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백두대간 16차(화방재~도래기재) 산 행 일 : 2013. 06. 22.(토) 산행코스 : 화방재 ~ 장군봉 ~ 천재단 ~ 부소봉 ~ 깃대기봉 ~ 신선봉 ~ 곰넘이재 ~ 구룡산 ~ 도래기재
(거리 23.6km) 산행참가 : 22명.
<산행코스>
화방재 어평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여, 시원한 밤공기에 몸을 맏긴다. <화방재(花房嶺, 936m)> '꽃방석 고개'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화방재(花房嶺)는 일명 '어평재(御平嶺)'라고도 하는데, 영월에서 태백으로 통하는 태백의 중요한 관문이다. 고갯마루에는 어평주유소와 어평휴게소가 있고, 휴계소 건물 2층에는 민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대간꾼을 위한 휴게소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화방재의 옛 이름인 어평재는 영월에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영혼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태백산 서쪽 기슭의 어평에 이르러 ‘이곳부터 내 땅(어평=御坪)’이라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지명이라 한다. 고개 마루에 진달래, 철쭉이 무성하기에 화방재(花房嶺)라고 하였다고 하며, 예전에는 정거리재라고도 했다 한다. 31번 국도가 지나며, 이곳 주민들은 어평재라 불러야만 된단다.
화방재에 있는 주유소 마당에 주차된 버스에서 내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주유소 우측에 들머리로 들어서며 대간 산행을 시작한다. 출발하여 몇 걸음을 가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백두~'를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서 이유를 알아보니, 권법사님이 주유소 마당에서 홀로남아 백두를 부르고 있다. 연유인즉 권법사님이 버스에서 내려 잠깐 뒷간에 들렀다가 나와보니 아무도 없는지라, '백두~'라고 소리쳐 불렀고, 잠시 멈춰 서서 권법사님이 대열에 합류하기를 기다린다. 사길령이라 새겨진 이정석을 지난다. 비가 온 후 등로 주변 나뭇가지와 풀잎들이 물방울을 잔뜩 매달고 있어서, 산행 출발 10분도 않되었는데도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버린다.
<사길령(四吉嶺)> 강원도 태백시 혈동과 영월군 상동읍을 넘나들고, 태백산 북쪽 백두대간 등로에 위치한 옛날 경상도로 통하던 고갯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로 나있는 천령(天嶺) 길을 통해 왕래하였으나, 길이 높고 험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지금의 사길령으로 새로이 길을 내면서 '새길령'이라 했는데, 변음되어 사길령이 되었단다. 옛날 사길령은 교통의 요지로 고갯마루에 도적이 성행하고 범이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일도 비일비재하여,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안전을 기원했던 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이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태백산령께 제례를 올렸으며,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4월 15일이 되면 산령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사하고 있다.
사길령 매표소를 지나는데, 옛날 국립공원 입장료를 징수하던 때의 흔적인가 보다. 사길령에서 15분 정도 짙은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걸어 오르니, 조선시대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과 보부상의 애환이 서려있는 산령각을 만난다. <태백산 산령각(山靈閣)> 옛날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하였지만 가장 가깝게 강원도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였기에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 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稽首)의 인솔하에 넘어 다녔었다. 산이 험하며 맹수와 산적 등이 많이 출몰하였기에, 그들은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하여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태백산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이 사후 혼령이 되어 태백산의 산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새길재(또는 사길령) 산령각의 신위는 다른 산령각의 신위와 다르게 단종대왕이라고 하여 산령각 내부에는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이 그려진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태백산 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관 중인 '천금록'은 200여 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 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산령각 앞의 이정표에서 직좌틀하여 1174봉 오름길을 시작한다. 옛날 북진 때 이곳에서 직진하여 꾀나 긴 알바를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1174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서면, 유일사 매표소 갈림길이 나온다. 모두들 물에 빠진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 땀 때문인지 안개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늘한 바람을 쐬며 잠시 쉼을 한다. 잠시 더 진행하면 우측 450m 지점에 유일사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 능선갈림길 쉼터를 지난다. 우측 유일사로 물자를 수송하는 삭도가 설치되어 있고, 밤안개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데 유일사를 묻는 등산객 몇 분을 만난다. 유일사매표소에서 올라왔다는데, 목적지가 천제단인지 유일사인지 분명치가 않은 듯했다.
