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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열왕기 하권 8장-13장
2열왕 8,1-6 수넴 여자 이야기의 마무리
여기서는 수넴 여자가 다시 등장하는 엘리사는 그녀에게 그 지역에 닥칠 가뭄을 예고하며 필리스티아로 피하라고 권고한다. 이 여인은 가뭄이 끝난 후, 아마도 엘리사가 죽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와 재산을 되찾으려고 애쓰는데 이때 엘리사의 시종 게하지가 그녀를 돕는다.
“일곱 해가 지나자, 그 여자는 필리스티아 땅에서 돌아와 임금에게 가서, 자기 집과 밭을 돌려 달라고 호소하였다”(3). 수넴 여인은 필리스티아 땅에서 돌아와 정당한 법적인 수속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기근을 피해 7년간 고향을, 떠나있던 동안 집과 밭이 아마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7년이란 기간은 안식년에 해당하므로 여인의 호소는 율법적인 타당성을 층분히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호소하기 위해 임금에게 나아간 것은 임금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2사무 8,15).
2열왕 8,7-15 엘리사와 아람 임금
엘리사는 아람 임금 벤 하닷이 그의 종 하자엘에게 암살당할 것과 하자엘이 이스라엘에 악을 저지를 것이며 아람 임금이 되리라고 예언한다. 하자엘은 나중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누르고 승리한다.
“엘리사가 다마스쿠스로 갔을 때, 아람 임금 벤 하닷이 앓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는 보고를 듣고, 임금은 하자엘에게 말하였다. ‘예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람을 찾아가 만나시오. 그를 통하여 ‘제가 이 병에서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주님께 문의해 보시오”(7-8).
엘리사가 다마스커스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6,13-19에서 아람 임금이 엘리사를 잡으려 했던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매우 뜻밖의 일인 듯이 보인다. 한편 카일(Keil)은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하자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갔다고 본다(1열왕 19,15). 즉, 이것은 본래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주님께 받은 사명이었으나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1열왕 19,16)과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 엘리사에게 전가되어 그를 통해 성취됨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엘리사가 간 곳은 다마스커스의 성 안이 아니라 그 성의 근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성 안으로 들어 갔다면 하자엘이 낙타를 타고 그를 맞이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9절). 그러나 엘리사가 간 곳을 단순히 다마스커스라고만 기록한 것은 추측컨대 그 지방 일대를 가리키는 의미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벤하닷은 아합과 동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1열왕 20,1) 노년에 이르러 병을 얻었다. 당시에 엘리사는 아람 땅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나아만에 의한 영향, 즉 나병이 고침을 받은 사실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해 준다(5,17). 그래서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이 엘리사를 아람 임금에게 소개한 것이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하자엘을 '그 집의 충성된 자'(호 피쉬토타토스 톤 오이케톤)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자엘의 족보나 궁중에서의 그의 관직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 진 것이 없다. 다만 '문벌도 없는 하자엘이 임금위를 차지했다'는 아시리야의 비문을 보면 그가 비천한 데서 임금위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임금이 자신의 병에 판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엘리사에게 하자엘을 보낸 것으로 보아 그는 나아만과 같은 군대 장수이었던 듯하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무엇을 물으려 할 때에는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규정으로 되어 있다(1사무9,7;1열왕 14,3). 이는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탈출 23,15)는 규정이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람 임금 벤 하닷은 일찍이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군대까지 동원했었다(6,13-15). 그러나 이제는 병중에 있으므로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자 사자를 보낸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개종(改宗)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그가 겸손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하자엘은 자기 임금 벤 하닷을 가리켜서 엘리사의 아들이라고 하며 겸손히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엘리사는 아람의 장수 하자엘에게 “돌아가서 ‘임금께서는 회복되실 것입니다’하고 전하시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알려 주셨소”(1)라고 말한다. 그리고나 나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하자엘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서 그가 아람의 왕이 되어 잔혹하게 자신의 백성을 죽일 것을 보았기에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것을 알고도 엘리사는 하자엘에게 “주님께서 그대가 아람의 임금이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하자엘은 벳 하단에게 건강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그 다음날 담요를 가져다 물에 적신 후 임금의 얼굴을 덮어 죽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람의 임금이 되었다.
