 그것에,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매진하니까 번뇌망상이 올라올 시간을 틈을 안 주고 계속 그걸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어떤 효과. 지관에서 어떤 지혜 효과? 이런 것들이 있겠지요. 멈추게 하는, 번뇌망상을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안주하게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마음은 사라져요.
왜냐면 나는 계획된 대로 쭉 쭉 쭉 잘 나아가고 있으니까 거기 어딘가에 안주하고 머물러있다는 소리거든요. 이 공부는 머물러 있으면 제대로 하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음을 느낄 때 그래서 깜깜할 때 그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저한테 질문을,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해요. “아니 뭐 이렇게 속 답답하게만 만들어주시고 뭔가 이렇게 제대로 뭘 안 해주시나.”
“이렇게 해야 됩니까? 저렇게 해야 됩니까?” 물어보면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라고 안 하고 “어 그러시다면 한번 해보세요.” “여기도 가 볼까요?” “거기도 한번 가보세요.” “가보시는 것도 좋아요.” “집주변에 또 무슨 명상센터가 있던데.” “거기도 뭐 가보고 싶으시면 가보시고.” 어디든 가시고 싶은 곳이 있으면 거기도 좋습니다. 뭐 이렇게 강력하게 “아, 반드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얘기는 안 하되 다 해도 좋다. 왜?
내가 발심이 있으니까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하는 방법은 없는데. 하여간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발심이 있으니까 그런 질문도 하시는 거기 때문에. 제가 어떻게 딱 정해서 하는 얘기는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그래야 깜깜해서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음을 스스로 느끼시게 되는 좋은 소식을, 좋은 소식이 오지 못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진짜 여러분이 답답할 때가 좋을 때입니다.
‘마른 똥막대기’ 화두는 어떠합니까? 화두를 붙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갑갑하다고 느낄 때가 도리어 좋은 소식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여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이 ‘간화선과 화두 드는 법’이라고 제목이 쓰여 있지요. 그 내용들이 지금 잘 나와 있습니다. 마른 똥막대기 화두를 들 때 화두를 들면서도 화두를 붙잡을 곳도 없어야 돼요. ‘나는 이렇게 화두를 들고 있으니까, 나는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를 들고 있어’ 그래서 뭐 있을 때마다 ‘마른 똥막대기’ ‘마른 똥막대기’ ‘마른 똥막대기’ 그러고 앉아가지고 ‘마른 똥막대기’ ‘마른 똥막대기’(웃음) 이러고 있으면서 화두 수행을 간화선 수행을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나는 화두가 잘 들려.” “나는 화두가 안 들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잘 들린다’ ‘안 들린다’라는 거는 ‘이걸 붙잡고 있다’라는 거잖아요. 붙잡았다 놓쳤다,고 하는 얘기거든요. 이 화두를 붙잡았다 놓쳤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거예요. 여러분이 계속 법당에 법문 들으러 나오시잖아요, 매주. 빠지고 싶을 때도 있는데 이상하게 빠지지 않게 되는 이유가 뭐겠어요? 화두가 들려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공부에 대한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이 공부를 해야 되겠다’라는 발심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게 ‘화두’라는 거지요. 화두라고 하는 붙잡을 뭔가가 있어서 ‘나는 마른 똥막대기를 하루에 몇만 번씩 생각하고 있어’ 그게 화두 드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마른 똥막대기가 됐든 뭐가 됐든 화두를 들고 있으면서도 화두를 붙잡을 것도 없어야 돼요. ‘나는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들고 있어’ 이런 게 없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들지만 들지 않는 거지요. 수행하지만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화두를 드는 건 방법도 없고 성취감도 없고 여기서 말한 것처럼 재미가 없어요. 뭔가 어떤 성취감이 있으면 재미도 있을 텐데. 이 공부는요, 재미도 없어요. 결정코 성취감이 들 수 없는 공부입니다. ‘야, 오늘은 화두가 좀 잘 들리는데’ ‘오늘은 공부가 좀 되는데’ 그거 망상입니다. 완벽한 망상입니다. 왜냐면 이 공부는 점수(漸修)가 아니라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공부가 아니라서 끝까지 끝끝내 모르는 공부에요.
완전히 하나로 탁 뚫리기 전까지는 그냥 끝까지 모르는 공부이기 때문에. ‘내가 좀 알 것 같다’ ‘공부를 많이 했는데 아직도 이거를 모르나’ 그건 공부를 잘 모르는 거예요. 이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몰라야 되는 공부지요. 그래서 재미도 없고 뭔가 갑갑하다고 느낄 때가 도리어 좋은 소식입니다. 갑갑하다는 마음이 뭐예요? 모르겠다는 마음이거든요. 알고는 싶은데 모르겠어요. 그게 그냥 갑갑함입니다. 그래서 이 갑갑함, 답답함. 그게 화두지. 이건 뒤에서 다시 설명할게요.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드는 곳에서 받아들이거나 긍정해도 안 되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화두를 들면서 화두를 받아들이면서 ‘야 난 이 화두를 잘 받아지니고 잘 받아들였어’ 이런 생각을 해도 안 되고. ‘화두를 드는 게 좋은 거야’ 뭐 이런 식으로 긍정을 해도 안 됩니다. ‘내가 화두를 잘 들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거나 뭐 이런 식으로 긍정을 해서도 안 된다. ‘내가 화두를 잘 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고 ‘잘 한다. 못 한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냥 하면 된다.
