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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병의 수필세계
- 자아와 가정, 두 가치의 환상적 통합 -
권대근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
I. 로그인
수필을 읽는 맛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작품의 전체 구도 속에 숨겨진 주제를 작가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놓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며, 다른 하나는 작가의 다채로운 내면 풍경을 따라 가며, 작가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을 ‘보물찾기’에 비유하는 것이고, ‘인간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고는 박태병 수필에서 나타나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열린 시각이 어떻게 인생을, 또는 여성적 삶을 이끌어나가는지 작가의 측면에서만 살펴보겠다. 그것이 가장 박태병 수필의 문학성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다. 많은 작품 중에서 유독 이 작품을 골라서 평을 쓰는 이유는 필자 역시 이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의 감상문이 어떻게 수필화되었는지 살펴보았는데, 과연 수작이었다. 이 영화를 작가는 몇 차례나 봤다고 하니, 아마도 박태병은 <메디슨카운티 다리>를 영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까싶다. ‘한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쓴 수필이기에 예상대로 그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수필화하는 데 성공한 바, 이 작품을 텍스트로 삼은 것이다.
한 작품만 골라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아쉬움이 남는다. 우수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다루는 것이 제대로 된 비평이라면 이번 평론은 대략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수필집에는 위에서 조명한 작품 외에도 제목만 봐도 신변잡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우수한 수필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필집은 주제의 간접화와 문단처리 면에서 첫 번째 수필집과 차별화된다는 점도 돋보인다. 그의 관심 분야는 ‘여성의 심리’에 닿아 있다는 건, ‘인간성의 추구’라는 수필의 주제 지향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여성의 심리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봐서 그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휴머니스트가 아닐까. 수필가는 구경꾼이어야 한다는 쿠퍼랜드 교수의 지적에 비추어 보면 ‘영화’에 관한 수필은 디지털시대의 당연한 귀결이다. ‘영화’에 관한 단상을 수필화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는 영화를 보고, 한 평범한 시골 중년여성의 가슴 속에 잠재된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인간의 공존하기 어려운 두 가지 욕망을 인간적으로 긍정하는 수필을 씀으로써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의 삶을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사랑과 갈등을 인간사의 필연적인 논리로 설명하고자 할 때, 작가의 긍정과 열린 사유는 장엄한 생의 본질세계를 관통한다. 현실이나 여성의 심리를 보는 예리함은 바로 이 수필의 쾌미다. 수필의 맛은 문학 본질적 요소로 보면 <인식>에 해당한다. 수필의 <맛>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빛나는 중요한 사고 유형은 긍정과 열림이다. 두 사고 유형은 박태병 수필을 맛있는 글로 만드는 데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주인공 ‘프란체스카’에 대한 느낌이 궁금해진다. <메디슨카운티 다리> 속에 묻어나는 자아와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독자는 작가와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성의 자아와 가정 문제에 대한 박태병의 환상적 통합 메카니즘을 살펴보기로 하자.
II. 자아와 가정의 환상적 통합
박태병의 이 수필이 주목받는 것은 그가 장로 신분을 가진 수필가여서만은 아니다. 자아와 사랑이 모순적으로 화해되고 있는 한 중년여성의 현실 문제를 다른 남성보다도 훨씬 더 주체적인 눈으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정과 자아의 환상적인 통합에 대한 이해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녀가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개인적 사랑을 포기하고 나흘간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은 여인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영화의 의도처럼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수필은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면 여성 정체성 찾기 측면에서 소극적인 인식으로 나타나지만, 그는 장로이지만 사랑과 자아의 문제를 너무나 유연하게 터치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영화 한 편을 보고 쓴 글이 철저하게 주제적 양식으로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도 돋보이는 점이다.
작품이 주제 지향적 특성을 가져서 문학성을 확보하기도 하지만 그의 수필에서 가치로운 것은 주제와 기교가 혼연 일체가 되어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로서 하나로 변용되기 때문에, 작품성이 문학적 성취 수준으로 오르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압권은 ‘인간을 완성하는 조건’에 ‘감추고 아낄 수 있는 멋’을 놓았다는 데 있다. <메디슨카운티 다리>는 작가 박태병의 인식 세계의 독특함과 사랑과 자아의 갈등 문제에 대한 열린 감수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매력은 삼 일간의 사랑에 대해 내리는 작가의 포근하고 진솔한 해석을 음미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가지고 잠시나마 부적절한 길을 갔던 프란체스카를 단죄하리라 여겼다면 큰 오산이다. 일탈을 풀어가는 또는 일탈을 보는 정도가 예상을 초월하기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유연한 사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열린 사고를 읽는 데서 이 수필의 맛이 돋아난다고 하겠다.