하자엘이 암살한 임금은 기원전 880년경 아사와 바아사 시대에 통치했던 벤 하닷 1세(2열왕 15,16-20)의 아들 또는 손자인 벤 하닷 2세일 것이다. 이 암살은 기원전 842년경에 일어났다. 이는 아람 임금이 약 3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했음을 암시한다. 아시리아 비문에도 평민이었던 하자엘이 다마스쿠스의 왕좌를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명 횡사한’ 임금은 하닷에제르로 불린다. 하닷에제르는 벤 하닷 임금의 다른 이름이거나 아니면 저자가 이 본문에 벤 하닷이라는 이름을 첨가했을 것이다(2열왕 8,7.9).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야기의 의도는 예언자가 하는 말을 통해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 말씀을 묘사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이스라엘의 큰 고난을 수반하는 것일지라도 예언자는 말해야 한다.
2열왕 8,16-24 여호람의 유다 통치
“이스라엘 임금,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팟이 유다의 임금으로 있을 때, 유다 임금 여호사팟의 아들 여호람이 임금이 되었다”(16). 여호람은 32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을 8년간 통치하였다. 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탈야와 혼인하였고, 그녀의 영향으로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다. 여호람은 죽고 아하즈야가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2열왕 8,25-29 아하즈야의 유다 통치
“아하즈야는 스물두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아탈야인데 이스라엘 임금 오므리의 손녀였다. 그는 아합 집안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아합 집안의 길을 걸어 아합 집안처럼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26-27).
2열왕 9,1-13 엘리사의 제자가 예후에게 기름부어 임금으로 세우다
엘리사 예언자는 예후를 이스라엘 임금(기원전 841-813년)으로 세우기 위해 그의 제자를 라못 길앗으로 보낸다. 기름병을 지닌 엘리사의 제자는 라못 길앗에서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팟의 아들 예후를 찾아간다. 그를 골방으로 몰래 데리고 간다. 엘리사는 젊의 예언자에게 말한다. “그런 다음에 기름병을 들고 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며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세운다.′ 그러고는 머뭇거리지 말고 문을 열고 도망쳐라”(4). 젊은 예언자는 엘리사의 말에 따라 행동하고 도망친다. 이에 예후는 그의 예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후의 부하들이 말한다. “그들은 ‘거짓말! 자, 털어 놓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후는 “그 사람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면서,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세운다.’고 말하였소”(12).
이 말을 듣자 마자 예후의 부하들은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께서 임금님이 되셨다”(13)라고 외쳤다. 겉옷은 수치를 가릴 뿐 아니라(창세 3,10,11) 정숙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1베드 3,3) 인격과 권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군대 장수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평소에 예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젊은 예언자를 미친 자라고 경멸했던 그들이 선뜻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겉옷을 취하여 바닥에 펴는 군대 장수들의 행위와 마태 21,8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 대해 무리들이 옷을 펴는 행위는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예우(禮遇)일 뿐만 아니라 임금으로 인정한다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열왕 9,14-26 예후가 이스라엘 임금 요람을 죽이다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팟의 아들인 예후는 요람을 칠 계획을 꾸몄다. 그때에 요람은 이스라엘 전군을 이끌고 아람 임금 하자엘에게 맞서서 라못 길앗을 지키고 있었다”(14). 요람이 하자엘과 싸운 것은 길앗 라못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이 여기서 판명된다. 그리고 14절의 이야기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하자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 전투에서 요람은 능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반면 예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모든 군대 장수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더군다나 21절을 보면 요람이 거의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러 길앗 라못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르엘에서 병 문안을 온 유다의 아하즈야 임금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장수의 원망을 산 것으로 생각된다. 요람에 대한 신임이 이와 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예후가 배반하여 요람을 치러 갈 때에 모든 병사들이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였던 것이다.