<유일사 갈림길 쉼터> 이곳은 유일사 매표소에서 올라오는 길로서 천제단으로 오르는 넓은 도로를 만나는데, 이곳은 쉼터와 이통통신중계기지 그리고 쉼터 우측 아래에 있는 유일사로 물자를 반입하는 곤돌라가 설치되어 있다.
10여분만에 400m를 올라 해발 고도가 1,260m라 표시된 이정목을 지나고,
천제단을 향해 가파른 능선길을 잠시 더 오르니, 주목 군락지에 들어서게 된다. <국내 최대 주목 군락지> 민족의 영산 태백산(해발 1,567m)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목 군락지다.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 동안 제자리를 지킨다는 주목(朱木)! 그 주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주는 곳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2,800여 그루의 주목이 서식하는 곳으로, 주목 군락지에 올라서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장관이 펼쳐지는 곳인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인해 그런 멋진 장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잠시 후 망경사 갈림길을 지나는데, <망경사(望景寺)> 망경사는 천제단 아래에 있는 사찰로, 월정사의 말사이며 신라 진덕여왕 6년(서기 652년)에 자장이 창건하였다. 자장이 태백산 정암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중, 이곳에 문수보살 석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한다. 망경사 옆에는 용정(龍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해발 1,470m의 고지대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차고 물맛이 좋으며, 용왕각을 짓고 용신에게 제사를 올리기에 용정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이 우물이 용왕국과 통하고 있다고 하며, 옛날부터 이 물을 천제(天祭)를 지내는 제수(祭水)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도를 높임에 따라 바람이 한결 차가워지며, 서늘한 한기마저 돌기 시작한다.
살아 천년을 보내는 주목과, 죽어 천년을 지탱하고 있는 주목이 함께하는 등로를 따르며, 주목나무를 배경으로 키재기도 해 보며, 바람에 시달려서 용(龍)인지 뱀(蛇)인지 가늠키 어려운 주목도 있다. 장군봉 정상부에 이르자 이슬 머금은 야생화가 반기고, 이내 태백산의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 도착한다. 태백산은 3대가 덕을 쌓아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조상님들 중에 덕을 쌓지 못하고 가신 분의 후손이 어느분인지...ㅋㅋ <태백산 장군봉(太白山 將軍峰, 1,567m)> 태백산은 주봉인 장군봉과 함께 남성다운 웅장함과 후덕함을 지닌 육산으로, 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 태백시의 경계에 있다. 우리나라 3신산 중의 하나로, 태고적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을 머리에 이고 있어서 민족의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태백산 정상에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이 있다. 태백산은『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천제단 역시 이런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약 300m 떨어진 곳 장군봉 정상에 있는 장군단과, 남쪽 아래에 있는 이름 없는 제단(하단)이 있는데, 이들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 상에 배열되어 있다. 이 세 개의 단은 삼제사상에 기초해 있다. 즉 하늘의 뜻을 받들고, 땅(자연)을 경외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태백산은 백두대간이 상징하고있는 생명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상생과 조화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이다.
<태백산 천제단(太白山 天祭壇)> 태백산 정상에는 세 개의 제단(祭壇)이 있는데,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나열해 있다. 가장 북쪽의 장군봉 정상에 위치한 제단을 '장군단'이라 하고 장군(사람)에게 제사를 지낸다. 중앙의 비로봉에 위치한 제단을 '천왕단(天王壇)'이라 하고 하늘(천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비로봉 남쪽 아래에 위치한 제단을 '하단(下壇)'이라 하고 땅(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세 개의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 한다.
