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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주교좌 성당 - 의정부 교구의 어머니, 든든한 석조 성당 |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 2동 429-6
경기도 의정부시 신흥로265번길 27
의정부 성당의 약사
1900년 초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현 양주시 덕정동) 등지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여 옹기를 구우며 형성된 교우촌을 토대로 몇몇 공소가 시작되었다. 1934년경 덕정리 성당이 출현하였고 1945년에 덕정리 본당의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는 성당을 매각하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의정부리로 성당을 이전하여 현재 위치의 대지 1,625평을 매입하는 한편, 25평의 한옥 1동을 매입 · 수리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고 본당의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1953년 3대 주임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6 25통에 불탄 성당 건물을 대신하여 반파된 창고 건물을 복구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군 로제스키 군종 신부의 도움으로 1953년 11월 68평 규모의 현재의 사적지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어 미군 1군단의 도움으로 1954년 3월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고, 1955년에 사제관, 1957년에 성모병원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1955년 말에 신자수가 1,000여 명에 달하면서 본당 운영도 자립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76년 최서식 신부는 본당 부속 성모병원을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등록시켜 경기도 북부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이자 최대 규모의 병원으로 발전시켰다.
1980년 9월 의정부 4동(현 의정부 1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본당은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또 그동안 의정부 본당에서 운영하던 성모병원은 신자 증가와 병원 확장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독립된 경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4년 7월 수녀원 내부 공사를 비롯한 제반 공사를 시행하였고, 신자들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비좁은 성당 옆에 경당을 설치하였다. 1995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와 행사, 의정부 본당 50년사가 간행되었다. 의정부 본당은 1999년 9월 17일 서울대교구의 경기 북부 지구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의정부 성당은 2002년 3월에 협소한 사적지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과 유치원 건물 착공식을 갖고 2003년 1월 완공하여 그해 8월 31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다. 주보는 하자(瑕疵) 없으신 성모 성심이다.
2012년에는 사적지 성당 내부를 말끔히 단장하며 옛 제대 감실과 제대 난간(영성체 난간) 등을 복원했다.
의정부 본당은 의정부 지역 복음화의 중추이다. 그동안 의정부 본당은 동두천, 의정부 1동은 물론 용현동, 호원동, 신곡 1동 본당에 이르기까지 의정부 지역 본당들이 속속 분가해 나갔다. 의정부 본당을 의정부의 어머니 본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이 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최초의 레지오 마리애가 1957년에 창설되었고, 지역 최초의 종합병원인 의정부 성모병원이 탄생했으며, 신협 및 유치원을 통해서도 지역사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양주 성지에서 택시로 의정부 주교좌 성당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성당으로 진입하는 길이 너무 좁다. 정문엔 새 교구장 임명 현수막이 걸렸다. 정면에 바로 나타나는 성당이 사직지 성당. 6 25 때인 1953년 미1군단의 지원으로 지은 석조 성당이다.
사적지 성당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이 사적지 성당 건물은 의정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전후한 시기의 성당 건축은 열주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의정부 성당도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그리고 앱스(성전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성당이 당시 성당 건축과 다른 점은 단단한 석재를 사용하고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폭격 등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단한 석재를 재료로 삼았고 높이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물 자체가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의정부 본당 50년사에 의하면 “성전을 지을 당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로 모든 신자들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젊은 신자들을 중심으로 공사 현장에서 미군들과 함께 땀을 흘려 일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당 안은 열주 대신 가느다란 내부 기둥이 두 줄로 서 있고, 벽에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십자가의 길 14처가 배열하고 정면에는 좌우로 성모님과 성 요셉 부자상이 높이 걸렸는 등 일반적인 성당 모습 그대로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성모님 아래에 성인 유해대가 있는데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로 안내되어 있다
기도하는 성모는 영국의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1609-1685)가 그린 성화로 온화한 표정과 우아한 자태로 홀로 기도하는 성모님이다.
