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예언 6
(창49:27-33)
(요약)
베냐민에 대한 예언은 한 마디로 이리가 되어라는 것이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는 대단히 호전적인 지파요 용감한 지파였다. 그런데 이리의 악함은 강한 식욕에서 비롯되며 식욕은 곧 탈취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마음의 갈망은 커진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이 사모함은 개인적인 영적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공동의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께 가까이 감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설교)
이 시간에는 계속하여 야곱의 예언 마지막 번째로 베냐민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27절에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여러분, 이런 축복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꼭 이래야만 한다면 차라리 축복을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아름답게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라의 쓴 물도 예수 안에서는 단물로 변하고, 광야 이스라엘이 죽어 새 국민으로 바꾸어짐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공로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도 예수 안에서는 성령의 은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경 읽다가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27절의 베냐민에 대한 예언은 문자적으로는 결코 은유가 아닙니다. 실재로 베냐민 후손들은 역사 속에서 이 예언대로 대단히 거칠고 호전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리가 어떤 동물입니까? 이리는 보통 늑대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가족 단위로 생활하지만 겨울에는 여러 가족이 모여 큰 떼를 형성하여 습격하는 동물입니다. 대개는 야행성이지만 낮에도 활동하는 주야구별이 없는 전천후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리가 얼마나 악하든지 개 이빨보다 강도가 3배나 강해 물면 뼈까지도 부숩니다. 그리고 공격할 때는 그 움직임을 거의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민첩합니다. 그리고 식욕이 대단하여 송아지나 염소 1마리를 앉은자리에서 다 먹을 수 있으며,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동물의 사체도 잘 먹고 나무 열매까지도 먹는 잡식성입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거친지 삿 3장의 에훗과 삿 20장의 기브아의 전투 그리고 삼상 11장의 사울왕의 전투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삿 20장 기브아 전투 때 어떻게 했습니까? 동족 끼리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인데 기어코 회개하지 않고 대결하지 않습니까? 그 결과 이스라엘 11지파 용사가 수만 명이 죽고 베냐민도 처음에는 이기다가 나중에는 베냐민 용사 600명을 빼고는 전 지파가 전멸하는 비극을 만납니다. 그 후에도 다른 민족과도 자꾸 싸우지만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그런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예언은 싸움 잘하는 그 기질보다 이리의 식성에 핵심이 있습니다. 먹고도 또 먹으려 하고 또 먹고도 또 돌아보며 또 먹으려고 하는 그 놀라운 식성 말입니다. 이 식성이 우리의 영적 생활의 요소에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정상적인 영적생활을 유지하려면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먹고도 또 먹고 싶고 먹고도 또 달라하고 먹고도 으르렁거리며 빼앗아 먹고도 부족해 감추어 놓고 또 밤에 나누어 먹을 만큼 그런 사모하는 심정입니다. 먹고도 또 돌아보고 먹고도 또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은 약 두 가지입니다. 27절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27절 상반 절에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그랬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입니까? 영적으로 심히 풍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를 보세요. 시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19:97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리고 시119:131에는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시로서 시편 84편이 아주 유명하지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10)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을 팔복에서 첫 번째로 하셨습니다.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 받고도 또 사모하고 더 사모하는 마음 우리 주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늑대의 식욕과 같은 마음이에요. 늑대는 배가 불러도 먹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특이한 동물입니다.
이처럼 특이한 것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사모합니다. 어쩌면 성경이 늑대로 비유하고 있는지 그래서 진리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분명히 영적으로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심령이 가난한 자처럼 됩니다. 가난하다는 것을 원문으로 보면 거지입니다. 거지와 같이 항상 얻고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사모하는 것만 보아도 은혜 받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2. 공동적인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27절 하반 절에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우리로 치면 자기가 얻은 말씀들을 다른 무리와 같이 나누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나눔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가장 많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도 이리처럼 평소에는 개인 혹은 가족 단위로 살다가 필요시에는 여러 가족들이 한데 모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리처럼 사모하되 함께 모여 말씀 듣고 기도하며 공동적인 사모함이 없이는 우리 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나 혼자 예배하고 나 혼자 성경연구하고 나 혼자 하겠다고 하는 사람 가령 무교회주의 같은 사람들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혹시 보이는 교회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초대교회가 보여준 그 모임과 교회의 직책과 제도를 송두리 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우리에게 맡기신 역동적 교육과 선교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장작개비도 모아놓아야 타지요? 그러나 흩어놓으면 다 꺼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교회에서 살아서는 안 되지만 모이되 이리의 식성과 같이 모이고 또 모이고 또 모이고 싶어 하세요. 주일예배 한 번으로 만족하십니까? 우리 영혼의 특성 상 주일예배 한 번으로는 그 갈망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삼일기도회도 필요하고 그런데 삼일기도회만 나오면 다 끝납니까? 삼일기도회 나와도 새벽기도회 나오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것은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기를 “온 세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인데 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만 예배해야 합니까? 산과 들에 나가서도 그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예배하세요.” 했다가 교인들이 너도나도 주일날 산과 들로 다 놀러가서 결국은 세상사람 다 되더랍니다. 대단히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공동의 예배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굶주린 이리와도 같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주님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채우십니다.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은혜 받고 공동으로 은혜 받아 충만한 영적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