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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강진 유배생활과 학문적 업적
1800년 6월 일세의 군주 정조대왕이 갑자기 붕어하자 의지하거나 보호해줄 세력이 없던 다산은 ‘신유교옥’(辛酉敎獄) 이라는 큰 위기를 맞는다. 1801년 천주교인을 탄압하던 대박해사건인 신유교옥은 다산의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다산 자신의 표현대로 동복의 3형제가 감옥에 갇히고, ‘일사이적’(一死 二謫)이라는 용어대로 셋째형 정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의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때 다산의 나이 40세였다. 처음에 경상도 포항근처의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다른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801년 11월 22일 나주 북쪽 5리지점인 밤남정 3거리에서 다산은 둘째형 정약전과 헤어졌다.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떠나야 했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의 첫 번째 발언이 기록으로 전한다. “이제 나는 겨를을 얻었다. 하늘이 나에게 학문을 연구할 기회를 주었다. 벼슬하느라 당파에 시달리느라 책도 못 읽고 저술도 못했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연구에 몰두하자!” 엎어지고 넘어져도 좌절하거나 절망할 줄 모르던 다산, 춥고 배고픈 유배생활에도 굽히지 않고 그는 다시 일어나 학문적 대업을 완성할 용기를 얻어냈다. 강진 읍내 동문 밖 샘거리에 있는 주막집 노파가 제공해준 오두막집 뒷방 하나를 연구실로 삼고 바로 주역과 상례(喪禮)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처하는 방 이름도 근사하게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고 학문연구에 침잠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스님들의 안내로 강진 읍내 뒷산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간으로 옮기고, 군동면의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경전공부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시절 다산은 읍내의 신분이 낮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강진 읍내에 거주한지 8년만에 『주역』과 『상례』에 대한 연구가 대체로 마무리 되었고 1808년 봄에는 다산학의 산실인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안주하면서 그의 경학(經學) 연구서의 대부분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만덕산의 줄기 다산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4서6경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1816년경에는 경학을 대체로 마쳤다.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에 마음을 기울여 『경세유표』· 『목민심서』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는 고향집에 돌아와 저술을 마쳤다. 유배기간인 18년 동안, 경학과 경세학을 연구하던 기간 중에도 다산은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주었다. ‘애절양’(哀絶陽) 등 대표적인 비판시들이 그 시절에 저작되었다. 특히 18제자를 양성하여 ‘다산학단’을 이룩한 다산학의 전수는 실학사상이 후인들에게 전승되어지는 일대 학술문화 운동의 절정이기도 했다. 이른바 ‘다신계’(茶信契)라는 결사를 통해 학술단체가 형성되어 조선후기의 사상과 학술경향의 변화에 큰 몫을 해주었음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자서전격인 자찬묘지명에 열거한 것처럼 다산의 저술집은 경집(經集) 232권을 비롯하여 문집 260여 권을 합해 500권에 이르고, 해배 이후 정리한 저술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많은 저술을 완성했다.
Ⅲ. 다산의 가르침과 사상
다산은 제자 정수칠(丁修七)에게 교훈으로 준 글에서 “경전(經傳)의 뜻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도(道)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뒤에야 덕(德)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학(經學)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여 학문의 기본이 경학에 있음을 말하였다. 다산은 경전의 뜻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생애를 바쳐 232권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연구서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혹 선유(先儒)의 학설에 따라 뜻이 같은 무리이면 두둔하고 뜻이 다른 무리이면 공격하여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모두 경전을 빙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들이지, 진심으로 선(善)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부연하여 교조적인 성리학의 주자학설(朱子學說)이나 퇴계 ‧ 율곡 등의 성리설에는 반대의견을 봉쇄했던 잘못된 학문풍토를 냉혹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래서 다산은 성리(性理)이론으로 사서육경을 해석한 주자학에 반대하여 실학적 이론으로 사서육경을 재해석하는 위대한 다산학을 이룩하게 된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설을 비판하여 행위와 실천이 담보되는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새로운 학문 세계를 열어놓고 있었다. 중세 “2천년 장야(長夜)”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긴긴 2천년의 밤에 잠겨있던 관념의 세계를 경험과 행위의 세계로 열어젖혔다고 감히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한 대목이 그런 연유에서 나오게 된다.