성전 밖 경내는 도심지라서 그리 넓지 못하다. 배치도를 보면 마당 오른쪽에 사적지 성당과 대성당이 앞뒤로 있고 왼쪽으로는 (앞에서 뒤로)사무실, 수녀원, 회의실, 교육관, 강당(성모대학)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마당 안쪽에는 대건 카리타스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성 김대건상이 있다. 정문 왼쪽 성물방과, 카페 그리고 정문 오른쪽의 성모상을 빼놓을 수 없다.
대성당
전체 면적 668평, 건물 면적 180평,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지하는 교리실, 지상 1-2층은 유치원, 지상 3층은 성당(현 주교좌 의정부 성당)으로 각각 꾸며졌다. 화강석으로 처리한 외양은 옛 사적지 성당의 석조와 무난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창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모양을 채택, 현대미 속에서도 고전적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다.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다가오는 시간 택시를 불러 성 남종삼 가족묘소로 향했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묘소- 의령남씨 순교자 3대 여기 잠들다 |
남종삼은 누구인가?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은 1817년(순조 17년) 의령남씨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큰아버지인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학서(西學書)를 접하면서 진리를 깨달아 입교했는데, 관직이 신앙생활에 방해되자 이를 포기하고 산골 마을인 묘재(山尺, 현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거처를 옮겨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성 남종삼 요한은 22살 때인 1838년(헌종 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영해 현감(寧海 縣監) 등을 거쳐 철종 때에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 正三品)까지 올랐고,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순교자 가운데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서학서를 가까이하며 학문을 통해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고,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던 성 남종삼 요한은 나라의 공식 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관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邦人)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와의 두터운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그는 재물과 여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방의 관리가 향교(鄕校)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생기자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1864년(고종 원년) 이후 자주 러시아 선박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강요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고종의 부친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자였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때 조선의 천주교 지도부는 신앙의 자유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조선에 잠입해 비밀리에 선교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1865년 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와 이유일 안토니오(李惟一)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프랑스 선교회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들과 만나 논의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성 남종삼과 동료들은 이 소식을 즉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과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거처 확인과 연락이 어려워 시간이 지체되었다.
1866년 1월 소식을 전해들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급하게 상경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가면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이 저절로 사라진 때라 대원군의 마음도 바뀐 뒤였다. 게다가 반대파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와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그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더욱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1866년 정월(음력)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면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성 남종삼 요한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를 방문한 다음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묘재에 은거해 있던 부친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의 술회를 들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는 다했다만 그 때문에 분명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너더러 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든 성교(聖敎)에 대해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는 것을 잊지 말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격려를 받고 순교를 각오한 그는 다시 상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웃해 있는 배론(舟論)의 신학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 무렵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고양군(高陽郡)에서 피신하려 했으나 3월 1일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와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성 남종삼 요한이 체포된 이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성 남종삼은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6회에 걸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천주교가 정도(正道)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그는 천주교는 하느님을 섬기고 충(忠)과 효(孝)를 다하는 학문이기에 배교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요 외세와 내통한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는 죄목에 대해 당당히 자기 뜻을 밝혔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력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순교 후 성 남종삼 요한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최형(崔炯)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겼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의령(宜寧) 남씨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그가 순교한 후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했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된 후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전주천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전주교구 초록바위성지 참조)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李召史)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였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은 노비 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성 남종삼 요한의 가문에서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울에서 성 남종삼 요한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굿 뉴스 한국의 성지 인용)
성 남종삼 요한 묘
성 남종삼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산2-22 의령남씨 가족묘원에 있다. 도착 후 택시 기사에게 10-20분 정도 기다려주면 다시 타고 황사영 묘로 가겠다고 하니 그러겠다고 했다.
입구에는 사랑의 묘역이라는 통나무 문이 있는데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내용은 1998년 8월 80년만의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나서 유실된 시신과 유골 89위를 수습하여 합동으로 묘역을 맞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8년 9월 13일 합동 분묘를 만들어 개장 미사를 드리고 이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경사진 기슭에 축대가 층층이 쌓였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길 좌우로 수백 기가 되는 넓은 묘역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모두 직사각형 석곽 모양에 흙으로 봉분을 올리고 꽃이랑 나무랑 각양각색의 상석이 저마다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군데군데 안내 표지판과 십자가의 길도 있어 찾는 데는 불편이 없었다.