태백산 장군단(將軍壇). <태백산 장군봉 장군단(將軍壇)> 장군단은 남쪽에 계단이 있는 석단으로 천왕단과 거의 비슷한 모양인데, 천왕단 상부에 있는 4각 제단이나 비석 등은 없다. 제단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족국가시대부터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고, 그 의식이 아직도 이어져 매년 개천절에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의 태평과 안정, 번영을 기원하는 동제의 장소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장군(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태백산은 신라의 삼산오악 중 북악에 속하는 산으로 신령시하여 주산으로 삼고, 왕들이 이 곳에 올라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장군단 앞에 선, 백두 김장군님!
태백산 천제단 장군단 안내판.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 장군단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태백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중앙의 비로봉으로 향한다. 태백산 비로봉 도착.(태백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 태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이 이렇다는데..ㅉㅉ 태백산 비로봉의 천제단 천왕단(天王壇) 모습. 태백산 천제단 천왕단 안내판. <태백산 천제단 천왕단(天祭壇 天王壇)> 천왕단은 태백산 정상부에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3기의 제단 가운데 하나로, 장군단과 하단의 중간에 있는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1,560m)의 봉우리에 위치한 중심 제단이다. 천왕단은 규모면에서 여느 단과 달리 월등히 크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태백천왕당(太伯天王堂)·신사(神祠)·태백산사(太白山祠)·천왕당(天王堂)·태백신사(太白神祠)·태백사(太白祠)·천왕사(天王祠)·태백당(太白堂)·구령탑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태백천왕당·천왕당·천왕사·구령탑이라는 명칭은 모시는 신령(神靈)을 모두 천신(天神)·천왕(天王)으로 보는 호칭이며, 구령탑은 천(天)의 9개 분야(分野)인 구천(九天)에서 유래한다. 신사(神祠)·태백산사(太白山祠)·태백신사(太白神祠)·태백사(太白祠)는 태백산의 신령을 위하는 사당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후대에 일부에서 부르는 마고탑은 태초(太初)에 천지를 이룩한 거인 할머니가 쌓은 탑이라는 의미로서 천지가 시작된 공간임을 암시한다.
태백산 정상 천제단 천왕단의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태백산 천제단에 붉은 글씨로 씌어있는 한배검은 단군의 다른 말이다. 《삼국사기》에 왕이 직접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때 오악(五嶽) 중 북악인 태백산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군들이 제사를 지낸 역사적인 장소로, 1991년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태백시에서는 매년 개천절에 태백제를 개최하고, 천제를 올리고 있단다.
지척도 분간키 어려운 자욱한 안개가 아쉽기만 한 태백산 정상의 백두들.
태백산 정상석은 최고봉인 장군봉에 있지 않고, 천왕단 있는 비로봉 아래에 있다. 아마도 천제단 중 천왕단이 중심 제단이라 그렇게 한 듯하니, 태백산 정상석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부소산을 향한다.
<태백산(太白山)>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에 있는 산으로 주봉은 장군봉(1,567m)이다. 태백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볼 수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태초에 하늘나라 환인의 아들인 환웅천황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척부 서쪽 120리에 있다. 신라 때는 북악(北岳)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기재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오악은 북악인 태백산을 비롯하여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중앙의 팔공산이 오악(五岳)에 해당한다. 태백산은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청옥산과 두타산을 지나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맥이 크게 용트림한 산으로, 다른 산들과 달리 태백산의 주능선 일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평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부드러운 능선으로 마치 하늘과 사람과 땅의 조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이 흐르는 영봉 정상의 한가운데에 천제단(天際檀)이 있으며, 이곳에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은 "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이름이 된 산으로, 태백산(太白山)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크게 밝은 산'의 순 우리말은 '한밝뫼' 또는 '한밝달'로 '한밝달'이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 지내던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고 부르며 숭앙했는데. '밝은 산' 중에서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태백산 비로봉의 천제단 천왕단 앞 이정표. 문수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 옆에 있는 태백산등산안내도. 천제단 하단(下壇)을 지난다. <천제단 하단(下壇)> 천제단의 중심인 천왕단에서 300m 정도 남쪽 아래에 있으며, 땅(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는데, 천왕단이나 장군단보다는 규모가 보잘것없다. 장군단,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 한다. 천제단 하단 안내판. 문수봉, 부쇠봉 갈림길 이정표. 갈림길에서 문수봉 방향에 있는 부쇠봉도 백두대간 상의 봉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 이정표는 부쇠봉을 우회하도록 표시되어 있다. 사실은 부쇠봉에서 보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 백천계곡 풍광이 너무도 인상적이라서 산행 전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구름이 조망을 허락지 않고 다른분들이 지름길을 선호함에 따라 부쇠봉을 우회하는 길로 접어든다.