이런 경학연구는 그 목표가 수신(修身)과 수기(修己)에 있었다. 학문의 본질인 제 몸을 닦고 자신의 사람됨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경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의 두 번째 목표는 치인(治人), 즉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기름인데, 그것은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자 세상을 올바르게 경영하기 위한 실력을 닦는 일이니, 바로 경세(經世)에 해당하는 학문이다. 즉 정치 ‧ 행정 ‧ 경제 등의 구체적인 나랏일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실력배양의 학문인 것이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경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경학 공부와 경세학 공부를 함께 완성해야만 본(本)과 말(末)이 구비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함양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다산은 경세학의 기본 목표를 ‘개혁’이라는 두 글자에 두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는 켓치프레이즈가 말해 주듯, 썩고 병든 나라를 고치고 바꾸는 데부터 경세학은 시작된다고 믿었다.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을 경륜하는 일은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다산의 사상을 총괄해보면, 새로운 경학논리로 인간 사고(思考)의 틀을 바꾸어 행하고 실천하는 행위의 논리로 무장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경세학의 능력을 길러 나라와 세상에 봉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두 분야를 통해 성과가 나오려면 결론적으로는 국부의 증진인데, 이 국부의 증진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길이, 과학기술의 개발에 있다고 여기고 과학기술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개발이 최종적인 결론임을 강조하는데, 그런 내용이 바로 다산의 사상이다. (「기예론」. ‘이용감’설치를 참조)
Ⅳ. 목민심서를 통한 다산의 가르침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고 역사가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논리나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목민심서는 본론과 각론으로 되어 있다. 각론은 중앙정부의 6조(六曹)조직처럼 지방정부에도 육전(六典)의 조직이 있기 때문에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개부서에서 조치해야 할 행정지침이다. 목민심서 48권에서 이 각론을 제외한 분야가 본론이다. 이런 본론 중에서도 핵심 본론은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의 세 편에 들어 있다. 율기 6개 조항의 핵심은 청심(淸心)조항이다. “청렴이란 공직자의 본질적인 임무다. 모든 착함의 근원이요 모든 덕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아니하고는 고위공직자 노릇할 사람이 없다. (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 : 淸心) 라는 다산의 말대로 공직자는 청렴으로 시작해서 청렴에서 끝나야 한다. 청렴한 사람이 진짜 큰 욕심쟁이라고도 했다.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려는 공직자는 청렴해야만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대탐필염(大貪必廉)이 바로 그런 의미다.
두 번째는 봉공이다. 봉공편의 핵심은 수법(守法)조항이다. 사리에 합당한 법은 조건 없이 지켜야 하나 문제가 있는 법은 융통성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 주의 할 대목이다. 상사의 명령은 따라야 하지만 사리에 맞지 않거나 부당한 명령은 단호히 거절하라는 조목도 수법조항에서 관심을 보여야 할 부분이다. 민생과 국법이 충돌하거나 준법의 기본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는 “민생도 중요하게 여기고 국법도 존엄하게 해야 한다. (以重民生 以尊國法)” 라는 부분을 사려 깊게 해석해야 한다. 법만 높이다가 민생이 파탄 나서도 안 되고, 민생만 위하다가 국법의 존엄성이 무너져도 안 된다는 점이다. 정당한 국민의 저항권은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다산의 민권의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시절에 일어난 이계심(李啓心) 사건에 대한 명재판을 상기해야 한다. “백성들이 제 몸을 이롭게 하는데만 꾀가 많아 자신들이 당하는 폐해에 항의할 줄을 모른다”(民工於謀身 不以瘼犯官也)라고 하여 목민관들이 밝은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다산이 곡산부사 재직 시 관의 잘못에 대중시위를 선동한 이계심을 무죄 석방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애민편이다. 애민편의 핵심은 『진궁』(振窮)조항이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조항에서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으며, 병들고 약하며, 천하고 지위 낮은 사람이 바로 민(民)이다. 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생각을 기울이는 일이 바로 ‘애민’이라는 것이다. 사궁(四窮 : 鰥寡孤獨)을 보살펴야 한다. 노인·어린이·장애인이나 중병에 걸린 사람, 상을 당한 집안, 재난을 당한 집안을 보살펴주는 일이 바로 애민이라고 다산은 정의하였다. 양로(養老)에서는 걸언(乞言), 진궁에서는 합독(合獨)제도 같은 사회보장제도도 활용하라고 했다. 공직자들은 최소한 이런 다산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인들의 기탄없는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잘못된 행정을 시정하는 것이 걸언이고, 홀로 사는 남녀노인들에게 재혼하는 길을 관(官)에서 열어주는 일이 합독이다.
Ⅴ. 결론
다산은 개혁가였고 변화주의자였다. 현상을 그대로 두고 역사발전을 기대하는 일은 연목구어다. 공직자는 고치고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지부동의 공직자는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다. 목민(牧民)의 목(牧)의 의미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공부에 임해야 한다. 승냥이나 호랑이의 피해로부터 어린 양들을 보호해주는 일이 목이라고 다산은 정의했다. 불쌍한 백성들을 보호하려면 토호들의 횡포부터 막아야 한다. 이런 것이 다산의 목민정신이다. 목민정신에 투철한 공직자가 많아지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다. (土豪武斷 小民之豺虎也 去害存羊 斯謂之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