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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합니다. 받을 내가 없는데 윤회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이 윤회하지 않고 식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알고 싶습니다.
답변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 수 있는 좋은 질문 올려주셨습니다.
초기불전의 가르침 가운데 무아설과 윤회설의 상충에 관계된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답을 하지 않으셨다(無記)는 난문(難問)들 가운데 "자아와 세간이 상주(常住)하는가, 무상(無常)한가?", "자아와 세간이 유변(有邊)인가, 무변(無邊)인가?"의 문제, 또 "고(苦)를 내가 짓고 내가 받는가(自作自覺)? 남이 짓고 남이 받는가(他作他覺)?"의 문제 등이 그 예들입니다.
이 가운데 "자아와 세간이 상주(常住)하는가, 무상(無常)한가?"의 문제는, 과거와 관계된 것으로 "전생의 내가 있어서 현생의 나로 이어진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현생이 시작하는 것인가?"라는 의미의 의문이고, "자아와 세간이 유변(有邊)인가, 무변(無邊)인가?"의 문제는, 미래와 관계된 것으로 현생의 내가 사망하면 완전히 끝인가, 아니면 내생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의미의 의문입니다. (이런 해석은 용수의 <중론> 제27장 관사견품(觀邪見品)에 근거합니다.) 또 "고(苦)를 내가 짓고 내가 받는가(自作自覺)?"라는 의문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인 이 세상에서 업을 지은 자와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동일한지 묻는 것이고, "고를 남이 짓고 남이 받는가(他作他覺)?"라는 의문은 업을 지은 자와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달라지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들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일단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가 십이연기설이나 사성제 등의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침묵하셨다는 의미에서 이런 가르침을 '무기설(無記說)'이라고 부르고, 대답을 방치하셨다는 의미에서 '치답(置答')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렇게 윤회와 관계된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부처님께서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셨기에, 불교학자 가운데는 부처님께서 윤회를 부정하셨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초기불전 도처에서 윤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 경문 몇 가지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한 사람이 1겁 동안에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바퀴처럼 돌아감에, 그 백골을 썩지 않게 쌓으면 비부라산과 같느니라(世尊告諸比丘 有一人於一劫中生死輪轉 積累白骨不腐壞者,如毘富羅山)." - 잡아함경 -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고하셨다. "가가라 등의 12명은 5하분결을 끊고서 목숨이 마치면 천상에 태어나 그곳에서 반열반하여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다. 목숨을 마친 50인은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의]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제거하고 음욕, 분노, 우치가 희박해져서 사다함과를 얻어서 이 세상으로 [한 번] 돌아온다. 목숨을 마친 500인은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의]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제거하여 수다원이 되어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도를 이루는데 7생을 왕래하면서 고를 모두 소진한다(佛告阿難:「伽伽羅等十二人,斷五下分結,命終生天,於彼即般涅槃,不復還此。五十人命終者,斷除三結,婬、怒、癡薄,得斯陀含,還來此世,盡於苦本。五百人命終者,斷除三結,得須陀洹 , 不墮惡趣,必定成道,往來七生,盡於苦際). - 장아함경 -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한 바로는 저희가 긴 밤을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고 죽으면서 그 몸이 파괴되어 흘린 피가 아주 많으니 4대양 바닷물을 넘습니다(諸比丘白佛:「如我解世尊所說義,我等長夜輪轉生死,其身破壞流血甚多,踰四大海水也」).“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고하셨다. “좋고 좋구나. 그대들이 긴 밤을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고 죽으면서 그 몸이 파괴되어 흘린 피가 아주 많아 무량하니 갠지스 강물이나 4대양의 바다를 넘느니라. 왜 그런가? 그대가 긴 밤, 일찍이 코끼리로 살아갈 때 혹은 귀, 코, 머리, 꼬리, 네 다리가 잘리는데 그 피가 무량하니라. 혹은 말의 몸이 되고 낙타, 당나귀, 소, 개 등 온갖 짐승이 되어 귀, 코, 머리, 발의 네 군데 몸이잘리는데 그 피가 무량하니라(佛告諸比丘:「善哉!善哉!汝等長夜輪轉生死,所出身血甚多無數,過於恒水及四大海。所以者何?汝於長夜,曾生象中,或截耳、鼻、頭、尾、四足,其血無量。或受馬身,駝、驢、牛、犬諸禽獸類,斷截耳、鼻、頭、足四體,其血無量) - 잡아함경 -
이 이외에도 초기불전 여러 곳에 윤회의 가르침이 실려 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 열반이 불교 수행의 목표이기에, 초기불전에서 윤회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윤회를 부정하신 게 아니라, '부처님께 난문을 여쭌 질문자가 윤회와 업(業)의 이론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에 위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단 침묵하셨다가, 십이연기나 사성제와 같은 연기법을 설하셔서 '질문자의 잘못된 사고방식(邪見)'을 치료함으로써 질문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후대의 부파불교 중 독자부에서는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보특가라를 설정하여 윤회의 주체로 삼기고 했습니다. 그러나 독자부는 불교 내의 외도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부파입니다.
