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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승리의 탈출>의 줄거리:
해골이라는 곳에서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심까지의 사건의 흐름에 좀 특히한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실패로 끝나고 있는 죽음의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보다 실패보다 더 큰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 탈출하는 통로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통로는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승리의 탈출
(눅23:26-43)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승리의 탈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승리의 탈출’
1981년도에 개봉이 된 영화의 제목입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연합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에 축구팀을 결성을 합니다.
축구를 하는 것을 본 독일 장교가, 여러 가지 목적으로 그 중에 가장 큰 목적이, 독일이 포로들의 인권에 관한 협정이 들어 있는 제네바 협정, 인권을 보장해야 된다고 하는 제네바 협정을 잘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외에 광고를 하고, 또한 독일군의 축구팀이 연합군의 축구팀을 이김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독일이 지금 우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온 세계만방에 광고를 하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축구시합을 제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리 콜롬 축구장에서 축구시합을 하게 되는데, 이 포로수용소에 있는 연합군 축구팀을 지도하는 장교들이 이 축구시합을 계기로 해서 선수들을 탈출을 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콜롬 경기장에서 전반전이 끝나고 나서 선수들이 들어왔을 때, 그 라커룸에 있는 물을 담는 욕조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의 하수도를 통해서 지하를 뚫고 들어온 레지스탕스와 연결을 해서 탈출을 하도록 계획을 세워 놨는데, 그 콜롬 경기장에 무려 독일군 측 25,000명 연합군 측 그러니까 파리 시민들이 50,000명이 모여서 이 축구경기를 관람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래 약속과는 다르게, 이 독일군 측에서 독일군 축구 선수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현역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을 대거 참여를 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전반전을 4:1로 졌어요.
끝나기 전에 겨우 한 골을 만회해 가지고 4:1로 졌는데, 하수도를 통해 뚫고 들어온 레지스탕스가 라커룸에 나타납니다.
레지스탕스들이 탈출하기를 재촉하는데, 펠레 진짜 펠레가 등장을 해요. 무려 17명의 현역 선수들이, 보비무어라든지 펠레라든지 하는 이런 선수들이 그 영화에 출연을 하게 되는데, 펠레가 ‘지금 우리가 탈출을 하게 되면, 축구시합을 지는 것 이상의 것을 지게 될 것이다. 모~든 파리 시민들이 이 경기에서 이기기를 소망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이 온 유럽을 점령하고 있는 차원에서, 이 상황에서 정말 그 패배감을 이 축구시합에 다 걸어서, 승리의 어떤 성취감과 승리감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4:1로 진 상태에서 다 탈출해 버리고 나면, 이것은 축구 시합을 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영원히 독일에게 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펠레가 설득을 해서 다 탈출을 포기하고 시합을 계속하게 됩니다.
아! 그런데 마지막에 기적적으로 동점골을 넣게 돼서 페널티킥을 얻게 되고, 실베스터스탤론이 골키퍼를 하면서, 페널티킥을 막게 되어 무승부로 끝나자, 승리감에 도취된 파리 시민들이 다 쏟아져 내려옵니다, 경기장 안으로.
그리고 그 시민들이 50,000명이 내려와 있어서, 도대체 누가 선수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옷을 다~ 바꾸어 입도록 자기 옷을 벗어서 선수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하면서 공개적인 탈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 장엄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도 아직도 기억이 나고 유~명하고 아주 클래식한 고전적인 탈출영화로 등록이 된 그런 영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한 청년, 그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유대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 한 청년의 마지막이고 실패이고 죽음을 향해 가는 얘기입니다.
근데 이 누가가 기록한 기록의 내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 되는 것이, 이것은 뭔가 죽음과 실패와 종착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탈출입니다.