제가 예전에 제일 힘들었던 게 도대체 방법도 모르겠고.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라. 이래 놓고서 그냥 그렇게 모르겠으면 된다. 그러면서 무언가 명확하게 얘기해주지도 않을 때, 그때가 제일 답답했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렇게 뭔가 긍정해주지 않는, ‘이거 내가 지금 잘 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는. 뭔가 선명하게 잘 나아가는지조차 모르겠는 그게 좋은 거지요. 그래서
일 없는 가운데 드러내어도 안 되고, 화두를 들 때는 있다가 들지 않을 때는 없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하! 오케이 뭔 말인지 알았다. 이게 일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구나’ ‘뭔가 내가 화두를 든다,라는 생각도 없고 함이 없어야 되는 거구나’ ‘아, 함이 없이 해야 되는 거지. 그렇지. 그러면 일이 없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오케이. 나는 이제 화두를 들면서도 나는 일이 없어’ ‘이렇게 일이 없는 가운데 일이 없는 가운데 화두를 미묘하게 드러내야 돼’라는 이런 생각도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웃음)
화두를 들 때는 있다가 또 들지 않을 때는 없다. 이런 말을 제일 많이 하거든요.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화두를 들고 말고 가 없이 그냥 갑갑하면 되는 건데. 이걸 화두를 들었다. 말았다 이런 말 자체가 사실 되게 좀 오류가 있는, 문제가 있는 말이에요. 그래서 화두를 든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면 간화선의 방식, 기존의 간화선 방식으로 넘어가게 될까 봐 그런 말을 하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
화두를 들 때에는 여러 가지 솜씨와 기량을 발휘할 필요가 없으니,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화두를 잘 들 수 있는 나만의 기량, 나만의 솜씨, 나만의 방법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야, 오늘은 화두가 잘 들렸어’ 그 자체가 망상이에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언제나 끊어짐이 없게 하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언제나 끊어짐이 없게, 애써서 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그냥 늘 끊어짐이 없어요, 그냥. 늘 그냥 문득문득 떠오르니까. 문득문득 답답하니까. 모르겠으니까 알고 싶으니까 그게 끊어짐이 없는 거예요, 그냥.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화두를 분별하지 마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화두가 잘 됐다고 막 기뻐하고. 안 들렸으니까 막 답답해하고. 뭐 즐거워하고 또 뭐 싫어서 기분 나빠하고 이러지도 말고. 또 그런 일이 희로애락 같은 어떤 일들이 있을 때에도 거기 연연하지 말고. 그냥 화두가 잘 되고 안 되고 이러쿵저러쿵하고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화두를 들고 또 들며, 화두를 보고 또 봄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재미도 없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이런 얘기가 이제 나오니까 ‘아! 이 화두를 들고 또 들어야 되는구나’ ‘보고 또 보아야 되는구나’ 하고 이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찌 보면 태생적인 한계 같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화두가. 이치의 길이 끊어져요. 아무리 들어도 이치적으로 머리로 헤아릴 순 없어요, 화두를. 재미도 없고. 이게 재미가 없어야 돼요, 공부하는데. 수행하는 데 재미가 없어야 됩니다.
‘수행하는 게 야, 재밌다’ ‘야, 잘 되는 거 같다’ ‘야, 이렇게 하면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건 재밌는 거잖아요. 재밌게 공부하면 안 됩니다. 이것처럼. 그러니까 이게 힘든 거라는 거지요. 아무 일도 아닌데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니까. 사실 삼천 배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좌선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없어요. 그리고 이것이 재미없는 게 제일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재미없는 거 속에 들어가 버텨야 되는 거지요.
마음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바로 당신이 신명(身命)을 버릴 곳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마음이 답답하고 재미없는 이것을 느낄 때가 그 좋은 시절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좋은 신명을 몸과 마음을 바쳐서 공부할 때다. 버릴 곳이다.
반드시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물러서서는 안 되니,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그냥 답답하고 모르겠고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하루하루 행주좌와 하는 가운데 차별 경계를 겪으며 힘이 덜어짐을 느낄 때가 바로 힘을 얻는 곳이니, 힘을 얻는 곳에서 도리어 힘을 덜게 됩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이 말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힘이 덜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여태까지 우리는 ‘수행을 해야 된다’라는 거에 탁 사로잡혀 있잖아요.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공부할 때는 열심히 공부해야 되잖아요. 운동도 열심히 해야지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건 다 인과법이기 때문에 생사법은 전부다 인과법이라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원인을 제공해줘야 그것에 따른 결과가 나와요.
그러니까 원인을 제공해서 결과를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돼요. 유위법으로. 수행도 열심히 해야지만 수행의 결과가 얻어집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결과로 얻어지는 공부가 아니지요. 비인비과(非因非果)라고 하듯이. 결과로 얻어지는 공부가 아닙니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어요. 지금 우리는 이미 부처로 말하고 있고, 부처로 듣고 있고, 부처로 움직이고 있고, 우리는 언제나 부처를 쓰고 있으니까 부처는 이미 등장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를 따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원인을 제공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애쓰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애쓰면 안 됩니다. 힘을 덜어야 돼요. 그래서 애쓰지 않고 공부하다 보니까 이제 이런 질문을 또 합니다. “야, 진짜 이렇게 해도 돼요?” “진짜 이게 공부에요?” “진짜 이렇게 공부해도 될까요?” 이렇게 말을 해요.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본인이 이 공부를 열심히는 하고 싶은데 세간의 습을 아직 떼지 못해서 어떤 세간의 취미활동, 이런 것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걸 버려야 될 것 같은 어떤 압박감에 시달리는데 그걸 도저히 못 버리겠다고 그래요. 뭐 그냥 버리지 말고 그냥 그건 그거대로 해라. 그걸 뭐 하루에 한두 시간씩 취미활동으로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느냐. 그거는 그거대로 해라. 공부는 나머지 시간에 하면 되지.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고마워하고 “야! 진짜 그렇게 해도 되느냐?” 하고 너무 신나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어찌 보면 ‘삿된 것은 무조건 다 끊어 없애야 된다’
라고 하는 이분법으로 나눠서 ‘중생심은 무조건 끊어 없애야 되고 출세간의 마음은 잘 돌봐야 돼’라는 생각. 그것도 하나의 이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취미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누가 그것을 하는 거겠어요. 취미활동을 하는 그것도 공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공부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힘이 덜어짐을 느낄 때, 힘이 덜어짐을 느끼면 우리는 불안해요. ‘이렇게 편하게 해도 되나’ 그때가 힘을 얻는 곳이다.