윤회와 무아의 교리가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아이니까 윤회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윤회를 설명할 때 한 등잔에서 다른 등잔으로 옮겨 붙는 등불의 비유를 드는데, 다음과 같이 들불의 비유로 이해하면 윤회와 무아의 갈등이 해소됩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 늦가을이 되면 경남 창원의 화왕산에서 억새밭 태우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억새밭의 동쪽 귀퉁이에 불을 붙이면 불길이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불길이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쪽의 억새밭을 다 태우고 나면, 그 불길이 저쪽의 억새밭 한 귀퉁이에 붙어서 다시 이동하면서 저쪽의 억새밭을 태웁니다. 우리의 삶과 윤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변치 않는 내가 있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되며, 목숨을 마치면 그런 내가 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나 윤회하는 것입니다. 억새밭의 불길이든, 우리의 삶이든 굵고 거칠게 보면, 이렇게 실체가 있어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고 [불길], 주체가 있어서 살아가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며 윤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억새밭의 불길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새로운 억새를 태우고 꺼지는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매 순간 불길은 명멸할 뿐입니다. 동일한 불길이 이동하는 일은 단 한 찰나도 없습니다. 불길은 무상(無常)하게 번져갈 뿐입니다. 억새밭을 태우는 불길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길은 무아(無我)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보면 몸도 약간 늙었고, 감정도 생각도 모두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 모두 무상(無常)합니다. 오온(五蘊)으로 표현하면 몸인 색(色)과 마음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모두 무상합니다. 변치 않는 몸, 변치 않는 마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즉 변치 않는 나(我)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無我)입니다.
억새밭에 변치 않는 불길이 없지만, 불길이 이동하다가, 다른 억새밭에 옮겨 붙는 듯이 보이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변치 않는 내가 없지만, 내가 살아가다가 죽고 다시 새로운 몸을 받아서 태어나는 듯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즉 변치 않는 자아가 살아가다가 다시 태어나는 듯이 보입니다.
불길이 억새밭을 이동하려면, 매 순간 꺼지면서 옆의 억새에 옮겨 붙어야 합니다. 불길에 실체가 있어서 상주한다면 옆으로 이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불길에 실체가 없기에 옆의 억새로 옮겨 붙어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무아이기에 내가 성장할 수 있고, 늙어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게 무상하고, 무아이기에 살아가고 윤회하는 것입니다.
즉 무아이기에 윤회합니다.
또 무아라고 해서, 너와 나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무아가 아닙니다. 억새밭을 태울 때, 동쪽에서 타올라서 이동하는 불길과 북쪽에서 타올라서 이동하는 불길이 전혀 다른 것이듯이, 무상하고 무아인 ‘남의 오온’과, 무상하고 무아인 ‘나의 오온’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남과 무상하고 무아인 나는 엄연히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인도불교에서는 이렇게 무상하고 무아인 나를 자상속(自相續), 그런 남을 타상속(他相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을 개체성과 결합한 신조어입니다.
내가 죽는 순간에 내생으로 이어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죽기 직전의 몸과 마음 그 어떤 것도 내생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순간의 육체와 정신 어떤 것도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는 순간에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불상(不常)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내가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지금의 어떤 순간에도,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검은 것이 보이고, 잠에 들면 온갖 꿈이 나타납니다. 꿈 없는 잠은 없습니다. 식물인간도 그 당사자의 의식에는 항상 무언가 나타납니다. 잠을 자든 기절했든, 뇌파가 진동하는 이상 그 의식에는 항상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번뇌가 남아 있는 한, 죽음 후에 다시 새로운 현상이 명멸하며 이어집니다. 부단(不斷)입니다.
한 등불에서 다른 등잔으로 불을 옮겨 붙일 때, 그 불길이 서로 이어진 것(常)도 아니고,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斷)도 아니듯이, 현생과 내생은 불상부단(不常不斷)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의 매 찰나도 앞 찰나와 뒤 찰나가 불상부단입니다.
전생과 현생의 관계, 현생과 내생의 관계는 불상부단입니다. 변치 않는 자아는 없지만, 마치 등불의 불길이 옮겨 붙듯이 매 찰나 명멸하는 식(識)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식(識)의 불길은 현생에 내가 지었던 모든 업의 씨앗들을 간직한 식(識)이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업의 씨앗들이 싹을 티우고 꽃을 피워서 내가 체험하는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불교 유식학에서는 이런 식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방편으로 도입한 가명(假名)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건강잘돌보세요
명쾌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 )
오늘 유튜브 조현 TV 에서 향봉스님 법문을 들었습니다. 무아와 육도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윤회는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영혼의 윤회를 애기 하신 것 같습니다.),그리고, 부처님 초기경전 어디에도 육도 윤회라는 글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큰 스님의 법문이기에 머리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글을 읽고 혼란했던 생각이 조금은 사라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안계셔도 계신 것과 같습니다.
무상한 나는 자상속, 무상한 타인은 타상속
고정된 실체로서의 영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닌
즉 one point stream으로서의 흐름(상속)이 있는 것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