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5. 신라 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②
혜초스님 8C 인도모습 생생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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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혜초스님은 녹야원을 거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6년간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붓다가야에 도착, “대보리사 대탑을 본다”는 소원을 이뤘다. 사진은 대보리사탑 전경. |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1878~1945)가 돈황석굴 제17굴(장경동)에서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완결본이 아닌 잔결사본(殘缺寫本). 그것도 본래 3권이었던 것의 요약에 - 총 230행 6,000여 글자 - 불과하기에, 혜초스님의 완전한 구법여행 코스는 아직도 정확하게 모른다. 혜초스님 보다 1세기 전 천축, 서역을 갔다 온 현장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기〉와 비교하면, 인도나 중앙아시아 각 지방에 관한 〈왕오천축국전〉의 서술은 너무 소략하다. 지명, 국명, 왕의 이름 같은 것도 자세히 나오지 않고 언어, 풍속, 정치상태에 대해서도 간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왕오천축국전〉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여행기”(고병익 전 서울대교수)임에 틀림없다. 8세기 무렵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기록으로 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 각국의 왕들이 코끼리와 병력을 얼마나 갖고 있으며, 아랍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는가도 알 수 있고, 투르크족, 티베트족, 한족 지배 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 어디라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왕오천축국전〉은 당시 ‘인도의 사회상태, 불교계 정세’ 등도 언급하고 있다. 지방 특색의 음식, 의상, 습속, 산물, 기후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중부 인도에선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든지, 여러 형제가 공동으로 한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등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과 부합되는 일이라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인도에는 감옥이 없고 사형도 없으며, 죄는 벌금으로 다스리고, 신두쿠라 지방에서는 술 취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캐시미르 지방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든가” 하는 흥미로운 기술도 많다. 〈왕오천축국전〉이 동서교통로의 요지인 돈황에서 서양인에 의해 발견됐고, 중국인, 일본인들이 혜초스님의 인물과 생애를 밝혀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혜초스님이 인도로 떠난 것은 아마 30세 이전, 서기 723년(신라 성덕왕 22) 무렵으로 추정된다. 앞부분이 없어 정확한 코스는 모르지만 중국 광주에서 출발해 인도네시아를 거쳐 갠지즈강 하류 지방에 도착했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갠지즈강 유역의 마가다국에서 시작되는데, 마가다국은 현재 비하르 지방을 가리킨다. 마가다국은 본래 인도 고대 16대국의 하나로, 불교가 가장 성했던 나라며, 부처님이 자주 설법했던 지방이었다. 기원전 3세기의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기원전 232)때부터 굽타왕조(320~500)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가장 성했던 중심지, 이른바 ‘불교 중국’이었다.
“중부인도에선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삼아”
혜초스님이 마가다국을 찾은 것은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한 지 약 1세기 후였다. 그래서 혜초스님은 가는 곳마다 외도(外道), 부처님 가르침 이외 다른 가르침이 성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찢겨졌지만 남아있는 〈왕오천축국전〉 첫머리엔 이렇게 적혀있다. “…삼보를 사랑하지 않는다. 맨발에 나체며 외도라 옷을 입지 않는다. (밑 부분 빠졌음). 음식을 보자마자 곧 먹으며 재계도 하는 일이 없다. 땅은 모두 넓다. (빠졌음) 노비를 소유하고 사람을 파는 죄와 사람을 죽이는 죄가 다르지 않다. (결락)….” 혜초스님은 마가다국에서 서북쪽으로 1개월 걸어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한 땅 쿠시나가라에서 혜초스님은 쓸쓸한 광경에 마주친다. “한 달 뒤 구시나국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 선사가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다. 매년 8월8일이 되면 비구, 비구니, 일반사람들이 여기서 크게 공양한다. 공주에는 깃발이 수없이 세워진다. 뭇사람들이 이를 구경하고 또 이날 불교로 발심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평상시엔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황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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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천축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온 혜초스님이 머물렀던 쿠차 시내 전경. 시내엔 당나귀 수레가 많았다. |
쿠시나가라에서 혜초스님은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오늘날 바라나시는 힌두교 성지로 힌두사원과 갠지즈강의 아침 목욕으로 유명하지만, 서쪽 교외엔 불교유적도 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녹야원이 그곳인데, 혜초스님도 녹야원에 참배하러 갔다. 혜초스님 보다 1세기 먼저 이곳에 왔던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장엄한 사원이 있고, 스님도 1,500명이나 있다”고 적었다. 혜초스님이 갔을 당시엔 스님들은 없었다. 다만 “다섯 명이 함께 부처님 설법을 들었으므로 그들의 소상만 탑 안에 있었다. 위에 사자가 있는 석당(아쇼카 석주를 가리키는 듯)은 다섯 아름이나 되며 거기에 새긴 무늬가 매우 아름다울” 따름이었다.