그리고 힘을 얻는 곳이 도리어 힘을 덜게 된다. 그렇게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게 힘을 더덜게 된다. 그래서 이 공부는 유위법으로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간절한 발심만 있으면 크게 할 것은 없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그랬던 거 같아요. 옛날에 처음 공부할 때, 이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했다가, 산은 산도 아니고 물은 물도 아니다 했다가,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처음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처음 출가했을 때에는 막 신심이 있어서 기도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왜냐면 기도를 해야 내가 뭔가 될 거 같았고. 기도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질 거 같았으니까 기도만 하면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거예요. 기도를 하고 있으면 ‘내가 뭔가 하고 있다’라는 든든함이 있고. 부처님이 나를 돌봐줄 거 같고. 지켜줄 거 같고.
뭔가 ‘내가 기도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 같다’라는 굳은 믿음이 있으니까 기도하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공부를 하다 보니까 ‘야, 기복 불교, 이게 다가 아니구나’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뭘 다 이루게 되고, 기도 안 한다고 해서 안 되고 이러는 게 아니구나’ ‘부처님께 턱 맡기고 가면 그게 하루하루 기도고 그렇지, 뭘 꼭 기도해야지만 기도가 되는 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기도에 대한 재미가 좀 없어지더라고요.
‘뭘 굳이 기도를 저렇게 해야 되나’ 이런 생각도 있으니까 기도하는 게 왠지 좀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 어느 때부턴가, 아마 저를 좀 아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요.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제가 49제를 되게 싫어했어요. 49제가 들어오면 49제를 왜 하려고 하느냐? 그거 하지 마라. 왜냐면 49제를 하는 게 제가 좀 싫었어요. 물론 그것에 대한 어떤 순기능도 분명히 있고 또 그것에 대한 어떤 효과도 있지만 그때 저는 이상하게 기도하는 게 싫고,
염불하는 것도 좀 싫었고, 목도 아프고,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것들이 하기가 싫었고. 그리고 또 그때는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야, 49제 해가지고 절에서 말이지 장사를 하면 되느냐’ 뭐 이런 어떤 반발심 같은 것도 있었어요. 그리고 기도하는 것도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수능 기도한다, 이러면 아휴, 너무 싫었습니다. 수능 기도는 특히나 어떤 절에서는 ‘야 진짜 최악이다’라고 느끼게 되는 게 수능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 5교시까지 시간표에 맞춰서 기도를 해야 된다.
아휴, 참 싫었어요, 예전에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재밌어요, 오히려. 왜냐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그냥 공부에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일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할 텐데.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그냥 쉴 수가 있어서 마음이 쉴 수가 있으니까 기도하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은 거지요.
그냥 재미있고. 그러다 보니까 옛날 저의 은사 스님 밑에서 49제 할 때는 7시간씩 했었거든요. 나중에 좀 짧게 해도 2, 3시간 이렇게 하는데. 들어가면서부터 ‘아휴, 7시간 있다가 나오겠구나’ 한숨을 쉬면서 들어갔다면 이제는 뭐 그런 시간개념 자체가 없어요. 그냥 들어가면 어느 순간 나오게 되고 별생각이 없어요. 시간개념도 별로 없고. 그래서 그 말이 뭐냐 하면 똑같은 기도를 해도 내가 막 거기에 신경 쓰고 ‘좋다 나쁘다’하고 분별하는 거잖아요.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있으면 그게 되게 부담이 느껴져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놔져버리면 그런 부담이 없어져요. 그냥 뭐 하루하루 사는 거지. 저는 사실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바쁜지 몰랐는데. 오후 4, 5시쯤 돼서 우리 군종병 친구하고 둘이 부대를 갔다가 일을 끝내고 부랴부랴 오는데. 이 친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어휴, 어제 오후에 멀리 대구까지 갔다가 밤늦게 도착하자마자 또 새벽에 새벽예불하고, 아침에 수능 기도하시고 틈틈이 교구 내려가서 업무도 보시고 다다음 주 있을 큰 행사도 있으니까.
또 헌병대에 가서 교육도 하시고 또 위문도 하시고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너무 바쁘시네요.” 이렇게 얘기를 해서 그때 알았어요. ‘아, 내가 오늘 바쁜 날이었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런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처럼 아무리 바쁜 날도요 그냥 크게 마음이 없으면 뭐 크게 거기에 막 ‘힘들다 이렇다 저렇다’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하게 됩니다. 뭐 그렇게 큰 부담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뭔가 하나 하나 할 때마다 ‘이건 잘해야 되고. 저건 잘해야 되고.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볼까. 저렇게 하면 일이 어떻게 될까.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런 온갖 생각들을 가지고 하면 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 없이 그냥 하면 그냥 잘하고 못하고도 없이 그냥 한다.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되면 일은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거처럼 부담이 없는 거예요.
