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와 검지 사이의 도톰한 손등을 눌러주면 체기가 내려간다던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손을 주물러주었다. 손바닥만 눌러보아도 몸의 아픈 부위를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지만 다음날 일어나보면 체기는 사라지고 아픈 배는 배고픈 배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로 나는 뱃속이 더부룩해지면 그 자리를 주무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손일 때만 가능한 일종의 마술인지도 몰랐다.
동네의 한의원에 가게 되었을 때, 손바닥 지압자리의 혈에 관한 액자 그림을 보았다. 손가락마다 심장, 간, 위 등의 명칭이 적혀있고, 손바닥에는 쭈글쭈글한 내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손바닥이 몸과 닮은 구조라는 것을 나타내는 걸까. 발바닥도 액자 속에서 하나의 작품처럼 그려져 있었다. 갑산성과 방광과 코와 어깨와 눈과 입이 발가락 사이마다 위치했다. 마술 같은 인체의 신비였다.
손바닥에는 또 지문이라는 유별난 것이 있는데,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지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손바닥이건 발바닥이건 어쨌든 우리 신체는 어느 한 부분도 예외 없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작은 구조가 전체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프랙탈(fractal)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해안선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확대를 해보면 전체 해안선과 같은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나무의 축소판인 것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하루만을 묘사함으로써 그 사람의 일생을, 더 나아가 인간의 근원을 묻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 역시 그와 흡사한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문학 작품뿐만이 아니라, 미술과 음악과 무용과 영화 등의 세분화된 형태가 예술에 대한, 삶에 대한 일종의 프랙탈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벌교의 지압자리
역사 역시 다르지 않다. 벌교읍을 걸으면 홍교를 비롯한 인상 깊은 몇 개의 다리를 만날 수 있는데, 부용교라고도 불리는 ‘소화다리’ 역시 그 중에 하나다. 이 다리는 1931년에 건립될 당시 일제에서는 소화(昭和, 일본국왕) 6년이었다. 그 이름을 붙인 것도 못내 서러운데, 이후 여순사건의 갈등이 극에 치달았을 때는 더했다. 좌우의 양측에서 반대급부의 인사에 대한 총살이 이 다리 위에서 자행되었던 것이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이렇게 묘사해 놓을 정도였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이 다리는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이며, 아픈 역사를 고증하는 유물이 되었다. 다리 아래의 갯가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는 역사의 과오 속에서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핏물을 흘려보냈다. 벌교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갈대숲은 흘러나온 갯물을 빨아들이며 지금까지도 높이 자라 있다. 바람이 불면 무리를 잃은 순록 한마리가 갈댓잎 속을 서성이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갈대 소리, 솔바람, 대숲 소리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는데, 유독 벌교의 갈대에선 울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느낀 벌교는 어머니의 손으로 한참을 주물러줘야 할 것만 같은 참 아픈 자리였다.
나는 벌교를 조금 달리 느낀다
아픈 역사를 보냈기 때문일까. 벌교라는 이름은 꼬막의 씨알처럼 굵고, 유명한 풍문의 주먹처럼 단단했다. 꼬막과 주먹이라는 큰 상징은 벌교를 독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과거 교통의 요충지이자 일본과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기에, 포구 또한 벌교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다른 것에 매혹되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철새들이 날아오는 갈대숲이 아니었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녹슨 철다리이거나 오래된 포구가 아니었다. 가을이면 갯벌 위로 붉게 피어오르는 칠면초도 아니었고, 조정래 작가의 친구네 집이기도 했던 ‘김범우의 집’도 아니었다. 여순사건과 6ㆍ25전쟁은 더더욱 아니고, 낙지와 쭈꾸미와 꼬막도 나에게는 큰 매혹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 매력은 새벽녘의 짧은 시간 동안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벌교의 작은 포구 앞에 닿을 수 있었다. 이제는 쓸모를 다 한 낡은 두 척의 배만이 포구 한쪽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배들을 껴안을 수 있는 포구에는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당기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즈음 저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흩어졌던 구름 사이로 점점 타오르던 노을은 순식간에 벌교읍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새벽노을을 투명하게 비추는 포구의 바다는 거울 같았다. 수면 위로 벌교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이 벌교의 역사였다. 벌교에서 맞이한 새벽노을은 더욱더 붉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침이 된 것이다.
나의 매혹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바로 이 노을이었다. 아니, 노을의 사라짐에 있었다. 하루에 두 번,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붉은 빛을 벌교에서 보았을 때,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저 벌교의 노을이 좋았다.
여행을 끝내고 생각해보니, 노을이라는 것은 원래 어중간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밤과 아침 사이, 낮과 밤 사이, 어둠과 빛 사이, 개와 늑대 사이의, 그 어정쩡한 시간에서 오는 것은 아름답고 또한 이유 없이 슬프다. 사실 인간도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벌교는 어떤가. 광주ㆍ고흥ㆍ장흥ㆍ순천을 연결하는 국도의 시작이고, 경전선(慶全線) 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걸친 곳인 셈이다. 한때는 좌와 우의 대립점이었으며,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포구로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돌고, 주먹다짐을 하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것이 벌교의 정체성이다. 벌교는 어제와 내일의 가운데에 선 공간이다. 그렇기에 벌교를 배경으로 한 『태백산맥』은 바로 오늘을 이야기하는 소설일 수 있다. 벌교는 스스로 한편의 소설이 된 것이다. 오늘도 벌교는 아침을 맞이하는 장렬한 붉음으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글ㆍ사진 | 오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