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춘천 동면에서 태어나 6.25가 끝나고 춘성군 사북면 가일리에서 이주하여 나면서 부터 화전민의 자녀가 되여 있었다
그 마을은 70호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1.2.3반으로 이루어졌다
아주 시골중 시골이고 깡촌중의 깡촌이었다 학교는 멀고도 멀어 대부분 학교를 2.3연 쯤 늦게 들어 가기에 나도 거기에 합하여 3년을늦게 들어가면서 그 늦은 시기를 하도 놀기만하고 공부는 할수가 없어서 하버지는 한문 서당에 넣었다
난 하루종일 놀다가 한줄 배우기도 하고 그냥 집에 가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조카는 명심보감 한줄 배우는데 하루 종일 배워도 그것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늘 놀다보니 재미가 있어서 천문 떼고 동몽선습 떼고 명심보감을 공부하면서 그후에 논어 맹자도 공부하면서
2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국민학교로 들어 갔다 참재미 있고 특히 운동하고 뛰고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운동회때는 너무 기뻤다 100미터 계주 등 육상에는 탁월한 실력이 있어서 온 대회를 휩쓸었다
학교 갈때는 북한강에서 네려오는 나룻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아침에 강바람을 쇠고 새벽 배를 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또 배를 타고 강건너서 5리쯤 도 가야하기에 무조건 지나가는 차는 다 세워도 먼지만 피우고 210호 버스는 세울때마다 세워준다
선행응 오래도록 가는 것 70이 넘은 나이에도 그 추위때 공자로 태워 주었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6학년 친구가 4명 있었는데 3명은 다 죽고 나만 남았다
그들에게는 추억이 많다 내가 신발을 잊어버리고 한쪽신을 잊었을때 소로 한쪽신을 빌려주면서 하교 하기도 하고 한 친구는 나랑 다른곳에 살아서 누가 먼저 갔을땐 막대기를 꽂아 놓고 가면 아 친구가 먼져 갔구나 하고 빨리가서 중간마을에서 다함께 모여서 가게 된다
그리고 아침밥이 늦어서 발가야 할때는 세째누님께 막 신경질을 부리곤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기에 지금도 세째 누님께 잘 하고 있다
이제 화전민 이야기를 좀해보자
먼저 평평한 산을 맡아 놓고 여를에 부대를 베어놓고 마르면 바람 불지 않는 택하여 불을 놓고 다음해에 콩.팥.조.수수등을 심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거의 품아시로 소 짝도 하고 심고 김매고 밭갈때 함께한다
특히 가을에 걷두어 들일때는 온동네에서 나서서 울력으로 집으로 지고 네려온다
1968년 대 홍수가 일어났났을때 온 밭이 다 떠네려가고 그때 으리집도 떠네려가고 그때 한 어머니가 애기를 데리고 개울옆에 섰는데 산사태가 네려와 어머니는 사태로 쓸려가고 아이만 남게 되는 비극이 벌어지고
동네에서 함께 돈을 걷어 사온 발도기도 떠 네려 갔고 시체와 발동기도 찾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 갔다
그때 어머니와 나는 큰 사태가 일어 나는 것을 보았고 많은 토사는 서울로 흘러가고 그후에 춘천댐이 생기고 우리느 수몰민이되어 보상도 받고 그때 박저의의 화전민 정리로 다 뿔뿌이 헤어지고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때는 댐이 없어서 그 많은 토사는 서울로 이도하여 지금의 강남을 만들고 앞으로 통일되면 북한의 토사도 더시 평양을 건설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모든 도시는 60년대 화전민이 만든 도시라고 생각한다
난 화전민 출신으로 이제야 자부심을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