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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학의 구심과 원심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인문대학장)
1. 지적 충전과 정서적 위안의 가능성
최근 기후변화로 상징되는 지구촌 전체의 재난이 인류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어버리고 있다. 통째로 위기를 맞고 있는 주류적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적 실천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결코 작지 않다. 이러한 불안 심리에 예언적 지남(指南) 역할을 해주고 지적 충전과 정서적 위안을 선사해주는 분야가 바로 종교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가운데서도 찬찬히 홀로 성찰할 수 있는 수필 혹은 산문은 어쩌면 근대문학의 총아인 소설보다 훨씬 더 독자들에게 충전과 위안을 줄 수 있을 가능성으로 충일하다. 그 점에서 수필은 미래문학으로서의 속성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수필 혹은 산문이 펼쳐갈 미학적 현재형과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해보기로 한다.
2. 타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보편의 언어
지역이나 문학단체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수필에 종사하는 인적 구성이 규모로나 역할로나 퍽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는 언제나 시, 소설, 희곡이었고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이 창작과는 다른 부가적 위상을 얻고 있었다. 말하자면 수필은 순수 창작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격 장르에서 배제하는 관행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 수필은 시, 소설처럼 순수한 의미에서의 허구물이 아니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고, 특유의 고백적 성격 때문에 사인성(私人性)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에 비해 수필가를 아마추어리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수필 분야의 도약과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먼저 인적 저변의 확대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 관련 매체나 등용문 제도의 활성화는 오래전 문청(文靑) 시절을 겪은 중장년 그룹을 수필로 초대하는 최적의 흡인력을 마련해주었다. 이 연배 사람들은 시나 소설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수필에 더 깊은 친화력과 선호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의 미학적 속성은 무엇일까. 그 하나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면, 다른 하나는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려는 계몽의 의지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울리는 명작 수필은 한결같이 이러한 진솔함과 소통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 고백과 소통의 내용이 타자의 삶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하는 일상에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적 감동과 깨달음을 평이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문장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필이 아무나 쓸 수 있는 손쉬운 양식은 아니다.
그 안에는 인생에 대한 예리한 비평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적정한 해석 과정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문장의 매혹이 있어야 한다. 헝가리 출신의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수필을 두고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리는 양식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수필이 이러한 은밀하고 신비로운 운명에 대해 균형감 있게 탐구한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분노가 일상이 돼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이때 우리는 잘 쓰인 수필을 통해 타인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분노의 일상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피천득, 법정, 장영희 등이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수필가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그 위상과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수필은 삶에 대한 그리움과 긍정의 미학으로 우리를 위안하고 치유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보편적 감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타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보편의 언어를 추구해가는 것을 더한다면, 수필은 매우 충실하고도 고유한 문학 중심부의 역할을 새롭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자연과 인생의 관조, 새로운 삶의 지향 제시
해방후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문학교육’은 매우 중요한 국민국가 구성원 만들기에 기여하게 된다. 이때 모어(母語)를 미학적으로 세련화하고 현대인의 일상을 잘 묘사한 수필 작품이 선호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특별히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수필들이 교과서에 집중 수록된 것은 해방후 씌어진 새로운 작품의 성층이 두텁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의 전통이 연면하게 이어져왔음을 알리려는 계몽 기획의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1970년대까지 이어져갔다.