부쇠봉으로 오를까를 망설이며..ㅉㅉ 잠시 우회길을 따르니, 봉화 백천계곡 갈림길 갈림길이 나온다. 봉화 백천계곡 방향은 부쇠봉 정상으로 이어지고, 부쇠봉 우횟길을 따라가는 대간길은 청옥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정표의 청옥산은 봉화군 소천면의 청옥산을 말한다) 부쇠봉을 우회하여 다시 대간능선으로 복귀하니, 우회한 부쇠봉 방향으로 이어진 갈림길이 나오며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부쇠봉(扶蘇峰, 1,546.5m)> 부쇠봉의 정확한 명칭 유래는 찾을 길이 없고, 근처에 차돌이 많아서 이곳에서 부싯돌을 만들면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하고, 태백산 장군봉이 단군께 제사 지내는 장소이기에 단군왕검이라 칭한다면, 그 아래에 있는 작은 봉우리가 단군의 둘째 왕자인 부소왕자를 뜻하는 의미로서 부소봉(부쇠봉)이 된 것이 아닌가 짐작하기도 한다. 이지역 방언으로 부소를 부쇠라고 한다고 한다. 옛날 대간북진 때 담은 백천계곡의 산군들 사진. 중앙 뒤편 두 개의 뾰족봉이 '달바위봉'으로, 오늘 이 그림을 부쇠봉에 올라서 조망하고 싶었지만 흐린 날씨로 우회길을 선택했다. 백두들 중 일부는 부쇠봉으로 올랐지만 사진이 없는 것으로 보아..ㅉ 정글을 연상케 하는 울창한 수풀 사이로 이어진 편형한 등로를 따른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이 능선길은 '하늘길'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천년도 훨씬 이전인 신라시대 때부터 깃대배기봉에서 부쇠봉을 거쳐 태백산으로 가는 편평한 능선길을 하늘고개라는 뜻으로 '천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때, 고직령과 연결되는 새갈치(신로령)가 생기면서 천령으로는 사람의 왕래가 뜸해졌다고 한다. 대간길을 걸으며 이처럼 편안한 능선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울창한 원시림에 안개까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어서 신비로움을 한층 배가 시킨다. 오늘 안개로 놓친 조망을 충분히 보상받는다는 느낌이다.
울창한 원시숲에서 인공의 쉼터를 만난다. 신새벽 어둠을 뚫고 출발한 태백산 오름길에 대한 부담감이 해소되고, 싱그러운 숲 내음새에 위로받게 되면서 백두들의 마음도 이제는 한결 여유로워진 듯하다.
10여분 간의 달콤한 쉼을 뒤로하고, 짙은 녹음 속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이어간다.