이처럼 무위법으로서 했을 때가 진짜 힘을 얻는 곳이 되는 거지요. 힘을 뺐는데 오히려 더 힘이 얻어져서 그냥 함 없이 했는데 그 일에 뭐랄까 성취? 능률? 창의? 뭐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솟아나는 것이지요. 지치지 않으니까. 아이들처럼.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단코 사법(邪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딱 나오지요.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려고 하면 그것은 결단코 사법(邪法) 이지. ‘참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쓸 필요까지 굳이 있었나’ 싶지만 이런 선사 스님들은 또 아닌 건 아니라고 그냥 칼같이 내치는 맛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뭔가 애써서 할 필요는 없어도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적당히 애쓰면 된다.” 적당히 애쓰면 됩니다. 그렇다고 애쓰지 않을 필요는 없어요. 애쓰고 싶은 게 있잖아요, 우리는.
선호하는 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있잖아요. 좋아하는 거를 열심히 애쓰면 돼요. 과도하게 애쓰지만 않으면 돼요. 어떤 결과에도 집착이 없이 애쓰면 됩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애써도 에너지 낭비가 안 돼요.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게 아닌 거지요. 예를 들어 제가 뭔가에 그냥 꽂혀서 그냥 툭하고 마음에서 뭔가가 일어나서 ‘야 이거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갑자기 그 일을 할 때 막 그냥 집중을 딱해버리는 일일 삼매라고 하듯이. 그냥 그 일에 한번 딱 빠져버리면 전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서너 시간 합니다. 시계 보면 ‘어제 이렇게 시간이 갔지’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아침부터 계속하고 있으니까 누가 들어와서 “아직도 그러고 계시냐고. 일 좀 그만하라고. 왜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고.” 그 얘기를 듣고 제가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거든요.
‘내가 일을 너무 열심히 했었나’ 그러니까 일을 열심히 한다,라는 생각조차 없게 되었을 때는 무위법으로 하는 거거든요. 크게 ‘애쓴다’ ‘한다’ 이런 생각조차 별로 없는 데도 불구하고 남들이 봤을 때는 되게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 완전히 몰입돼버리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완전 몰입이 돼버려요. 그런데 일의 능률은 그럴 때가 훨씬 더 오릅니다.
즉 ‘잘 해야지’ ‘노력해야지’ ‘뭘 해야 되는데’ ‘언제까지 해야 되는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면, 하면서도 계속 힘들고 시간도 안 가고 결과물도 안 좋아요. 그런데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뭔가를 딱할 때는 한 서너 시간, 어떨 때는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는 경우도 있잖아요. 지금 저보고 걸망 메고 인도 가라고 하면 저는 별로 가고 싶지 않거든요.(웃음)
10년 전, 그때만 해도 그 무거운 걸망을 지고 40도 위도는 더위 속에서 인도를 걸어 다니고 부처님 성지도 다니고 하면서 고생도 많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게 좋았는지 몰라요. 그 최악의 더위와 정말 최악의 무게와 싸우면서 왜 그렇게 좋았는지. 그때는 제가 그게 너무너무 좋았던 거예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혀 힘들이지 않아서 이걸 시절 인연이라고 하는 거지요. 본인이 뭔가에 이렇게 마음이 탁 동할 때는.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수행도 같이 하지요?” 하거든요. 일하는 것과 수행을 같이 하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을 할 때 다만 내가 없이 일을 하면 전혀 상관이 없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일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잘 해야 된다’ ‘못해야 된다’ 이런 ‘나’라는 자아개념이 개입돼버리면 일이 자꾸 분별이 돼버려요.
‘일을 통해서 내가 뭐 성공해야지’ ‘일을 통해서 내가 돈을 벌어야지’ ‘일을 통해서 내가 인정받아야지’ 그런 생각이 있으면 자꾸 중생심이 연습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나’ 없이 일을 하는 거예요. 아상 없이.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을 5시간, 6시간 하더라도 그게 그냥 하나의 공부가 돼버려요. ‘나’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할 때는 그것이 공부기 때문에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힘을 써서 지탱할 필요가 없다.
길고 멀리 보는 마음으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맞붙어 버티고 또 버티다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
길고 멀리 보는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 수행할 때 길고 멀리 보는 ‘평생 내가 이렇게 공부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빨리 끝내서 ‘내가 한 달 만에 끝내야지’ ‘두 달 만에 끝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마장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든 뭐를 들든 그 화두를 하나 들고 맞붙어 버티고 또 버티다가 그냥 이렇게 궁금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버티는 겁니다.
마음이 어떻게도 할 수가 없는 때가 되어서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하고, 연꽃이 피고, 구름을 헤치고 해가 나온 듯할 것입니다. 이때에 다다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됩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7,288)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지듯 번뇌망상이 올라오더라도 ‘무자(無字)’ 화두만 지켜보되,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또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하고는 상관치 마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88)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또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하고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냥 화두를 들고 그냥 답답해하고 궁금해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을 이렇게 지니고만 있으되. 그래서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져도 계속 그 공부를 지켜나가되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건 상관하지 말고. ‘내가 잘 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철저하나’ ‘철저하지 못하나’ 이런 것들은 아예 상관치 말아라. 그건 다 망상번뇌일 뿐이기 때문에.
다음은 이제 화두 공부할 때 주의할 점이 나옵니다. 이게 이제 대혜 스님이 말씀하신 화두 공부할 때의 10가지 주의점으로 당부한 거예요. 그런데 이 주의점을 지금은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간화선이 오염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다만 전도된 망상과 사량 분별, 좋고 싫은 마음과 지견으로 이해하려는 마음과 고요함은 좋아하고 시끄러움은 싫어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말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즉 분별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한꺼번에 잡아 눌러둔 채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이게 잡아 눌러둔 채,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표현을 조금만 더 세련되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는데. 잡아 눌러둔 채 이러니까 뭔가 이걸 잡아 눌러야 되는 어떤 인위적인 뭔가를 해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냥 말을,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으니까. 방편을 쓰다 보니까 이런 말을 쓴 거지요.