우리의 기억 속에 1970~80년대 교과서 소재 수필은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라는 비유적 명명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래서인지 중후한 인문적 에세이보다는 경험적 구체성이 녹아 있는 미셀러니 류가 압도적으로 실렸다. 그 애틋한 목록을 열거해보자. 지금은 교과서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작품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양주동의 「몇 어찌」와 「면학의 서」와 「질화로」, 김진섭의 「백설부」, 정비석의 「산정무한」, 나도향의 「그믐달」, 최남선의 「심춘순례」, 피천득의 「인연」, 이양하의 「경이 건이」와 「나무」, 이희승의 「딸깍발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유달영의 「슬픔에 관하여」, 이상의 「권태」와 「산촌여정」, 윤오영의 「마고자」, 이하윤의 「메모광」, 전숙희의 「설」, 한흑구의 「보리」 등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와 제목만 열거해도 그 자체로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법정 수필이 많이 실렸고 전혜린, 박완서, 이어령, 장영희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광범위한 제재 확장에 따라 월북작가들 작품이 수록 범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월북작가들의 전면적 해금에 따라 수필 분야에서는 이태준, 김용준 등 소위 문장파(文章派)들의 고담한 수필이 즐겨 수록되었다. 김기림의 짧은 글 「길」도 선호되었다. 또한 시인이나 작가들이 쓴 수필들도 적지 않게 실렸는데, 박두진, 조지훈, 이청준, 전상국 등의 수필이 실리기도 했고, 예외적으로는 해외 수필이 번역되어 다수 실리기도 했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비롯하여 가드너, 임어당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가, 최근에는 나쓰메 소세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미셸 투르니에, 움베르토 에코 등의 작품도 들어와 있다. 지금도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되는 슈낙의 작품은 우울함과 비애의 선명한 감각으로 곧잘 회상되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고전 작품들 중에 교술 양식에 포함되는 작품들도 수필에 준하여 많이 소개되었는데 박지원의 「물」이라는 작품을 배운 기억이 또렷하다.
수필은 문학 갈래 중에서도 독특한 성질을 지니는 문학이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시나 소설이나 희곡같이 창작 문학에 가까우면서도 허구적 형상화에 의한 순수 창작이 아니고, 비평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지적 통찰과 이성적 판단에 의해 평가에 이르는 순수 비평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여 그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삶의 지향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이러한 수필의 속성을 경험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나, 요즘 점점 수필 수록 빈도가 낮아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더해져간다.
4. 단정하고 강한 항심(恒心)의 산문
연전에 산문집 한 권을 냈다. 단정한 기억이라는 책이다. 그동안 펴냈던 비평서들이 워낙 전문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지인들에게 읽어보라고 대뜸 주지 못했는데, 과감하게 ‘자연인 아무개’가 간직하고 있는 섭렵과 경험의 기억을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줄 수 있었다. 보통 어떤 글에는 전문성과 보편성 혹은 낯섦과 친숙함이 상대적으로 담기게 마련인데, 흔히 산문 범주로 묶이는 것들은 대체로 부드러운 표현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산문’의 반대는 ‘비평’이 아니라 ‘운문’이 아니던가.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리듬에 언어를 대응시켜 낭독과 음송에 어울리는 형식을 입힌 글을 운문이라고 한다면, 산문은 그러한 외적 리듬보다는 내용상의 명료함과 서사성을 강화하다 보니 생겨난 줄글 형식을 말한다. 장르로 말하면 소설, 수필, 비평 등이 모두 산문이다. 사전에서는 “운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리듬이나 정형성에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운 문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산문’은 수필과 가장 친연성이 높은 분야를 말한다.
물론 산문에 무한정한 자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장르적 관습(convention)과 함께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장르를 통해 경험하고 또 기대해왔던 어떤 기율이나 원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산문을 가장 잘 쓴 작가들은 누구일까. 내 기준으로 본다면 가장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개성을 담은 산문을 쓴 분은, 일제강점기만 예로 든다면, 정지용과 이태준과 이효석과 김기림과 이상(李箱)이다.