이즈르엘 탑에 있던 파수꾼이 예후 부대가 오는 것을 보고 북이스라엘 왕 요람은 기병을 보내 평안한지 물었다. 첫 번째로 간 파수꾼도 두 번째로 간 파수꾼도 요람에게 돌아가 않았다. 이제 요람이 직접 예후를 만났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예후 장군, 평안하오?’ 하고 묻자, 예후가 대답하였다. “당신의 어머니 이제벨이 온갖 음행과 마술을 일삼고 있는데 평안이 다 뭐요?”(22). 이제 예후는 요람을 가까이에서 활을 당겨 요람의 심장에 명중시켜 죽게 하였다. 이는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의 자식들의 피가 나봇 포도밭에 뿌려질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예후가 믿음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 아합의 집을 진멸하기 위해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 기름부으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1열왕 19,16). 더욱 확실한 사실은 예후가 임금이 되어 바알의 신당을 헐고 그곳에 변소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 예후를 칭찬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0,27).
2열왕 9,27-29 예후가 유다 임금 아즈즈야를 죽이다
“유다 임금 아하즈야는 그것을 보고 벳 간 길로 도망쳤다. 예후는 그의 뒤를 쫓으며 ‘저자도 쏘아라.’ 하고 일렀다. 병사들은 병거를 타고 가는 아하즈야를 이블르암 근처의 구르 오르막길에서 쏘았다. 아하즈야는 므기또로 도망쳤으나 거기에서 죽었다”(27). 북이스라엘 요람을 도와 아람 임금 하자엘과 맞서기 위해 갔던 유다 임금 아하즈야는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아하즈야의 어머니는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의 소녀 아탈야였다. 그는 아합 집의 사위었기에 주님의 눈에 거스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2열왕 9,30-37 예후가 이제벨을 죽이다
예후는 아합의 아내 이제벨을 찾아간다. 그녀는 예후가 문에 들어오자 “자기 주군을 죽인 지므리 같은 자야, 평안하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즈므리가 7일만에 끝난 반란을 일으키듯 그를 빗대어 말한다. 예후는 이제벨의 시종들에게 말한다. “예후가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져라.’ 하고 일렀다. 내시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자 그 피가 담벼락과 말에 튀었다”(33). 이는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벨의 주검이 이즈르엘 들판의 거름이 되어 아무도 그것을 이제벨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37). 이제벨의 주검은 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에 버려졌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네 번째 왕조(예후, 여호아하즈, 여호아스, 예로보암 2세, 즈카르야)의 창시자다. 그리하여 엘리야의 임무가 성취된다(1열왕 19,16). 예후는 이스라엘 임금 요람(9,15-26)과 유다 임금 아하즈야를 암살한 후(9,24-29), 이즈르엘로 가서 이제벨을 처형하라고 명령한다(9,30-37).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묘하기 위해 ‘창녀’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예후도 마찬가지로 이제벨을 “온갖 음행”(9,22)을 저지르는 종교적인 ‘창녀’로 비난한다.
2열왕 10,1-11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죽이다
“사마리아에는 아합의 아들 일흔 명이 있었다. 그래서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이즈르엘의 고관들과 원로들과 아합 아들들의 교육관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1). 여기 "아들"이란 말은 자손들(손자들까지 포함)을 가리킨다. "70인"이란 숫자도 문자적으로 70명이 아니고 대략으로 많은 수효를 의미한다. 예후는 이즈르엘의 고관과 원로들의 아들들에게 요람의 아들들 중에서 임금이 될만한 자를 세우고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싸울 용의가 있으면 싸워보라는 도전(挑戰)을 보낸다. 이것은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편지였다. 손자병법에는 말하기를, "상대방을 알고 나 자신의 실력도 잘 아는 처지에서는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知彼知己 百戰百勝)고 하였다. 첫 번째 편지 내용은 오므리 왕조에 서는 사람들에게 조롱 섞인 도전으로 오모리 왕조를 떠나 자신 예후 편에 서라는 것이다.
