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사흘 뒤 드디어 덕수궁에 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과 조선일보사 주최로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다. 이중섭과 7년간 살 맞대고 살며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95·한국명 이남덕) 여사를 도쿄 세타가야(世田谷)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이중섭과의 사랑을 버팀목 삼아 두 아들을 홀로 키워내며 60년을 버텼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사가 남편 이중섭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아고리!(일본어로 턱을 뜻하는 '아고'와 이중섭의 성 '李'를 합친 말로 턱이 긴 이중섭의 애칭.)
당신이 태어난 지 100년, 세상과 이별한 지 60년 되었어요. 시간 참 빨리도 흘러요, 그렇죠? 요즘도 꿈에 가끔 당신이 나와요. 태현(장남), 태성(차남)이하고 아이처럼 장난치고 그림 그리는 당신이. 꿈속 당신 시계는 멈췄는지 서른 얼굴 그대로인데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네요.
한국에선 당신 그림들이 덕수궁에 모여 관람객을 맞는다지요.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당신 그림을 알아볼 거란 내 믿음은 옳았어요. 그래도 초등학생까지 다 아는 '국민화가'가 되리라곤 상상 못했지요. 이토록 기쁠 수가요. 당신이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시 열리는 덕수궁이 1945년 내가 현해탄 건너 천신만고 끝에 당신과 재회한 반도호텔(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호텔) 근처라네요. 기억나세요? 원산으로 돌아간 당신을 2년 넘게 기다리던 내게 다급하게 보냈던 전보를. 집안에서 결혼 승낙받았다고 빨리 오라 했지요. 백방으로 수소문해 친정아버지(전 미쓰이창고주식회사 대표)가 배표를 구해주셨어요. 아고리가 우리 집에 처음 인사 왔을 때 "조선 사람인 건 상관없는데 화가라 식구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겠나" 걱정했던 그 아버지께서요. 무작정 시모노세키로 갔지요. 이틀치 끼니 때울 쌀만 들고. 그런데 기뢰(機雷)가 폭발해 시모노세키 배편이 끊어져 며칠을 기다리다 하카다에서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죠.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공습으로 머리 위로 시커멓게 떨어지는 폭탄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토록 그리던 아고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났을까요. 그거 알아요? '문화학원'에 나와 이름 똑같은 학생이 하나 더 있었던걸. 나중에 친구들이 전쟁통에 아고리 만나러 간 마사코가 자그맣고 조용했던 나였단 사실을 알고 다들 놀랐다지요. 부산에서 다시 기차 타고 서울 반도호텔에 도착해 당신에게 전화 걸었어요. 한달음에 원산에서 달려온 당신의 커다란 손엔 삶은 계란과 사과가 한가득이었어요. 꿀 같은 사과 맛, 아고리의 따스한 품. 70년이 넘어도 생생하답니다.
아고리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요. 1939년 문화학원 미술과에 함께 다닐 때 2층 우리 교실에서 당신이 배구하던 모습을 봤어요. 서른 살 만학도 이케다가 "저 사람 훤칠하니 잘생겼구먼" 하기에 곁눈으로 봤지요. 무리엔 조선 유학생 이(李)씨 셋이 있었어요. 턱이 긴 아고리, 키 작은 '지비리(일본어로 꼬맹이를 뜻하는 '지비'와 李'를 합친 말)', 머리에 포마드 잔뜩 발랐던 '데카리(번쩍인다는 '데카데카'와 李'를 합친 말)'…. 하늘나라에서도 이씨 셋이서 배구하나요? 얼마 뒤 팔레트 씻으러 수도에 갔다가 당신과 마주쳤죠.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 석 자를 알려줬어요. 아고리는 운동도, 노래도, 시도 잘하는 팔방미인이었어요. 모두들 '천재'라고 했지만 뻐기는 법이 없었지요.
지주 집안 부잣집 도련님답게 당신은 마음 넉넉한 이었어요. 낭만 넘치는 괴짜이기도 했지요. 유학 시절 기치조지(吉祥寺)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 살 때 하숙방 한가운데에 난(蘭)을 두고 키웠던 기억이 나네요. 온갖 화구 뒤죽박죽 뒹구는 좁은 방에서 당시로선 고가 식물이었던 난초를 고이 키웠어요. 망중한(忙中閑)의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어요. 소설은 싫다 했지만 시는 좋아했지요. 문학소녀였던 내게 보들레르, 릴케 시를 멋들어지게 써서 편지 보내곤 했지요.
