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4월 15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황의찬 목사)
주께서 주시는 징계
히12:1~13
엊그제 주일학교 예배에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모처럼 교회에 왔습니다. 이 아이 형제가 지
난겨울에는 교회에 종종 오곤 했었는데, 아마도 이들 부모가 하나님은 없다고 가르치면서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주일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예배시간에 들어왔습
니다.
다른 아이들은 맨 앞 자리에 앉았는데, 이 녀석 혼자 중간쯤에 앉았다가,
“하나님 없어요! 보이지도 않잖아요?” 하면서 신경을 건드립니다.
금년에 쉰다섯 살이 된 목사가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여덟 살 난 1학년짜리가 그렇게 딴지
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과 논쟁을 할 수도 없고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 1학년짜리의 논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초등학교 1학년짜리에게 너무나도 쉽게 먹혀드는,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니 믿
을 수 없다.”는 논리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상상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이 틀리지 않네! 뭐, 맞는 말이네!”하고 맞장구치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솔직히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수긍하십니까? 물론 수긍하실 겁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영, 세상의 악한 영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세상의 영, 사탄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
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서 논리를 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장 쉽게 넘어온다는 것을 간파한 사탄의 계략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깜박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깜박 속아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눈으로 봄으로써 확인하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누구로부터 어떤 사실을 듣고, 들은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입니
다. 이 말은 눈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귀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이 태어난 후 가장 먼저 가지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믿음이지요.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다.” 이것이 첫 번째 믿음입니다. 최초의 믿음입니다. 사실 이 믿음은 대단
히 중요합니다. 만약 이 믿음이 없다면 그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믿음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자기 눈으로 확인한 것입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었다. 흔들릴 수 없는 믿음입니다.
어머니가 열 달 만에 나를 낳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흔들릴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확신이 내 두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출발했습니까?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저 철이 들면서 부모님들이 ‘너는 내 새끼다. 너는 내 배속에서 열 달 동안 있다 나온 내 새끼
다’하니까 그 말을 믿는 것이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믿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냥 믿는 겁니다.
믿음은 그냥 믿는 겁니다.
자라면서 보니까 내가 아빠 엄마를 닮았고, 부모가 아니라면 나를 그렇게 양육해 주실 리가 없고,
온갖 희생을 감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점점 확신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내가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보니, 태양과 별이 있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이 있는데, 저것들이 저절로 생
겼을 턱은 없고 누군가가 만드셨을 터인데, 그분이 누구일까?
시간이 흐르면서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는데, 이런 조화는 누구에 의해서 돌아가
는 것일까?
하나님을 증명하고 입증할 만한 자료들은 눈만 뜨면 넘쳐납니다.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에 대해서는 “몰라!” “그건 알아서 뭘 해?” “저절로 생겼겠지 뭐!” 하면서 시침을 딱 뗍니다.
그러나, 히3:4『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본문 기자는 저와 여러분에게 아주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어떤 당부요?
(2a)『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누구를 바라보라고요? ···
“예수”
제발 좀 바라봐라, 예수님을 바라봐라,
자기를 낳아주시는 어머니의 출산과정도 목격하지도 못하는 존재, 인간들아~
제발 교만을 버리고 정말 바라봐야 할 분이 있으니 그 분, 누구요?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 좋은 기독교인들은 하루 온 종일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모양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귀걸이를 만들어서 거는 이유들이 다 뭡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자”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견디는 예수님이십니다.
(2b)『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인들은 가장
지독한 범죄자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연쇄 살인사건의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사형집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오게 될 부활의 기쁨을 위하여 그 고난을 참으신 분입니다.
온고을교회가 효자동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한 성도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면, 나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좀 위선적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상당히 돌발적인 질
문이어서 저도 얼버무렸는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그 믿음이 대단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
다.