예후는 이제 두 번째 편지를 성읍에 있는 대관들에게 보낸다. “‘너희가 만일 내 편이 되어 내 말에 순종하겠다면, 너희 주군의 아들들 머리를 내일 이맘때까지, 이즈르엘에 있는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때에 왕자들 일흔 명은 모두 그들을 키우는 그 성읍의 대관들과 함께 있었다”(6). 대관들은 예후가 두려워 70명의 왕자들의 머리를 잘라 예후에게 바쳤다. 실로 무서운 장면이다. 예후는 이 말로써 그의 간교하고 음흉한 성질을 드러낸 것이다. 실상은 자기가 아합 왕자 70명을 죽이도록 명령하고도 이제 와서 자기는 그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듯이 그들을 죽인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합 왕실의 멸망이 주님의 뜻대로 실현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정당시 하였다. 그는 아합 왕자들을 죽인 자를 단죄하지는 않은 것이다.
2열왕 10,12-14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즈야의 형제들을 죽이다
여기서는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즈야의 형제들" 42명을 죽인 사실에 대해 말한다. "아하즈야의 형제들"이란 말이 문자 그대로 번역되기는 하였으나 실상은 아하즈야의 형제들의 아들들을 가리킨다(2역대 22,8). 예후로 말미암아 이들이 죽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아합 왕실의 친속(親屬)들로서 이제벨의 우상주위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찍부터 아합 왕실과 깊이 교통한 것이 마침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로 더불어 친근히 지내는 자들은 마침내 그 악인과 함께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2열왕 10,15-18 예후와 여호나납
“예후가 다시 그곳을 떠나서 가다가, 자기를 맞으러 나온 레캅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났다. 예후는 그에게 인사한 다음, ‘내 마음이 그대 마음과 함께하듯, 그대 마음도 그러하오?’ 하고 물었다. 여호나답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후는 ‘그렇다면 그대의 손을 내미시오.’ 하고 말하였다. 여호나답이 손을 내밀자 예후는 그를 자기 병거에 태웠다”(15).
"레캅"은 겐 부족에 속하였는데(2역대 2,55), 모세의 장인이 이 부족에 속하였다(민수 10,29). 이 부족은 사치와 방종을 피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데 엄격한 경건(敬虔)을 유지하려고 유목 생활을 택하였다. 예례미야 시대에 레캅의 자손들은 유목생활의 이상을 실천하였다(예레 35,5-11). 그들은 농경 생활과 정착 생활을 조상들의 하느님에 대한 온갖 불충의 근원으로 보았다. 여호나납은 예후에게서 조상들의 종교를 재건하려는 열성을 확인하였다. 예후가 "레갑의 아들"(레갑의 자손이란 뜻) 여호나답을 이렇게 높인 것은 자기의 혁명이 경건을 위한 다는 인상을 민중에게 주려는 정치적 목적이다.
2열왕 10,18-27 예후가 바알 숭배를 없애다
예후는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놓고 자신이 아합도 더 바알을 섬기겠다고 말한다. 예후는 자신이 아합보다 바알을 더 많이 섬기리라는 말로 뭇 백성들을 쉽게 눈속임한다. “그러니 이제 바알의 예언자들과 숭배자들과 사제들을 모두 나에게 불러오십시오. 내가 바알에게 성대한 제사를 드릴 터이니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빠지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을 없애 버리려고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다”(19).
그런데 그가 이렇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바아사와 시므리의 경우를 비교해 보며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군사 혁명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개혁의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9,31) 백성들 가운데서도 예후의 혁명을 시므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백성들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예후의 기발함이 잘 나타난다(9,16절).
예후와 여호나답은 바알 신전 주위에 80인의 호위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예배를 다 드릴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만약에 예후가 이방의 제사 의식에 참여했더라면, 예후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즉, 그 행위가 본심에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하느님의 신실한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뭉쳐진 신실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후의 호위병과 무관들 바알 신전 사제들은 물론 신전 기둥을 뽑아서 불태웠다. “또 바알의 기념 기둥을 부수고 바알의 신전을 허물어 뒷간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27). 뒷간 즉 변소는 '성읍의 모든 불결한 것을 두는 저장소'이다. 그런데 바알 신당을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은 바알 신에 대한 모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유행하던 최대의 모욕이었다.
