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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유대 사회에서 “시므온”은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귀족도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칠흑같이 어둡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습니다. 평생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가 죽기 전에, 그를 포함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 년 동안 정말로 간절히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볼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늘 함께 동행 해 주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품에 안긴 채 성전으로 들어오고 있는 갓난아이가, 그는 물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다려 왔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달려가 부모 품에 안겨 있던 아기 예수를 빼앗듯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안고”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수동태와 능동태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중간태 동사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에르코마이 : eρχομαι) 동사는 중간태입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간다.”는 능동태적 의미와 “누군가에 의해서 간다.”는 수동태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내가 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기노마이 : γινομαι) 동사 역시 중간태로,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이 되다.”라는 뜻과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무엇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태 동사인 “안고”에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았다.”는 능동태적 의미와 “시므온이 누군가에 의해서 아기 예수를 안았다.”라는 수동태적 의미를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이 누군가에 의해서 아기 예수를 안았다.”라는 수동태적 의미에는 “시므온이 누군가에게 안겼다.”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b),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26b), “성령의 감동으로”(2:27a)라는 말씀에 따르면, 그를 자신의 품에 안은 “누군가”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는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자신을 안고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당신 앞에 의롭고, 경건했을 뿐 아니라, 죽기 전에 온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있던 메시아를 보게 해 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인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은혜는 물론, 당신이 친히 품에 안아 주시는 은혜까지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① 한편, 영역 성경들은 우리가 “포옹하다, 감싸주다, 품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안으시며”를 “데려가다”(carrie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3)라는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행진할 시기와 장막을 치고 머무를 시기와 장소 등을 친히 결정하시고 지시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정을 친히 주도적으로 이끄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홍해를 건넌 이후 광야에서 보낸 지난 1년을 회상하며 “우리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신1:19)라고 말했습니다.
메마른 시내만 널려 있는 광야는 물이 귀했습니다.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암석과 거친 모래사막에는 불 뱀과 전갈이 득실거렸습니다. 피폐하고 황폐한 고원 지대에서는 종종 죽음의 모래 폭풍까지 휘몰아쳤습니다. 광야는 실로 크고 두려운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간 지 3일 만에 물이 없어 기진하였습니다. 살인적인 목마름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인도해주었던 모세를 향해 돌을 들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또 굶주렸습니다. 또 장막을 치고 거두는 일을 반복해야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머무르면 장막을 치고, 움직이면 장막을 거둬야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안정된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안아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크고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으며 칭얼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물론 하나님까지도 대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광야생활은 백성들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는 많게는 300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어디로,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늘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많은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을 때마다 다 해결해 주어야 했습니다. 지도자로서 외롭고 고독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안아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백성들의 시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은 당면한 문제와 고난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열어주셨습니다. 하늘을 열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습니다. 반석을 열어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친히 대적들과 맞서 싸워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께서”를 연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안아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 가장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안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실제로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과 시험을 만날지라도, 비록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다 할지라도, 깊은 슬픔으로 인해 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할지라도, 꿈조차 가난하여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근심이라고 하는 마귀다. 아무 일이 없는 날에도 그 마귀는 사람을 괴롭게 하고 혼란 속에 몰아넣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심이 마귀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마귀는 끊임없이 근심과 걱정으로 사람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심은 마귀다.”라는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지 못한 체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a),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라고, 공생애 기간 중 단 두 번만 “근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염려 또는 근심”은 “분열되다, 나뉘다” 등의 뜻으로, 지나친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염려라고 하는 늪에 빠진 이들은 인생의 참된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또 염려는 삶에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갑니다. 그는 비행기를 탑승하기 직전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파됐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염려 때문에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눈부신 구름과 그 위로 펼쳐진 청명한 하늘과 붉은빛으로 타고 있던 석양을 전혀 즐기지 못했습니다. 또 염려는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만들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실 마을 전체를 뒤덮는 두터운 안개에 포함된 물의 양은 실제로 한 컵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은 양의 물이 눈앞의 건물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동차들을 기어 다니게 만들듯이, 염려는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만듭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게 만듭니다. 또 염려는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가장 심각한 전염병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환난과 시험이 아니라 염려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 중에 진실로 근심해야 될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은 8%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염려는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엔돌핀의 생산을 막습니다.
