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3> 서장 (書狀)
"이 도리(道理)는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멀다 하여도 자기 눈동자 속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눈을 떠면 바로 보고 눈을 감아도 없어지거나 모자라지 않으며, 입을 열면 바로 말하고 입을 다물어도 스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계합하려 한다면 벌써 십만 팔천리나 어긋나 버립니다. 그대가 마음을 씀이 없는 바로 그곳이 가장 힘을 더는 곳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이 도를 배우는 자들은 대부분 힘을 써서 찾고자 하니, 찾을수록 더욱 잃게 되고 향할수록 더욱 어긋납니다."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도리(道理)는 마음의 실상(實相)이다. 마음의 실상은 실재(實在)이기는 하지만 상(相)이 없다. 실상이란 말은 허상(虛相)에 상대하여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반면에 우리가 상(相)으로 인식하는 모든 경계는 실재가 아니므로 허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의 상(相)을 쫓을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실재를 알아야 한다.
마음의 실재란 무엇인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상이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마음이 움직이면 상을 만들어내고, 움직이지 않으면 상도 없다.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마음은 있다. 아상(我相)·인상(人相)·세계상(世界相)·중생상(衆生相)·여래상(如來相)이 모두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며, 말하고·침묵하고·보고·듣고·가고·앉고·눕는 행위들이 모두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다.
마음은 이처럼 모든 행위와 작용을 하지만, 스스로는 어떤 모양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을 파악함에 생각을 움직여서 파악하려 든다면 어긋날 수밖에 없다. '마음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인데 다시 마음을 찾으려 하므로, 찾아보아야 그것은 마음에 관한 허상(虛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찾는 공부에서는 생각을 쉬어라고 하는 것이며,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에도 함정이 있다. 생각을 쉬어라는 말을 듣고 생각이 일어나는 족족 회피해버리고 문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텅빔을 추구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거나,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오직 하나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 의식을 잡아매고서 의식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 공부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함정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이므로, 생각을 쉬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쉰다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며,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지금 마음을 알고자 하는 이 사람, 지금 마음을 찾고자 하는 이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찾기는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일이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노릇이다. 찾고 있는 자기가 바로 찾고자 하는 자기인데 또 무슨 자기를 찾겠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찾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찾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 찾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모두 아무 일 없이 마음을 쉰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도 함정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공부의 어려운 점은 마음공부의 전 과정을 오해의 여지가 없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고 나면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한 일이지만, 말로써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말이란 모두 상(相)이기 때문에, 상 아닌 실재를 상인 말로써는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설명은 모두 방편일 뿐이고, 그 방편을 계기로 실재를 파악하는 것은 공부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 몫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한 발심(發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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