여성은 사람받기를 원한다. 이는 곧 남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의 기대와 요구를 충족하는 것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성의 호감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기대와 유혹을 통해 본능적인 안정을 추구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랑은 여성 자신의 이상과 자유를 추구하게 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생각과 삶에 들어가게 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독립성이 강한 여자일수록 이에 대한 갈등이 클 가능성이 높다. 아직도 우리 사회나 유럽이나 가정을 지키는 것은 탄탄한 덕목이다. 여성의 사랑은 또한 모성적인 사랑으로 전형화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여성적 사랑으로 예찬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여성은 흔히 사랑을 일방적인 자기희생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남성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여성성의 표본으로 기대하게 된다. 이 수필을 맛있게 읽는 하나의 방법이라면, 이런 사회적 관습의 가치를 지키면서 내면에 있던 사랑의 욕구를 풀어내는 데도 성공한 주인공 여인을 보는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어제, 밤이 늦도록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를 보았습니다. 그 소문난 영화를 몇 차례 보았지만 나는 심야에 영화전문 채널을 통하여 다시 보게 된 것이지요. 그 영화가 내게는 퍽 흥미를 주고 있어서 추억 속의 명화라고 칭찬하며 잘 만든 영화로 평가합니다. 어쩌면 모든 여인이 그러하듯이 그 영화에는 당신에게도 잠재하고 있는 여인의 잔잔한 갈등의 모습들이 숨겨있다는 느낌을 가져보았습니다.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려 놓은 영화가 아닐까요.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발단 부분
사랑은 우리 문학이 지향해온 두 가지 테마 중의 하나다. 그만큼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전통적 철학적 관점인 구성주의로 보면, 인간은 신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사람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사람을 사랑할 때가 불가시적인 신을 사랑할 때보다 훨씬 더 자신 안에 감춰진 원초적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삶은 사랑이다. 이 영화는 사랑이 뭔지를 느껴보게 하는 힘이 있다. 주인공 프란체스카는 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지도 모른다. 박태병의 수필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는‘사랑에 관한 여성의 잠재된 심리’를 잘 묘파하고 있는 수필이다. 그것도 한 장로 수필가가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심리에 대한 글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인용 예문에서 ‘어쩌면 모든 여인이 그러하듯이’에서와 같이 작가는 여성에게 일탈 심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무조건 결혼했으면 한 남자에, 또는 한 여자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한 이해가 윤리 교과서적이라면, 굳이 여기에 소개할 가치조차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여성의 내면에 감춰져있는 심리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어서 관심을 끄는 글이다.
어느 날 남편과 두 자녀가 먼 타지방에서 벌어지는 송아지경연대회에 참가차 4박 5일간 집을 비우게 됩니다. 그녀가 맞는 며칠간의 해방이 이 영화가 차지하는 핵심 줄거리입니다. 여인이 가족을 섬기는 속박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속의 자유를 누리며 내가 찾고 싶었던 본향에 가고 싶은 본능을 탓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원작자 로버트 제임스 월러Robert James Waller가 묘사한 전편에 흐르는 이런 여성심리의 분석은 훌륭하다고 칭찬하겠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외딴집에 홀로 남은 여인은 발코니에 외롭게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회한의 고독을 씹고 있었죠. 때마침 메디슨 카운티 마을에 있다는 ‘로즈맨’ 다리를 찾는 사진작가 로버트 킨 케이드가 그 집 앞에 초록색 픽업 차를 세우고 그 다리로 가는 길을 묻습니다. 여인은 그의 차에 함께 타고 친히 길을 안내합니다. 꼭 필요한 그녀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유혹은 주고받는 남녀에게는 창조본능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은 조금도 어색하거나 불편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내숭은 있었지만, 그것은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전개 부분
