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는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여 천년 이상 안동에 세거해온 안동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연원]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대대로 안동에 살던 토족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이다.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권씨(權氏) 성을 하사받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후삼국 통일 후 태사(太師)의 작위를 받았다.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입향경위]
안동권씨는 시조로부터 10세 때에 권수중(權守中)을 파조로 하는 종파, 권시중(權時中)을 파조로 하는 부호장공파, 권수평(權守平)을 시조로 하는 추밀공파, 권수홍(權守洪)을 시조로 하는 복야공파, 권체달(權?達)을 파조로 하는 동정공파, 권지정(權至正)을 파조로 하는 좌윤공파, 권영정(權英正)을 파조로 하는 별장공파, 권통의(權通義)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 권인가(權仁可)를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 권숙원(權叔元)을 파조로 하는 중윤공파, 권사발(權思拔)을 파조로 하는 군기감공파, 권대의(權大宜)를 파조로 하는 광석파, 권추(權樞)를 파조로 하는 호장공파, 권주(權倜)을 파조로 하는 검교공파, 권형윤(權衡允)을 파조로 하는 급사중공파 등 15개의 큰 파로 분파 되어 안동의 각 지역에 세거 하고 있다.
안동에 거주하는 안동권씨의 대다수는 권수홍의 후손인 복야공파이다. 권수홍의 둘째 손자 권윤평(權允平)의 증손으로 예의판서를 지내던 권인(權靷)은 조선 개국 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서후 송파(현 서후면 교리)에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권인을 파조로 하여 판서공파라 자칭한다. 판서공파는 풍산읍 노리에 세거하였다. 권인의 아들 권후(權厚)는 중랑장이고 손자 권계경(權啓經)은 횡성현감을 지냈다.
권계경의 아들 권개(權?)는 벼슬이 수의부위이고, 권개의 맏아들 권숙형(權叔衡)은 사맹이고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한 권기(權紀)는 권숙형의 현손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명이 높은 권호문(權好文, 1532~1557)은 권개의 둘째 아들 권숙균(權叔均)의 손자이다. 권개의 동생 권곤(權琨)의 맏아들 권사영(權士英)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위로 두 아들은 후사가 없고 3자 권응희(權應禧)의 후손은 서후면 명리 일대에 살고 있다.
권곤의 둘째 아들 권사빈(權士彬, 1449~1535)은 송파에서 북후면 도촌리로 옮겨서 정착하였는데 권사빈의 차자 권벌(權?, 1478~1548)은 봉화 유곡리로, 삼자 권려와 사자 권장(權檣)은 예천 저곡리로 이거하여 나가고 도촌리에는 맏아들 권의(權?)의 장자 권심기(權審己)와 6자 권심행(權審行)의 후손이 세거하게 되었으나 권심행의 후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권심행의 아들 권위(權暐, 1552~1616)는 선조 때 학자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의의 다른 아들 권심언(權審言), 권심사(權審思), 권심변(權審辯)은 각각 예천 저곡, 감천, 봉화 명호로 이거하였다. 권수홍의 셋째 손자 권윤보(權允保)는 중문지후를 지냈는데 풍천면 가곡리에 정착한 안동권씨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서주자사를 지낸 권윤보의 증손 권시중(權時中)을 파조로 하는 서주공파의 후예이다. 권시중의 맏집 손자 효자 권질(權?)의 아들 권시(權?)는 문과에 올라 교리를 지냈고, 권시의 아들 권렬도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목사를 지냈는데 영천 신령으로 이거하였다.
권시중의 둘째집 손자 판관 권심(權深)의 맏아들 권항(權恒)은 1403년에 평해에서 태어나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를 지냈는데 풍산현에 살던 류서(柳?)의 사위가 되어 가곡리에 정착하였다. 권항의 맏아들 권이(權邇)는 현감을 지냈고, 둘째 권건(權建)은 1477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지냈다. 도승지를 지내고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한 화산(花山)권주(權柱, 1457~1505)은 권이의 아들이며 이황의 장인 사락정(四樂亭)권질(權?)의 아버지다.
권통의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는 파조의 5세손 권백종(權伯宗)의 효자비각이 안기동에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부내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백종의 아들 경혜공권전(權專, 1371~1441)은 단종의 외조부이다. 단종 폐위 때 권전 일족은 거의 멸문되고 겨우 살아남은 혈육이 군위군 효령면에 거주하게 되었고, 어린나이에 영해로 유배된 종질 권책(權策)의 후손은 이후 크게 번창하였다.
