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의 애지문학회 카페에서
----황박지현, 김길중, 유계자의 시
맑은 고딕체
황박지현
어느 각도에서 어디를 보아도
참 반듯하고 단아한 자태
네모는 네모의 정석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의 정석
어떤 장식도 허용하지 않는다
휘어짐 없는 꼿꼿한 선은
선비가 따로 없고
일정하고 가지런한 간격들은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말라는
관계의 철학을 설파한다
일생 가까이 두고 벗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친구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동그랗고 네모난 노랫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황박지현 시집 ,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에서
꾹꾹 누른다
김길중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풍덩한 몸빼 바지를 입은 할머니가 쪽 마늘을 심는다
밭고랑
간격을 맞춰 뚫어 놓은 작은 구멍에
쪽 마늘을 하나씩 넣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누가 먹는다고 그렇게 많이 심냐 물으니 큰 딸년은 삼겹살 먹을 때 싸하게 매운 마늘이 최고라고 지랄하고 작은 딸년은 반찬으로 마늘쫑만 한 게 없다고 지랄이니 하는 수 없이 해마다 이 지랄하고 있다며 나를 힐끗 쳐다본다
애들 학비 때문에 밭 담보 잡히며 꾹 누르던 그 손으로
집안 돌보지 않던 바깥양반 때문에 본인 가슴 꾹 누르던 그 손으로
꾹꾹 눌러 심으며
젊어서는 그 양반이 나를 꾹꾹 눌러주었는데 늙어서는 내가 딸년들을 위해 꾹꾹 누르고 있다고 씩 웃으신다
참 맑다
-2023년 《애지》 가을호에서
물마중
유계자
그녀의 굽은 등에 파도가 친다
오롯이 숨의 깊이를 다녀온 그녀에게
둥근 테왁 하나가 발 디딜 곳이다
슬픔의 중력이 고여 있는
물의 그늘 속에 성게처럼 촘촘히 박힌 가시
물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엔 딸의 물숨이 묻어있다
끈덕진 물의 올가미
물숨을 빠져 나온 숨비소리가 휘어진 수평선을 편다
바다의 살점을 떼어 망사리에 메고
시든 해초 같은 몸으로 갯바위를 오를 때
환하게 손 흔들어 물마중 해주던 딸 ,
몇 번이고 짐을 쌌다가
눈 뜨면 골갱이랑 빗창을 챙겨 습관처럼 물옷을 입었다
납덩이를 달고 파도 밑으로 들어간 늙은 어미가
바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테왁 같은 낡은 집이 대신 손을 잡는다
저녁해가 바닷속으로 자맥질하고 있다
-유계자 시집 『물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