마음을 한꺼번에 잡아 눌러둔 채, 그곳으로 나아가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가 이르되 “없다”라고 했던 그 화두를 살펴보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봤더니 “없다”라고 한 것은 그 개념, 뜻하고는 아무 볼 일이 없습니다. 그냥 소옥이랑 똑같은 거예요. 소옥이한테 관심이 없고 수위 대장한테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그냥 그 말의 의미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없다,라고 해도 상관없고 있다,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화두를 살펴보십시오.
이 한 글자는 수많은 삿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막아주는 무기와 같습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즉 ‘이 뭐고’ ‘모를 뿐’ 하는 이 화두. 무엇이 되었든 이 화두는 수많은 삿된 지식과 깨달음을 막아주는 무기와 같다.
이 무(無)자 화두를 들되,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이건 무(無) 자 화두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화두라도 상관없다. 화두를 들되 ‘이 뭐고’ ‘모를 뿐’이라는 화두를 들되 첫째 이제 ‘화두 주의점’이 나옵니다. 열 가지가.
첫 번째, 유(有)니 무(無)니 헤아려도 안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즉 무(無) 자 화두라고 하니까 ‘개에게 불성이 없다’라고 한 거잖아요. ‘무(無)’없다 이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 없구나’ ‘왜 개에게 불성이 없을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 거 아닐까’ ‘사람에게 불성이 있으면 개에게도 있을 텐데’ ‘그러면 뭐 고양이에게는 없나’ ‘그러면 생명 있는 거에는 있고, 생명 없는 거에는 없고, 나무에는 없나’ ‘그럼 개미한테는 있나’ ‘그러면 미생물에게는 있나’ 이런 온갖 ‘있나’ ‘없나’라는 ‘유(有)’ ‘무(無)’하는 ‘있나’ ‘없나’라는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말뜻 따라가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화두의 말뜻을 따라가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무(無) 자 화두를 든다고 해서 무(無)니 유(有)니 하는 그런 거에는 별 볼일이 없다.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마라, 첫째. 두 번째 거의 비슷한 얘기들이 나오는데요.
두 번째, 이치를 따져서 이해해도 안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두 번째 화두를 들 때 이 화두가 도대체 이 불교교리와 맞는 거야? 불교교리에서 말한 ‘아, 연기법,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대소승의 불교교리들, 경전에서 나온 말씀들이 아, 이런 식으로 하라는 얘기구나’ 하고 교리와 이걸 막 연결해가지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이러이러한 이치를 따져가지고 ‘아 이러이러한 이치 때문에 이런 걸 시키는 것이겠지’ 하는 식으로 막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저는 그렇게 얘기하지요. 이해를 안 하면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까지 따라오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는 결국에는 집착하지 마라. 번뇌망상, 분별하지 말라는 그것을 연기법도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무아, 무소득, 무소유, 뭐 삼법인, 사성제, 전부다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오온개공 전부다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전부 이 대소승의 가르침은 다 그 얘기다. 이런 식으로 설명은 해드리지요. 그러나 공부할 때 공부할 때 이렇게 이치를 따져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세 번째, 생각으로 사량 분별하여 알아맞히려고 해도 안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네 번째,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며 힘을 주어도 안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이거 많이 하거든요. 제가 얘기를 할 때나 화두를 들 때 여러분은 눈에 힘을 주게 됩니다, 저절로. 왜냐면 마음에 뭔가 자꾸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것도 안 된다. 눈을 치켜올리고 막 눈을 깜빡이며 힘을 주고 ‘도대체 뭘까’하고 눈에 힘을 주면서 막 법문 들을 때도 그렇게 듣게 돼요, 그렇게. 그렇게 듣게 돼요. 얼굴을 보면은 수심이 한가득이에요.
답답한 사람들은. 막 그냥 답답한 마음으로 하면서 눈을 막 깜빡하고 제가 (죽비를 치며) 이게 부처다,라는 얘기를 하면 갑자기 막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귀를 쫑긋하려고 애쓰고 눈을 깜빡이고 이런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 된다. 또 언어에 의지해도 안 된다. 수많은 언어들, 어떤 스님이 이런 말을 했고, 어떤 스님은 저런 말을 했고, 어떤 말에, 어떤 화두가 있고, 저런 화두가 있고,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고, 저런 말씀이 있고, 말들이 계속 솟아나요.
‘이 뭐고’하면 ‘이 뭐고’에서 딱 끝나지가 않고요. ‘이 뭐고’하고 나서 ‘움직이는 이놈이 누구일까’하고 언어가 올라와요. 말이 올라와요. ‘이 길을 걷는 이놈이 누구일까’ ‘나를 이렇게 살아 숨 쉬게 하는 이놈이 누구일까’ 이런 식으로 언어가, 말이 자꾸 올라와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단 말이지요. 그냥 ‘이 뭐고’ 끝. 거기서 딱 끝나야지. 그 뒤에 자꾸 뭐 속삭임이 올라오면 안 됩니다. 그 미세한 속삭임이 자꾸 올라오면 안 된다. 또 그렇다고
다섯 번째, 일 없는 곳으로 도망쳐도 안 돼요.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아까 말했지요. ‘아, 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구나’하고 일 없음으로 도망쳐서 그냥 아무 일도 없게 아무 생각도 안 일어나고 아무 일도 없게 무기공에 빠졌다고 하듯이. 아무 일도 없는대서 가만히 있었어도 안 된다.