위의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부부의 일상생활에서 억압의 냄새를 맡는다. 아내로서 가족을 섬기는 것에 대해 ‘속박’이라는 말을 쓰면서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혼자 남겨진 상태를 ‘해방’으로 규정하는 등, 그의 도덕적 윤리적 프레임에 대한 회의는 열린 인식으로 발전하여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케 한다. 삶에서 가끔 반은 규칙적이고 반은 우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현상들을 일컬어 우리는 유우성contingency이라고 한다. 예상할 수 있는 것과 예상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요, 결혼 생활은 바로 그 현장이다. 전통적 도덕관을 기반으로 하는 결혼방정식에 대해 의문을 눈길을 보낸 원작자 로버트 제임스 월리의 분석을 작가는 아주 훌륭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부부관계에 대한 부적절한 프레임을 열린 시작으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과 눈을 지닌 사람에게만 우연이나 실수까지도 행운이 되는 창의적 수필쓰기의 가능성이 찾아온다. 낯선 남자에 대한 여성의 친절한 행위에 대해 박태병의 시선은 호의적이다. 그 어울림에 대해 비록 영화를 보면서 느낌을 말하지만 그는 ‘자연스러운’, ‘조금도 어색하거나 불편할 수 없었다’는 평가로 나타난다. 자가는 프란체스카가 남편과 아이들이 여행 떠난 빈 집에 홀로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띠고 잇었는데, 작가는 ‘빈 빕’을 그녀의 심리적 공간으로 파악한다. 이 지점에서 그녀를 누구의 아내나 어머니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 나아가 한 명의 여성으로 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심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감독의 의도와 영화의 분위기에 공감과 긍정을 표한다.
그들 두 남녀는 가깝게 밀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작가로 세계를 떠도는 이혼한 전력을 가진 방랑자에게 잠시 해방된 여유를 얻은 여인은 잠복한 그들의 고독과 객기를 풀려는 욕망에서 일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흰 나방이 날갯짓할 때, 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오늘 밤 일이 끝나는 대로 들르세요.” 그녀의 유혹은 도전적이었습니다.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우리는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지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등의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속박당하고 있는 결박을 풀어 버리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은 무척 가련하지만, 영화는 에로틱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흘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끝나고 야속한 그들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데 자기 평생에 단 한 번만의 확실한 감정을 얻은 사나이는 함께 떠나자고 여인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기의 속박을 풀 용기가 없었지요. 남편과 자녀들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남기로 한 것은 잘못이에요.” 흐느끼며 이별을 고하는 빗속의 정경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명 연출이었습니다. 배경음악으로 피아노곡이 감미롭게 연주되는 이별 장면은 두 연기자의 수준급 연기가 영화의 깊은 맛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몇 번을 보아도 이 영화는 싫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전개 부분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라고 설파했다. 주성분이 빠진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역설을 가져다주는 말이다. 사랑은 인간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루소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사랑의 방정식 속에 살면서 사람들은 그 사회적 가치나 통념을 좇아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결국 한 많은 일생을 보낸다. 온전한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편의 룰에 따라 자신을 동화시키는 여인에게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란 문제를 제기하는 이 수필은 결혼 생활의 성찰을 통해 여인의 심리를 다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힘 있는 수필이다.