궤양이 생기게 하고, 두통과 마비 증상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의사 W. C. 알바레즈는 위장 장애의 80퍼센트는 염려와 두려움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느린 형태의 자살”입니다. 또 염려에는 “물어뜯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계속 염려하면 영적 감각을 상실한 채 무력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염려는 무의식적인 신성 모독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4:6a)고 명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어린아이들에게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오늘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먹여주실까? 무엇을 입혀주실까? 나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돈이라도 벌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매일 이렇게 근심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인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 놈 참 대견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여기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맡기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투병생활을 하던 고 옥한음 목사는 늘 성경을 가까이하며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1:31)라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친 광야를 힘겹게 지나고 있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당신의 품에 안아주셨다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언제 적들의 창과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등 뒤에서는 불안할 수도 있을까봐, 앞으로 안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얼굴을 바라보시며 걸었다는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걷기조차 힘겨워 보일 때에는 업고 걸어가십니다. 더 힘들어 보일 때에는 가슴에 안고 걸어가십니다.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젖을 물려주려는 어머니처럼 가슴에 안고 걸어가십니다. 그러므로 견디기 어려운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품에 안고, 눈을 마주치며, 얼굴을 바라보실 뿐 아니라, 모든 원수들의 손에 건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까지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 또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경험을 통해 아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곤고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안아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아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저에게는 올해로 스무 살 된 딸과 열일곱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수시로 이놈들을 안아 줍니다. 입을 맞춥니다. 누군가 다 큰 딸과 아들과 입 맞추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끌어안고 입 맞추는 일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색한 관계까지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구역장님에게 아이들을 안아보라고 권했습니다. 구역장님은 처음에는 대학생인 딸과 아들을 안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아이들과의 관계와 대화를 회복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아주는 것은 상대방의 아픔을 나에게로 옮겨오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시리도록 추운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안아주는 행위를 통해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 등 여러 가지 의미와 감정들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어제 새벽 올림픽 한일전이 있었습니다. 일본을 이기고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물론 감독과 코치들과 전 세계에 흩어져 마음을 졸이며 그것을 지켜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 얼싸 안았습니다. 펄쩍 펄쩍뛰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또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웃을 안아줌으로써 위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안아줌으로써 감정을 나누고, 서로 하나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관계 이론의 전문가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utt)은 갓 태어난 유아가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부모의 손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아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전존재적으로 안아주고 품어주는 환경에서 자랄 수만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아줌”은 우리가 안정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결코 안아주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전쟁과 살육과 죽임과 고통의 소리가 들려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포악해지는 범죄와 사고들로 인해 숨쉬기조차 두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안아줌”(holding)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근하게 안아줄 대상을 추구하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갈망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을 통해서 해소되기를 원합니다. 이 기대가 해소되지 않을 때에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약물을 하기도 하고, 일에 빠지기도 하고, 밤새 도박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돈으로 이 “안아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정서적으로 안아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갈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곧 곤고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안아주는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라고 외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당신의 자녀들을 안으시는 당신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마저 거부했습니다.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메 달았습니다. 아들을 통해 세상을 안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류를 안아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선생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 세상을,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안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것은, 품어주는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서로 안아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삶에 지친 채 “안아줌”을 갈망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안아주고 있습니까?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까? 수백만 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D. L. 무디를 감동시킨 사람으로 유명한 헨리 무어하우스(Henry Moorhouse)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풀이 죽은 채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실에서 놀고 있던 딸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엄마에게 줄 것이라고 대답한 그는, 엄마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2층에 있다고 대답한 딸은,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걸을 수 없는 딸의 다리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그는, 너무 무거워 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딸은 “제가 물건을 들면, 아빠가 저를 안아주시면 되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내가 딸을 안고 있듯이 나를 당신의 따뜻한 품에 안고 계시는데, 내가 왜 이토록 좌절하고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습니다.
그 확신을 통해 힘겹게만 여겨졌던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1995년, 쌍둥이 자매가 몸무게 1kg의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 언니는 정상이었지만, 심장이 좋지 못한 동생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부모에게 동생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는 병원의 내규를 어기고 인큐베이터 안에 언니를 같이 넣어 주었습니다. 언니의 손이 동생을 부둥켜안을 수 있도록, 둘을 나란히 눕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의사가 포기한 동생의 심장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는 것”은 마음의 병뿐 아니라, 심장까지도 고칩니다.
실제로 한 대학교의 연구팀은 200명의 커플을 대상으로 “안음”의 능력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20초 동안 포옹을 한 그룹은, 아무런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은 그룹에 비해 혈압과 심장 박동이 안정되었습니다. 스트레스 호르몬도 적게 나타났습니다. 외롭고 힘든 사람에게 있어서 한 번의 “안음”은 잠시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을 안아준 대상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3-4)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배에서 태어남으로 내게 안겼고”의 문자적인 뜻은 “태중에서부터 운반된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태어날 때부터 품에 안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는, 하나님께서 자상함과 애정과 보살핌을 계속 유지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혈통적 유대인은 물론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당신의 품에 안아주십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게 된 “안아줌”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주십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안아주심을 통해서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절망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안아줌”을 갈망하고 있는 영혼들을 안아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과 시험이 다가올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것을 통해 당신이 허락하신 시간을 사는 모든 순간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망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영혼들을 품에 안아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전해 주는 사명까지도 온전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