지금 탈출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가려진 채 은밀히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독일군이 다 보고 있는 가운데 50,000의 관중들이 내려와서, 50,000명 틈에 끼여서 이 선수들이 탈출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모~두가 다 보고 있는 가운데에 탈출이 시도 되고 있는데,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시도되는 이 탈출에 대해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고 채찍에 맞아서 고통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신 채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고 있는 이 과정이, 누구의 눈에 다~ 비치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탈출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탈출의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절이 어떤 구절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많은 무리들 틈에서 우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자들을 보고 뭐라 그러시냐 하면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지금 너희들 눈에는 내가 비참해 보이고 내가 안타까운 상황으로 정말 곤궁에 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여 지는구나, 근데 아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건 나지만 십자가를 안 지고 있는 너희들의 상황이 훨씬 더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그렇게 비참한 상황을 빠져 나가고 계신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비참하냐 하면, 지금 우리 보통 사람들의 소원이 뭡니까?
성공하는 것, 잘 되는 것 이게 소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울고 있는 여자들의, 그리고 그 여자들이 낳은 자식들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될 거냐 하면, 산을 향하여 ‘산아 무너져서 우리 위에 덮여서 우리의 삶이 다 멸망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 소원이 되는 그런 상황이 올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망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인 것으로, 망하는 것이 최선인 상태가 올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망하는 것이 최선인 그런 자리를 지금 빠져나가고 계시는 겁니다.
그럼 빠져 나가서 어디로 가느냐?
마지막에 양쪽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매달리는데, 그 중에 한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께서 계시다가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죽음이고 마지막 끝이고 비참함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그 길을 가셔서 떠나시는 그 자리는, 산이 무너져 산사태에서 산에서 굴러 떨어진 돌에 깔려 죽는 것이 최고인 그런 인생의 상황이 주어질 것이고, 거기서부터 빠져나가서 주님은 어디로 가시냐 하면, 양쪽에 있는 강도 중에 한 강도를 데리고 낙원으로 빠져 나가시는 그런 과정으로, 지금 십자가의 길이 한 통로가 되어 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 이거 참 희한한 거 아닙니까? 승리의 탈출이 이루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 눈에는 그냥 비참한 상황만 보여 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상은, 빠져 나가고 있는 거예요.
어디로부터 빠져 나갑니까?
산이 무너져서 산사태 때문에 깔려 죽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이고 모~든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소원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부터 빠져 나가서 낙원 쪽으로 지금 돌진해 들어가고 계시는 겁니다.
승리의 탈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시각은 여자들의 시각이에요, 울고 있는 여자들의 시각.
십자가를 지시면서 죽음을 향해 가시는 주님이 몹시 불쌍합니다, 마음이 찢어질 만큼 아픕니다, 그래서 웁니다.
근데 그 여자들을 향해서 주님이 뭐라 그러시냐 하면,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우는 것이 넌센스다.
넌센스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동안에 빠져 나오고 있는 너희의 자리는, 너희는 너희 그 자리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 가는 나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나를 보고 불쌍해서 울고 있지만, 실상 그 자리는, 자식을 낳고 살고 있다면, 자식을 낳아서 지금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너무 저주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자리가 될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지 못한 배와 아기를 낳지 못해서 젖을 먹여 본 적이 없는 그 젖이 복되다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 이겁니다.
이 말을 확장 시켜 보면, 사업이 잘~ 돼서 잘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가는 길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행복한 성공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될 거냐 하면, 그 사업 때문에 내 상황이 더 불행해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올 거라는 겁니다.
성공한 사업 때문에, 차라리 사업을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덜 불행할 텐데, 성공한 사업 때문에 불행해 질 거라는 얘기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아이를 못 낳는다는 것은 요즘 아이를 못 낳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것은 곧 저주에 해당되는 거였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대가 끊기는 거라고 봤어요.
그런데, 실상은 어떤 것이냐 하면, 자식을 낳은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 것을 알고, 자식이 없는 여자를 향해서, 저 여자가 성공했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고, 이렇게 의미를 확장 시키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사업이 잘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그 상황, 하나님께 복 받아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라는 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됐다고 하는 그런 모~든 상황들이, 성공이면 성공일수록, 부자면 부자일수록 더욱 더 그 상황이 저주스럽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거라는 얘기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올까요, 왜?
이 여자들이 지금 울고 있는 이것과 한 강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린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과 주님께서 비교하고 계시는 겁니다.
비교하면 어떤 겁니까?