이분들은 본인들의 주력 장르였던 시나 소설이나 비평만큼 아름다운 산문을 우리 문학사에 남겨주었다. 아쉽게도 김소월, 백석, 윤동주는 그분들이 남겨준 탁월한 시적 성과에 비해 산문적 충격은 약한 편이다. 반대로 산문에서 일가를 이룬 변영로, 양주동, 김진섭, 이양하, 피천득 등의 수필가들도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 점에서 근대문학사는 산문의 일대 부흥을 이룬 시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 Baudelaire)는 산문을 일러 “영혼의 서정적 격정에도, 몽상의 파동에도, 의식의 충격에도 능히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면서도 강한” 글이어야 하고, “이러한 이상(理想)은 무엇보다도 도시와 서로 무수하게 얽힌 복잡한 관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운문인 서정시가 격정과 몽상과 충격을 순간적으로 주는 근대 이전 사회의 잔광(殘光)이라면, 산문은 막 떠오르는 근대 도시의 문학이요 서정시를 유연하고도 강하게 감싸고 있는 서광(曙光)임을 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형성시켜가는 ‘산문적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산문은 근대의 본격적 산물인 셈이다.
어쨌든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타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줌으로써 그들의 삶과 생각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가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여기에서의 계몽이 위압적 훈계나 자기 확신의 강요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공감에의 간곡한 요청이요 오랜 경험과 기억을 나누자는 호소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이 글쓴이의 인격이나 사람됨을 담고 있다면, 그 대표 사례는 아마도 산문일 것이다.
그동안 진력해온 비평과 달리 산문이 이러한 소통과 공감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산문집을 건네니까, 비평집에는 시큰둥하던 친구들도 더러 반색을 해주었다. 네 글이 재밌다면서 말이다. 나로서도 재미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충격적 정보를 스캔들화하는 데 앞장서는 과잉 문장들에 내면적 상처가 깊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을 고르고 다듬고 세련화해야 할 주체들이 언어 과잉을 통해 존재론적 잔명(殘命)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평화로운 위안을 주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충전을 꾀하는 산문을 통해 그러한 한시적 소음에서 벗어나 단정하고 강한 항심(恒心)을 가다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5. 비평 문화의 활성화를 통한 주변성의 극복
최근 우리 수필은 우리가 살아가는 미세한 삶의 국면에 대한 빼어난 관찰과 표현을 통해 예술적 정점을 구가해가고 있다. 운문 장르의 자유로운 감각과는 달리 산문 장르의 빽빽하고 단정한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수필 양식의 도약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수필가들의 면밀한 관찰과 판단과 형상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삶의 불모성과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지난 시간에 대한 위안과 반성적 시선을 얻기도 한다. 특별히 새롭고 충격적인 소재보다는 충분히 낯익은 이야기를 택해 고전적 감동에 이르는 수필들은 우리에게 창조적 영감을 선사하면서 생명력을 가진 아우라(Aura)를 풍요롭게 소환해준다.
우리 문학 전체에서 수필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중적이다. 수필 창작에 종사하는 인적 구성의 폭이 매우 넓어진 데 비해 수필에 대한 비평 문화는 턱없이 영성하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창작이 보여주고 있는 활성화 수준에 비해 수필이 문학계에서 거론되고 장려되는 모습이 여전히 주변성과 외곽성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이처럼 우리 수필 문학이 가진 모순된 위상은 수필만의 고유한 장르적 성격을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정립해가야 할 수필 정신에 대해 매우 암시적인 지표를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위상을 면밀하게 해석하여, 수필이 우리 문학 전체 영역에서 종요로운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게끔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수필을 쓰는 작가들의 숫자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반면 수필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비평 문화가 현저하게 부재하다는 지적은, 사실 수필의 장르적 성격에서 그 일차적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수필은 작가 자신의 자기 탐색 혹은 성찰의 성격이 짙은 산문 문학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수필을 쓰는 주체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 삶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적 감동과 자각을 매우 평이하고 친화력 높은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그만큼 독자가 수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해석하는 데 드는 품은 타 장르에 비해 그리 크지 않게 되고,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필은 이해와 해석이 용이한 언어적 형식이 된다. 