여섯 번째, 화두를 일으키는 곳을 향해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뭐지’ ‘뭐지’하고 막 알려고 ‘이 뭐고’ ‘뭐야’ ‘뭐야 도대체’하고 알려고 막 애써서도 안 된다. 문자로 증거를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이렇게 뭘 알게 되거나, 뭐 하는 것을 특정한 문자를 빌어 와가지고 이게 뭐 어떤 문자로 정리하려고 하거나 체계화시키려고 하거나 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다 비슷비슷한 얘기에요.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뭔가 애써서 노력하고 애쓰고 분별하고 뭔가 막 찾으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인위적인 유위적인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요, 쉽게 말하면.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가면서 막 열심히 수행해야 되고 막 앉아야 되고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 되고 이런 식으로 변질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다만 하루 종일 행주좌와에 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라는 이 화두를 삶에서 떼어놓지 마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4)
이건 화두 공부의 방식이니까. 이제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한 거지요. 이 말을 제가 말하는 방식으로 바꾸면 하루 종일 문득문득, 문득문득 ‘야, 이게 도대체 뭔가’ ‘이 뭐고’하고 ‘그러나 난 모른다’하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이거 뭘 알고자 하지만 뭔가 알고자 하는 데서, 뭔가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뭐고’하는, 답을 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모를 뿐이니까 답답할 뿐이지요.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에서 답을 내야 되는데 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 속에 갑갑함 속에 딱 놓여있게 되는. 그러니까 그 상황이 공부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뭐고’ ‘모를 뿐’을 하되 ‘이 뭐고’ ‘모를 뿐’이라는 말을 자꾸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한다.
논리와 이성(理性) 위에서 재미를 얻거나, 경전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재미를 얻거나,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8)
무슨 논리나 이성 위에서 재미를 얻는, 거사님들 중에 이런 분들이 많으세요. 혹은 똑똑하신 분들, 논리나 이성으로 이걸 헤아려가지고 알려고 하는데 그런 데서 재미를 얻으면 안 된다. 경전의 가르침과 아! 이게 합당하구나 혹은 경전의 가르침을 막 공부하면서 재미를 얻는다고 그게 방편의 공부는 될 수 있을지언정 뭐 그렇게 큰 공부는 또 아닐 수 있다.
조사의 언구(言句) 위에서 재미를 얻거나,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8)
‘야, 내가 이제는 조사 어록까지 소화가 돼’ ‘야, 이거 재밌어, 불교 공부’ 이렇게 재미를 얻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8)
눈으로 보이는 뭔가 또 귀로 들리는 뭔가에서 재미를 얻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발을 들고 걷고 움직이는 곳에서 재미를 얻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생각하고 헤아리는 곳에서 재미를 얻은 적이 있다면, 이 일을 전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8)
재미를 얻는다,라는 건 거기에 매인다는 얘기고. 거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건 분별한다는 것이에요.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그런 분별의 일을 가지고는 전혀 이 일을 이룰 수가 없다.
만약 곧장 쉬고자 한다면, 마땅히 예전에 재미를 보던 곳을 전혀 상관치 말고, 도리어 붙잡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으로 나아가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8)
이건 뭐 머리로 헤아리라는 얘기는 아니지요. 한번 이 공부를 해봐라.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재미를 보던 곳에서 뭐 또 다른 재미를 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다.
만약 헤아릴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으며, 붙잡을 만한 그 어떤 손잡이도 없어서,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9)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거지요.
이치의 길과 뜻의 길에는 전혀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마음에 일체의 분별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마치 토목와석(土木瓦石)과 같음을 느낄 때,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9)
흙과 같고 나무와 같고 뭐 벽돌과 같은 이런 것을 느낄 때,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도 말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9)
그러니까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의 길이 끊어지니까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내가 마치 돌이 된 거 같고 목석이 된 거 같이 이렇게 느낄 때. 그러더라도 막 공(空)에 떨어진 거 같은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곳이 바로 당신이 신명을 버릴 곳이니,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흔히 그 총명이 장애가 되어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접촉하는 곳마다 막히게 됩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9)
총명한 사람은 머리로 헤아리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건 총명한 사람이 공부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가 그런 것이지요.
붙잡을 것 없고, 헤아릴 것 없고, 재미도 없는 곳에서 한 번 공부해 보십시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다’ 하신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총명한 사람은 심의식으로(심의식은 전부다 마음, 분별이라는 소리에요) 이해하고 추측하고 헤아리면서 증거를 끌어와서 법을 정리하려 하지만, 화두란 증거를 끌어옴을 용납하지 않고, 추측하거나 헤아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며, 심의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99)
그 어떤 추측, 용납 뭐 추측하고 헤아리고 뭐 증거를 끌어오고 이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다음에 지눌(知訥)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인데요. 이 수심결은 뒤에 이제, 지눌 스님의 수심결 뒤에 나오는 몽산덕이(蒙山德異) 화상의 몽산법어(蒙山法語)예요. 몽산법어를 기점으로 간화선이 좀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유위법적인 수행법으로 좌선 방식으로 오염되기 시작하는데요.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까 말한 대혜 스님의 서장과 뒤에 나오는 고봉원묘(高峯原妙)의 선요(禪要), 그러고 몽산덕이의 몽산법어, 이 세 가지를 간화선의 교과서처럼 여기고.
그 중에서도 몽산덕이의 몽산법어를 아주 중요한 교과서 텍스트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이 오염된 것이 제 얘기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나 또는 선사 스님들 중에서 일부를, 요즘에 와서 이제 밝혀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하던 것이 잘못됐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을 아는 분들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이렇게 그냥 툭툭 던지긴 하되 이것이 기존에 해오던 견고한 방식의 몽산덕이 방식인 열심히 애쓰고 수행해서 화두를 드는 그 방식의 수행으로,
좌선하는 방식이 너무 견고하게 자리 잡다 보니까 아무리 얘기해도 안 먹히니까 ‘그냥 공부할 사람만 하자’ 하고 마는 분위기가 큰 것이지요. 그런데 쉽게 말해서 몽산덕이의 오염된 간화선이랄까요. 그런 표현을 제가 좀 쓴다면 이제 그것이 나오기 이전에는 지눌 스님이 쓰신 수심결이 있는 거지요. 지눌(知訥)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보면 법을 진리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귀한 텍스트입니다.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려면 본성(本性)을 찾는 길밖에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왜냐면, 괴로움이 없는 것을 가지고 본성을 찾는다,라는 표현을 쓴 거예요. 이 길밖에 없지요.