안동권씨는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여 천년 이상 안동에 세거해온 안동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연원]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대대로 안동에 살던 토족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이다.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권씨(權氏) 성을 하사받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후삼국 통일 후 태사(太師)의 작위를 받았다.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입향경위]
안동권씨는 시조로부터 10세 때에 권수중(權守中)을 파조로 하는 종파, 권시중(權時中)을 파조로 하는 부호장공파, 권수평(權守平)을 시조로 하는 추밀공파, 권수홍(權守洪)을 시조로 하는 복야공파, 권체달(權?達)을 파조로 하는 동정공파, 권지정(權至正)을 파조로 하는 좌윤공파, 권영정(權英正)을 파조로 하는 별장공파, 권통의(權通義)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 권인가(權仁可)를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 권숙원(權叔元)을 파조로 하는 중윤공파, 권사발(權思拔)을 파조로 하는 군기감공파, 권대의(權大宜)를 파조로 하는 광석파, 권추(權樞)를 파조로 하는 호장공파, 권주(權倜)을 파조로 하는 검교공파, 권형윤(權衡允)을 파조로 하는 급사중공파 등 15개의 큰 파로 분파 되어 안동의 각 지역에 세거 하고 있다.
안동에 거주하는 안동권씨의 대다수는 권수홍의 후손인 복야공파이다. 권수홍의 둘째 손자 권윤평(權允平)의 증손으로 예의판서를 지내던 권인(權靷)은 조선 개국 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서후 송파(현 서후면 교리)에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권인을 파조로 하여 판서공파라 자칭한다. 판서공파는 풍산읍 노리에 세거하였다. 권인의 아들 권후(權厚)는 중랑장이고 손자 권계경(權啓經)은 횡성현감을 지냈다.
권계경의 아들 권개(權?)는 벼슬이 수의부위이고, 권개의 맏아들 권숙형(權叔衡)은 사맹이고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한 권기(權紀)는 권숙형의 현손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명이 높은 권호문(權好文, 1532~1557)은 권개의 둘째 아들 권숙균(權叔均)의 손자이다. 권개의 동생 권곤(權琨)의 맏아들 권사영(權士英)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위로 두 아들은 후사가 없고 3자 권응희(權應禧)의 후손은 서후면 명리 일대에 살고 있다.
권곤의 둘째 아들 권사빈(權士彬, 1449~1535)은 송파에서 북후면 도촌리로 옮겨서 정착하였는데 권사빈의 차자 권벌(權?, 1478~1548)은 봉화 유곡리로, 삼자 권려와 사자 권장(權檣)은 예천 저곡리로 이거하여 나가고 도촌리에는 맏아들 권의(權?)의 장자 권심기(權審己)와 6자 권심행(權審行)의 후손이 세거하게 되었으나 권심행의 후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권심행의 아들 권위(權暐, 1552~1616)는 선조 때 학자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의의 다른 아들 권심언(權審言), 권심사(權審思), 권심변(權審辯)은 각각 예천 저곡, 감천, 봉화 명호로 이거하였다. 권수홍의 셋째 손자 권윤보(權允保)는 중문지후를 지냈는데 풍천면 가곡리에 정착한 안동권씨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서주자사를 지낸 권윤보의 증손 권시중(權時中)을 파조로 하는 서주공파의 후예이다. 권시중의 맏집 손자 효자 권질(權?)의 아들 권시(權?)는 문과에 올라 교리를 지냈고, 권시의 아들 권렬도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목사를 지냈는데 영천 신령으로 이거하였다.
권시중의 둘째집 손자 판관 권심(權深)의 맏아들 권항(權恒)은 1403년에 평해에서 태어나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를 지냈는데 풍산현에 살던 류서(柳?)의 사위가 되어 가곡리에 정착하였다. 권항의 맏아들 권이(權邇)는 현감을 지냈고, 둘째 권건(權建)은 1477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지냈다. 도승지를 지내고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한 화산(花山)권주(權柱, 1457~1505)은 권이의 아들이며 이황의 장인 사락정(四樂亭)권질(權?)의 아버지다.
권통의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는 파조의 5세손 권백종(權伯宗)의 효자비각이 안기동에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부내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백종의 아들 경혜공권전(權專, 1371~1441)은 단종의 외조부이다. 단종 폐위 때 권전 일족은 거의 멸문되고 겨우 살아남은 혈육이 군위군 효령면에 거주하게 되었고, 어린나이에 영해로 유배된 종질 권책(權策)의 후손은 이후 크게 번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