깃대배기봉숲 안내판을 만나고, 이내 산림청에서 세운 깃대배기봉 정상석 앞에 도착한다. <깃대배기봉(1,368m)>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석포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는 안개가 연기처럼 보여서 백연봉(白煙峰)이라 불렸는데 일제시대 측량하느라 깃대를 꽂아서 깃대배기봉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길을 걷다 보면 ‘깃대봉’이란 봉우리를 참으로 많이 만난다. 이것이 어쩌면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깃대봉은 일제 때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아 놓았은 봉우리를 의미한다. 이곳 깃대배기봉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산림청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다. 사실 산림청에서 설치해 놓은 정상석은 이곳이 처음인 듯하다. 또 다른 깃대배기봉 정상석에 도착하는데, 정상석 앞 이정표에는 두리봉 방향의 갈림길을 표시하고 있다. 차돌배기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대간길은 차돌배기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좌측 두리봉 방향으로 난 등로는 봉화의 청옥산으로 이어지는데, 최근에 산꾼들이 이 구간을 '백두청옥지맥'이라 부른다. 우리도 언제쯤엔가는 기맥을 마치고 지맥까지도..ㅋㅋ
이곳에는 태백시 한얼뫼오름회에서 세운 깃대배기봉 정상석이 있는데, 부근이 워낙 평탄하다보니 어디가 꼭데기인지 구분이 어려운가 보다. <또다른 깃대배기봉 정상석> 산림청에서 설치한 깃대배기봉 정상에서 5분 정도를 내려오니, 이름이 똑같은 정상석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태백시 한얼뫼오름회에서 세워 놓은 정상석이다. 그리고 잠시 전에 지났던 산림청에서 세워 놓은 정상석의 깃대배기봉 높이가 1.368m였는데, 이곳의 고도가 조금 더 낮아 보이는데도 1,370m라 표시하고 있다. 어느 것이 맞는 건지! 어찌 되었던지 정상석이 많으니 인증도 많아져서 좋아해야 할까? 좌측의 나무데크 쉼터를 지나니, 급경사 내림길이 이어지고, 아름드리 신갈나무들이 호위하고 있는 등로를 따르다가, 널찍한 등로 한켠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식사 장소가 너무 넓으면 이곳저곳으로 떨어져서 식사를 하게 되고, 너무 좁으면 모두 다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데, 오늘의 식사 장소는 딱 20명 수용 가능한 식당이다! 땀과 이슬에 젖은 상태로 높은 고도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이 사람들의 체온을 금세 떨어뜨린다. 식사를 하느라 한기를 느낀 백두들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둘러맨다. 백두들이 떠난 20명 수용 가능 아침식사 자리! 인공으로 조성된 듯한 사면길이 이어지더니, 나무밴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되고, 잘못된 이정표가 있는 능선에 도착하니, 땀에 젖느니 차라리 비에 젖겠다며 우장을 배낭에 갈무리 한다. 잘못된 이정표.(거리가 잘못 표기되어 있다) 자켓을 벗고 안개 자욱한 오솔길을 따르니, 차돌배기 쉼터가 나온다. 차돌베기 이정표. 춘양면 석문동은 마을 입구 양쪽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그 사이로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석문 역할을 했다고 해서 석문동이라 했다고 한다. 예전에 천연의 요새 역할을 하여 전쟁 시 피난처였던 곳이라고 한다. 정감록의 전국 십승지 중에 한 곳이라고 하며, 자개동 석문에서 석문동이라 유래되었다고 한다. 차돌배기 쉼터 안내판. 각화지맥 분기점 표지판.
<각화지맥>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각화지맥의 주봉인 각화산(覺華山, 1176m)이 있다. 각화산 기슭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지(史庫址)가 있다. 조선 사고(史庫)는 초기에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있었다가, 임진왜란 후에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네 군데로 바뀌었다. (각화지맥 개념도)
차돌배기 쉼터를 뒤로하고 다시 안개자욱한 대간길로 들어서니, 해마 모양의 나뭇가지가 이채롭다.(숨은그림 찾기) 당겨본 나뭇가지 해마! 신선봉 오름길에 잠시 쉼을 하고, 신선봉 전위봉에서 또 쉼을 하고서야, 신선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상에는 처사 경주손씨 묘지가 있다. <신선봉(神仙峰, 1,280m)> 신선(神仙)이란 깊은 산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상상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원래 강신(降神)을 잘하는 무당이 산에서 수행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신선이란 능력 있는 신관(神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산을 신성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산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곳이자 속세와 가장 떨어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높이에 초월적인 신성을 느끼고 하늘의 절대적인 신을 감지했는데, 이러한 신이 지고신(至高神)이다. 지고신의 아들이 인간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인격화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땅으로 내려온 지점이 바로 태백산 천제단이며, 신성한 동물(龍)은 산줄기를 타고 천제단으로 모이고, 제관들은 곰넘이재를 통해 천제단으로 모이며, 신관(신선)들은 접신(接神, 신맞이) 준비에 분주하다. 