본성을 찾으려면(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본성을 찾으려고 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그 마음이 곧 본성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느냐.
성품은(본성이 바로 성품인데요) 본래 깨끗하여 본래 스스로 원만하니,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본래 깨끗하고 원만하게 스스로 나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단지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그대로가 부처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분별하는 생각만 없으면 곧 그대로가 부처다.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근원이 불성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내가 보면 보는 근원이 불성이다. 불성이 있어서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눈이 보는 게 아니고. 듣는 것도 불성이 있으니까 불성이 듣고 듣는 것이지.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듣자마자 헤아리는 걸 가지고 내가 듣는다,라고 생각하지만. 헤아리기 이전에 첫 번째 자리에서 듣게 되면 듣는 그놈은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지요. 지각하는 거, 생각하는 거, 번뇌망상 일으키는 것도 다 불성이 하는 일입니다.
생각의 내용물을 따라가서 막 생각으로 헤아리면 그거는 분별심이지만 생각이 올라오고 사라지는 게 어디서 올라오고 사라지는 거예요. 불성 자리에서 올라오고 사라지는. 바다 위에서 파도가 치듯이 생각이 올라오는 거는 이 파도들은 전부다 바다와 둘이 아닙니다. 번뇌망상도 전부다 불성과 둘이 아닌 것이지요.
“성품(性品)을 보았다면 성인이니 신통변화를 나타내야 할 텐데, 요즘 사람들은 왜 신통변화가 없습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4)
이렇게 제자가 질문한 거예요. 이런 질문은 정말 많이 하지요, 요즈음에도. 성인이면은 신통 변화를 보여야 될 거 아닙니까? 좀 신통 자재해야 되고 우리랑 좀 달라야 될 거 아니에요? 깨달았으면 깨달은 사람이라면 뭔가 좀 신통 자재하고 뭔가 우리가 봤을 땐 좀 ‘야 저 사람은 진짜 도인이다’할만한 우리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부처님도 32상 80종 호가 있다는데. 뭔가 신통 자재함이 있어야지 되지. 그게 없으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지요. 그랬더니 뭐라고 답하나 보세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정(正)과 사(邪)를 분별 못하면 미혹에 빠진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5)
정법과 사법을 분별하지 못하면 미혹에 빠집니다. 이거는 정말 미친 소리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뭔가 신통 자재해야 된다. 우리와는 달라야 된다. 미래를 볼 줄 알아야 된다. 뭔가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예언할 줄 알아야 된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디 있습니까? 깨달은 자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예언할 미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미래를 예언해요. 미래를 예언하는 거 자체가 현재와 미래를 둘로 나눠서 분별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분별망상을 도(道)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도인이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겠어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물론 뭐 이렇게만 단정 지으면 또 안 되니까. 예를 들어 그냥 우리도 감(感)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냥 감(感). 그냥 감(感)은 얘기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조금 그 감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겠지요. 왜냐면 번뇌망상이 많이 내려놔지니까 내 근원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투명하잖아요, 마음이.
투명할 때, 고요히 명상할 때나 마음이 고요할 때. 그래서 “기도하다 보면 뭐 답이 나와” 이렇게 얘기 많이 하잖아요. 기도하면 답이 나온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방편으로써는. 현상세계로써는. 왜냐하면 계속 번뇌 망상으로 오염되어 있으니까 현실 세계를 오염된 생각 가지고 근근이 버텨 가는데. 오염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기도를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뭔가를 하면 번뇌 망상이 잦아들어요. 고요해져요.
그러면 그냥 뭔가 문득 답이 나오는 것 같은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하는 어떤 확연한 자각으로 뭐 이렇게 내 안에서 내면에서. 부처님이 어떤 소리를 내서 ‘이렇게 해라’라는 답을 준다는 게 아니고. 그냥 감(感)으로, 이 감(感)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결코 알 수 없어요. 그 감(感)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떤 감이 오면 그 감으로 하면 됩니다, 그냥. 직관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감이 들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감이 틀린 것은 왜 틀렸는지 아세요? 예를 들어 내 아들을 재수를 시킬까 말까, 시킬까 말까 엄청 고민을 해요. 아이도 하고 싶어 하고 될 수 있으면 그거는 아무런 고민할 바가 없어요. 그런 문제는. 애를 재수 시킬까 말까에 대한 고민은 딱 답이 나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애한테 물어보면 돼요, 그냥.(웃음)
그러고 내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좀 그렇다고 한다면 애한테 톡 틀어놓고 야 내가 경제적으로 이렇고, 이렇고 이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한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으니 네가 결정을 해라. 본인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 거는 감에 의존할 필요도 없지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업을 확장할까 말까 막 고민하다가 확장을 했어요. 감으로. 해보면 될 것 같아서. 어젯밤 꿈을 잘 꿔서. 뭔가 막 하면 될 것 같아서 했어요.
그런데 그 감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확장했는데 우리의 감이 틀려서 망했어요. 그러면 ‘아, 그때 그 감이 틀렸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틀린 게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업장을 소멸하고 뭔가 또 다른 깨달음과 배움으로 액땜을 하고 그런 것이 그 사람 인생에 필요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 감이 안 맞은 게 아니라 그 감을 통해서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한 감이었던 것이지요. 본래 틀린 삶은 없어요. 틀린 삶이 없어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머리를 가지고 계산해서 답을 내는 거보다는 감을 따라가는 게 좋아요, 어찌 보면. 굳이 표현한다면. 굳이 표현한다면, 생각으로 막 계산해서 하는 거보다 그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더 좋아요.