그러나 해석이 다소 용이하다는 것이 곧바로 비평의 무용론으로 연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교적 난해성이 적다 하더라도, 수필 역시 비평가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얻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가와 독자를 소통케 하는 비평의 역할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수필이 매우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고 수필 전문 매체도 적지 않은 데 비해 수필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아직도 열악한 까닭은 우리 문학계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본격(순수)문학/대중문학’의 양분법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법에 의하면, 대개 본격(순수)문학은 대중문학에 비해 눈높이가 높고 삶의 구경적(究竟的)인 문제를 탐색하는 것으로서 결국 그 장르적 양상은 시와 소설과 비평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수필에 대해서는 본격적 공론의 장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
나아가 수필가들에 대해서는 그 흔한 문학상조차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물론 수필이라는 것이 쓰기 전에 어떤 계획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라고 이해되고 있고, 나아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가진 산문이어서, 문학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고유한 허구적 성격은 다소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필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세계 이해와 표현 방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같은 주변 장르로서의 인식 관행은 점차 완화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수필은 그 특유의 일상성, 무형식성, 평이성 등을 특색으로 하면서 비판적 문제 제기보다는 공감의 영역을 지향하는 성과를 우리 문학에서 만만치 않게 거두고 있는 양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수필 문학의 낮은 위상 평가에 대하여 깊은 반성적 시선을 던지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필 미학의 정립과 평가를 적극적으로 해가야 할 것이다. 결국 비평 문화의 활성화를 통한 주변성의 극복의 마인드가 고려되고 깊이 반영될 때 수필의 위상과 지분은 크게 강화될 것이다.
6. 비평적 에세이로의 확장 가능성
수필이 담아내는 삶의 원리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힘겹고 아름답게 유지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그래서 작가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삶의 순리를 탐색하고, 과거와 현재는 물론, 자아와 대상, 현상과 실재, 죽음과 삶, 생성과 소멸의 경계를 지워가면서 자신의 언어와 사유를 한 차원 높게 완성해간다. 거기에 대상을 안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을 완성해가려는 사랑의 힘이 숨쉬고 있고, 삶의 순연한 흐름에 대한 친화와 긍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 갈래 중에서도 독특한 고백의 속성을 지닌다. 나아가 수필은 한편으로는 삶을 차분하게 관조하여 그 존재론적 의미를 밝혀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삶의 기율이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가편(佳篇)들은 이러한 수필의 존재론적 본령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좌표를 그렸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대상을 안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을 완성해가려는 사랑의 힘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그 내용이라든가 문체가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중후하여 독자들의 취향이나 감식안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물론 그 취향과 감식안에는 작가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념이나 삶의 태도 등에 대한 공감 능력이 들어 있다. 그 능력 가운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삶의 이치를 배워가는 과정일 터인데, 구체적 경험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배워가는 것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루어가야 할 실존적 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좋은 수필에는 작가 자신의 고유하고도 각별한 경험은 물론 사물을 향한 한없는 사랑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데, 그만큼 수필은 작가의 경험과 사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내는 산문 양식인 셈이다. 그래서 수필은 작가 자신의 새로운 감각과 깨달음을 통해 사물의 표층과 심층을 투시하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발원하고 씌어진다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수필가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법한 사물이나 현상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거기 잠재해 있는 삶의 본령을 찾아내고 유추하고 표현해낸다. 이런저런 맥락에서 만난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 속에 깃들여 있는 장면에 한껏 주목한다. 한 편의 작품 안에 반영된 시간은 ‘경험적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의 내적 필요에 따라 변형된 일종의 ‘미학적 시간’이다.
우리의 기억 역시 심상(心象)이라는 지층(地層)에 남아 있는 시간의 변형된 흔적일 것이다. 수필가들은 의식 저편에 깃들인 미학적으로 변형된 형상을 상상적으로 복원하여 자신의 현재형을 유추해간다. 그리고 그러한 유추는 사물이나 시간에 대한 매혹으로 나타났다가 그 사물과 시간이 다시 작가 스스로의 의 삶을 반추하는 과정을 거쳐간다.