그래서 이곳을 신선봉이라고 칭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선봉 손처사 묘지에서 배낭털이에 나선다. 묘지 한켠의 나뭇가지에는 신선봉이라는 표지기가 걸려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신선봉 나무 안내판을 뒤로하고 대간남진길에 나선다. 대간능선 위로 방화선이 시작되고, 나무밴치 쉼터도 여럿 지난다. 헬기장도 지나면, 곰넘이재에 도착한다. <곰넘이재>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상천평에서 경북 봉화군 소천면 참새골로 넘나들던 고개로, 먼 옛날 천제를 지내기 위해 태백산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넘던 고개였으며, 영남에서 강원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다.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 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곰넘이재 좌측 아래에 있는 참새골은 동이정, 장부골, 석문동, 참새골 등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애당2리를 통칭하여 "참새골"이라 하는데, 참새가 날아가는 형세를 갖춘 산이 북쪽에 있다고 하여 "참새골", 또는 약수가 나오는 "참샘"이 있다고 하여 "참새미골"로 불리는데, "정감록"에 의하면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새골과 석문동을 이 고장 사람들은 열두 도심이라 한다. 열두 골짜기로 이루어진 참새골과 석문동은, 시루봉 능선 구룡산에서 고직령. 신선봉. 차돌배기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각화산으로 가지를 내리는 산줄기의 내경에 속하는 계곡으로 행정상 애당리로 표현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열두 도심이라 이르고, 그 뜻은 골이 깊어서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다르다 하여 이른 말이라 한다. 곰넘이재 이정표. 고개 한켠에는 곰넘이재의 유래도 적혀 있다. 곰넘이재를 뒤로하고 구룡산을 향한다. 등로 주변에 핀 산목련이 어여쁘다. 만개한 산목련. 뚜렷한 등로를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어느새 1231봉을 우회하여 지나게 되고.. 이어서 고직령에 도착한다. <고직령(高直嶺)> 고직령에 대해 옛 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곰님이골로 들어가서 산사나무골 어귀를 지나쳐 좀 더 가서 오른쪽으로 갈라진 골짜기를 올라가면 서벽과 애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라고 되어있다. 높고 곧은 고개라고 고직령이라 한다는데, 일설에는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키고 있어서 고직령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김정호(金正浩)의《대동지지》삼척 산천조에 보면 고석령(孤石嶺)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고석령은 서쪽 1백10리에 있는데 길이 좁고 매우 험하다. 안동 땅으로 통하는 길인데, 춘양 서쪽이 되며 영천(영주) 예불령(예배령)의 북쪽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가지》에는 고적현(高適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곶적령(串積嶺)이라고 기록한 곳도 있단다. 옛날부터 이 고갯길은 영남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이었고, 특히 고개 넘어 경상도 땅의 도심리(道深里)에는 도심역(道深驛)이 있어서 태백산 천제를 지내러 오는 관리들을 묵게 하였고, 천제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던 고갯길이었다. 조선시대에 보부상들이 봉화와 영월을 오가면서 호환(虎患)을 당하지 않기 위해지었다는 산신각이 100m 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주위를 아무리 봐도 산신각은 보이지 않는다.
고직령 이정표.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은 정감록에 나오는 난세에 최적의 피난처인 십승지(十勝地) 중의 한 곳이다. 정감록 비결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되었던 국가 운명과 살아있는 백성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예언서로, 그 당시 '이담'이라는 사람이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고 전하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펴낸 것이라 한다. 이 책은 조선 5백년을 통하여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쳐오고 있는 문헌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이 문헌과 '이중환'의 택리지에 술가들이 말하는 굶주림과 싸움 등의 염려가 없어 난세를 피할 수 있는 조선의 십승지는, 풍기의 금계촌에 이어 봉화의 춘양면, 보은의 속리산, 운봉의 두류산(지리산), 예천의 금당동, 공주의 유구와 마곡, 영월의 정동 상류, 무주의 무풍동,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등을 지칭한다. 십승지란, 원래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하여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십승지 가운데 봉화군 춘양면 일대를 표기한 원문을 보면, 풍기의 금계촌에 이어 두 번째로 '화산북거 소라고기 내성현동 태백양면(花山北去 召羅古基 奈城縣東 太白陽面)’이라 했다. 그곳이 지금 이곳 일대이다.