이제 생각해보니 믿음은 참으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대단히 화가 치미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분
을 내고, 말을 함부로 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또한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
늘 아무리 화가 치밀고, 오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고나면 내일이 옵니다. 내일에 있을 기쁨,
내일에 있을 영광을 위해서 오늘 화가 나도, 힘들어도 믿는 사람은 그래서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려워도 하늘나라 천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을 잘 견딜 수 있습
니다. 다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 천국을 갑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갈 세상이 어디가 될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겉으로 봐서는 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입니까? 낼 모레가 국회의원 보궐 선거 날입니다. 전주가 뜨겁게 닳아
올랐습니다. 국회의원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일까요? 그것도 별거 아닙니다. 오히려 독이 됩니다. 노무현 대
통령 보세요, 감옥살이 초읽기에 들어갔잖아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2절 말씀 다시 한 번 보십시오.
(2b)『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정해진 임기가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임기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했느냐 추궁당하고 감옥갈 일도 없는 자립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참으신 예수님에게 가장 영광된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는 너희는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바라보고 오늘의 고통을 견뎌라~ 인내해라~
그러면 나중에 기쁨이 있다. 나중에 영광이 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오늘, 고통 중에 있는 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오늘,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3절)『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
으신 이를 생각하라』
지금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2천 년 전에 죄인들이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을 거역하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이 죽이
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그분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죽기까지 참으셨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피
곤하다고 주저앉지 말라,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오늘날 힘들다. 괴롭다. 살겠다 못 살겠다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라!
너희가 아직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다시 말해서 순교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
예수님을 바라봐라! 할렐루야~
여기까지, 4절까지,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5절부터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집안에 우환이 멈
추지도 않고, 가족 중에서 오히려 멀쩡하던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래서 교회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런 고난은 기독교인의 품격에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얘기가 5절부터 시작됩니다.
5~8절 합독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시는 온고을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님으로부터 떡 한 조각을 바라십니까? 아니면 회초리 한 대를 바라시겠습니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부모님의 회초리 한 대를 달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도 하나님처럼 미운 자식에게는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회초리를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징계를 달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징계를 주시는데, 우리가 그 징계를 어떻게 여겨야 한다고요?
5절에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
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더니, 집안이 더 엉망이 되었다.
교회에 나가고 나서부터 아무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무개가 독감이 걸렸다.
이런 일들이 뭐라고요? ···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오히려 달게 여기고 참으라,
그 고난 속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아무리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만이야 하겠느냐? 그러니,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절)
그리고 9절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꾸중한번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꾸중을 싫다하고 뛰쳐나가면 어찌 됩니까?
부모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고 해서 옆 집 아저씨한테 가서 “아버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부모님이 징계를 하여도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데, 그걸 싫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부모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자식을 훈계할 때 일시적인 감정에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10)『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
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육신의 부모님과 달리 하나님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인내하도록 징계하십니다. 그러니 그 분이 주는 고통에 괴로워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엊그제 부활주일에 선물로 드린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는 책에 보면 소제목 중에
“자신의 십자가 고통에 익숙해지십시오”라는 단원이 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에만 고유한 고통이 있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의 질병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장애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저도 저만의 십자가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몇날 며칠씩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다가올 때, 그렇게 괴로
워만 하지 말고, 그 고통 중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고통에 익
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반을 쓴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십자가가 있었습니까?
바울에게는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고백합니다.
(7절)『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
려 하심이라』
어떤 신학자는 그 병이 간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만성 말라리아 열이
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만성 말라리아 열은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이마를 쑤시는 듯한 고통이 있
는 병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뭐였습니까?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
라~』
어떤 사람에게는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일 수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고통이
시작되면, 그 고통으로 인해 속상하고, 괴로워만 할 것이 아니라, “아~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징계
를 주시는구나,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 때문에 징계를 주실까?”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씩씩
거리면서 분을 내고, 큰 소리를 내고, 상대방을 힘으로 누르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뜻은요, 믿음의 창시자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간으로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함으로써 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시작하도록 하신 예수
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하시는 그랬는데, 예수님이 이 믿음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