수필에는 작가의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는 고백적 전언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 내용이라든가 문체가 다 같이 작가의 인격과 교양을 드러내며, 작가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태도 등이 그 안에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또한 수필에는 일상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끼는 감상을 솔직한 주관에 의해 표현하는 작가의 예술적 솜씨가 반영된다. 결국 수필에는 강렬한 인생론적 태도와 함께 작가 고유의 예술성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자신의 정서를 독자에게 전달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수필은 한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 즉 불규칙하고 소화되지 않는 작품이며, 규칙적이고 질서 잡힌 작문이 아니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정의나 “수필은 마음속에 표현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관념, 기분, 정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시도다. 그것은 관념이라든지 기분․정서 등에 상응하는 유형을 말로 창조하려고 하는 무형식의 시도다.”라는 리드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수필은 무형식성, 감성 지향성을 지속해갈 것이다. 여기서 감성이란 수동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잇는 원초적 유대 고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이론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위한 감각적 소재를 제공하고, 실천에서는 이성의 지배와 통솔을 받을 소지를 마련하며, 인식에서는 자신의 순수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적 삶의 상징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성적 세계 인식은 소중한 윤리적, 미학적 계기를 인간에게 부여한다. 수필이 이러한 감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점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성 편향이 될 때인데, 그 편향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기능은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지성은 감성과는 달리 사물을 개념에 의하여 사고하거나 또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그 기능은 합리성, 객관성, 진리 타당성의 검증과 설명에 놓여 있다. 우리 수필이 사물에 대한 감성적 해석과 반응에서부터 사회 현상 전반에 걸친 합리성과 객관성을 지향하고 나선 것부터가 수필 정신의 확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필에 지성의 개입과 실천은 어느 면에서는 수필 고유의 감성적 기능을 잠식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수필의 비평적 기능을 제고하여 그 위상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미적 안목과 비평 정신을 결합하여 일종의 ‘비평적 에세이(critical essay)’로의 확장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수필이 발전해가야 할 것이라는 제언을 적고자 한다. 이때 수필에 대한 비평 문화의 활성화는 긴요하게 요청되는 문화적 인프라가 될 것이다. 그 점에서 특히 시와 소설에 치우쳐 있는 비평 인력들이 수필에 대한 해석과 감상, 평가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결국 동일성의 미학에 바탕을 둔 감동과 긍정의 미학은 수필 문학의 종요로운 존재 근거가 된다.
거기에 타자에 대한 적극적 옹호와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을 결합하여 인류 보편의 언어를 추구해가는 것이, 이미 다매체 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수필 문학이 존속하고 나아가 제 역할을 확충해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감성과 지성의 결합을 통한 수필 정신의 확대를 이루어가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 문학의 성층(成層)에 수필 혹은 산문 문학이 의제를 제기해가는 품과 격은 한없이 넓어지고 높아져갈 것이다. 더욱 세련된 문장과 깊어진 사유로 한국 수필이 더욱 발전해가기를 희망해본다.
7. 수필의 근원적 에너지로서의 ‘사랑의 마음’
우리는 객관적 사실에 눈멀고 가짜뉴스 같은 것에 외진 눈을 뜨는 병리적 현상을 지금 숱하게 목격하고 있다. 제대로 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정서적 선호에 따라 참과 거짓의 경계도 소홀하게 무너뜨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건강한 정보를 나누는 일의 중요성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수필이 삶의 주변, 외곽, 상실된 것들을 향해 손길과 눈길과 발길을 여는 양식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탈환하면서 친근하고도 머나먼 대상들을 호명해가는 작가들의 필치를 따라가고자 한다.
부재하면서도 아득하게 편재(遍在)하는 이들을 찾아, 아니 찾을 수 없음을 때로 절감하면서, 그들의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어떤 대상을 찾아가는 사랑의 마음은 두고두고 우리 수필의 근원적 에너지가 되어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수필 문학의 원심과 구심을 균형 있게 궁구해갈 것이고, 미래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압도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