실제 대기업 회장들은 수백수천억이 왔다 갔다 하는 일에서 아랫사람들이 논문을, 보고서를 작성해서 이런 단점이 있고 저런 단점이 있어서 결론은 이게 좋습니다,라고 이 부서 저 부서에서 이거는 하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했는데 몇 천억을 막 날릴 판인데. 그걸 무시하고 회장님은 자기 감으로 어이없게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감(感)으로 그냥 한다잖아요. 그런 일이 더 많답니다. 전혀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더 많더랍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일 때문에 뭔가 더 크게 되는 경우도 많답니다. 그러니까 이 감이라는 게 뭐겠어요? 힘쓰지 않았는데 애쓰지 않았는데 그냥 얻어걸린, 그냥 주어진 거잖아요. 이게 진짜배기예요. 그러니까 뭐 연예인 시험 보러 가는 친구 따라 얘는 심심해서 따라갔다가 덜컥 얻어걸리고. 그 친구는 3년을 준비해서 시험을 봤는데 그냥 떨어진 걸 보면. 될 거는 그냥 얻어걸리게 돼 있어요. 무위법이기 때문에.
애쓸 필요 없이 그냥, 그냥 주어지는 거지요. 그리고 또 보면 진짜 큰 성공은 내가 했다,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짜 ‘야! 이게 세상이 우주가 도왔나 보다’ 싶고. 자신의 미래 같은 거 있잖아요. 뭐 진급이나, 자식의 대학 진학이나, 자식이 어떤 배우자를 데리고 오거나, 딸이 어떤 사윗감을 데리고 오거나, 이런 거 있잖아요. 인생의 굵직굵직한 거. 그거는 내가 미친 듯이 반대한다고 반대한 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겉으로 봤을 때, 얘가 저 얘랑 결혼하면 불행이 불 보듯 뻔해도 내가 반대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끝까지 부모님이 반대해가지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안 된다. 결혼하려면 우리랑 연을 끊고 살자 해가지고 실제 연을 끊고 사는 사람도 봤어요. 결혼 때문에 부모님하고 연을 끊고 살아요, 아예. 그러고 젊은 보살님들 하고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요. 아예 시댁에 발 끊은 지 오래된 사람들도 은근히 있어요, 또.
발 끊고 완전히 남남처럼 사는 경우지요. 내가 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큰일은 내 마음을 비우고 그냥 다 맡겨버리는 거예요. 다 저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자기 인생의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저 아이의 부처 성품을 내 어리석은 분별망상으로 분별심으로 어떻게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경에 이치로는 돈오하여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실에는 차례차례로 없어진다 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5)
즉 깨닫는 그 순간은 돈오라고 해서 몰록 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중생세간에서 방편으로 봤을 때는 이게 한 방에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차곡차곡 되는 것도 또 틀린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아까 말한 것처럼 갑자기 확 뜬 사람이 자기는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뜰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어찌 보면 그 아이가 그냥 이렇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공부해 왔고 뭔가 그 능력을 발휘해 왔을 수도 있고.
또는 뭔가 크게 성공하는 사람도 문득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뭔가 조금 조금씩 그래도 뭔가 바탕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잘 될 수도 있고. 또 여러분들 같은 경우 몰록 깨닫는다,라고 하지만 이렇게 법문 듣는 지고한 시간, 뭔가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은 진척되지 않는 것 같은 이런 시간을 버티고, 버티고 법문을 듣고. 오랜 시간을 이렇게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1년이고 2년이고 계속 나오는 이런 시간들을 보내야지만 나중에 가서 깨닫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봤을 때는 이거를 점차라고 볼 수도 있는 거지요. 차례차례 공부해 나간다. 단계, 단계 공부해 나간다,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점수도 한편으로 봤을 땐 틀린 말이 아니고. 또 뭐 돈오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지요.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알아차림’ 이 더딜까를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려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305)
망상, 분별이 일어나는 거는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 망상이 일어나는 걸 내가 보지 못하고 망상에 휩쓸려 갈까 봐, 그걸 걱정해라. 망상이 일어난 걸 가지고 전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이렇게 바라보면 돼요. 구경하면 됩니다.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면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알아차리게 되면 망상에 끌려가지가 않거든요. 그건 잠깐 왔다간 손님. 망상, 생각은 그냥 딱 손님이에요.
그것도 나랑 친하지 않은 손님. 잠깐 왔다가 그냥 갈 손님. 그러니까 그거는 내가 막 붙잡아서 심각해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특정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거기에 사로잡혀서 크게 괴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다음 시간에 몽산덕이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 불교가 어떻게 됐는지 잠깐 살펴보고, 그다음 고봉원묘의 선요를 통해서 고봉원묘 스님이 바라보는 간화선은 또 어떤 것인지도 좀 살펴보도록 그렇게 하겠고요.
시간이 되면 아마 서산휴정까지 얼추 볼 수 있을 거 같고. 그 뒤에 초발심자경문은 그냥 좀 선과는 큰 상관이 없는데. 그냥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가한 스님들이 보는 거라서 덤으로 해놓은 거라 이거는 뭐 안보더라도. 어쨌든 다음 시간에 나머지 부분들을 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녹취해 주신 덕분에 귀한 공부를 편하게 합니다.
공덕으로 행복하시고 편안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_( )_
_()()()_
너무 고맙습니다._ ()_
'분별하는 생각만 없으면 곧 그대가 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