2열왕 10,28-36 예후의 죄와 그의 마지막
예후가 바알 숭배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숙청을 가했지만 베텔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숭배는 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나 예후는 마음을 다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걷는 일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예로보암의 죄에서는 돌아서지 않았던 것이다”(31). 즉, 이것은 마치 남쪽 유다 임금들이 종교 개혁을 했을 때 산당을 전부 파괴하지 않은 것과 흡사하다. 열왕기 저자는 예후의 무자비한 학살을 예찬하지만, 호세아 예언자는 가혹하게 비난한다(호세 1,4).
“예후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35). 예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28년이다(기원전 841-814년).
2열왕 11,1-20 아탈야의 유다 통치
“아하즈야의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1-2).
아탈야는 이스라엘 임금 오므리의 손녀이고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자 유다 임금 여호람의 아내이다. 아탈야가 유다의 요람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북이스라엘 임금 아합과 남유다 임금 여호사팟이 군사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세운 혼인 정책 때문(1열왕 22,2-4)이었을 것이다. 아탈야는 다윗 왕족 모두를 살해함으로써 유다의 왕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아탈야의 계획은 어김없이 실행되고, 다윗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탈야는 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7년째 되는 해에 아하즈야의 여동생 에호세바는 여호야다 사제에게 보내어 다윗의 후손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왕자인 요아스가 6년 동안이나 숨어서 살아야 했다는 것은 아탈야가 임금의 씨를 멸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극악하게 애써왔는가를 보여준다. 그래도 요아스와 그 유모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차례 아탈야가 성전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2역대 24,7) 하느님께서 다윗의 씨를 보존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한편 요아스가 아탈야의 눈을 피해 성전에서 6년 동안 양육받았던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윗의 씨가 보전됨, 요아스는 다윗의 왕통을 이어야 할 자이다. 그리고 다윗의 왕통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언약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탄은 아탈야를 통해서 다윗의 왕통인 요아스를 죽여 하느님의 언약을 파괴시켜 버리려는 어마어마한 흉계를 꾸몄다. 또한 6년간 숨겨진 요아스는 종교 개혁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요아스는 주님의 전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사제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12,2) 주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각성을 쌓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12,4-6).
4절에 칠 년째 되는 해에 반란이 일어난다. 여기서 칠년이란 말은 어떤 사건의 결정을 이루는 해를 가리킨다. 즉 이는 여호야다가 지금까지 준비하고 계획한 요아스의 임금 복권 운동의 절정의 시점을 말한다. 이와같이 7일, 7주, 7년이란 기간에서 7은 종종 어떤 사건에 있어서 위기의 정점을 나타낸다. ‘여호야다’ 이 이름은 하느님의 이름 '주님'(Yahweh)와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다'가 합성된 것으로서 '주님께서 아신다'라는 뜻이다. 여호야다가 주체가 되어 모든 거사(擧事)를 진행하고 지휘한 것으로 보아 그가 요아스의 임금 복권 운동의 핵심이었다.
여호야다는 주님의 집 즉 성전에 있는 요아스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그에게 기름을 부은 다음 사람들이 다함께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하고 외쳤다. 이 증언서는 ‘증언판’이라고 불리는 두 십계명 돌 판의 내용이 남은 두루마리로서 임금이 이를 소중히 여겨 우선 자신이 어김없이 지키고 백성들 또한 지키도록 해야할 율법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과 다윗 집안 사이에 맺은 계약의 조항들을 써둔 것이거나 임금의 권한을 적어 놓은 두루마리일 수도 있다.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14).
대사제 여호야다는 임금의 경호를 담당하던 용병 “카리 사람”(11,4)과 지바의 세력 있는 상류층(또는 지주)으로 추정되는 ‘그 지방의 백성’(11,14)의 도움을 받아 요아스를 유다 임금으로 세운다(기원전 835-796년). 그리고 아탈야를 처형하도록 명령한다. 그녀도 어머니 이제벨처럼 표독스럽게 반항하지만 체포되어 죽는다(11,13-16). 대사제 여호야다의 주도 아래 요아스 임금은 바알 신전을 허물고 바알 사제를 처형하도록 명령한다.