원산 신혼 생활은 축복이었어요. 당신은 내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며 '남덕(南德)'이란 이름을 붙여줬지요. 시댁 식구 모두 살뜰히 날 챙겨줬고, 이웃 살던 김안라(가수 김정구 누나)씨가 말동무 해주었지요. 하늘이 우리의 행복을 시샘했을까요. 전쟁이란 불청객이 찾아왔지요. 6·25 터지고 그해 12월 미군 물자 수송선 타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란 갔어요. 당신은 화구부터 챙겼지요. 그게 마지막 배였다지요? 그 배를 못 탔다면 '한국의 이중섭'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듬해 1월 부산에서 다시 서귀포로 옮겼지요. 우리가 도착한 날, 눈 귀한 제주에 함박눈이 쏟아졌어요. 아고리는 태현이 손잡고, 나는 태성이 업고 걷고 또 걸었어요. 배급받은 식량 바닥나면 농가 기웃거리고 마구간에서도 잤어요. "우리 예수님 같네. 허허."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아고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먹을 게 없어 게를 참 많이 잡아먹었어요. 밀물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잡았지요. 한라산 보이는 들판에서 부추 따서 허기 채우고. 당신이 그랬지요. 게의 넋을 달래려 게를 그린다고. 피란 시절 당신은 밤중까지 부두 노동자로 일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어요. 아고리는 그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어요.
1952년 태현이와 내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당신을 홀로 남겨두고 부산을 떠났지요. 돌아서는 길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일본에 돌아오고 당신이 절절한 그리움 꾹꾹 담아 아이들과 내게 보낸 그림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어요. 홀로 남아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는 당신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웠던지요.
1956년 집으로 시인 김광균씨가 보낸 전보가 날라왔어요.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터라 불길한 예감이 스쳤어요. 세상에, 당신이 죽었다니….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다시 봤어요. 한달음에 서울로 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국교 단절 때문에 갈 수 없었어요. 한 해 뒤 구상, 양명문 선생이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행사에 오는 길, 한 줌 재로 변한 당신의 유골 일부를 들고 왔어요. 178㎝ 기골 장대했던 당신이 한 움큼도 안 되는 재로 돌아오다니, 그 절절한 그리움의 끝이 이토록 허망하다니…. 대답 없는 당신을 향해 한참을 흐느꼈어요.
당신 없는 세상은 힘겨웠지만 외롭지만은 않았어요. 아고리가 남기고 간 두 아이가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어찌어찌 키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요. 사람들이 종종 물어요. 당신과의 결혼, 후회하지 않느냐고.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아고리, 나는 우리의 사랑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우리는 운명이니까.
첫댓글 위의 은박지 그림은 기존 도록들에 실리지 않았던 작품인데, 정말 잘 그렸네요. 이와 같이 그림이란 그리운 것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예술적으로 승화하여,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리워하다와 그리다, 그림은 다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운 것을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 그림이니까요. 이중섭 그림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지요.
얼마전 수학여행 제주도로 다녀왔는데 이중섭 화가가 살았던 정말 작은 방에 '소의 말' 이란 시가 있었습니다. "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 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
그리운 것을 그린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아, 댓글이 달린 줄 몰랐습니다. 이중섭 그림을 즐길 수 있으면 미술작품을 즐긴다는 게 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좋은 그림이 많이 실려있고, 사진과 인쇄가 잘 된 도록을 구해, 반복해서 들어다 보고 있으면 정말 잘 그렸고, 재미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즐기고 있는 것이죠. 그림감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이중섭으로 시작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우선 위에 실린 은박지화와 액자 속의 유화를 컴터 화면으로 들어다 보고 있어 보시기 바랍니다. 엉덩이 선과 표정 너무 잘 그렸지 않습니까? 두 마리 세가 너무 좋아하지 않습니까? 행복을 꿈꾸는 이중섭, 우리에게 이런 꿈이 없으면 어떻겠어요?
@조성래 화면을 꽉 채우는 과감한 구도, 자유스러운 솜씨, 깔끔한 선질, 멋진 내용, 꿈, 그리움, 소망 등이 잘 들어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