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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8장 28-32절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잡히셨지만, 그렇게 잡히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고 난 뒤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아뱌에게로 가기에 앞서 그의 장인인 안나스에게서 먼저 심문을 받으셨는데, 그의 질문의 핵심은 그와 그의 제자들의 교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의 교훈을 몰라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단적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확인 차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더 자신의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지금까지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가르쳤다는 사실과 그러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가르침을 확인해 보도록 답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으로 있던 안나스의 아랫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데, 예수님은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지 바른 말을 하는데도 손으로 치는 행위는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한편 이런 심문을 지켜보던 사도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서도 기록하는데,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였지만 다시금 예수님을 따라 갔던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야바의 심문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안나스의 심문 과정 속에서 사도 베드로가 부인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부인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비교하자면 예수님은 그가 잡혀 심문을 받는 과정 속에서도 바른 말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결박을 당하신 상태에서도 자신의 가르침이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결박된 상태가 아닙니다. 결박된 상태와 비교하자면 자유의 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질문,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보다는 숨겼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있었느냐 하면 베드로의 장담이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것이라는 장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그는 마치 목숨을 내 놓기라도 하듯이 칼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자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것을 금하시면서 칼의 방식이 아님을 알리셨을 때 그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주를 따를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의 합당한 방식으로 주를 따를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주를 부인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숨기는 것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나라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내가 베드로였다면, 좀 더 올라가서 내가 아담이었다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이상, 그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는 이상 내가 베드로요, 내가 아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그 내용 속에서, 아니 그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내가 가는 그곳을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겁니다. 네 힘과 능력으로는 따라올 수 없지만, 성령이 함께 하셔서 친히 힘과 능력을 주시면 따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까지 하셨던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과 다음 주에 살핀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리도에게로 데려가 심문을 받게 하는 내용입니다. 안나스의 심문 이후 가야바에게서 심문을 받고, 그 이후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게 됩니다. 먼저 28절에 보시면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가야바의 심문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 다른 복음서에 보면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과 함께 서기관들, 장로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는데, 거짓 증인이 많이 왔지만 거짓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얻게 되는데, 그가 신성모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공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인 31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로 끌고 가느냐 하면 당시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이때가 새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새벽에 재판을 행하고 죄 없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많은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결국 사형을 선고하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줬다고 할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했는지, 그만큼 철저히 준비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면서 민란이 날 수 있다는 문제로 명절에는 하지 말자는 말을 하게 되는데(마26:4-5) 예수님을 존중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피해 밤중에 심문한 것이고, 새벽에 빌라도에게까지 왔다는 것도 이런 민란을 피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도는 세속 관원이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이방인이 만진 것을 만지만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부정하게 된 자들은 정결케 되기까지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는데,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서(민28:17-18 참고), 다시 말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신16:2 참고) 빌라도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매튜 풀 주석 참고).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는데, 어떤 장소에 들어감으로 더러워지는 것보다 더한 더러움, 이미 그들 안에 있는 그런 더러움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따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떡을 먹을 때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는 것입니다(마15:2).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고 말씀하시면서(마15:3),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그렇게 더러운 마음으로 내뱉는 말이 사람을 더욱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9-20)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디도서 1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특히 깨끗함과 더러움을 비교할 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더럽다고 한다면 깨끗하다는 것은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러운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서 더러운 것 외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스스로가 깨끗해서 그렇습니까? 그들 안에는 늘 깨끗한 것만 있어서 깨끗한 것이 나오기 때문에 깨끗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깨끗한 자이지만 깨끗한 자에게도 더러운 것이 나오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13:10). 결국 믿는 자를 깨끗하다고 하시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그들 안에 깨끗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깨끗하신, 점과 흠도 없으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말씀에 비춰보면 저들은 저들의 외적 행위만 살필 뿐 내적 마음의 상태는 전혀 살피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런 저런 전통을 세워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었는데도 그들 스스로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이 위선자들의 악의, 야심, 기만, 잔혹성 그리고 탐욕은 얼마나 풍성하든지 천지간에 온통 그들의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외적인 오염뿐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순결을 망각한 채 불결한 것만 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스스로는 깨끗한 채 하는 것이고, 그런 모습으로 심판자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비록 새벽이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끌고 왔기 때문에 빌라도는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9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빌라도의 질문에 대하여 저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30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일단 빌라도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는지 묻는 것은 자신이 재판관으로 있다고 할 때 자신의 임무를 어느 정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심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놓아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저들의 뜻대로 내 준 것은 결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비난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는 고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온 자들, 다시 말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그들 스스로 재판을 열어 예수가 죄인이라는 사실 아래 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행악자로 소개합니다. 행악자가 아니라면 당신에게 넘기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행악자인데 재판을 열어 옳고 그름을 분별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분명 죄인이라는 것이고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내려주도록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1절은 계속해서 빌라도의 질문과 저들의 대답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비록 유대 사회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법도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 앞까지 데리고 온 것은 단순히 재판해서 벌을 주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죽일 권한까지 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손을 빌리고자 한 것입니다.