14처가 끝나가고 아마포 거적이 깔린 길이 나타나자 묘소에 거의 다왔음을 직감했다. 마지막 구비를 돌자 묘원 안내판이 나타난다.
안내판의 내용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가계와, 관직과 신앙과의 갈등, 호교를 위한 노력, 신앙의 길로 전환한 후 박해와 체포와 순교, 그리고 유해의 이장 내력 등이다. 안내판 머리에는 그의 순교 최후 발언인 “비록 나는 이제 국법에 따라 죽지만 나라를 배반한 일은 털끝만큼도 없다. 나는 죽고 또 죽을 때까지 심한 고통을 받겠지만 나에게 악의에 찬 어떤 행위를 가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세의 행복을 위해 즐겁게 받고 또 참으리라.”라는 말을 결의에 찬 말의 일부를 새겨놓았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든 성교(聖敎)에 대해 욕된 표현은 일체 금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부친의 준엄한 훈시를 목숨으로 지킨 효자이기도 함에 마음이 울컥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말미에는 이 묘원에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순교), 창녕 감옥에서 목졸려 순교한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와 의령현에 유배 가서 종이 된 막내아들 남규희 프란치스코(당시 4세)의 묘가 있음을 알렸지만 안타깝게도 전주천 초록바위에 떠밀려 수장된 장남 남명희(순교, 당시 15세), 산청과 영산현에 관노로 유배 간 두 딸(당시 7세, 9세)의 묘는 찾을 수 없다. 이 어린 아이들이 무슨 국법을 어지럽혔는가? 연좌제란 이렇게 비인간적이다. 이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힌다.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와 3명의 유배자를 낸 남종삼 가문은 전주의 유항검 가문, 마재의 정약종 가문, 예산의 홍낙민 가문 등과 같이 그야말로 세속적으로는 멸족되었지만 아마도 천국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화관을 쓰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리라.
언뜻 시계를 보니 20분이 되간다. 남종삼 요한 묘는 맨 꼭대기여서 숨을 헐떡거리며 부지런히 걸어도 10분이 더 걸린 것이다. 간단히 묵념만 하고 운전기사와 약속 시간도 있고 하여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신 모세 형제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운전기사를 데리고 오겠다하여 중간 휴식처에 기다리자 곧 차가 올라왔다. 대기료도 받지 않고 기다려준 택시기사가 참 고마웠다.
벌써 5시 20분. 바로 황사영 묘로 차를 몰았다. 약 20분 후 도착. 택시 기사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보냈다. 순례 후 여기서는 버스를 타고 의정부 읍내로 가서 숙소를 구해야 한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 백서로 조선 조야(朝野)를 흔들다 |
황사영은 누구인가
황사영(黃嗣永)은 1775년(영조 51) 남인 출신 명문가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한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 사이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소(德召), 세례명은 알렉시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 이어 천주교 가문인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若鉉)의 딸 정명련(命連, 일명 난주)과 혼인하였다.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등으로부터 천주학을 접하고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진리를 찾는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그의 측근이 되어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와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토굴속에 숨어지내며 교우 황심(黃心)을 통해 교회의 머리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항검 형제 등 다수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또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 학살이 이루어졌고,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깊은 산중으로 도피한 후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황사영은 울분을 느껴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려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이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 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편지를 작성하여 황심을 통해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편지, 이른바 황사영백서가 중국에 전달되지 못한채 황심(黃心)이 1801년 9월 15일에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9월 26일에 황사영마저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국청이 열리고 혹독한 심문을 받은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그의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노비로 끌려갔다. 정명련은 제주도에 가면서 두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남겼다. 그리고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갔다. 심지어 집안의 머슴과 종들마저도 피해를 입어 다들 귀양을 갔다.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날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되었다. 파가저택이란 집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하는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어떤 편지였나?