굳이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자루의 촛불이 평생 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톨스토이의 말을 빌릴 필요가 없다. ‘잠시 해방된 여유’, ‘고독과 객기를 풀려는 욕망’ ‘속박당하고 있는 결박’ ‘속박을 풀 용기’ 등의 어구 제시로써 결혼생활이 어떤 문제를 지닐 수 있다는 설득력을 이 수필은 충분히 확보한다. 남녀가 우연하게 만나서 즐겼던 시간을 ‘사흘간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작가는 이 사랑이 끝난 것을 ‘야속한 그들의 시간’ 으로 나타내고 있다. 나흘간의 사랑은 비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으로 완성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의도한 감독의 기대를 작가는 저버리지 않는다. 기성의 논리나 상식을 뒤덮는 이런 수필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설득력이다. 작가는 여성심리에 대한 명쾌한 분석으로 사랑에 기반하지 않는 부부간에는 위기가 언제나 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사랑이 없는 울타리가 지닌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1960년대 중반 미국 시골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1990년대이니 미국인의 의식구조가 제법 우리와 같은 면모도 있었군요. 그 여인이나 남자는 그 사흘간의 확실한 사랑으로 남겨진 여생을 잊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떠난 남편과 남은 자녀들에게 떳떳한 유산으로 부끄럼이 없이 남기려는 여인의 모습은 당당하기도 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는 이 영화를 감독하고 주역을 맡아 한 고독한 사나이의 멋을 잘 소화했으니 훌륭한 배우 겸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에서 황야의 무법자 연기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노년의 애정 영화의 연기도 잘하는군요. 여주인공 역의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은 매력적인 연기가 넘치는 배우입니다. 그녀는 미적 감각이 별로 뛰어나지도 않는데 그렇게 농염한 연기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내적 완성도가 높은 배우가 아닌지 모릅니다. 인간의 완성은 안으로 성숙하여서 감추고 아낄 수 있는 멋이 있어야 한다는 소탈한 꿈이 이 영화를 다시 몇 번이고 보게 되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멋있는 영화를 다시 보며 당신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고맙습니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결말 부분
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남는다. 수필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는 그의 사랑에 대한 지론이 질펀하게 녹아 있다. ‘인간의 완성은 안으로 성숙하여서 감추고 아낄 수 있는 멋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이런 멋있는 수필을 낳게 한 것 같다. ‘‘결혼생활은 행복이다’라고 하는 상식을 깨는 작가의 용기에 감복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들에게는 자기 생각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욕망을 선한 의지로 승화시키는 일이 인간다운 삶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 영화 속 부부간의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욕망이 승화되지 못하는 구조다. 한 사람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할 수밖에 없는 논리이기에 박태병은 영화 감상을 빌어 사랑에 기반한 부부관계의 정립을 촉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만남을 이루기도 하고, 그만큼의 이별을 체험하기도 한다. 만남과 이별의 인생사에 운명적으로 내재된 비극이 녹아 있다. 그는 이런 비극 속에서도 진실한 사랑은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감독의 의도에 공감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일반적으로 누군가와 결혼해 살 수밖에 없는 유한적 존재로서의 운명을 타고난다. 인간의 만남과 사랑에는 이별의 아픔이 녹아 있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겪는 인생의 한 단면에는 저마다의 가슴에 숨어있는 추억이 있다. 따라서 박태병은 인간의 삶에 예고된 비극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그 비극은 또 다른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적절한 영화의 예를 통해 문학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다.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다. ‘그 여인이나 남자는 그 사흘간의 확실한 사랑으로 남겨진 여생을 잊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떠난 남편과 남은 자녀들에게 떳떳한 유산으로 부끄럼이 없이 남기려는 여인의 모습은 당당하기도 합니다.’라는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의외다. 아름다움은 현란한 빛깔과 진한 향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 현실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이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평가되지만,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이 배제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일반적 통론이다. 한 작가의 가치는 한 시대를 대변함으로써 그 폭을 확장할 수 있다.
III. 로그아웃
여전히 완전한 사랑을 규명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찾는 길은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적 관습의 울타리 속에 형성되어 왔으며, 사랑론 역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려 하면, 우리 사회의 한 축은 이런 새로운 시도를 곱게 보려하지 않는 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박태병은 ‘보이지 않는다’의 작가정신으로 보수적인 사랑론에 정조준을 가한다. 그의 이런 인식적 글쓰기에 의한 설득전략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또 그 작업의 진로를 우리는 호감어린 눈으로 기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필가 스스로 확고한 자기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연린 시각을 통해 미적으로 증명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도덕성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이나 윤리성으로부터 벗어나 그 어느 하나가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임을 찾아내어야 이 수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심리학적 접근, 그의 수필 쓰기는 우리 수필의 반규범성 또는 역행성적 특성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그의 철학적 인식과 인문학적 사유는 상식을 초월했다. 운명적 만남과 인연이 이별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박태병의 안타까움과 탄식의 정서는 이 수필의 압권이다.
박태병은 ‘학생시절부터 성자의 품을 지니고 있었다’는 구양근의 전언은 그가 맑은 영혼으로 글을 쓰는 수필가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한마디로 그의 수필은 술술 풀리는 듯 문체가 자연스러우며 위트도 있고 지성과 재미가 있어서 책장이 잘 넘어간다. 현대는 맛있는 수필만 살아남는다고 했다. 지적인 그의 수필에 기대를 건다. 그의 수필집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비평가로서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수필집 발간을 계기로 해서, 또는 이 평문으로 해서 그의 이름이 한국문단에 드높이 빛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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