다만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권한은 없지만 스데반 사건의 경우 소위 폭동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을 봐야 하는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할 때 어느 정도 사형까지도 열어 두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6장 4절과 5절에 보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는 말씀에 비춰보아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문제가 여러 가지로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을 잡아 심문할 때도 낮이 아닌 밤중에 진행했던 것이고, 민란 없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이 아니라 로마 위정자들의 손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로마 총독의 경우 민란이 일어나더라도 진압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맡기려고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도 새벽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죽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0장 18절과 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세 번째로 언급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분명 예수님은 안나스를 중심으로, 가아바를 중심으로 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로 끌려 간 상태입니다. 이런 과정만 보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재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예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미리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알고 계시다는 것은 그 일을 뜻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작정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는 일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원인을 찾는답시고 가까운 원인 혹은 제2원인에 해당하는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 열심 때문이다. 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것은 열심과 함께 내 실력 때문이다. 혹은 갑작스러운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내 주위에 누군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는 것은 진정한 사실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럼 진정한 사실로 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가까운 원인이 아니라 먼 원인, 제2원인이 아니라 제1원인,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유일한 원인이신 하나님에게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원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일어난 일이기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의 고백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누가 극심한 환난이 찾아왔을 때 주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한순간 재산을 빼앗겼다면 그 재산을 빼앗아간 강도 탓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 아니겠습니까? 이때 누구도 강도 탓으로 재산을 빼앗겼다는 말에 대하여 거짓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이지만, 욥의 고백은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원인자인 줄 알고 그분의 뜻 안에서 풀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이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바로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과 찬송 받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가야 할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욥기는 그 자리에서도 더 자라갈 것을 알리시는 말씀이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원인자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 계시는데, 이 모든 과정을 다 아시고서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것을 정하셨는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취급당하시고 실제로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정죄에 의해 우리의 정죄가 말소되도록 하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매튜 풀 주석의 내용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은 유대식이 아니라 로마식의 사형 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주님을 사형에 처하였더라면, 그들은 주님을 돌로 쳐 죽이는 방식을 택하였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셔야 하였기 때문에 “나무에 달리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갈3:13).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기는 주님을 하나님의 그런 계획을 모른 채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죽이려고 했다면, 바로 그 동일한 일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욥의 내용으로 오면, 욥이 당한 고난의 내용 이면에는 악인도 있고, 악인을 사주한 사탄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욥을 시험하겠다고 할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사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어 임의로 행하는 바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합니다. 그러나 원한는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도 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원인,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도 일하시고, 사탄도 일하고, 악인도 일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사탄은 사탄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합니다. 악인 역시 그들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들을 그렇게 행하도록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사탄과 악인은 그들의 본성대로 악한 목적, 악한 방식으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일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나타내십니다. 즉 동일한 그 일 속에서 하나님은 사탄과 악인의 목적과 다른 목적을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말씀을 응하게 하는 사건 한 가지가 더 기록되어 있는데, 지난 시간에 본 베드로의 부인도 그러한 내용 가운데 한 가지이지만 택자가 아닌 유기자 가룟 유다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27:1-10)
빌라도도 심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게 되지만, 그에 앞서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먼저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4절에 보시면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 방면에서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봤던 베드로와는 달리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택자로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 유기자로서만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기 전에 자신이 받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게 되는데, 이 돈에 대하여 대제사장들은 핏값이라고 해서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이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게 되는데, 이 모든 일이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자체는 선지자 예레미야라고 되어 있지만, 사본 상의 오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서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기록했다는 것 때문에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원본은 이런 오류 자체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가룟 유다와 관련하여 예언된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보면 스가랴 11장 12절과 13절이 은 삼십에 대한 말씀인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런데 이 말씀의 배경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시는 내용 속에서 나오는 본문입니다. 심판하시되 선지자를 통해 먹이신 하나님께서 그동안 너희를 먹인 품삯을 달라고 하자 은 삼십 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 은 삼십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 수고한 것에 비해 저들이 값을 쳐 준 은 삼십은 결코 합당한 값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마치 싸구려 취급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지만 저들은 그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가룟 유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는 열 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사도로서 예수님 바로 곁에서 보고 듣는 자로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까이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저버린 자가 누구냐? 바로 자신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만 은혜를 저버렸는가? 어떤 면에서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 모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렇게 밝혔던 겁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여기서 자기 백성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부르셨다는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왔으나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극치를 보여주는 분입니다. 로마서 증거에 의하면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롬8:32),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요1:16)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절할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 은 삼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값싼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성경을 통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와 관련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의 배신,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의 잘못이 하나님 탓인가? 그렇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일하시지만, 그들도 그들 자신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의 일이란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있을 뿐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았고, 또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회개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이기 위해 그들의 꾀를 모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빌라도의 재판장에까지 세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할 목적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가룟 유다,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관련해서는 로마서 9장 22절을 이루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즉 결국에는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고 계시다는 것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리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한해서만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사건에서도, 지난 시간 살펴본 베드로의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택자만이 아니라 유기자에 대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택자만이 아니라 유기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말씀을 응하게 한다는 것이 시간 안에서의 일이라면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 시간 이전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정 없는 말씀의 실행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작정의 실행으로 있을 뿐입니다. 시편 139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순경(順境)일 때는 괜찮습니다.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逆境)일 때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저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 일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또한 그렇게 이끌어가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게 계신 만큼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일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를 성경에 합당한 내용으로 갖춰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의 고백을 다시금 주목해야 합니다. 거기에 사탄의 꾀가 있고, 악인의 악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진정한 주체임을 알고 하나님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사탄도 빠뜨리고, 악인도 빠뜨렸지만 하나님만은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이 우리에게 뭔가를 행하면 악인만 봅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고백에서 악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주체임을 알고 하나님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원망과 불평이 아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을 가신 것 아닙니까! 온통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헛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진리만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를 먹고 마시며 사는 자로서 우리가 맺어야 할 것은 진리 외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진리만을 내놓을 수 있는, 반대로 순탄하게만 흘러가면 사람들은 온통 자신을 주목하도록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하는,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드러내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만을 답으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원인자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주체로 가져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빠뜨리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 마땅한 줄 아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