녹야원을 찾은 혜초스님은 동쪽 붓다가야로 향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6년간 수행 끝에 크게 깨달은 곳, 대보리사 탑이 세워져 있는, 불교에선 가장 성스러운 곳. 현장스님도 다녀갔고, 동쪽에서 오는 구법승들이 반드시 찾았던 순례 처였다. “대보리사 대탑을 본다”는 본래 소원을 이루게 된 혜초스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자연스레 시가 나왔으리라. 대보리사에서 읊은 오언시가 〈왕오천축국전〉엔 남아있다.
불려보리원(不慮菩提遠) 보리사를 멀다고 걱정치 않았는데,
언장녹원소(焉將鹿苑遙) 어찌 녹야원을 멀다고 걱정하리오.
지수현로험(只愁懸路險) 단지 두려운 건 낭떠러지 험한 길뿐,
비의업풍표(非意業風飄) 거센 바람 불어와도 개의치 않노라.
팔탑성난견(八塔誠難見) 불적의 여덟 탑을 보기란 진정 어려운 일.
참차경겁소(參差經劫燒) 이리저리 헐리고 소실되어 난잡도 하니,
하기인원만(何其人願滿) 팔탑 뵈려는 소원 채울 이 몇이런가,
목제재금조(目諸在今朝) 오늘 아침 이 자리서 내 눈으로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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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쿠시나가라에 있는 열반당에서 기도하는 스님. |
이후 혜초스님은 중천축 카나우지(곡녀성) 도착, 여기서 5천축 전역의 기후, 풍속 등을 기술하고, 사위국의 기원정사, 바야샬리의 암라원탑, 카필라바스투에 있는 탑, 상카시에 있는 삼도보계탑 등을 둘러보고 남행하게 된다. 3개월간 만에 데칸고원에 도착, 용수보살이 야차신을 시켜 지은 산 속에 있는 사찰을 찾았다. “산을 뚫어 기둥을 세우고 3층 누각 식으로 만든 사찰의 규모는 사방 300여 보나 되며, 용수보살이 살아있을 때 그 사찰에 3,000명이나 되는 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찰은 폐허가 되고 스님도 없다”며 혜초스님은 번성했던 과거를 생각하고 섭섭해 한다.
녹야원→대보리사탑→데칸고원→언기서 끝나
데칸고원에서 시를 읊은 혜초스님은 발걸음을 옮겨 3개월간 서북쪽으로 가 서천축→북행하여 북천축 수도 사란달라→1개월간 서행하여 탁사국→1개월간 서행하여 신두고라국의 다마삼마나사→다시 사란달라에 도착했다. 사란달라에서 한 구법승의 죽음을 듣고는 시 한 수를 읊는다.
고리등무주(故里燈無主)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
타방보수최(他方寶樹控) 큰 인물이 이국땅에서 꺾여졌구나.
신령거하처(神靈去何處) 신령은 어디로 갔나,
옥모이성회(玉貌已成灰) 옥 같은 얼굴 이미 재가 되었도다.
억상애정절(憶想哀情切) 생각하니 애절함 끝이 없다.
비군원불수(悲君願不隨) 님의 소원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니,
돈지향국로(敦知鄕國路) 뉘라서 그의 고향 길 알 것인가.
공견백운귀(空見白雲歸) 흰 구름만 헛되이 돌아가누나.
구도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혜초스님은 15일간 북행하여 가섭미라국(캐시미르 지방)→1개월간 서행하여 건타라(파키스탄 간다라)→갈락가(카니쉬카 대사원) 대사원 참배→3일간 북행하여 오장국(파키스탄 스와트)→15일간 동북행 하여 구위국(파키스탄 치트랄)→서행하여 계빈국→7일간 서행하여 사율국→북행하여 범인국(아프가니스탄 바미얀)→서북행하여 토하라 수도 부하라→서행 1개월 만에 파샤(페르시아)→10일간 북행하여 대식(아랍)→동쪽으로 가 토화라→7일간 동행(東行)하여 와칸 계곡→동북행하여 파미르고원→1개월간 동쪽으로 가 소륵→다시 동쪽으로 걸어가 727년 11월 상순 쿠차에 도착→언기를 지나 장안으로 들어오는 코스를 밟았다. 혜초스님의 여행기는 사실 언기에서 끝난다. 뒷부분은 결락되고 없다. 문명교류 연구가 정수일씨는 〈왕초천축국전〉에 대해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지역에 관련된 서적으로, 내용의 다면성과 정확도에 있어 단연 으뜸가는 명저”라며 “혜초스님은 이 여행기에서 사상 최초로 아랍을 대식(大食)이라 명명하고, 한(漢) 문명권 내에선 처음으로 대식 현지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해, 한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 사이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도모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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