이 모든 것이 여호야다가 중재하여 임금과 백성이 야훼와 맺은 계약이다. 계약을 통해 이 백성은 “주님의 백성”(11,17)이 되었다. 이 계약 의식은 아탈야의 왕위찬탈 때문에 파기된 다윗의 계약을 갱신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20).
아탈야의 학정과 종교적 부패, 그리고 비리 등으로 그 동안 백성들이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이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온을 얻었음은 새로운 임금권이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 참으로 불안한 지도자, 불안한 정책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서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를 들면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게 마련이다(잠언29,2). 그러므로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사회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정의가 넘치고 의인이 대접받을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는 보다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소지해야 하겠다. 한편 여기서 '평온'이란 말은 '조용하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안정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2열왕 12,1-22 요아스의 개혁
“요아스는 임금이 될 때에 일곱 살이었다. 요아스는 예후 제칠년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치브야인데 브에르 세바 출신이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 사제가 가르쳐 준 대로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1-3).
북이스라엘의 예후(기원전 841-835년)와 남유다의 아탈야(기원전841-835년)는 같은 해에 임금위에 올랐는데 아탈야는 유다를 6년 동안 다스렸다. 따라서 요아스가 7세에 임금위에 오른 해는 예후의 칠년에 해당된다. 요아스란 말은 '주님은 강하시다', '주님는 도와주신다' 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그가 죽고난 이후에는 하느님께 범죄하였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여호야다가 죽자 바알 숭배에 관심이 있는 새로운 측근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타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2역대 24,15-25). 한편 여호야다는 1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2역대 24,15) 그가 죽은 시기는 요아스 임금 23년 이후이다(6절).
산당에 드린 제사가 우상 숭배였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이곳이 비합리적인 주님 숭배 장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사(1열왕 15,14)나 여호사팟(1열왕 22,43)과 같은 선한 임금의 경우에도 이 산당은 제거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 제사는 히스키야 시대(18,4)에서야 비로소 제거 되면서 요시야 임금 때에 제사의 중앙화를 이루게 되었다(23,8). 한편 이러한 산당 예배는 당시 제사의 중앙화를 이루지 못한 유다의 일반적인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나라의 쇠망을 촉진시키는 일이 되었다.
“요아스가 사제들에게 일렀다. ‘주님의 집에 들어오는 모든 헌금, 곧 개인이 바치는 일반 헌금, 의무 헌금, 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주님의 집에 가져오는 모든 헌금은, 사제들이 저마다 친지에게서 받아 두었다가, 주님의 집에 부서진 곳이 드러나는 대로 그 부서진 곳을 고치는 데에 쓰시오”(5-6).
5절에서 성전 보수의 주체가 요아스 임금임을 열왕기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포로 시대 이전에는 제사장보다 임금의 권위가 더 존중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아스 임금은 성전 수리를 위하여 한 때 모세가 성막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을 다시 바치게 하였다(2역대 24,6). 이때 거두어 들인 세금의 종류는 다음 세 가지로 분류된다. 1) 사람의 통용하는 은(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각 사람이 위로 지나갈 때에 드는 돈'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두세나 주민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인구 조사에 의해 계수된 20세 이상의 장정들로부터 받는 돈인데 이는 탈출 30,13, 14에 근거한 세금이다. 2) 각 사람의 몸 값으로 드리는 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각자의 평가에 대한 사람의 돈'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서원하는 자들에 대한 제사장의 평가에 따라 징수되는 세금으로서 연령이나 남녀의 성별의 차이에 따라 그 징수액이 각각 달라졌다(레위 27,2-8). 그리고 사람이나 생물의 첫 탄생인 맏물을 주님께 바칠 때 드리는 세금도 여기에 포함된다(민수 18,15,16). 3) 자원하여 주님의 전에 드리는 은: 자발적인 헌물로서 성소에 바치는 은을 말한다. 이것은 성막에 관련된 경우와 같이(탈출 35,21) 자원하는 예물이었다. 그런데 이 돈들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각 자기가 살던 성읍에 가서 잘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와서 성전의 부서진 곳을 고치는데 사용하였다. 한편 역대기에서는 이 세 가지의 종류의 세금을 전체적으로 통칭하여 "주님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라고만 표현하였다(2역대 24,6).