사람들은 전부 기적의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예수님이 불쌍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메시아가 누구냐 하면,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거든요, 나라를 가져 오신 분.
근데 이 사람은 이 지상에서 나라가 아니라, 지금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나라를 이루실 때에 내가 한자리 하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 죽음으로 가고 있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를 인정을 합니다.
이게 바로 메시아 신앙이라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빠져 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이 세상에서 왕이 되는 예수님을 붙잡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능력과 기적을 베푸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빠져 나가는 예수님이 불쌍해 보이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음을 통해 빠져 나가는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 걸 깨닫고,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이 강도를 데리고 주님께서 낙원으로 탈출해 나가십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진짜 메시아로서 당신의 나라로 빠져 나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메시아 신앙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이 빠져 나가는 것, 왜 이렇게 비참해 지는 겁니까?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우면서 이 여자가, 아이가 없는 여자가 성공이라고 부러워하게 되는 상황이 왜 주어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을 자식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식에게.
지금 주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식을 위하여 울라’는 이 말씀은, 지금 네가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마음이 묶여야 될 가장 큰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마음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이유 때문에, 너는 뭐라고 얘기하게 될 거냐 하면, 앞으로 ‘아기를 낳아서 기르지 않은 저 여자가 너~무 너무 부럽다’는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산들이 무너져서 내 위에 덮쳐버려서 내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원이 될 상황이 주어질 거라는 겁니다.
왜? 이 세상 내 삶에 대해서 내가 마음을 다~ 이 땅 위에 가지가지 것들에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있었던 이 상황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얘기하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아는 사람은 아는 거예요.
34절에 주님이 뭐라 그러냐 하면 ‘저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몰라서 저러고 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뭘 모른다는 겁니까?
마음을 이 땅에 붙이고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이 성공인 줄 아는 것, 모르기 때문이라는 얘기에요.
아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에서 마음이 빠져나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몸을 떠나 지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뭘 아느냐?
이 지구에서 어쨌든지 마음이 떠나는 것이 최고라는 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지구에서 마음이 떠나는 게 방해가 될 것 같다 그러면, 자식이 없는 게 낫다는 거예요.
결혼도 안 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내 마음이 빠져 나가는 데 자꾸 걸림이 되고 매임이 된다면,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빠져 나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겁니다.
이 지구 위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까 성공할까 가 과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이 지구 위에서 빠져나가서 낙원에 이를 것인가에 온 총력을 기울이라는 얘기가, 오늘 이 본문 누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이 행로의 의미가 바로 거기 있다는 겁니다.
승리의 탈출을 위해서 주님께서 지금 통로를 만들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이 떠나신 자리는, 산이 무너져 내 위에 덮이는 멸망이 최선의 것으로, 최선의 성공으로 여겨지는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회사 나가서 승진하기를 원하고, 자식들이 잘 돼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장이 어떤 현장이냐 하면, 내막을 들여다보면 한 껍질만 벗겨보면, 산이 무너져 내 위에 덮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라는 얘기에요.
근데 그 자리에 내가 마음을 묶어 놓고 있는 겁니다.
빠져 나가세요!
승리의 탈출을 시도 하세요!
그것은 한 강도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붙잡는 겁니다.
능력의 예수님, 기적의 예수님, 이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을 끌어안는 겁니다.
그래야 탈출이 이루어집니다.
승리의 탈출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에덴에 이를 것이다’ 이 말씀은 나에게도 주시는 말씀이에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이 세상을 떠나시는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다’
오늘 우리 마음이 낙원을 접촉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과 함께 죽을 때.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이 마음 없애고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겁니다.
낙원에 임해서 우리 마음이 에덴의 기쁨을 회복할 때에, 이제 우리 이 남은 몸을 통하여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고, 우리 마음은 탈출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의 과제는 승리의 탈출인 것을 기억하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떡하던지 이 세상 안에서, 이 땅 위에서 내 마음을 묶는 것에 대하여, 십자가를 붙잡고 끊어내고 마음이 탈출해야만 합니다.
탈출이 우리 마음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과제인 것을 깨닫고, 한 강도처럼 에덴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