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파 초제문중, 죽동문중, 모서문중
20세 恪(각)
21세 德龍 德鳳 德麟 3형제에서 德龍할아버지 이후를 초제 문중으로 부르고, 德鳳 할아버지 이후를 죽동문중으로 부르며, 德麟 할아버지 이후를 모서문중이라 부르고 있다.
21세 德龍, 22세 慄, 23세 商賚
카페 “신씨의 등대” 06년 6월 26일자 소개 중에서
제 23세 신상뢰 청사원종 일등공신의 자료 / 판서공파
소재지 : 경북 경주군 안강읍 죽전동 판서공파 모서문중 으로 소개되었는데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판서공파 초제문중” 으로 하면 맞습니다.
참고로
신상뢰(辛商賚)에 대하여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계응(季膺).
조부는 공신(功臣) 신덕룡(辛德龍)이고, 부친은 참봉(參奉)이었던 신율(辛慄)이다.
경주에서 살았으며, 1603년(선조 36)에 등과(登科)하였고, 1615년(광해군 7)에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2등에, 1623년(인조 1)에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624년(인조 2)에 공신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1626년(인조 4)에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가 되어 치적(治績)을 잘하여 풍천군민(豊川郡民)이 그를 추사(追思)하여 동비(銅碑)를 세웠다. 1631년(인조 9)에 은율현감(殷栗縣監), 1632년(인조 10)에 해주병마절제사를 역임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창의(倡義)하여 적군(敵軍)과 싸우는 등의 공을 세워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으로 녹선되고 노비를 하사 받았다.
더불어 임금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의(義)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신하로써 충절을 나타냈으니, 어진 이의 공적을 기록한 것은 국가가 힘써 표창할 일이다”라는 글을 내리고, 그 신위를 부조(不祧)하도록 명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대곡리 고통곡(古通谷)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성균관관장(成均館館長) 권중해(權重海)가 찬(撰)했는데 그 내용이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재주가 많고 충(忠)이 뛰어나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경기도 여주군에는 부조묘가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신상뇌(辛商賚) : 제23세, 선조(宣祖) 계묘년생, 급제(及第), 익사원종공신, 정사원종공신일등 통정대부(通政大夫), 풍천도호부사, 해주병마절도사, 호종공신, 호종훈재 남한창의록, 판서공파.
묘(墓) : 영일군 기계면 대곡리 고통곡 곤좌(坤坐)에 있고 상석(床石)에 면각(面刻)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자료제공 : 부산종친회 신우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