위에서 언급한 세금들은 유다의 각 고을에 있는 제사장들이 거두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전 수리도 성전에 종사하는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것 같다. 즉 이것은 성전 복구를 위한 요아스 임금의 큰 뜻과는 달리 성전 수리가 전 국민적 운동이 되지 못하고 매우 소극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포로 시대 이후에 성전을 복구하기 위한 제사장들의 열의와 비교해 보면 당시 성직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2역대 24,5).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임금 때(기원전 959년;1열왕 6,38) 지어진 것으로 당시를 요아스 임금 때(기원전 835-796년)의 초기로 보더라도 그것은 약 130년, 혹은 140년 정도가 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전은 아탈야의 아들들에 의해 심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보수할 곳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2역대 24,7).
아람 임금 하자엘은 갓을 점령하였다. 성경에서의 '갓'은 본래 필리스티아의 주요한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였으며(가자, 아스클론, 아스돗, 에크론, 갓:1사무 6,17) 초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성읍은 기름진 해안 평야(필리스티아 평야)의 일부로서 르호보암 시대에 유다를 방비하는 성읍들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요새이기도 했다(2역대 11,8). 갓은 아람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남방에 있는 갓(Gath)를 하자엘이 먼저 침략한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그러나 하자엘의 편에서 볼 때 물질적인 소득과는 별개의 문제로 갓의 후방에서 예루살렘을 제거하는 것은 전략상 상당히 유익한 것이다. 한편 갓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적어도 약 64km 이상 떨어진 먼 곳이었기 때문에 하자엘이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막강한 아람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한다는 것을 안 요아스는 자기 조상 때부터 성물(聖物)로 주님의 성전에 바쳤던 모든 보물을 하자엘에게 내어 주었다. 본문의 17절과 18절을 얼핏 보기에는 갓을 빼앗김으로 인해 요아스가 싸움도 하지 않고 보물을 다 내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2역대 24,24에서는 큰 참패 이후에 그렇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2역대 24,23).
어쨌든 요아스가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왕실과 성전의 재정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까지 처했던 것이다. 이에 요아스의 신하들이 음모를 꾸며 그를 밀로 궁에서 죽였다. 요아스는 40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리다 죽고 그의 아들 아마츠야가 남유다의 임금이 되었다.
2열왕 13,1-9 여호아하즈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 제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열일곱 해 동안 다스렸다”(1). 북이스라엘 여호아하즈 임금도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였고, 예로보암의 죄를 따라 걸었다. 예로보암의 죄란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 신당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도록 하는 것이다.
2열왕 13,10-13 여호아스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요아스 제삼십칠년에 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10). 여호아스(기원전 803-787년)도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면서 예로보암의 죄를 따라 걸었다. 여호아스가 죽자 예로보암이 그의 왕좌에 앉았다. 여기서 예로보암은 동명이인이다.
2열왕 13,14-22 엘리사가 죽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가 그에게 내려와 그 앞에서 울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14).
엘리사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의 죽음을 묘사한다. 여호아스는 엘라사를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13,14)라고 부르며 그와 의논한 마지막 임금이다. 엘리사는 임금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고 당기라고 한다. 임금이 활을 쏘니 엘리사는 그에게 “주님께서 베푸실 승리의 화살입니다. 아람을 이기실 승리의 화살입니다. 임금님께서 아펙에서 아람을 쳐서 그들을 전멸시키실 것입니다”(17)라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엘리사는 임금에게 땅을 치라고 말한다. 임금 땅을 세 번 치고 말았다. “그러자 하느님의 사람이 임금에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대여섯 번 치셨더라면, 아람을 쳐서 전멸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람을 세 번밖에 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19). 주님께 대한 청원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나서 엘리사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엘리사의 뼈에 닿은 주검이 다시 살아나는 마지막 장면에서(20-21)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예언자의 능력이 등장한다. “한번은 사람들이 주검을 묻으려다가 그 약탈대를 보고는, 주검을 엘리사의 무덤 속에 던지고 가 버렸다. 그런데 그 주검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다시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