황사영 백서(帛書)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천주교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가톨릭교회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흰색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비단(명주천)에 쓰여졌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아주 가는 붓으로 쓴 깨알 같은 글자의 수는 한 줄에 110자씩 122행에 걸쳐 13,311자로 방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검은 먹이 아닌 백반으로 썼기 때문에 물을 묻혀야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내용의 핵심은 탄압받고 있는 조선 천주교의 상황과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백서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천주교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박해 때의 순교자 약전
▲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근본 건의책
이때 근본 건의책은 4개 항목으로 나뉜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전혀 힘이 없으니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 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을 얻고자 함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낼 것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케 함으로써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조선은 2백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이 백서로 그는 참혹한 명물지화를 당했지만 이제는 이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황사영의 묘의 발견과 성지 조성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 서양 군함을 요청함)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이 온전할 리도 없거니와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유배를 당한 터라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다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한 용감한 교우들 덕택에 순교자의 유해가 전해질 수 있었다.
그 후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황사영의 묘는 180년이 지난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에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순교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묘비만 무덤을 지키고 있다.
한편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 요셉 씨는 2004년 4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을 기증했다. 이 청화백자합은 지난 1980년 8월 31일-9월 1일 가마골에서 황사영의 묘를 발굴할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연구소에 영구 기증됐다.
황사영은 죽을 때까지 손목을 명주 토시로 감고 다녔고, 그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자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당시 돌 십자가와 함께 180여 년간 지하에 묻혀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된 토시는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후 보존 처리를 거쳐 2009년 9월 5일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에서 토시가 담긴 청화백자합이 최초로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의정부교구는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해 송추 성당을 중심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또한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를 순례지로 지정했다. 또한 묘소 입구의 민간인 건물을 매입하고 마당에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한편에 성모자상을 설치하여 순례자를 반기고 있다.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소 입구에 교구에서 매입한 건물이 있는데 흡사 모텔 건물 같다. 일단 나올 때 보기로 하고 먼저 묘소 입구에 이르러 택시를 모냈다. 황사영의 묘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호석으로 둘러진 아담한 원형 봉분이 있고 그 앞에 상석, 묘 오른쪽에 묘비가 서있고 왼쪽에 장명등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망주석이 있고 오르는 돌계단이 전부다.
묘소를 떠나 다시 골짜기 입구로 나오니 올 때 본 모텔 같은 건물이 지금 천주교 영성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건물 앞에는 대형십자가가, 오른쪽에는 한복 입은 성모자상이 있다.
영성관 내부는 일반 경당 모습과 다름없다. 제대 뒤에는 십자고상과 조그만 성모상이 있고 벽면에는 좌우로 흑백 사진 모습의 황사영 순교자와 김대건 신부 초상이 걸렸다. 그리고 좌우 벽에는 아담한 십자가형의 14처가 있고 자비의 예수님 상과 한복입은 예수님과 제자 성화가 다른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영성관 바깥 홀에는 성화 두 점이 있는데 모두 한복 입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형제에게 그물을 버리고 따르라고 한 장면이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첫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는 장면이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이에 따라 도로 확장 공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한다.
6시가 넘어 이제 의정부 시내로 들어간다. 일단 숙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의정부 시내에서 묵고 내일 갈곡리 성당과 신암리 성당을 거쳐 강화도로 갈 계획이다. 사실 배도 허전하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걸렀다. 실제 걸렀는게 아니라 식당에 들어가 사서 먹지 않았다는 말이 맞다. 점심에는 신 모세 형제가 집에서 준비해온 빵과 과일 도시락 하나로 때웠다. 아침에도 빵 하나로 때웠기에 오늘 저녁식사는 잘 먹자고 하면서 찾은 곳이 의정부 시내 고산 떡갈비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서 저녁식사.
숙소는 유성여관이라는 곳인데 더블베드 하나뿐이어서 한 사람은 맨바닥에 누워 자야 한다. 화장실 문을 열려면 바닥에 누운 사람은 다시 일어나야 할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값도 싸고 하여 일단 묵기로 했다. 옆에 호텔도 있지만 하룻밤 자는데 많은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공통의 생각이었다. 잠자리에 까다로운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이렇게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오늘 하루는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