싱그러운 관목 그늘 속으로 펼쳐진 우장풀 풀밭길을 천천히 따라 오르면,
군데군데 나무밴치가 있어서 앉아 쉬기도 쉽게 해 놓았다. 구룡산 오름길은 완만하여 그냥 평지를 가듯이 오르다 보니, 구룡산 정상에 도착한다. <구룡산(구龍山, 1,345.7m)>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구룡산은 태백산과 옥돌봉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이루는 산이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구룡산이라 하는데, 용이 승천할 때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가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 봐라’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전설이야 모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구룡산 아낙 관련 전설은 산 이름이 먼저 생긴 후에 무리하여 꾸며진 전설을 가져다 붙인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구(九)’는 본디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구룡이라고 하면 용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용은 어떤가? 산은 천만가지 형상을 가져서 크다가도 작아지고, 일어나다가도 엎드리고, 숨다가도 나타나는 등 변화무쌍하니, 마치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통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용맥(龍脈) 또는 래용(來龍)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결국 구룡이라는 뜻은 산줄기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 이곳 구룡산에 올라서면 수많은 산줄기가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룡산이라고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룡산숲 안내판.
구룡산 인증은 천보님과 보성님 두분이서! 20여분 전에 앞서간 백두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배낭털이를 하고 갔다.
백두들이 떠난 빈자리에 혹시 남겨진 여운만이라도 찾아보며.. 구룡산 정상을 뒤로한다. 구룡산 북쪽 방향으로 삼동산 직전 봉우리인 1212봉이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구룡산 북쪽 삼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방향으로도 표지기가 많이 걸려 있는데, 아마도 춘양 십승지 길이 아닌가 한다. 요즘 산꾼들이 십승지 산행도 한다는데.. 구룡산을 뒤로하고 도래기재로 향한다. 우장풀 사이로 이어진 호젓한 등로를 따르다 보면, 많은 자식(가지)을 거느린 신갈나무도 만난다. 대간길은 이런 사면 우회길을 걸을 때가 가장 좋다. 어차피 올랐다가 내려올 거고, 우회길을 잘못 들으면 알바의 위험도 있어서 살짝 긴장도 하게 되고...ㅋㅋ
아름다운 산길만큼이나 고요한 쉼터도 만나는데, 쉼터에는 산림청에서 세워 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나무와 우장풀의 조화 속으로 스며들어, 내림길을 따라 도래기재로 향한다. 임도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가야 할 1021봉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이곳이 상금정 임도 갈림길이다. 임도에는 산나물 채취꾼들이 주차해 놓은 차량도 보인다. <상금정(上金井) 임도 쉼터>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향이동을 연결하는 임도로, 임도의 상태가 자전거를 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좋다. 임도에는 쉼터인 팔각정자와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 그리고 산림청에서 만든 구룡산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우구치리(宇龜峙里)는 강원도(영월)와 경상북도의 경계에 있는 자연 마을로, 우구치리에는 새터, 상금정, 상시장, 사호, 하금정, 샘골, 와흥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금광이 개발되면서 크게 번성했으나, 이후 1970년대 폐광되면서 마을 역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직도 이곳은 일제시대의 ‘금정’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이는 당시 금광에 물이 많이 차있어서,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캐는 것 같다 하여 금정(金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영월 상동의 세계적인 텅스텐 광산이 있다. 임도 한켠에는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가 서 있고, 구룡산 정상에는 없었던 구룡산 유래 안내판이 이곳에 있다. 임도 밴치에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데, 산객들이 쉬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도래기재를 향한 발걸음을 서두른다. 호젓하게 이어지는 1021봉 오름길을 유유히 걷노라면,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쉼터는 산행 막바지의 대간꾼이 뿌리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이다. 헬기장인 듯한데, 지금은 용도를 다한 듯한 헬기장도 지나고..
아침이슬을 아직도 머금고 있는 예쁜 야생화와도 만남과 이별을 이어가다 보면, 끝내 유혹에 이끌려 배낭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목디스크로 산행이 몹시 힘들다는 만보 형님을 부추겨, 도래기재로 향한다. 나란히 사이좋게 자란 금강송 나무 형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아픔을 부등켜안고 있다. 또 임도를 만나고, 대간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이어지는데, 임도 모퉁이의 우람한 춘양목(황장송, 금강송)을 보니, 옛날 북진길에서의 눈발이 흩날리는 새벽의 기억이 새로이 난다.
이제 등로 주변에는 우람한 춘양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우거진 숲길을 따라 공터를 지나고,
쭉쭉 뻗은 금강송들의 도열을 받으며, 오늘 산행의 결승선에 다가선다.
도래기재로 이어지는 나무계단길이 나오고, 수많은 대간꾼들의 갈채를 받으며, 도래기재에 도착한다. <도래기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도래기마을에서 우구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경북 봉화에서 강원도 영월군을 지나가는 88번 도로가 지난다. 도래기재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어서 “도역리(道驛里)”로 부르다 이것이 변음(變音)되어 “도래기“로 부르는 마을 이름에서 빌려와 도래기재로 불린다. 강원도 영월과 경북의 봉화를 나누는 도래기재를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소의 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우구치(牛口峙)”로 불리는 계곡을 따라 옥동천의 상류인 내리계곡이 형성되고, 남쪽에는 “도래기”에서 금당계곡을 따라 운곡천이 발원된다. 역(驛)은 당시 주요 교통수단인 말(馬)을 관리하는 곳으로 사람과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도래기재의 행정구역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속해 있다. '춘양'하면 대체적으로 ‘억지춘향’을 많이 떠올리는데,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며, 그 뜻은 ‘일을 순리대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우겨 겨우 이루어지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박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억지춘향'이 아리나 '억지춘양'이 맞다. '억지춘양'의 유래는 경북 영주에서 강원도 철암으로 연결되는 영암선(현 영동선) 중, 이 구간(춘양구간)의 철도가 직선으로 이어가지 않고, 춘양면 소재지를 곡선으로 한바퀴 휘감고 간다. 1950년대 후반에 당시 직선으로 90% 이상 철로공사가 진행됐는데, 춘양면 서벽리에 고향을 둔 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낸 '정문흠'의원(2대~4대)이 억지로 철도를 우회하게 했다고 해서 나온 말이란다. 도래기재 날머리 전경. 도래기재 날머리 이정표.
도래기재 에코브리지 아래에서 기다리던 애마에 올라, 북쪽 단양 방향 우구치리로 내려가다가 계곡에서 땀을 닦는다. 계곡물이 너무 차서 발이 얼얼한 지경으로 제데로 씻기조차 힘들 지경으로, 여름철 피서를 오게 되면 난방장치도 있어얄듯 하다..ㅋㅋ 단양 인근의 문곡송어장 횟집에서, 강물이 만든 '대한민국 전도'를 바라보며, 모처럼 민물회(송어회)로 오랜 산행의 피로를 풀어본다. 식당 앞마당은 송어양식장. 콩가루와 야채를 함께 버무려 먹는 송어 맛은, 예상보다 훨씬 Good~!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향한다. 십여 년 전 대간길에 첫발을 들여 진부령을 향할 때에, 이 구간을 걸으며 부쇠봉 직전 바위전망대에서 피곤한 몸에 잠깐의 휴식시간을 부여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봉화 백천계곡의 풍광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기에.. 내심 오늘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지고 산행에 올랐으나, 짙게 드리워진 구름으로 조망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덕이 부족하여 보지 못한 조망은 후일을 다시 기약하고, 그래도 녹음이 울창한 대간을 따라 이어진 오래된 옛길 '천령(天嶺)'을, 자연과 옛사람들의 호흡을 느끼며 걸을 수 있었기에, 오늘도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애마에 오른다. 언젠가 봉화 백천계곡 보러 갈 때, 모든 백두들이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감사함다^^ |